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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문의 영광] 26
#.1 씬. 종가 앞.(밤)
강석 : (다가서서 느슨한 단아의 목도리 여며 주면서) 기억해줄래요?
단아 : .....
강석 : 어쨌든 나도 한 때는 당신의 연인이었다는 거?
단아 : ....
강석 : 무리한 부탁이겠군요. (돌아서는데)
단아 : 기억하게 될 거예요. 전갈의 천성에 대해 얘기하던 어떤 남자가 슬퍼보여서 마음이 아팠다는 거.
강석 : (돌아서서 단아를 끌어안는) 그런 말은 하지 말아야지, 이 바보 같은 여자야.
어쩌자고 나같은 놈한테 그런 말을 해. (감정 억누르고 단아를 떼어놓는)
단아 : (슬프게 보는)
강석 : 살면서 자기가 뱉은 말의 덫에 걸릴 수도 있군. 당신을 흔들어 놓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그래서 당신 그 징그러운 사랑이 단단한 게 아니란 거 스스로 인정하게 하고 싶었는데.
어쩌면 휘청이고 있는 건, 난지도 모르겠군.
단아 : 곧 끝날 거잖아요?
강석 : (보면)
단아 : 우리 이 연극. 그래서 오늘만 살 것처럼, 할 수 있는 걸 다 해보는 거구.
강석 : (쓸쓸하게 미소 짓고) 다행이군. 이 연극, 내일은 끝나지 않을 테니.
그럼 내일도 오늘만 살 것처럼 그래 볼 수 있는 거겠군. 들어가요, 갈게요.
단아 : 가세요.
강석 : (차에 타고 떠나는)
단아 : (보고 서있는)
#.2 씬. 마루.(밤)
들어오는 단아, 영인 하품하면서 방에서 나오는.
영인 : 이제 와?
단아 : 네. 안 주무셨어요?
영인 : 아냐, 자다가 깼어. 왜 이렇게 늦어? 너무 무리하고 그러지 마.
단아 : 네, 주무세요.
영인 : 나 할 말 있는데.
#.3 씬. 단아의 방.(밤)
단아, 영인 앉아있는.
영인 : 만나봐야 알겠지만, 들은 걸로는 나쁘지 않은 거 같아.
물리학 박사 코스 들어간 사람이라고 하는데, 사람도 건실하고 부모님들도 인품이 좋으시대.
단아 : 어머니?
영인 : 응.
단아 : 저 결혼 생각 없어요.
영인 : 그러지 말고, 단아야.
단아 : 제가 누구하고 결혼을 해요? 아시잖아요? 저 결혼도 했었고.
영인 : 그게 뭐? 결혼식만 했지.....(차마 말을 못하고) 그건 서로 이해만 되면 아무 문제없는 사항이야.
단아 : 제가 문제가 돼요.
영인 : (보면)
단아 : 그 사람 가여워서, 저 잊어줄 수가 없어요. 저마저 잊으면, 그 사람 어떡해요?
영인 : 단아야. 그래, 네 마음 다는 모르겠지만, 조금은 이해가 돼.
나 수술 한 줄 알고 미역국 끓여주러 왔을 때, 내 동생인데 왔다 간 거 안다고, 알려주고 싶다고 했던 말.
그런 말 하는 너니까, 그 사람한테 갖는 마음은 얼마나 더 애틋할까, 이해는 되는데.
그래도 너, 이렇게 사는 건, 옳지 않아. 그 사람도 그건 바라지 않을 거야.
단아 : 제가 해주고 싶어요. 아무 것도 해줄 수가 없어서, 그것만이라도 해주고 싶어요.
영인 : (암담하게 보는)
#.4 씬. 석호의 방.(밤)
영인, 들어오는, 석호 자다가 일어나 앉는.
석호 : 왜 깼어?
영인 : (앉으며) 단아랑 얘기 좀 했어.
석호 : 단아, 싫다지?
영인 : 사랑이라는 거, 참 무섭다. 나도 연애라면 남 못지않게 하고 산 인간이지만.
석호 : (헛기침 하고)
영인 : (흘겨보면서) 몰랐던 얘기도 아니면서 왜 그래?
석호 : 태교에 안 좋다, 그런 말.
영인 : (배에 손 대고) 듣지 말고 자고 있어.
(석호 보면서) 난 제대로 사랑이란 걸 안 해보고 산지도 모르겠다, 그런 생각이 들어.
단아를 보면. 어린 나이에 연애다운 연애도 못해봤을 텐데, 저렇게 애절하게 그리워하는 거 보면,
저게 진짜 사랑 아닐까 그래지네.
석호 : 저 녀석한테 사랑은 의린 거 같아. 한번 맺은 인연, 어떻게든 붙잡고 가겠다는 의리.
영인 : 그래도 나 포기하지 않을 거야.
우리 단아 어떻게든 좋은사람 만나서 결혼하고 애 낳아서 알콩달콩 사는 모습 보고 말거라구.
