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 서울 남산(南山) 안중근 의사 기념관 및 이모저모
지난 4월 17일의 일정을 다시 이어 봅니다. 남산을 내려와 우선 안중근 의사 기념관이 있는 곳으로 오고 보니 전에 있던 한옥형 기념관은 철거되고 새로운 기념관이 건립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많이 새롭게 변모해 있었습니다.
아, 이런! 얼마나 오랜 세월동안 남산을 찾지 않았는지 탄식이 흘러나왔네요. 30여년 전 처음 남산 밑 회현동에 살 때는 남산의 대원정사를 거의 날마다 찾으면서 이 곳을 가로질러 가곤 했었는데 말입니다. 남산을 그동안 몇 년 동안은 남산에 간 일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기념관은 들어가지 못 했지만 야외의 기념물을 보면서 안중근 의사를 생각해 보는 시간 을 가졌습니다. 대한민국 사람으로 안중은 의사을 모르는 분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
대한국인 안중근(大韓國人 安重根) 동상
「한말의 교육가ㆍ의병장ㆍ의사(義士). 자(字)는 응칠(應七). 어려서부터 유학을 배웠으며, 총을 잘 쏘았다. 17세에 천주교에 입교해 활동했고, 20대에 학교를 세워 학생들의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1907년 한일신협약에 체결된 후 간도로 가 의병을 결집해 일본군대와 싸웠다. 1909년 비밀결사를 조직해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저격해 죽였다. 그리고, 재판에서는 자신을 한국의 군인 신분이고 국제의 평화를 위한 행동이었음을 당당하게 밝혔다. 사형을 언도받고 1910년 여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백과사전에서-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의사는 본관이 순흥(順興)으로 아버지 진사 태훈(泰勳)과 어머니 조시(趙氏) 사이에서 삼남일녀 중 맏아들로 태어났고, 아내는 김아려(金亞麗)라고 합니다. 태어날 때 배에 검은 점이 일곱 개가 있어 북두칠성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고 여겨 응칠(應七)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民族正氣의 殿堂 -大統領 朴正熙 글씨-
민족정기의 전당이란 힘찬 글씨는 1979년 9월 2일 박정희 대통령이 휘호하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
안중근의사 기념관 건립취지
「안중근의사는 일제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위험에 처한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 에서 제국주의 침략의 상징 이토 히로부미를 쓰러뜨려 대한의 민족혼이 살아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린 민족의 영웅입니다.
동양평화를 위해 헌신하신 안중근의사는 일제의 부당한 판결을 받고 뤼순감옥에서 『동양평화론』을 저술하던 중 서론과 본문의 일부만을 남긴채 1910년 3월 26일 순국 하셨습니다. 때문에 아쉽게도 우리는 그 깊은 평화사상을 짐작만 할 수 있을 뿐입니다.
『동양평화론』에 나타는 정치적 구상은 금일의 유럽공동체(EU)와 흡사하고 경제적 뒷받침을 위해 공동은행을 세우려는 구상은 세계은행(IBRD)ㆍ국제통화기금(IMF)의 구 상과 일치하는바, 안중근의사는 100년 후의 오늘을 내다본 탁월한 정치사상가이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우리 정부는 조국이 광복을 이룬 후에도 한국전쟁과 4ㆍ19혁명, 5ㆍ16군부 쿠데타 등 격동기를 거치면서 안중근의사에 대해 이렇다 할 위훈을 기리지 못한 채 많은 세월을 보낸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던 중 1970년 10월 26일 당시 박정희대통령의 지시와 국민의 성금 등으로 일제시 기 민족정기를 탄압하는 조선신궁이 있던 서울 남산 현 위치(회현자락)에 안중근의사 기념관을 건립ㆍ개관하게 되었으며, 세월이 흘러 기념관이 노후ㆍ협소해짐에 따라 2004년 (사)안중근의사숭모회와 광복회의 요청을 받은 노무현대통령의 지시로 국가보 훈처에서는 2010년 10월 26일 새 기념관을 개관하였습니다.
