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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산(金山)·요해(遼海)·오량해(烏梁海)·삼위(三衛)〉
○ 역사(歷史)란 무엇일까? 대한민국(大韓民國)에서 ‘역사(歷史)’란 뜻은 무엇일까요?
다음백과 / 역사(history , 歷史) : 〈인간 및 인간이 속하는 자연의 모든 현상에서 과거에 일어난 사실이나, 그 사실에 관한 기술〉이라고 정의(正義)하면서,〈중국에서는 주대에 주요한 사건을 죽간 등에 기록하는 관리를 사관이라 했다. 서양에서는 히스토리라는 말이 연구를 뜻하는 그리스어 이스토리아에서 유래했듯이 과거에 관한 탐구와 그 서술을 의미한다. 동시에 독일어의 게시히테(Geschichte)의 어원인 geschehen(일어나다)처럼 일어난 사실 그 자체를 의미하기도 한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은 모두 그 대상이 되지만, 그 모든 사실이 역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한 관심, 가치 판단에 입각해 선택된 과거의 사실이 역사를 구성한다. '역사는 다시 쓸 수 있다'와 같은 말이 있듯이 문제의식의 차이에 따라 선택된 과거의 사실이나 그 기술이 달라진다.〉고 말한다.
➠〈역사(歷史)는 다시 쓸 수 있다〉는 말이며, 이는〈다시 쓰여 질 수 있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올바른 길이 있을 것이고, 왜곡(歪曲)하고 조작(造作)하는 그릇됨이 있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언급(言及)한 것처럼 「과거(過去)에 일어난 사실(事實)은 모두 그 대상(對象)이 되지만, 그 모든 사실(事實)이 역사(歷史)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일정(一定)한 관심(關心), 가치(價値) 판단(判斷)에 입각(立脚)해 선택(選擇)된 과거(過去)의 사실(事實)이 역사(歷史)를 구성(構成)한다.」면〈그 판단(判斷)은 누가 하느냐?〉하는 거다.
○ 조선사(朝鮮史)는 어떨까? [조선사(朝鮮史)는 다시 쓸 수 있다…조선사(朝鮮史)는 일정(一定)한 관심(關心)이나, 가치판단(價値判斷)에 입각(立脚)하여 선택(選擇)된 과거(過去)의 사실(事實)이 역사(歷史)를 구성(構成)할 수 있다…즉(卽) 조선사(朝鮮史)는 다시 쓰여 져야 한다.]는 뜻이다.
○〈요하(遼河)의 상원(上源)은 요해(遼海)이고, 금산(金山)의 청하(淸河)【대청하(大淸河)와 소청하(小淸河)가 합류(合流), 청하(淸河)이다.】가 합류(合流)하여 요해(遼海)로 들어가고, 요해(遼海)에서 나오는 한 물줄기가 요하(遼河)〉라고 하였다. 또 요하(遼河)는 본시(本是) “구려하(句麗河)”란 이름으로 불렸다고 전한다.
〈구려하(句麗河)=구려하(句驪河)란 고구려하(高句驪河)란 이야기고, 영토(領土)안에 있었으며, 고구려(高句驪)와 밀접(密接)한 관계(關係)를 갖고 있다〉고 봐야 한다.