석호 : (영인의 손을 잡고) 고맙다, 영인아.
난 에비면서도 저 녀석은 타고나길 저러니 어쩔 수 없다 포기하고 살았는데.
영인 : 하여간 이 집 식구들 은근히 이기적이야. 어떻게 10년이나 애를 저렇게 놔두니?
(누우면서) 두고 봐. 우리 단아 진짜 근사한 남자랑 결혼시키고 말테니까.
석호 : 의지에 불타는 거 보니 오늘은 코 골면서 이도 갈겠다.
영인 : 이 남자가, 나 코 안 곤다니까.
석호 : 방귀만 뀌지?
영인 : (베개로 석호 얼굴 때리는)
#.5 씬. 강석의 집 거실.(밤)
영자, 서있고, 천갑, 방문 앞에 서서.
강석 들어오는.
영자 : 왜 이렇게 늦어?
강석 : 일이 좀 있었어요.
영자 : 혜주도 방금 전에 들어왔어.
강석 : 그랬어요? 이 녀석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저희 안 들어와서 못 주무신 거예요?
천갑 : 안 들어오고 뭐해?
영자 : 그만 좀 하자니까.
천갑 : (버럭) 따고 배짱이야?
#.6 씬. 천갑의 방.(밤)
천갑, 영자, 강석 들어오는. 바닥에 화투 판 깔려져 있고.
강석 : (웃으며) 고스톱 치셨어요?
천갑 : (영자 잡아 앉히며) 빨리 돌려, 빨리.
영자 : 졸려 죽겠다, 내기 골프에선 판판이 잃고 들어오면서 왜 나한테는 못 이겨서 이 난리래?
천갑 : 내가 달리 판판이 잃고 다니냐? 지고는 못사는 성격이라 그렇지.
영자 : 나한테까지 이 악물고 덤비니까 그렇지.
천갑 : 내 이 성격 때문에 이 자식같은 아들놈이 나온 거야.
이 자식, 지고는 못사는 성격인 거 누구 닮았겠어?
강석 : (웃으며) 꼭 승리하고 주무세요, 아버지.
천갑 : 고맙다, 아들. 올라가라.
강석 : (나가는)
천갑 : (꾸벅 졸고 있는 영자 보고 버럭) 패 안 돌리고 뭐하냐?
#.7 씬. 강석의 2층 거실.(밤)
강석, 올라오면, 혜주 서있는.
강석 : 조금 전에 들어왔다면서?
혜주 : .....
강석 : 왜 이렇게 늦게 다녀? 아르바이트 늦게 끝난 거야?
혜주 : 오빠?
강석 : 응?
혜주 : 나, 차 한 대 사줘.
강석 : (보다가 미소 지으며) 웬일이냐?
혜주 : 사줄 거지?
강석 : 그럼, 누가 사달라는데, 안 사줘. 바로 빼줄게.
(혜주 어깨 잡으며) 자식, 요즘 오빠 마음에 드는 짓 자주 한다.
혜주 : (돌아서서 들어가는)
#.8 씬. 강석의 방.(밤)
강석, 들어와 핸드폰을 꺼내는.
#.9 씬. 단아의 방.(밤)
단아, 책을 보고 있으면, 메시지 수신음.
단아 : (핸드폰을 보면)
문자, 나 지금 들어왔어요. 뭐해요?
#.10 씬. 강석의 방.(밤)
강석, 메시지 수신음 듣고 핸드폰을 보면.
문자, 책 봐요.
#.11 씬. 단아의 방.(밤)
단아, 책을 보고 있으면, 다시 수신음 들리고.
단아 : (핸드폰을 보면)
문자, 이런 일상적이 것들 싱겁지만 재미있네요.
단아 : (물끄러미 문자를 들여다보다가, 진하의 사진을 꺼내고) 나 나쁘다는 거 알아. 근데 오빠. 모른 척 해줘.
아주 조금만, 조금만 더 이렇게 가보고 싶어.
#.12 씬. 강석의 방.(밤)
강석, 싸대기 보면서.
강석 : 알아, 임마. 나 이기적이고 나쁜 놈이란 거.
그런데, 그 여자랑, 딱 오늘만 살 거처럼 그래보고 싶다.
#.13 씬. 종가 전경.(낮)
태영E : 어머니, 과하신 거 아니세요?
#.14 씬. 마루.(낮)
석호, 수영, 태영, 동동, 각자 손에 청소 도구 들고 서있는.
영인, 그 앞에 서있고, 삼월, 조만, 주정, 단아 뒤에서 보고 있는.
영인 : 뭐가요?
태영 : 쉬는 날, 남자들만 청소를 하라고 하는 이 처사가요.
영인 : 난 과하다는 생각 전혀 안 드는데요. 말했잖아요, 우리 집 남자들 그동안 너무 편하게 살아왔다구.
