주일 생명 말씀( 2023.8.20) 말씀/ 역대상 4: 1-10
나의 지경을 넓혀주소서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가로되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 하사 나의 지경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이 그 구하는 것을 허락하셨더라.”(대상4:10)
역대상 1장에서 9장까지를 보면 아담에서 시작하여 수 천 년을 지나 이스라엘의 귀환에 이르기까지 기록된 계보들 가운데 500개가 넘는 생소한 이름들이 나옵니다. 그 이름들 속에 야베스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자세히 읽지 않으면 잘 모르는 아주 평범한 사람입니다. 성경을 수십 번 읽었어도 자세히 살피지 않으면 '야베스란 사람이 누구인지 잘 모릅니다. 그의 프로필도 아주 간략합니다. 9절을 보면 야베스는 그 형제보다 존귀한 자라고 소개하며 그의 출생 배경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이름하여 ‘야베스’라 하였는데 그 이름의 뜻은 ‘내가 수고로이 나았다‘는 것 입니다. 히브리말로 '고통'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인간적으로 어두운 출생의 비밀을 갖고있는 운명적 사람 이었습니다. 거꾸로 태어났는지, 병으로 죽을 고비를 만났는지, 아니면 태어나기도 전에 아버지가 없는 유복자인지 알 수 없습니다. 대게 이런 운명적인 출생을 가진 사람들은 인생이 어둡고 부정적이 되기 쉽습니다. 그런데 야베스는 자신의 운명을 극복하고 형제 중에 '존귀한 자'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그가 그렇게 될 수 있었습니까? 그 비밀을 푸는 열쇠가 바로 야베스의 기도입니다. '야베스가 이스라엘 하나님께 아뢰어.' 그는 믿음의 기도를 통해서 운명적 생의 '고통'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존귀한 자의 반열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의 기도가 어떤 기도였는지 어떻게 인생을 역전시킬 수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평범한 사람의 기도이지만, 오늘날 우리 모두가 그의 기도에서 두가지를 배우고자 합니다. 그리고 우리 역시 야베스처럼 평범하지만 기도로 위대한 일을 시도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첫째, 하나님의 축복을 구한 야베스. 야베스가 가장 먼저 기도한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을까요? “국가적 부흥을 위해? 아니면 이스라엘의 굶주린 영혼들을 위해?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와 의나 양들을 보내달라고?" 아닙니다. 그렇게 거창한 기도가 아닙니다. 9절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사” 그는 우리의 기대와는 전혀 달리 '내게 복에 복'을 더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의 기도는 보통 사람들이 구하는 기도와 다를바가 없습니다. “아닌 뭔 복을 달라는 기도야? 난 그런 기도 안 해” 그런데 여기 말씀을 보면 '복에 복'을 이라는 반복적인 히브리어 표현을 쓰고 있습니다. 이는 마치 느낌표를 5개나 더하거나 아니면 고딕체로 쓰고 밑줄을 그어 강조하는 것과도 같은 뜻입니다. 그는 자신의 비참한 삶의 밑바닥에서 벌떡 일어나서 하늘을 향에 두 손을 뻗히고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아버지, 아버지! 제게 복을 주십시오. 정말 많이 복을 주시기를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지 않으시면 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복을 달라는 기도가 운명의 어둠을 가르고 하나님의 축복의 세계로 굳게 닫힌 문을 열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께 복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쩐지 기복 신앙 같고 성숙한 기도 같지가 않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한 영혼을, 나라와 민족을, 세계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될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이런 복을 먼저 구한다는 것은 어쩐지 믿음이 작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야베스가 구한 복은 우리가 생각하는 복과 다릅니다. 