기념관 신축을 계기로 우리는 안중근의사에 관한 유물과 자료를 전시하고 그 사상과 정신을 보급하는 일에 더욱 매진하고자 합니다. 앞으로 이 기념관은 우리의 젊은 세 대와 후손들에게 나라와 민족이 무엇인가를 일깨우고, 나라와 민족을 위해 희생하신 애국지사를 민족의 긍지로 여기며, 스스로 삶의 표본과 중심을 일으켜 세우는 산교육 의 마당으로 자리잡게 될 것입니다. 2010. 10. 26.」 -안중근 의사 기념관 사이트에서 옮김-
알리는 말씀
「우리가 여기에 안중근 의사의 동상과 기념관을 세운 뜻은 그의 높은 정신과 행적을 영원히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는 1870년 9월 2일에 나서 1910년 3월 26일 32세로 순국하기까지 오직 조국을 위해 몸을 바친 이요, 동양 평화의 큰 이상을 품었던 대한 남아의 표상이었다.
그러므로 의사가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두에서 일본의 이등박문을 저격한 것도 결코 개인적 행동이 아니다. 이등이 우리 조국을 유린하고 평화를 파괴하는 원흉이므 로 정의가 불의를 무찌른 것이다. 선이 악을 제거한 것이오 평화가 침략을 징계한 것이다.
의사는 실로 민족정기의 발양자요 자유 평화의 수호자자. 그의 희생정신은 민족과 인류를 바른 길로 이끌어 줄 것이다.
1970년 10월 26일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
알리는 말씀을 하필이면 글자가 잘 안 보이는 얼룩무늬의 바위에 새겼네요.
다음은 안중근 의사의 유묵비(遺墨碑)들을 살펴보고자합니다.
人無遠慮難成大業(인무원려난성대업)
人無遠慮難成大業 인무원려난성대업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생각이 없으면 큰일을 이루기 어렵다.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書 경술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서
1910년 3월 여순의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그러니까 경술국치가 있던 1910년 3월 여순의 옥중에서 쓴 글입니다. 사람이 눈앞보다는 멀리 내다보는 안목이 있어야 큰일을 도모할 수 있는 법입니다.
1909년 1월 안중근(安重根) 의사는 러시아 연해주 크라스키노(연추)에서 11명의 동지 를 초청해 집회를 갖고 함께 그 유명한 단지동맹(斷指同盟)을 하고 조선을 독립활동을 전개하기로 다짐하며 왼쪽 무명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독립'이라 쓰고 국권 회복을 위해 목숨을 바치기로 맹세했다고 합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견리사의 견위수명)
見利思義 見危授命 견리사의 견위수명
이득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書 경술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서
1910년 3월 여순의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이 글은 안중근의사가 써서 인구에 회자된 유명한 글입니다. 그런데 이 글의 출처는 《논어(論語)》『헌문(憲問)』에 나옵니다.
자로(子路)가 공자님께 성인(成人)에 대하여 여쭈었습니다. 성인이란 전인(全人)이란 뜻이니 완성된 인물을 말합니다. 완전한 인격자 말입니다. 공자께서 말씀하십니다.
"만약 장무중(臧武仲)의 슬기와 맹공작(孟公綽)의 과욕(寡欲)과 변장자(卞莊子)의 용기와 염구(冉求)의 재주에 예악(禮樂)으로 꾸민다면 또한 완성된 인물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다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완성된 인물이야 어찌 꼭 그러할 수 있겠느냐? 이득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칠 수 있고, 오래 전의 약속이라도 평생 그 말을 잊지 않는다면 또한 완성된 인물이라 할 것이다." (今之成人者 何必然 見利思義 見危授命 久要不忘平生之言 亦可以成人矣)
이로 보면 안중근의사는 성인(成人)이 되셨네요. 예를 올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_()_
國家安危 勞心焦思(국가안위 노심초사)
國家安危 勞心焦思 국가안위 노심초사
국가의 안위를 생각하고 애태운다.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書 경술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서
1910년 3월 여순의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안의사께서 얼마나 국가안위에 대하여 노심초사 했는지 느끼게 합니다.