요즘 가사분담은 기본인 거 몰라요?
석호 : 그냥 하자.
태영 : 아버지, 너무 어머니 편만 드시는 거 아니세요?
수영 : 청소만 하면 되는 건가요?
영인 : 청소 끝내고 이불 빨래도 해야 해요.
태영 : (입 벌어지고) 그동안 여자들은 뭐 하구요?
주정 : 여자들은 여자들이 알아서 놀고 있을게.
태영 : (주정 노려보면서) 신나셨어요, 할머니.
삼월 : 저기 이불 빨래까진 좀 그렇지 않나요?
영인 : 제가 알아서 할게요.
삼월 : 내가 좀 민망해서 그렇죠. 나하고 조만인 집안 일 하는 사람들인데
주중엔 회사일 하느라 고단했을 사람들한테 집안일 다 시키고 손놓고 있는 게.
만기 방에서 나오며. 외출 차림으로.
만기 : 종부가 하려는 일이니 그냥 두시구려.
석호 : 출타 하세요?
만기 : 평촌 어르신 어떠신가 좀 가보고 와야겠다.
수영 : 제가 모시고 갈게요, 할아버지.
만기 : 이기사 오라고 했으니 넌 청소나 하거라.
주정 : 수영이 너 머리 써서 빠져나가려고 한 거지?
수영 : 아니에요, 할머니.
동동 : 할아버지? 저도 따라 갈게요.
만기 : 머리 쓰지 말거라.
#.15 씬. 마루.(낮)
태영, 동동 엉덩이 들고 걸레 거의 휘두르는 기분으로 휘휘 마루 닦고 있는.
석호, 수영, 유리문도 닦고, 집기도 닦고, 바쁘다.
영인, 공기청정기 가져와 마루 일각에 놓는다.
영인 : (청정기를 켜는)
동동 : (걸레질 하며) 할머니 그게 뭐예요?
영인 : 어, 공기청정기. 겨울엔 창문도 잘 안 열고 그러니까 집안 공기가 안 좋을 거잖아.
공기 안 좋으면 기관지도 나빠지고 집중력도 떨어져서 우리 동동이 공부하기도 힘들 거 같아서.
동동 : 어차피 공부는 못하는데요 뭐. (하다 방귀 뿡 뀌는)
영인 : 어머 근데 진짜 신기하다. 방귀 뀌니까 여기 빨간색 불 들어오네. 공기 변화에 민감하다더니 정말이다.
(그러다 태영 보고) 작은 아드님?
태영 : (퉁퉁 부어서) 네.
영인 : 근데, 지금 장난하세요?
태영 : 제가 뭘요?
영인 : 일에 정성이 없잖아요, 정성이. 이런 식으로 하시면 작은 아드님은 나머지 공부 하시는 수가 있어요.
태영 : 나머지 공부라뇨?
영인 : 점심 상 혼자 차리셔야 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에요.
태영 : 아버지?
석호 : 왜?
태영 : 저 새어머님한테 너무 학대당하는 거 같지 않으세요?
석호 : 나 일 열심히 해야 하니까 말 시키지 마라.
동동 : 아빠, 점심 혼자 차리고 싶어?
#.16 씬. 단아의 방.(낮)
주정, 삼월, 조만, 단아, 떡하고 식혜 놓인 상 앞에 둘러앉아있는.
영인E : 하과장, 여기 먼지.
주정 : (킬킬거리면서) 우리 태영이 죽어난다.
삼월 : 이거야, 원 바늘방석 같아서.
주정 : 그럴 거 없어, 할멈, 조카댁이 군기 제대로 잡으려고 그러는데 편하게 놀아, 편하게.
삼월 : 어떻게 편하게 노누. 남자들이 생고생을 하고 있는데.
단아의 울리는 핸드폰.
단아 : (번호, 보고 전화 받는) 네.
강석E : 시간도 없는데 연애질 해야죠? 우리?
단아 : 저 오늘은....
강석E : 집입니까?
단아 : 네.
강석E : 웬일입니까? 박물관에 안 있고. 노는 날이라 집 앞으로 데리러 가면 식구들 눈에 띨 수 있을 테니까
집 앞 큰 길로 갈 테니 전화 하면 나와요. 1시간 쯤 걸릴 겁니다. (전화 끊기고)
단아 : (핸드폰 보는)
주정 : 학교에서 나오래?
단아 : 네? 네.
주정 : 그래, 나가, 괜히 오빠들 일하는데 눈치 보지 말구.
태영, 문 왈칵 열고 먼지 털이 휘두르면서.
태영 : 다들 나가요. 이 방도 청소해야 하니까.
태영의 기세에 다들 일어서고.
주정 : 야, 먼지나.
태영 : 그럼 청소하는데 먼지 않나요?
#.17 씬. 강석의 집 거실. (낮)
아줌마, 청소하고 있으면, 강석 내려오는.