금산(金山)·요해(遼海)·오량해(烏梁海)·삼위(三衛)에 대해
(1) 盛京疆域考 六 : 三萬衛
《三萬衞【今開原縣治】原注元開元路原志洪武初廢二十年十二月置三萬衞於故城西兼置兀者野人乞例迷女真軍民府二十一年府罷徙衞於開元城南距都司三百三十里【本紀洪武二十八年六月周興等自開元追敵至甫答迷城不及而還國朝天命四年六月丁卯克明開原城】➡原注洪武二十四年,建韓王府,永樂二十二年遷於陝西平涼西北,有金山東有分水東嶺北有分水西嶺西有大清河東有小清河流合焉.下流入於遼河,又北有土河東北有艾河流合焉.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按本注遼河上源乃東遼河之源西遼則源於直隸承德府界】又北有金水河北流入塞外之松花江,又鎮北關在東北廣順關 【即靖安堡】在東【李成梁傳,初王杲死其子阿台走依王台長子虎兒罕以王台獻其父嘗欲報之王台死虎兒罕勢衰阿台遂附北關合攻虎兒罕,又數犯孤山汎河成梁出塞破之阿台復掠瀋陽成梁從撫順出塞滅杲部時萬曆十年也.北關清佳砮楊吉砮素讐南關王台沒屢侵台季子猛骨孛羅且藉土蠻兵侵邊境.其年十二月巡撫李松許之貢市清佳砮楊吉砮率二千騎詣鎮北關謁松備禦霍九皋見其兵譙讓之其徒遂殺九皋並侍卒十餘人松軍礮鳴伏起擊斬二人並其子盡殲焉.成梁聞礮急出塞擊其留騎斬首千五百有奇餘眾刑白馬攢刀誓永受約束乃旋師北關既被創後清佳砮子卜寨與楊吉砮子那林孛羅漸強盛數與南關虎兒罕子歹商搆兵成梁以南關勢弱謀討北關以輔之十六年五月率師直擣其巢卜寨走與那林孛羅合憑城守城四重攻之不下用巨礮碎其外郛遂拔二城斬馘五百餘級卜寨等請降設誓不復叛乃班師.】又西有新安關西南有清河關南有山頭關又北有北城即牛家莊也.洪武二十三年三月置遼海衞於此.二十六年衞徙又南有中固城永樂五年置.》
➊ 본문(本文)번역(飜譯) :《盛京疆域考 六 : 三萬衞.原注元開元路原志洪武初廢二十年十二月置三萬衞於故城西兼置兀者野人乞例迷女真軍民府二十一年府罷徙衞於開元城南距都司三百三十里. : 성경강역고(盛京疆域考) 6 : 삼만위(三萬衛) : 원주(原注) : 원(原)개원로(開元路)는 원지(原志)에 홍무(洪武) 초에 폐(廢)하고, 20년 12월에, 삼만위(三萬衛)를 두었는데, 고성(故城)의 서(西)쪽 겸 올자(兀者)야인(野人) 걸예미(乞例迷)여진(女眞)군민부(軍民府)를 두었으나, 21년에 부(府)를 파(罷)하고, 위(衛)를 개원성(開元城) 남(南)쪽 도사(都司) 330리 떨어진 곳으로 옮겼다. 原注洪武二十四年,建韓王府,永樂二十二年遷於陝西平涼西北,有金山東有分水東嶺北有分水西嶺西有大清河東有小清河流合焉.下流入於遼河,又北有土河東北有艾河流合焉.謂之遼海即遼河上源也. : 원주(源注) : 홍무(洪武) 24년, 한왕부(韓王府)를 건치(建置)하였는데, 영락(永樂) 22년에 섬서(陝西)평량(平涼)서북(西北)으로 옮겼다. 금산(金山)이 있는데 동쪽에서 물길이 동(東)으로 갈라지고, 영북(嶺北)에서는 물길이 서쪽으로 흐른다. 령서(嶺西)에 대청하(大淸河)가 흐르고, 동쪽에는 소청하(小淸河)가 흘러 합해진다. 하류(下流)에서 요하(遼河)에 들어간다. 또 북(北)쪽에 토하(土河)가 있어, 동북(東北)에 애하(艾河)가 있어 합쳐진다. 일컬어 요해(遼海)라고 하는데, 곧 요하(遼河)의 상원(上源)이다. 又北有金水河北流入塞外之松花江,又鎮北關在東北廣順關,在東又西有新安關西南有清河關南有山頭關又北有北城即牛家莊也.洪武二十三年三月置遼海衞於此.二十六年衞徙又南有中固城永樂五年置. : 또 북(北)쪽에 금수하(金水河)가 있어 북류(北流)하여 새외(塞外)의 송화강(松花江)에 들어간다. 또 진북관(鎭北關)이 있고, 동북(東北)의 광순관이, 또 동쪽, 또 서(西)쪽에 신안관이, 서남(西南)에 청하관, 남(南)쪽에 산두관이 있고, 또 북(北)쪽에 북성(北城) 곧 우가장(牛家莊)이다. 홍무(洪武)23년 3월에 두었는데, 요해위(遼海衛)가 바로 이곳이다. 26년에 위(衛)를 옮기고, 또 남(南)쪽에 중고성(中固城)을 영락(永樂)5년에 설치하였다.》고 하였는데,