合成散敗 萬古正理(합성산패 만고정리)
合成散敗 萬古正理 합성산패 만고정리
합하면 이루고 흩어지면 패한다. 이는 정한 만고의 이치다.
이 글은 안의사가 동양평화론의 서문 첫머리에서 쓰신 말씀입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이 뜻이지요.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一日不讀書 口中生荊棘 일일부독서 구중생형극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
庚戌三月 於旅順獄中 大韓國人 安重根書 경술삼월 어여순옥중 대한국인 안중근서
1910년 3월 여순의 옥중에서 대한국인 안중근 쓰다.
안의사는 사형을 집행하는 날에 마지막 소원이 무엇인지 물었을 때 말했습니다.
"5분만 시간을 주십시오. 책을 다 읽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말한 다음, 5분 동안 읽고 있던 책의 마지막 부분을 다 읽고 난 다음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수불석권(手不釋卷)은 이를 두고 하는 말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책을 읽을까?
안중근의사의 인심결합론
인심결합론(人心結合論)
『대저 사람이 만물보다 귀하다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삼강오륜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에 처하되 첫째는 몸을 닦고, 둘째는 집을 정돈하고, 셋째는 나라 를 보호하는 것이다. 유지되고 나라는 국민상하의 단결에 의해서 보존되는 것이어늘 슬프다. 우리나라는 오늘날 이 같이 참담한 경지에 빠졌으니 그 까닭은 다른 것이 아니라 서로 화합하지 못한 것이 제일 큰 원인인 것이다. 소위 교만한 무리들은 저보다 나은 자를 시기하고 저보다 약한 자를 업신여기며, 있을 것인가. 주장삼아 자기를 낮추고 남을 공경하여 남이 자기를 꾸짖는 것을 달게 받으며 사람이 짐승이 아니어늘 어찌 서로 불화할 리가 있겠느냐 되려니와 마음을 합하기만 하면 어찌 남들이 꺾을 수 있으리오." 하였었다. 는 소리를 참아 듣지 못하겠다. 일가친척은 모두 대한 땅에 있고 당신들의 조상의 분묘도 모국산하에 있지 않단 말인 가 으니 내 몸은 장차 어떻게 하리오. 우리 동포들아! 각각 「불화」 두 자를 깨뜨리고 체로 육대주가 진동하도록 대한독립만세를 부를 것을 기약하자.』 共報)에 「인심을 결합하여 국권을 회복하자」는 제목으로 기고했던 글을 이은상(李殷 相) 씨가 번역하였음.
1985년 9월 2일 사단법인 안중근 의사 숭모회」
이 비문을 읽어 보니 모두가 한번 읽어 보면 좋을 것 같아 글을 옮겨 보았습니다.
丈夫歌(장부가)
丈夫歌(장부가)
丈夫處世兮 其志大矣 장부처세혜 기지대의 時造英雄兮 英雄造時 시조영웅혜 영웅조시 雄視天下兮 何日成業 웅시천하혜 하일성업 東風漸寒兮 壯士義熱 동풍점한혜 장사의열 忿慨一去兮 必成目的 분개일거혜 필성목적 鼠竊○○兮 豈肯比命 서절○○혜 기긍비명 豈度至此兮 事勢固然 기도지차혜 사세고연 同胞同胞兮 速成大業 동포동포혜 속성대업 萬歲萬歲兮 大韓獨立 만세만세혜 대한독립 萬歲萬歲兮 大韓同胞 만세만세혜 대한동포
[安應七] 作歌 [안응칠] 작가
장부가 세상에 처함이여, 그 뜻이 크도다. 시절이 영웅을 만듦이여, 영웅이 때를 만들도다. 천하를 당당히 바라봄이여, 어느 날에 대업을 이룰 것인가. 동풍이 점점 참이여, 장사의 의기는 뜨겁도다. 분개한 마음으로 한번 감이여, 반드시 목적을 이루리라. 쥐새끼 같은 좀도둑 이등(伊藤)아, 어찌 옳게 명을 다하랴. 어찌 이에 이를 줄 헤아렸으리오, 사세가 본디 그러하도다. 동포 동포여, 빨리 대업을 이루오리다. 만세 만세여, 대한 독립 만세! 만세 만세여, 대한 동포 만세!