강석 : 두 분 아직도 그러고 계세요?
아줌마 : 네, 좀 말려보세요. 사모님 죽으려고 하세요.
강석 : (미소 짓고, 천갑의 방 쪽으로 움직이는)
#.18 씬. 천갑의 방.(낮)
영자, 폐인이 된 분위기로 화투 힘없이 떨구는.
천갑, 지쳤지만, 아직도 의지에 불타고 있는 느낌으로.
강석, 문 열고 들어오는.
강석 : 몇 시간 째세요?
영자 : 몰라, 몰라. 이젠 패도 안보여.
천갑 : 광박에 피박에 멍따에, 좋아. 이제 제대로 걸렸다, 당신. 쓰....리....고.
영자 : 쓰리고를 하든 뭘 하든 제발 따기나 해.
강석 : 아직까지 아버지가 지고 계셨어요?
천갑 : 이번엔 제대로 걸렸다니까. 빨리 하지 않고 뭐하냐?
영자 : (패 툭 던지는데, 쌌다) 이게 뭐야, 나 세 번 쌌나봐.
천갑 : (확 일그러지면서) 뭐, 뭐가 이래.
영자 : 아, 아니다. 나 두 번 쌌어, 두 번.
천갑 : 지금 사람 가지고 노냐? 세 번 쌌잖아?
영자 : 그냥 나 두 번 싼 걸로 할게.
천갑 : 이 여편네가 사람 자존심을 아주 뭉개네. 자 접고, 다시 돌려.
영자 : (강석의 다리 붙잡고) 강석아, 엄마 좀 살려주라. 엄마 이러다 죽어.
강석 : 아버지, 좀 쉬었다 하세요, 어머니 이러다 정말 돌아가세요.
천갑 : 이젠 체력전이야, 빨리 안 돌리고 뭐해?
#.19 씬. 욕실.(낮)
석호, 수영, 태영, 동동 이불 빨래하고 있는. 문 앞에서 팔짱 끼고 감시하고 있는 영인.
태영, 동동, 큰 대야에 들어가서 이불 밟고 있는.
석호, 수영, 빨래판에 작은 빨래(베갯잇 등)들 문지르고 있고.
영인 : 천 다 헤지겠네, 하과장, 너무 꽉 꽉 밟지 말아요.
태영 : 그래야 때가 팍팍 빠지죠.
석호 : 야, 야 물 튀긴다.
태영 : (석호를 흘겨보는) 오늘처럼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적이 없네요.
석호 : 미안하다.
영인 : 하과장, 왜 내 남편한테 그래요?
태영 : 내가 말을 말아야지.
수영 : 저기요, 어머님?
영인 : 왜요?
수영 : (빨래 들고 영인 앞에 서서) 때 다 빠진 거 같은데. 헹궈도 될까요?
영인 : (보고, 끄덕이며) 잘 빨았네. 됐어요, 헹궈요.
수영 : (돌아서며 태영 보고) 난 통과 됐다.
태영 : 난 오늘 형의 실체를 안 거 같거든.
영인 : 큰 아드님?
수영 : 네.
영인 : 큰 아드님은 정성껏 열심히 했으니까 10분 쉬었다 해요.
수영 : 고맙습니다.
태영 : 형의 실체는 아부형 인간이었어.
수영 : 나 10분 쉰다.
#.20 씬. 길.(낮)
단아, 서있고, 강석의 차 다가오는. 이후의 씬부터 단아, 강석이 사준 목도리 할 것.
강석 : (차에서 내리는) 와서 전화 한다니까 왜 나와 있어요?
단아 : 연애할 때는 그래야 할 거 같아서요.
강석 : (웃고) 눈깔 사탕만한 다이아 하나 사줄까요?
단아 : 네?
강석 : 애인이 마음에 드는 말 하면 남자는 그러고 싶어지거든요. (차 문 열어주면)
단아 : (차에 타고)
강석 : (올라타는)
단아 : 저기요.
강석 : (보면)
단아 : 어제도 공부 빠졌는데,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찾아뵙고 공부하는 게 어떨까 싶은데요.
강석 : 그럴 정신없으세요, 우리 어머니.
단아 : 바쁘신가요?
강석 : 아버지랑 20시간 째 고스톱 치고 계시거든요.
단아 : 네?
강석 : 아마 우리 어머니 오늘 입원 하실 지도 몰라요.
단아 : (기가 막혀서) 무슨 고스톱을 스무 시간이나?
강석 : 내가 싸대기 따려고 괜히 그 난리였겠어요?
그거 유전이거든요. 우리 아버지 피 제대로 물려받은 거죠.
#.21 씬. 말순의 집.(낮)
진아, 핸드폰으로 문자 넣고 있는.
#.22 씬. 마루.(낮)
수영, 문자 확인하는.
진아E : 뭐하세요?
수영, 문자 찍는.
영인 : (커피 들고 걸어오면서) 10분 다 됐는데.