그는 자신의 조건으로는 도저히 얻을 수 없는 복, 하나님만이 초자연적인 은혜로만이 주실 수 있는 복을 구한 것입니다. 내가 내 힘으로 이룰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위로부터의 놀라운 복을 베풀어주실 때 할 수 있다는 믿음에서 나온 간절한 기도입니다. 그는 하나님이 복 주시면 저주스러운 자신의 고통스러운 운명도 축복으로 바뀔 수 있다는 것을 믿었고, 또 근본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으면 세상의 많은 복을 받아도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고 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그런 근본 복을 구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위대한 일을 시도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무엇보다 ‘하나님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을 내 인생의 주로 모시는 기도입니다. 주님이 하셔야 한다는 믿음의 기도입니다. 히브리 6:14-15절로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가라사대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 하셨더니 저가 이와 같이 오래 참아 약속을 받았느니라.” 우리는 생각 날 것입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그도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인내로 받아 복의 근원이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자기 성실로 복의 근원이된 것이 아닙니다. 이런 하나님의 축복을 받지 않고 우리는 하나님을 위해 무슨 일을 시도할 수 없습니다. 야곱의 인생도 보아도 이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그가 절망하여 아무것도 할 수 없었을 때, 에서를 인하여 두려워 한 발자국도 옮기지 못하고 얍복 나루터에서 밤이 맞도록 기도할 때 그가 막다른 골목에서 한 기도 역시 하나님의 축복을 구하는 기도 였습니다. “하나님, 하나님이 복을 주셔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게 복을 주시지 않으면 가게 할 수 없습니다.” 그도 마침내 하나님의 복을 받고 에서의 문제를 극복하고, 이스라엘로서 새로운 인생을 출발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 입니까? 우리가 누려야할 복이 인간의 조건에서 나오는 것이라면 그런 복을 얻을 자신이 있습니까? 여러분, 돈 많이 있습니까? 세상과 경쟁해서 이길 수 있는 재능이 있습니까? 아니면 좋은 가문 학벌 등 스펙이 띄납니까? 아니라면 어떻게 복을 받고 복을 나누는 이생을 살 수 있겠습니까? 저를 비롯해서 모두 지방 출신이고 시골에서 자라온 사람들입니다. 무안 청계에서 무엇으로 세계로 도약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출신 배경 스펙을 가지고는 어떤 위대한 일을 시도하기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시도록 준비할 수 있습니다. 나는 믿고 기도하고 하나님은 일하시면 됩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능치 못할 일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야베스의 기도는 정말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기도입니다. 그도 볼품 없는 스펙과 고통스런 운명을 띄어넘어 형제들 중에 존귀한 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와 믿음의 기도를 한다면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것처럼 “내가 반드시 너를 복 주고 복 주며 너를 번성케 하고 번성케 하리라”하신 이 복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우리는 현실의 조건가 형편만 보지 말고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하나님을 바라보고 축복을 구해야 합니다(엡 3:20). 아멘. 이렇게 기도하는 것입니다. "원컨대 주께서 내게 복에 복을 더하여주옵소서." 아멘.