이 장부가는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역에서 침략의 원흉인 이토오히로부미를 처단하기 위해 출정하면서 쓴 시라고 합니다.
원문을 옮기고 그 뜻을 새겨 보니 그 장한 의기가 전해 오는 듯합니다. 쥐새끼 같은 좀도둑[鼠竊] 이란 대목에서 이등을 조롱한 것은 옛날 고구려를 침략한 수장 우중문을 조롱한 을지문덕의 여수장우중문시(與隋將于仲文詩)가 연상되었습니다.
원문에 ○○으로 된 부분은 이등박문(伊藤博文 이토오히로부미)를 뜻합니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은 관람하지 못했습니다. 묵서비만 살펴보고 내려갔습니다. 다음에 기회가 오면 찾아보고자 합니다.
안중근의사 기념관에서 바라본 남산의 모습
남산도서관 옆의 라일락 나무에서
사진을 당겨 봅니다.
저도 서 보았습니다.
우리는 남산도서관을 거쳐 남대문시장쪽으로 가고자 백범광장으로 향했습니다.
이 건물은 처음 어린이회관이었는데 지금은 '서울교육연구정보원'이라고 하네요.
이 건물은 남산 분수대앞, 백범광장으로 내려가는 가장자리에 있는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어린이회관의 필요성을 역설한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 대통령의 영부인인 육영수여사의 뜻에 의해 1969년 5월 5일에 기공식을 갖고 이듬해 1970년 7월에 개관하 여 어린이들의 꿈의 궁전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자양동에 어린이대공원이 조성되 어 1974년에 어린이회관이 그곳으로 이전되었습니다. 그 후 이 건물은 '국립중앙도서 관'이 되었는데, 1988년 도서관이 서초동으로 옮겨 감에 따라 지금은 '서울교육연구정 보원'이 되었습니다. 무상하네요. ^^
백범광장(白凡廣場)
백범광장에는 이날 캐릭터걷기대회가 있어서 가까이 가지는 않았습니다.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고 지나갔습니다.
생각해 보면 남산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세우고 안중근 의사 동상을 건립하고 백범 광장을 조성하여 백범 김구선생의 동상을 건립하여 민족혼을 고취시키려 한 것은 여기 가 일본의 야욕이 치성했던 곳이기 때문입니다.
남산은 임진왜란 때 왜군들이 남산을 '왜장 터' 혹은 '왜성대'라 부르면서 주둔지로 삼은 바 있었는데, 일제강점기 그들은 일제 식민통치의 거점으로 활용하였고 신사참배 시설인 조선신궁을 세우기도 하면서 남산 일대는 일본인들의 적산가옥이 많았던 곳입니다.
일본이 야욕을 부리던 1897년 일본인들이 남산을 왜성대공원이라 이름하였고, 1909년 에는 한양공원(漢陽公園)을 조성하여 일본 벚꽃을 대거 옮겨 심었던 것입니다.
남산을 돌아보면서 이러한 사실을 상기하면서 다시는 그런 치욕의 역사를 되풀이 해서 는 안 됨을 새겨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백범 김구 선생(白凡金九先生) 동상
백범 선생의 동상을 세운 뜻
「한국의 독립운동을 일으킨 무수한 애국지사 중에 백범 김구 선생은 어둔 밤 하늘에 만 개 별을 거느리신 북두칠성이요, 서리 찬 눈보라 속에 낙락장송을 이마에 인 태산 교악의 자새였다.