수영 : 네.
#.23 씬. 말순의 집.(낮)
진아 : (문자 보면, 이불 빨래 중이예요. 임무 완수하고 도망 나갈게요)
말순, 엉금엉금 기듯이 욕실에서 나오는.
진아 : (문자보고 미소 짓다가, 일어서서 말순 부축하며) 또 설사 했어요?
말순 : 폭포수가 따로 없다.
진아 : 그러니까 몸도 안 좋으면서 웬 술을 그렇게 드세요?
말순 : 내가 먹고 싶어, 먹었냐. 웬수 놈의 친구 자식 때문에.
진아 : 네?
말순 : 아, 있어, 그런 인간. (핸드폰 들고 버튼 누르는)
#.24 씬. 욕실(낮)
석호, 수영, 태영, 동동 빨래하고 있고, 영인 커피 마시면서 감시 중.
태영 : (핸드폰 울리자, 바지 주머니에서 얼른 꺼내 받고) 어, 민태야?
말순E : 나야, 나.
태영 : 어, 뭐야? 세상에, 어쩌다가. 저런, 저런. 그래 민태야. 내가 지금 바로 갈게.
말순E : 나라니까, 나 너 때문에 다 죽게 생겼어.
태영 : 그렇게 허망하게 돌아가시냐. 그래, 알았다, 바로 갈게. (끊는)
석호 : 무슨 일이냐?
태영 : 민태 아버님이 돌아가셨다네요.
석호 : 저런. 어쩌다?
태영 : 원래 병이 있으셨거든요, 저 지금 가봐야겠어요, 아버지.
석호 : 그래, 어서 가봐라.
태영 : 어머님, 제가 빨래 다 하고 가고 싶은데, 불가항력적인 일이 발생했네요.
영인 : 할 수 없죠 뭐. 가 봐요.
태영 : 네, 어머님. (얼른 뛰쳐나가고)
영인 : 마무리들 잘 해요. 난 감시하느라 서 있었더니 다리가 아파서 들어가서 조금 쉴 테니까.
석호 : 어, 그래, 쉬어.
영인 : (문 앞에서 사라지면)
수영 : (미소 짓고 있는)
석호 : (수영을 보면) 왜?
수영 : 민태 아버님 몇 년 전에 돌아가셨잖아요. 아버지랑 저도 문상 다녀왔잖아요?
석호 : 아. 그랬던가.
동동 : (석호, 수영 번갈아보다가) 할머니? 할머니? 아빠 뻥....
수영 : (동동 입 막으면서) 봐주자, 동동아.
#.25 씬. 길.(낮)
태영, 운전하면서, 말순의 머리 쓰다듬는.
태영 : 기특한 놈, 타이밍도 잘 맞추고.
말순 : (손 탁 쳐내면서) 너 때문에 술병 나서 설사 쫙쫙하고 나왔거든.
태영 : 넌 여자애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순 : 여자로 안 보인다면서?
태영 : 나한테는 그래도 다른 놈들 앞에선 그러지 말라는 거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말순 : 배탈 났다니까.
태영 : 다 쏟았으니까 다시 채워야지.
말순 : (히~ 웃는)
태영 : 너 그 히~는 뭐냐?
말순 : 너 보니까 갑자기 배고픈 거 같아서. 이상하네, 아까까진 아무 것도 못 먹을 거 같았는데.
태영 : 너 혹시?
말순 : 혹시 뭐?
태영 : 그거 나를 향한 불타는 욕정 아닐까?
말순 : 뭐?
태영 : 나만 보면 배탈이 났다가도 뭐가 먹고 싶어진다. 그거 불타는 네 욕정의 다른 표현 아닐까?
양기가 너무 부족다고나 할까.
말순 : 양손으로 맞고 싶니?
#.26 씬. 커피숍.(낮)
수영, 진아 앉아있는.
진아 : 정말 이불 빨래 하셨어요?
수영 : 네. 진아씨만 그런 게 아니고, 우리 새어머님도 못하고 살아본 거 다 시켜보려고 작정하셨나 봐요.
진아 : (웃고) 갑자기 인생 너무 파란만장하신 거 같아요.
수영 : 누가 아니래요. 저기, 나....
진아 : (보면)
수영 : 주부 습진 걸린 거 같아요.
진아 : (웃는)
수영 : 밥 먹었냐는 말 말고도 나 웃기는 말 잘하죠?
진아 : 장족의 발전이세요.
수영 : 실은 이거 카핀데.
진아 : 네?
수영 : 내 동생 놈이 주부 습진 걸렸다고 엄살 떨드라구요.
그래서 속으로 메모 해뒀거든요. 나중에 진아씨한테 써먹어야지 하고.
진아 : (보는)
수영 : 왜요?
진아 : 가끔 제 생각도 해주시고 그러신 거예요?