➋ 여기에 기존사학(旣存史學)인 역사통설(歷史通說)과는 전혀 다른 역사(歷史)이야기가 기록(記錄)되어 있다. 〈즉(卽) 요하(遼河)가 평량(平涼) 서북(西北)쪽 금산(金山) 주변에 있었다.〉는 것이다.【이 내용(內容)은 ‘우리 카페’에서 필자(筆者)가 십여(十餘)년 전(前) 쯤에, 번역(飜譯) 해설(解說)하여, 몇 차례에 걸쳐 게재(揭載)된 것이나, 일부(一部)를 ‘수정(修正)·보완(補完)·비교(比較)·검토(檢討)’를 한 것이다.】
➌ 금산(金山) :〈아이태산(阿爾泰山)=알타이산(山)=벨루하산(山)=금산(金山) : 해발고도 4,508 m〉이다. 금산(金山)은 3 개의 큰 봉우리로 이루어졌는데, 총칭(總稱)하여 ‘금산(金山)’이라고 한다.
〈阿爾泰山 : 亦作阿勒壇.又作阿爾但.蒙古爲金爲阿爾但.故又稱金山.天山北出之脈.中略,與賀蘭山勢遙連.中略. : 아이태산(阿爾泰山) : 또한 아륵단(阿勒壇)이다. 또한 아이단(阿爾但)이다. 몽고(蒙古)에서는 금(金)을 아이단(阿爾但)이라고 하여 금산(金山)이라고 일컬었다. 천산(天山)이 북(北)쪽으로 뻗어 나간 줄기이다. 중략. 하란산(賀蘭山)의 기세는 아득하게 연하였다.〉
➍ 여기서 우리를 더욱 놀라게 하는 이야기는,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원전(原典)에 기록(記錄)되어 있다. (전회(前回)에 이미 게재(揭載)된 것이나, 수정(修正)과 보완(補完)한 내용(內容)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금산(金山) :《通典唐乾封二年薛仁貴破髙麗於金山進拔夫餘城.【案夫餘城東接挹婁西接鮮卑在遼為通州金為威平府地】: 통전(通典) 당(唐) 건봉(乾封) 2년에 설인귀(薛仁貴)가 고려(高麗)[고구려(高句驪)]를 격파(擊破)하고, 금산(金山)에서 진격(進擊)하여 부여성(扶餘城)을 쳐 빼앗았다.【안(案) : 부여성(扶餘城)은 동(東)쪽에 읍루(挹婁)와 접(接)하고, 서(西)쪽에는 선비(鮮卑)와 접해있는데, 요(遼)나라의 통주(通州)요, 금(金)나라의 위평부(威平府) 땅이다.】 明統志金山在開原西北三百五十里遼河北岸又西北三十里曰東金山又二十里曰西金山三山緜亘三百餘里與烏梁海接境. : 명통지(明統志)에 의하면, 금산(金山)은 개원(開原) 서북(西北) 350리 요하(遼河) 북안(北岸)에 있다. 또 서북 30 리에 동금산(東金山)이 있고, 또 20 리에 서금산(西金山)이 있는데, 이 세 산(山)의 뻗친 줄기가 3백 여리에 달하는데 “오량해(烏梁海)”와 접경(接境)하고 있다.》고 하였다.
1) 우선(于先), 「금산(金山)은 큰 봉우리가 3개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事實)이다. 《금산(金山)+동금산(東金山)+서금산(西金山)》이다. 또 이곳에 있는 청하(淸河)는, 대청하(大淸河)와 소청하(小淸河)가 있어, 합류(合流)하여, 하나의 청하(淸河)가 되어, 요해(遼海)로 들어간다는 사실(事實)이다. 그렇다면 현재(現在)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이라고 하는 “위키 백과”를 한 번 보자.