둘째, 나의 지경을 넓혀 달라고 기도하는 야베스. 복을 달라고 기도한 야베스는 이제 구제척으로 '나의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합니다. 그가 기도로 구한 복이 무엇인가 했더니 지경을 넓혀달라는 것 이었습니다. 여기서 지경은 정복 전쟁 당시 해변, 경계. 미개척지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당시 이스라엘 국가는 여호수아가 가나안을 정복하고 각 지파들에게 그 약속의 땅을 분배해주던 때 였습니다. 야베스는 당시 분배받은 땅에 대해서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앞으로의 비젼을 생각하면 너무 좁았습니다.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면 현재보다 얼마든지 더 넓은 지경을 감당할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지경을 넓혀달라고 기도한 것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이렇게 기도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복음이 우주적으로 퍼져갈 수 있도록 그릇을 더 넓게 더 멀리 확장시켜 주옵소서. 더 많은 기회를 주십시오." 더 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현재 제가 섬기는 일로는 부족합니다. 더 많은 영혼들을 섬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내가 가는 곳마다 내가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주님을 의지하면 입을 크게 벌립니다. “주님, 나만 만족하고 행복할 수 없습니다. 내 가족만이 아닙니다. 우리교회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독일, 일본, 중국, 네팔, 태국, 로마 미국, 러시아 세계 각국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며 전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북한에도 러시아에도 선교의 길을 얼여 주셔서 지경을 넓혀주소서”
이런 기도가 바로 야베스의 비전의 기도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상황이나 조건이나 운명을 생각하면 이런 기도는 못합니다. "나는 그만한 능력이 없습니다. 나는 재정이 넉넉하지 못합니다. 나는 성격이 소심합니다. 저는 신앙이 약하고, 아직 전도도 잘 못합니다. 저는 언어가 딸립니다. 말이 어눌합니다. " 우리가 이런 생각을 한다면 우리가 드리는 기도 역시 자신의 운명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께 구하는 것입니다. 단지 내가 할 수 있는 범주의 일들을 아뢰는 기도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와 연약함 + 하나님의 뜻과 초월적인 능력 = 나의 확장된 지경. 위대한 일 성취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포로 생활을 마치고 약속된 고향 땅으로 돌아오게 하셨을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슥 4:6). 이것이 하나님을 나의 삶과 역사에 개입시키는 계산 방법입니다. 때로 우리는 너무 우리 자신을 분석하고 신중, 신중하게 계산합니다. 그러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하심을 믿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 불가능이 없으신 하나님. 무에서 유를 창조하시는 하나님. 이런 하나님을 바라보며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실 것을 기대하고 도전하고 모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다 하십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하십시오.” 하면 딥니까? 하나님은 우주적인 축복을 하시려고 하는데 우리는 그저 작은 컵 하나 들고 달라고 부르짖는다면 그 축복이 가능하겠습니까? 컵은 넘치도록 채워져도 우주적 축복을 흘러 넘쳐서 새 나가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축복을 받으려면 지혜로워야 합니다. 틀을 깨고 그릇을 확장 시켜야 합니다. 데미안에 보면 성실한 삶과 현실의 관념에 붙들려서 살아가는 씽클레어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 알은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한 세계를 깨트려야한다.” 전 세계에서 형성된 틀을 깨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로 나갈 수 없다는 것입니다. 씽클레어는 밝고 환한 세계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안락한 유년기를 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관념에 갇혀 사는 자신이 답답하였습니다. 그렇다고 관념에 갇힌 과거의 삶에서 나오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자기 속에서 솟아나는 그것을 제대로 살아보려고 했습니다. 그 방법으로 거짓말을 했습니다. 스스로 자신에게 상처를 낸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는 과거의 좁은 세계으 벗어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 데미안을 기술하면서 최진석 교수는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만일에 씽클레어가 균열을 내지 않았더라면 가질 수 있는 안온한 삶이 더 나아보인다면 데미안을 읽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이 편안함이 인간으로 살다가는 과정에서 자기를 얼마나 작게 만드는지 알아야 합니다. 이것을 벗어나서 힘들게 건너가기를 계속하는 사람들이 이 세계를 얼마나 넓고 깊고 높게 경험하다 가는지 이해해야 합니다. 안락하고 풍요로운 삶이냐 가난하고 궁핍한 삶이냐의 대비는 여기서 의미가 없습니다. 중요하 것은 인간의 크기와 깊이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내가 크지 않고 어떻게 큰 일을 할 수 있겠습까? 내가 크기 위해서 어떻게 스스로 에게 상처를 낼 수 있습니까? 하다 못해 큰 집을 지려해도 작은 집을 부숴야 합니다. 성경 말씀도 이렇게 말합니다. 네 장막터를 넓히며 네 처소의 휘장을 아끼지 말고 널리 펴되 너의 줄을 길게 하며 너의 말뚝을 견고히 할찌어다 이는 네가 좌우로 퍼지며 네 자손은 열방을 얻으며 황폐한 성읍들로 사람 살 곳이 되게 할 것임이니라 (이사야 54:2-3) 이는 주님이 하실 큰 역사를 위해서 어떻게 준비할 것인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의 성은 황폐합니다. 사람이 살지 않습니다. 포로로 끌려가서 앞으로 어떻게 될지 장래가 암울합니다. 비젼소 소망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렇다고 형편 상황을 보고 가만이 있는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게 운명 아닙니까? 닫혀있는 생각부터 열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때가 되어 성읍을 가득 채워주시고 열방이 돌아오는 역사를 이루실 것인데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지경을 넓히고 터를 확장 시키라는 것입니다. 무엇을 학장 시킵니까? 우리 생각부터 사고부터 트고 학장 시켜야 합니다.