수영 : (보다가, 쑥스러워하며) 나도 자주 들키게 될 거라고 했잖아요.
#.27 씬. 극장.(낮)
강석, 표 사가지고 와서 단아 옆에 앉는.
강석 : 우선 영화 한편 때리고. 그 다음엔 점심 먹고. 노래방 가서....
단아 : 노래방은 왜 또 가요?
강석 : 그럼 어디 가요?
단아 : 목표 달성 했잖아요?
강석 : 언제요?
단아 : 저번에 친구들 모임 가서 보여줄 거 다 보여줬는데 왜 또 연습을 해야 해요?
강석 : 그건 웃겨서 받은 거구.
단아 : 저 정말 노래방 가기 싫어요.
강석 : 그럼 하고 싶은 거 뭐 있어요?
단아 : 별로 없는데.
강석 : 이 여자가 또. 우리 연애 하면서 하고 싶은 거 다 해보기로 작정한 사람들이거든요. 성의 좀 보이죠.
단아 : 지금 성의 보이고 있는 거 아닌가요?
강석 : (보는)
단아 : 왜요?
강석 : 그런 말 내 자존심 건드리는 거란 거 몰라요?
단아 : .....
강석 : 마지못해 끌려나왔다, 하는 그 투?
단아 : .....
강석 : 가끔 사람 서늘하게 만드는 그 악취미?
단아 : 미안해요, 반성 할게요.
강석 : 건드릴 거 다 건드려놓고 더 할 말 없게 만드는 저 내공.
단아 : 마지못해 끌려나온 건 아닌데.....
강석 : 아닌데?
단아 : 낯설어서 그래요.
강석 : 그렇게 만나놓고 아직도 내가 낯섭니까?
단아 : 아니요. 이런 일들이.
강석 : .....
단아 : (시선 피하면서) 해보고 싶다는 생각도 안하면서 살아와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서 노력하려고 하는데도 그쪽 성에 안차는 걸 거구.
강석 : 노력을 하긴 합니까?
단아 : .....
강석 : 근데 알아요? 그 말도 서늘하게 만든다는 거? 그냥 그렇게 되는 게 아니라, 노력을 해야 한다는 거?
단아 : ....
강석 : (일어서며) 영화 시작할 시간이에요. 들어가죠.
단아 : 고맙게 생각해요.
강석 : (내려다보면)
단아 : 살면서 한번도 꿈 꿔보지 않은 시간들, 내게 주는 거.
강석 : (그런 단아를 깊은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28 씬. 커피숍.(낮)
현규, 카운터에 엎드려 있는. 친구들 그 앞에 서서.
성민 : 아직도 안 깨냐?
현규 : (손으로 가라는 시늉만)
강하 : 얼마나 처 마셨길래, 대낮까지 이렇게 빌빌거리냐?
현규 : 제발 좀 가라. 골 울린다.
혜주, 들어오는.
성민 : 원룸도 보러 다녀야 한다면서? 원래 방은 노는 날 보러 다니는 거다.
강하 : 부모님 다음주면 떠나신다면서 살 방도 안 구하고 어쩌려구 그러냐?
현규 : 살 방 없으면 길바닥에서 자면 되지 무슨 걱정이냐. 제발 좀 가라.
성민 : 사랑 때문에 길바닥에 죽는 놈 하나 나오겠네 그려.
친구들 나가는.
현규 : (엎드려 있는데)
혜주 : (약병을 옆에 놓는)
현규 : (그 소리에 고개를 드는) 왜 나왔어요? 오늘 안 나와도 되는 날이잖아요?
혜주 : 마셔요. 속 좀 편해질 거예요.
현규 : (집어 드는데)
혜주 : 유리엔 던지지 말아요.
현규 : (보다가 피식 웃으며 약병을 따서 쭉 마시는)
혜주 : 고마워요.
현규 : (보는)
혜주 : 안 던지고 그냥 마셔줘서요. 실은 던져버릴 줄 알고 한 병 더 사왔거든요.
현규 : (갸우뚱하는 느낌으로 고개 약간 옆으로 숙이면서) 이런 거 하고 싶어요?
혜주 : .....
현규 : 매일 소리 지르고, 못되게 굴고, 딴 여자 좋다고 미쳐 날뛰면서 뒤 한번 돌아보지 않는데,
이런 게 하고 싶냐구요?
혜주 : 이런 말 하면 안 되는데.
현규 : 무슨 말이요?
혜주 : (망설이다가) 그쪽한테 마음 주기 전으로 돌아가겠다고 했잖아요.
현규 : 그런데요?
혜주 : 그런데 잘 안돼요. 그쪽이 너무 많이 아파하고, 힘들어하고,
술도 너무 많이 마시고. 길에서 잠도 들고 그러니까. 뭐라도 해주고 싶어서.
현규 : 참 그쪽 보면 속도 없어요. 난 그 여자 찾아가서 들이대기라도 하는데,
술이라도 퍼 먹고 엎어지기도 하구. 답답하지 않아요? 그렇게 사는 거?