2)〈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 벨루하산(山) : 【벨루하 산 러시아 카자흐스탄에 있다. 벨루하산(山) (러시아어: Белуха, 4,506m)은 러시아와 카자흐스탄에 위치한 산이다. 이 산은 알타이 산맥의 지류인 카툰 산맥의 동쪽에 위치해 있고, 알타이 산맥에서 가장 높은 산이다. 높이는 4,506m이고 1년 내내 눈이 내린다. 동벨루하봉(4,506m)과 서벨루하봉(4,440m)의 2개 봉우리로 이루어졌다.】고 하였다.
출처 : 다음백과 : 금산(金山)=아이태산(阿爾泰山) : 벨루하산(山)의 전경(全景)
◆〈위키 백과〉에서는 2개의 봉우리가 있다고 하는데, 고전(古典) 원문(原文)에서는 3개의 봉우리를 모두 합쳐 금산(金山)이라고 하였다고 하였다. 지형도(地形圖)를 찾아보니 : 조금 떨어진 곳에 해발고도(海拔高度) 4,374m 의 봉우리 하나가 존재(存在)하고 있다. 3개의 큰 봉우리가 있다.
➎ 위의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금산(金山) ➍의 내용(內容)을 보면 : 마지막 말미(末尾)에 〈오량해(烏梁海)와 접경(接境)하고 있다.〉고 하였는데, 「오량해(烏梁海)는 올량합(兀良哈)으로, 올자(兀者)」라고도 하는데, 바로 여진족(女眞族)을 말하며, 이들은 〈조선(朝鮮)의 북방(北方)지역을 침범(侵犯), 약탈(掠奪)하여, 변방(邊方)을 소란스럽게 했던 장본인(張本人)〉들이다. 오량해(烏梁海)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을 말한다. 아래 :
1)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 : 《遼 金 所 置 眀 屬 烏 梁 海 其 稱 故 建 州 者 : 요(遼)나라와 금(金)나라가 설치했고 명(明)나라에 속했던 오량해(烏梁海)는 건주(建州)에 있는 자(者)들을 일컫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卽) 건주(建州)에 살고 있던 여진족들을 ‘오량해(烏梁海)’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다.
2) 그런데 이들 건주(建州)에 살고 있던 오량해(烏梁海)들이 〈금산(金山)과 경계(境界)가 서로 맞닿아있다〉고 하였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역사기록(歷史記錄)은 반도(半島) 북방삼성(北方三省) 요녕성(遼寧省)의 심양(瀋陽)을 가지고는, 죽었다 다시 깨어나도 설명(說明)할 길이 없다.
즉(卽)〈오량해(烏梁海)는 건주(建州)며, 심양(瀋陽)인데, 심양(瀋陽)은, 금산(金山) 주변(周邊)일대(一帶)에 있었다.〉고 했기 때문인데, 요녕성(遼寧省)의 짝퉁 “심양(瀋陽)”과 오리지널 “금산(金山) 주변의 심양(瀋陽)”과는, 일만(一萬)리는 떨어져 있는데, 무슨 재주로 설명(說明)할 수가 있겠는가!