선생은 나라가 광복된 후에 두 동강으로 끊어진 남북을 통일하려고 노력하셨다. 그러나 통일대업을 이루지 못하신채 1949년 6월 26일 정오 철천의 한을 품고 순국하시니 우리 들의 슬픈 마음 그지 없다.
백범김구선생기념사업협회는 선생의 순국 20주년을 맞이하여 만대의 사표이신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동상으로 하여 이곳에 세운다. 백대의 후생들에게 그 의로운 기풍을 본 받게 하려는 뜻이다.
1969년 8월 23일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협회」
한양도성(漢陽都城)을 복원한 모습
한양도성(漢陽都城)의 축성형식(築城形式)
「오랜 역사를 지닌 한양도성(漢陽都城)은 축성시기에 따라 성벽의 축조형식이 구분되 는데, 태조(太祖) 때의 성벽은 주로 산지(山地)지역으로 거친 돌을 깬돌을 이용하여 평 축(平築)하여 쌓아 올렸고, 세종(世宗) 때는 평지(平地)와 구릉지(丘陵地)에 주로 축조 되어 있는데, 이 시기의 성벽은 잘 가공된 장방형(長方形)의 성돌로 아래쪽은 규격이 크고, 상부로 가면서 차츰 작은 부재를 사용하였다. 이후 숙종(肅宗) 때에는 전란(戰亂) 등으로 훼손된 성곽을 전면적으로 수축(修築)하였는데, 이때는 정방형(正方形)의 성돌 을 이용하여 수직에 가깝게 쌓아올린 특징을 보이고 있다.」
성곽을 따라 이제 완전한 하산입니다.
이렇게 하여 남대문시장을 거쳐 북창동의 모 커피숍에서 차 한 잔을 나누며 하루의 일정 을 마감했습니다.
지하철 3호선 동대입구역에서 출발하여 동국대학교 정각원에 들어 참배를 하고 난 후 시작된 남산길 걷기는 이렇게 끝이 났습니다. 대강으로나마 남산을 공부한 느낌입니다. 이 밖에도 남산에는 볼거리가 풍부합니다. 미처 살피지 못하고 남겨두고 온 사물과 현 장은 부지기수입니다. 남산은 역사의 현장이자 자연생태관광으로도 무한한 가치가 있 는 곳이라는 것을 새삼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앞으로도 이런 아름다운 환경을 잘 가꾸고 보전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번 순례및 나들이에 함께하신 정파님, 묘법님, 염화님, 미소님, 대각화님, 석원님, 정순님, 비니초님께 감사드립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즐거운 순례가 되었습 니다. 순례에 동참하시고자 하시는 분들은 언제든지 건의해 주시고 의견을 내 주시면 어디든 갈 수 있습니다. 산행이든 사찰순례든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 하여 다음엔 더 많은 분들 새로운 분들이 동참하는 순례가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백우 _()_
|
첫댓글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_()_ _(())_
함께한 시간 즐거워고
다음 순례가 기대 됩니다....나무묘법연화경()()()
그동안 남산의 많은 것들이 많은 변모를 했네요. _()_ _(())_
우리는 이제 누가 남산에 대해서 묻는다면 많은 이야기를 들려 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딸래미 시험기간이라 이제야봅니다 ()
순례가 있던 그날... 전날의 비와 당일 아침에도 비가 와서 혹시나 하고 기다렸는데... 감사합니다. _()_ _(())_
잘 지내고 계시지죠
정다운 법우님들과 함께한 시간거웠습니다. _()_
유묵비 하나하나에 안의사의 정신이 살아 있더군요. _()_ _(())_
나중에 다시 가면 기념관도 둘러보고 빠진 유묵비도 남김없이 담고 싶네요.
남산이 일본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었었는만큼 민족정기도 그에 상응하여 진작시키고 있는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