혜주 : 많이 답답했어요. 왜 나는 이렇게 생겨먹었을까.
그런데, 그날, 벚꽃 나무 밑에서 웃고 있는 그쪽 보면서 아주 오랜만에,
아니 태어나서 처음인 것처럼 아, 봄날이다, 그랬어요.
이렇게 따스한 봄날에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 저기서 웃고 있다. 그러니까....
현규 : (보면)
혜주 : 나한테 아무렇게나 해도 되요. 내 마음 같은 거 신경 쓰지 않아도 되요.
나한테, 그런 봄날을 줬으니까 그 쪽은 나한테 뭐든 해도 되는 거예요.
현규 : ......
혜주 : 쉬어요. 내가 손님 오면 주문 받고 다 할 테니까. (돌아서는)
현규 : 내가 그쪽 오빠라도 그렇게 했을 거예요. 그 쪽 같은 동생이면. (다시 엎어지고)
혜주 : (눈물이 글썽해서 서있는)
#.29 씬. 극장 주차장.(낮)
강석, 단아 차에 오르는.
강석 : 영화도 봤으니 맛있는 거 먹으러 갑시다. 저번에 거기 괜찮죠?
단아 : 다른 데 가면 안돼요?
강석 : (보는)
#.30 씬. 분식집.(낮)
강석, 단아 앉아서 우동 먹고 있는, 앞에 김밥 놓여 있고.
강석 : 이런 게 먹고 싶었어요?
단아 : .....
강석 : 참 소박하시네요.
단아 : 해보고 싶었던 거 해보라면서요?
강석 : 그러니까 이런 게 해보고 싶었냐구요? 우동하고 김밥 먹는 거?
단아 : 여고 때, 친구 애들이 남자 친구랑 분식집에서 이런 거 먹는 거 지나가면서 우연히 본 적 있어요.
그런 모습 보면서 나도 저거 해보고 싶다 그랬어요.
오빠하고 학교 앞 분식집에서 저러고 있으면 친구 애들이 누구야, 누구야 하고 묻고.
난 부끄러워하고 그런 거.
강석 : 해보지 그랬어요? 뭐 어렵지도 않았을 거 같은데.
단아 : 해봐야지, 해봐야지, 그러다 졸업을 했어요.
강석 : 많이 자랑스러웠나보군요, 그 사람.
단아 : (보면)
강석 : 그 성격에 그런 걸 해 보고 싶었던 거 보면,
친구들한테 보여주고 싶을 만큼 자랑스러웠다는 거 아닌가?
하긴, 정현규란 애랑 많이 닮았다니 생긴 것도 멀끔했을 거구,
집 앞에서 며칠씩이나 기다리는 낭만도 있었으니 보여주고 싶을 만도 했겠네요.
소녀들 취향엔 그런 친구들이 딱이니까. 아쉬웠겠네요?
단아 : (보면)
강석 : 그래서 시화전에도 불렀던 걸 텐데, 불발로 끝나서요.
단아 : 아니요. 그날 알았으니까요. 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내가, 나도 좋다는 걸.
강석 : 인생 참 불공평하지. 누군 여고 때 자랑하고 싶은 애인도 있고 그랬는데,
누군 아버지가 학교에 그랜드 피아노 기증한 것 때문에
졸부 아들놈 어쩌고 하면서 구시렁거리는 놈들 상대로 쌈질이나 하면서 보냈으니.
단아 : (애잔한 눈길로 보는)
강석 : 왜 그렇게 봐요? 동정하는 겁니까?
단아 : 떠올려보고 있는 중이예요. 싸우고 많이 다치고 그랬을 텐데, 그때 어떡하고 있었을까.
강석 : 뭘 어떡하고 있어요.
피투성이 된 얼굴 물로 쓱쓱 닦고 내일은 더 줘 패놔야지 하고 이 악물고 일어섰지.
단아 : 학교 때 이런 분식집 누구하고 와 봤어요?
강석 : .....
단아 : .....
강석 : 우동 불겠네요, 먹어요. (고개 숙이고 우동만 먹는)
단아 : (그런 강석을 더욱 애잔한 눈길로 보는)
#.31 씬. 마루.(낮)
병도, 한약 봉지 들고 서있고, 삼월, 그 앞에.
병도 : 집에 내려갔다 오는 길인데, 할머니가 선배 주라고 한약을 지어놓으셨잖아요.
(보약 상자주면서) 선배 있죠?
삼월 : 주정이 없는데.
병도 : 어디 나갔어요?
삼월 : 누구 좀 만난다구 하고 나갔는데. (보약 보면서) 고마워서 어쩐대요.
어른들은 결혼 하는 걸로 알고 계셔서 이런 것도 지어 보내고 그러시는데, 이거 정말 미안해서.