3) 烏梁海 : 中國古今地名大辭典 :《亦作兀良哈,明時居直隷長城外.卽蒙古東部地方,爲朶顔.福餘.泰寧三衛,後徙外蒙古西北部,其種爲突闕族,語言風俗,則以喀爾喀人,自稱東巴.居唐努山,阿爾泰山之間.分爲三部,一曰唐努烏梁海,二曰阿爾泰烏梁海,三曰阿爾泰諾爾烏粱海. : 오량해(烏梁海) : 또한 올량합(兀良哈)이다. 명(明)나라 때 직례(直隷)장성(長城)밖에서 살던 자(者)들이다. 곧 몽고동부지방의 타안(朶顏)·복여(福餘)·태녕(泰寧) 삼위(三衛)이다. 뒤에 외몽고 서북부로 옮겨갔는데, 그 종류는 돌궐(突厥)족으로, 언어풍속이 객이객(喀爾喀) 사람들이다. 스스로 동파(東巴)라고 불렀다. 당노산(唐努山)과 아이태산(阿爾泰山) 사이에 살았는데, 세 부(部)로 나누어져, 하나는 당노오량해(唐努烏梁海)요, 두 번째는 아이태오량해(阿爾泰烏梁海)요, 세 번째는 아이태낙이오량해(阿爾泰諾爾烏梁海)이다.》라고 하였는데,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서는 : 〈금산(金山)과 오량해(烏梁海)는 본래(本來) 같은 곳에 있었다.〉는 이야기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도 : 금산(金山) 일대(一帶)에 있는데, 다만 이들은 몽고(蒙古)동부(東部)의 타안(朶顏)·복여(福餘)·태녕(泰寧) 삼위(三衛)들로써, 이들이 외몽고(外蒙古) 서북(西北)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는 건륭 43년(서기 1778년) 흠정만주원류고(欽定滿洲源流考)로 편찬(編纂)〉된 것이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은 1,931년【중화민국(中華民國) 18년 3월 22일】장려화(臧勵龢)등에 의해 편찬(編纂)되었다.〉는 사실을 알면, 짝퉁 요녕성 “심양(瀋陽)”에 대한 정체(正體)가 풀린다.
수백(數百)년 전(前), 먼저 편찬(編纂)된「만주원류고(滿洲源流考)에는 당시(當時)에 여진족(女眞族)들인 ‘오량해(烏梁海)=올량합(兀良哈)’들이 금산(金山)일대(一帶)에서 살았다.」는 것이고,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서는 몽고(蒙古) 동부(東部)지방에서 외몽고(外蒙古) 서북(西北)지방으로 옮겨갔다.」는 것이다.
➠ 이것을 보면, 수백(數百)년 후대(後代)에 만들어진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이 ‘왜곡(歪曲), 조작(造作)됐다’는 것이, 명백(明白)하게 밝혀지는 것이다.
➏ 삼위(三衛)【타안(朵顏)·복여(福余)·탸녕(泰寧)】의 땅(地) :〈신강성(新疆省)·카자흐스탄·러시아·외몽고(外蒙古)등 네 나라가 국경(國境)을 접(接)하는 곳의 벨루하산(山)=금산(金山)일대와 그 북방지대(北方地帶)의 광활(廣闊)한 땅에 있었다.〉고 하였다. 고황제(高皇帝) 홍무(洪武) 22년에 설치(設置)[朵顏,福余,泰寧,高皇帝所置三衛也.]한 것이고, 그 땅은 당시(當時)【명(明) 나라 때】에 말하기를 :
1)《明史 列傳 : 그 땅은 올량합(兀良哈)이 있는 곳인데, 흑룡강(黑龍江)의 남(南)쪽, 어양새(漁陽塞) 북(北)쪽, 한(漢)때의 선비(鮮卑), 당(唐)나라 때의 토곡혼(吐谷渾), 송(宋) 때의 글란(契丹)이 있었던, 모두의 그 땅이다. 원(元)의 대녕로 북쪽 지경이다. [其地為兀良哈在黑龍江南,漁陽塞北.漢鮮卑,唐吐谷渾,宋契丹,皆其地也.元為大寧路北境]》라고 하였다.
2) 그렇다면 〈신강성(新疆省)·카자흐스탄·러시아·외몽고(外蒙古)등 네 나라가 국경(國境)을 접(接)하는 베루하산(山)=금산(金山)일대〉에 〈흑룡강(黑龍江)이 있고, 어양새(漁陽塞)는 그 남(南)쪽에, 옛 선비족(鮮卑族)도, 토곡혼(吐谷渾)도, 글란(契丹)등도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역사적(歷史的) 사실들은, 오늘날의 역사통설(歷史通說)과는 확연(確然)히 다른, 역사해설(歷史解說)이 될 수밖에 없다.