제가 청계에 산지 벌써 35년이 지났습니다. 처음에 이곳에서 힘들었던 것은 답답함이었습니다. 이 시골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사실은 청계가 답답한 것이 아니라 제 자신의 생각이 닫혀 있는 것이 답답한 것이었습니다. 저는 몰랐는 것입니다. 성장도 몰랐고 건너가야 한다는 사실로 몰랐습니다. 장막터를 넓힌다는 의미도 몰랐습니다. 기도제목을 더 크게 가지라는 것인가? 그런데 이제야 깨닫고 있습니다. 내가 달라졌더라면 묘비문을 새긴 어느 주교의 고백처럼 내가 달라지면 될 것을...데미안의 새가 다른 세계로 가려면 알에서 께어나야한다는 의미도 이제야 깨닫고 있습니다. 그래도 얼마나 감사합니까? 죽어서 비문에 새기지 않고 살아서 그래도 말할 수 있는 것이 감사입니다. 우리는 이제 곧 내일이면 이태리 돌로미티로 떠납니다. 세계 최초 독서 트래킹이라는 이름으로 책 두 권을 들고 갑니다. 반년 전부어 준비해왔지만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갖고있습니다. 단지 돈으로 가는 여행이 아니라 생각을 넘어서고 사유의 시선을 높이고 한 세계에서 또 다른 세계로 건너가는 모험과 용기와 행동 실천이 함께 하는 다양한 의미를 갖고 있는 여행입니다. 기대도 큽니다. 여러문 주위를 살펴보세요. 우리가 하고있는 이 일이 쉬운 일인가? 나는 내 속에서 스스로 솟아나는 그것을 살아보려고 했는데 그것이 왜 그토록 어려운지... 쉬운 일이 아닌 것을 하는 것입니다. 어떻게 그동안 끊임없이 말씀을 붙들고 독서를 하면서 생각하고 숙고하면서 중단 없이 배우고 성장하려고 노력한 결과입니다. 하나님이 큰 일을 하시기 위해서 우리는 멈추면 안 됩니다.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쿠르트 파이페시도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계속 가리라, 계속해서. 여행을 하는한 나는 살아있는 것이다. 그에게 여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었습니다. 6개월 사형 선고를 받고 침대에서 죽음을 기다리지 않고 한 걸음 건너갈 것을 결단을 하고 실천하고 목표르 이루었습니다. 그리고 2년을 더 살았습니다. 자신으르 암에게 맡기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결과 그는 정상인도 할 수 없는 독일 도르트문트에서 로마 3,350km를 완주하고 자신의 삶 2년을 더 연장시켰습니다. 60평생 정원사로 소시민적 삶에 갇힌 자기 인생을 세계인으로 확장시키고, 그의 죽음마져도 숭고한 죽음이 되어 세상에 희망의 메시지가 되었습니다. 내 그릇이 커지는 만큼 하나님이 축복하시고 쓰시는 것입니다. 우리도 매일 매일 희망을 안고 한 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가는 삶을 살 수 있기를 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복을 주시는 분도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지경을 넒히시는 분도 하나님 이십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가만이 있지 않고 장막터를 넓히고 그릇을 확장 시키는 일을 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균열의 상처를 낼지라도 다음 세계로 건너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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