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일
아들 나이가 벌써 39세. 마음은 청춘이고 몸도 그리 늙었다는 생각이 없는데 세월은 이리도 빨리 지나갔다. 그 나이에 나는 변변한 직업도 없이 번역이나 하며 근근히 살았으나 그 덕에 시간은 많아 아들 딸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런 탓인지 아들 딸과는 지금도 소통이 잘되고 정이 두텁다.
늘 하는 말이지만 세상에 억울한 일은 별로 없다. 저울에 달아보면 마이너스와 플러스가 결국 균형을 이룬다. 얼핏 보기에 나빠 보이는 일들 속에 한없는 복이 숨어있기도 하다. 이것을 아는 것을 지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어떤 경우에도 비관주의자가 될 수는 없다. 이것이 내가 받은 최고의 복이다.
미국에서 아들이 와 오늘은 실로 오랜만에 함께 목욕탕에 갔다. 참 특별한 느낌이고 기분이 좋다. 아들과 만나면 예전에는 내가 말이 많았는데 요즘은 주로 듣는 편이다. 생각과 지식이 나보다 훨씬 앞서 있기도 하고 내가 아들 걱정하는 것 보다 아들이 내 걱정을 더 많이 해 이런 저런 조언을 해준다. 들을 줄 아는 귀만 있으면 복음 아닌 것이 없다. 나이들수록 거듭거듭 다짐하는 것은 잘 듣는 사람이 되자는 것이다.
월요 운동 모임. 친구는 부인이 열흘 넘게 해외 여행을 떠나 해방된 민족이라고 들떠 있다. 가정은 작은 천국 같은 곳인데도 때로는 감옥처럼 느껴진다는게 참 신기하다. 불경한 생각이지만 천국에 가서 살 때도 가끔은 천국이 답답해 며칠이라도 지옥에 살게 해달라고 간청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죄와 유혹이 인생을 풍부하게 한다는 것은 사실이다. 고통없는 인생의 단조로움을 나는 매일 실감한다.
운동하러 가서 뜻밖의 반가운 분 만나 운동 후 넷이서 봉평메밀에서 식사. 어쩌다 화제가 스트레스 해결하는 법으로 옮겼는데 운동하고 몸을 움직이는 것이 최고의 스트레스 해결법이라는데 의견이 일치했다. 사실 별 스트레스가 없는 나는 혹시라도 무언가가 머리에 달라 붙으면 재빨리 날려버리는 신기한 비법을 터득해 나는 스스로 망각 전문가라고 칭한다. 세상에 심각한게 없고 그저 뭐든 대충 사는 싱거운 놈이라는 말을 자주 듣는 것은 그 때문이다. 無相, 無念 無住 無我는 내 인생의 깃발이다.
식사후 어떤 분과 핀오크에 가서 커피 한잔. 이 분은 요즘 작은 밭을 가구며 자연과 교감하는 것이 유일한 낙이라고 한다.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가는 인생이 사는 동안에도 흙과 친해지면 이 보다 더 본성에 가까운 삶은 없을 것이다. 깨어있다는 것은 교감하는 것이다. 이 분은 내 일기 중독자인데 내가 평범한 일상을 기적처럼 사는 신비한 마술사 같다고 해 몸둘바를 몰랐다. 쓸 것도 없는 단조로운 일상을 쓰려니 나의 문학적 상상력이 지나쳤나 하는 반성을 했다. 속지 마세요.
구자환 배오식님이 오셔 넷이서 편갈라 저녁내기 당구를 치는데 아슬아슬하게 우리편이 이겨 구형이 술 한잔 샀다. 세게 117개국을 다녔다는 구형의 여행담은 언제 들어도 즐겁다. 나더러 뉴질랜드 여행 같이 가자는데 돈없다는 핑계를 대며 거절했다.
26일
반가운 비가 내려 아침부터 술푸기 삼삼한 날이라고 친구가 전화하며 시가 둥둥 떠다닌다고 한다. 박진화 화가와 황청리에 섬이라는 카페를 연 김병화 조각가의 제자이신 조각가 김일수님과 함께 외포리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이층 횟집에서 비소리를 들으며 매운탕에 술 한잔. 술을 삼가기로 결심한지가 얻그제 같은데 이런 식언을 한 것이 부끄럽지도 않은 듯 나는 친구와 분위기가 좋아 흐물흐물해질 때까지 마셨다.
박화가가 가난한 젊은 시절, 술 마시던 얘기를 하는데 돈 1200원 밖에 없어 멸치 한봉지 소주 두병 사서 친구와 마시다 술 더 먹고 싶어 사방을 해메다 아는 집에 자리 잡고 술값 낼돈 없어 사방에 전화하던 일을 회상하며 자신이 술을 정신없이 빨리 마시는 이유는 돈없던 시절 한잔이라도 더 마시려고 서로 경쟁하듯 빨리 마시던 습관에서 생긴 것이라고 했다. 김일수님의 섬이라는 카페는 위치가 환상적이고 님의 조각품이 가득하다. 노을 보기에 이보다 더 좋은 곳은 없다. 김형과는 금방 친해졌고 김병화님이 스승이라며 고등학교 다닐 때의 여러 일화를 들으니 더욱 가까운 느낌이다.
친구의 생방송 대담을 30여분 들으며 나는 기분이 좋고 친구가 자랑스럽다. 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었지만 이웃사촌 음악감상 모임 참석하기 위해 아쉽게 자리를 떴다.
큰나무 카페 음악감상 모임. 오늘은 오페라 미스 사이공 감상이다. 15분 정도 오셨는데 어떤 분은 음악 들으며 순수한 사랑에 감동해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나는 어메리칸 드림이라는 노래의 풍자에 속이 다 시원했다. 노래와 연기를 다 잘하는 오페라 가수들은 대단하다. 여기저기 다니며 인생을 즐기기만 하는 소비형 인간!
27일
생략
28일
이웃사촌 목요산악회 상봉 산행. 언제나처럼 숲길이 환상적이며 산행벗들과의 정담이 즐겁다.
강화백북스 모임. 오늘은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 읽기. 십여분 단골들만 오셧다. 나는 잘난척하며 스토아 철학을 좀 지루하게 설명했다.
아홉명이 뒷풀이. 일산에서 송도현 사장이 오셔 늦도록 좋은 시간을 가졌다. 송형왈; 우정은 숲길과 같아 자주 왕래가 없으면 풀이 우거져 길이 없어진다. 나는 끝까지 남아 춤추는 것도 보고 사람이 좋아 어쩔줄 몰랐다.(더 쓸 얘기가 많은데 빨리 나오라는 전화가 와 여기까지. 바쁘다 바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