➐ 우리 카페에서 주장(主張)하는 역사(歷史)강역(疆域)과 크게 다르지 않다. 바로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영토(領土)를 말하는 것이다. 〈조선왕조(朝鮮王朝)는 단군(檀君)이래(以來), 중앙아세아(中央亞世亞)로부터 대륙(大陸)까지, 모두를 보듬었던 옛 봉건왕조(封建王朝)였음이 밝혀졌다. 물론(勿論) 시대적(時代的)으로 동구라파(東歐羅巴)까지도 속국(屬國)으로 다스리기도 했고, 힘이 부칠 때는 청해(靑海)주변까지 밀릴 때도 있었다. 그러나 중요(重要)한 것은 유일무이(唯一無二)한 대륙(大陸)의 천자국(天子國)이었다.〉는 사실(事實)이다.
1) ‘반도사관(半島史觀)=식민사관(植民史觀)의 역사해설(歷史解說)’은 오직 1,910년 이후(以後)의 것일 뿐이다. 일제(日帝) 식민지(植民地) 때, 반도(半島)의 역사(歷史)를 만들고, 다듬고, 살을 붙인 다음, 의무교육(義務敎育)이라는 문맹퇴치(文盲退治)의 미사려구(美辭麗句)를 앞세운 공교육(公敎育)이라는 새로운 체제를 도입(導入)하여,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를 주입(注入), 세뇌교육(洗腦敎育)을 생활화(生活化)시켰다.
2) 그리고 해방(解放) 후(後), 식민지(植民地)의 유산(遺産)을 그대로 물려받은 대한민국(大韓民國)은 모두가 예외(例外)일 수 없었다. 교육계(敎育界)는 특히 역사계(歷史系)는, 오직 식민지(植民地)의 유산(遺産)을 그대를 물려받아, 새로운 나라에, 새롭게 만들고, 다듬은 반도조선왕조(半島朝鮮王朝)에 대한 조작(造作)된 역사(歷史)이야기를 공교육(公敎育)이라는 미명(美名)하에 주입(注入)시킨 것이 오늘날의 결과(結果)이다.
3) 해방(解放) 후, 식민지(植民地)시대(時代)를 말끔히 청산(淸算)해야 했음에도, 서구(西歐)세력(勢力)들과 일제(日帝)가 남기고 간 유산(遺産)을 떨쳐내지 못하고, 친일(親日)청산(淸算)을 하지 못한 것은, 그 후유증(後遺症)이 오늘날에도 그대로 우리 사회(社會)에 짐이 되고 있고, 정치적(政治的) 난관(難關)이 되고 있는 것이다.
친일분자(親日分子)들 대부분(大部分)이, 반공주의자(反共主義者)로, 다시 친미분자(親美分子)로 거듭나며, 기회주의자(機會主義者)로 변신(變身)하여, 권력(權力)과 영화(榮華)와 부(富)를 창출(創出)하고, 또 이어가기 위해 국가(國家)와 국민(國民)들을 현혹(眩惑)시키며, 온갖 만행(蠻行)을 저지르고 있는 것이 현실(現實)이다.
4) 지금 벌어지고 있는 현실(現實)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국민(國民)들의 마음은 전혀 헤아리지 않으며, 또 알려하지도 않고, 오직 봉건왕조(封建王朝)시절의 군주(君主)인 냥 행동(行動)하는 사람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무엇이 잘한 것인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하고,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 건지조차 판단(判斷)하지 못하는…이건 공교육(公敎育)의 폐해(弊害)요, 세뇌교육(洗腦敎育)의 결과(結果)요, 식민지(植民地) 유산(遺産)의 크나큰 폐해(弊害)라 아니 할 수 없다.
○ 모든 것을 보듬어야 하는, 힘없는 국민(國民)들만 등골이 휜다. 민초(民草)들만이라도, 깨어있는 자세(姿勢)로, 정신(精神)을 가다듬어야 할 때다.
2017년 03월 02일 〈글쓴이 : 문무(文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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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안녕 하십니까 ?
금산[金山], 요해[遼海], 명[明]나라의 삼위[三衛], 올량합[兀良哈], 알타리[斡朶里], 조선[朝鮮]의 백두산[白頭山]인 불함산[不咸山], 그리고 압록강[鴨綠江], 요동[遼東], 발해[渤海]와 연산]燕山] 등, 이러한 역사의 사실을 담고 있는 지역들은, 모두 다 오늘날의 벨루하산[조선사의 백두산]을 중심으로 그 인근에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조선 함경도의 북관과 평안도의 의주는 말씀 하시는 대로 그 지역이 맞습니다.
우리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이 발길을 옮기면서 밀려오는 참담한 심사와 느끼는 소회를, 어찌 문자와 필설로 다 표현 할 수 있겠습니까 ?
대륙을 치달리며 천하를 호령하고, 천하의 문명에 밝은 태양을 비추고, 천하에 인간의 대도와 인간이 걸어야 할 정도의 기틀을 닦은 조선사 일만년의 위대한 역사는, 불과 백년 사이에 그 뿌리조차 없는 초라하기 이를데 없는 역사로 전락하여, 바람에 날리는 한낱 종이 조각이 되어 버리고 말았습니다.
오늘도 시간을 다투며 들려오는 천하 말종만도 못한 군상들의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불의와 패악질들,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 원인과 발단은, 거짓의 역사 교육에 주관과 자아를 잃어버린 한 일면이기도 합니다.
문무 선생님 고생 하셨습니다. 끊임없는 노고 하심에 경의의 감사를 드립니다.
안녕하세요. <환국고려>님!
작금의 세태를 보면 : 모든 것들이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그 댓가라고 생각됩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대한민국의 주류들은 친일사학에 몸둘 바를 모르며, 죄송 황송하다는 모습을 보입니다.
도대체 자국의 역사에 일제 군국주의자들이 만들어 놓은 그 성과에 목매는 학자들을 보면, 깨끗한 입가지고 욕은 할 수 없고........보통 답답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다가 온갖 언론들, 방송국들......모두가 거대한 음모에 따라 움직이는 것처럼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습니다. 오늘 대통령 권한대행인지 무슨 대행인지.....역사교과서....하는 이야기를 들으니....도대체 이들은 어떤 마음으로 국정에 임할까요?
자국의 어린 소녀들이 총독부와 일제의 강압과 강제로 끌려가 위안부가 되어 얼마나 심한 고생을 했겠습니까? 그나마 살으신 분들은 그래도.....현지에서 살해되고, 죽은 수많은 위안부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이 나라를 어떻게 하든 발전시켜 다시는 이러한 일이 벌어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각오는 없고, 독재정치의 잔재처럼 밀실에서 일제와 합의를 했다고 지들끼리 쑥덕쑥덕 한 것을 가지고.......합의서를 볼 수 있도록 하자는 공개청구도 받아들이지 않는 이런 나라가 민주주의 국가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불어 무슨 대행인지 하는 자는 한 술 떠 뜹니다. 외교 장관이란 자도 똑같구요. 이게 자국민을 대하는 관리들입니까?
나이가 들만큼 든 나도 이럴진대, 젊은이들은 어떻겠습니까? 50년 대부터 지금까지 많은 일들을 겪은 세대로써, 젊은이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때이지만, 작금의 대한민국은 노인들 때문에 챙피하다는 젊은이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막갈리 마시고, 아무곳에서나 담배 피우고, 태극기를 몸에 두루고, 깔고 앉고, 쌍욕을 해대며...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노인들....그런 노인들을 이용하는 관변단체와 기회주의자들과 맹종하는 단체들!
정말 답답한 하루 하루입니다. 이런 모든 일이 역사교육 부재에서 출발하며, 일제가 남겨준 분열의 유산입니다. 일제가 철수하며, '오십년, 백년 분열로 싸울것이다 했다지요'
엉뚱한 이야기로 댓글이 길어졌습니다.
요즘처럼 답답한 시간은 별로 없었던 것 같습니다.
역사교육! 이게 정말 답이라고 봅니다. 거짓으로 얼룩진 대한민국의 역사교육은 하루라도 빨이 없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의 힘으로, 우리의 역사를, 우리 손으로, 우리 중심에 역사로, 다시 태어나야한다>고 봅니다.
댁내 평안 하시고, 건강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