병도 : 선배가 엉덩이 작은 것 때문에 애 잘 못 낳을까봐 걱정 되서 지으신 약이라는데.
삼월 : 아이고, 얼마나 손주를 기다리고 계시면.
병도 : 근데 누구 만나러 나간 지 모르세요?
#.32 씬. 술집.(낮)
주정, 경섭 술을 마시고 있는.
경섭 : 그땐 너 술 못 마셨는데?
주정 : 이젠 고주망태야.
경섭 : 내가 너 많이 망가뜨렸구나.
주정 : 술이 체질에 맞아서 먹는 거니까 지레 짐작하지 마.
경섭 : 너도 많이 힘들었겠지만, 그렇게 너 두고 떠난 나도 사는 게 편치는 않았다.
주정 : 결혼은?
경섭 : 몇 번 기회가 있기도 했는데, 잘 안 되드라. 그러는 너는?
주정 : 술 퍼마시다가 기회도 못 만들었어.
경섭 : 한국에 있으면 너 찾아가게 될까봐, 필리핀으로 갔다가 거기서 미국으로까지 흘러들어갔는데,
사는 게 참 쉽지 않드라. 기를 쓰고 살아보자 하면서 악착같이 돈 좀 모아 콧구멍만한 슈퍼라도 차리면
강도 들어서 총질해대는 바람에 죽다살아나고,
또 어떻게 어떻게 재기 하나보다 하면 흑인 폭동 일어나서 알거지 되고.
주정 : 지금은 뭐하는데?
경섭 : 택시 운전해.
주정 : 그렇게 사는 게 힘든데 비싼 비행기 값 들여가면서 여긴 왜 왔어?
경섭 : 피붙이 하나 없는 고아 새끼가 여기 왜 왔겠냐?
주정 : .....
경섭 : 얼마 전에 운전하다가 또 강도를 당했거든. 빗맞아서 다행히 살긴 했지만, 옆구리에 총도 맞고.
이렇게 살다 죽나 싶은 게, 허망하드라.
밑바닥으로 살다가 이렇게 갈 거, 가서 너나 한번 보자, 그런 마음으로 온 거야.
주정 : 나 봐서 뭐하게?
경섭 : 그냥. 한이나 없게 가자 그런 거겠지 뭐.
주정 : (암담한 느낌으로 술을 마시는)
#.33 씬. 레스토랑 앞.(낮)
태영, 차 세우는. 말순, 태영 차에서 내리는.
태영 : 칼질 한번 해보자.
말순 : 하태영.
태영 : (보면)
말순 : 사랑한다.
태영 : (순간 굳어지고)
말순 : 너 같은 친구 다시는 없을 거다. 진짜 진짜 사랑해.
태영 : 영화 찍냐? 하여간 얘는 뭐만 먹여준다면, 헤벌레 해선.... (하는데, 태영의 얼굴 위로)
여자E : 오빠?
태영 : (뒤를 돌아보면)
여자(1회에서 간통으로 잡혀갔던 그 여자) 길에서 화들짝하는 느낌으로 뛰어와서 태영 팔 잡고 펄쩍 펄쩍 뛰는.
여자 : 오빠? 오빠?
태영 : 어. 어, 그래.
여자 : 오빠, 진짜 어떻게 된 거야? 그때 그렇게 경찰서에서 나오고 전화 한번 안하구.
말순 : (그제야 이 여자가 누군지 알겠는)
여자 : 나 그때 진짜 콩밥 먹는 줄 알고 얼마나 쫄았는데. 할아버님 장례는 잘 치렀어?
태영 : 그, 그렇지 뭐.
여자 : (태영 마구 때리면서) 진짜 나빠 오빠. 오빠 친구, 그 왜, 전자제품 대리점 하는 이사장님 있지?
태영 : 응. 응. (계속 말순의 눈치를 보는)
말순 : (아예 시선을 돌리고 있는)
여자 : 이사장님 말 들으니까 오빠 이혼 했다면서?
태영 : 너 안 바쁘냐?
여자 : 오빠 만났는데 바쁜 게 대수야.
내가 그 얘기 듣고 얼마나 전화한 줄 알아? 근데 왜 내 전화 안받아?
태영 : 너랑 나랑 전화 할 일이 뭐가 있냐?
여자 : 오빠, 왜 이래?
태영 : 나 조금 바쁜데.
여자 : (그제야 옆에 있는 말순을 보고 기분이 상해서) 누구야?
태영 : 어, 친구.
여자 : 친구? 오빠가 무슨 여자 친구가 있어?
태영 : 나 가야하는데.
여자 : (말순 위 아래로 훑으면서) 오빠 그동안 눈 많이 낮아졌구나.
말순 : (허걱, 기가 막히고)
태영 : (말순 팔 잡고) 바빠서 난 이만.
말순 : (팔을 뿌리치는데)
여자 : 오빠, 전화 할게.
태영 : (말순 끌고 가면서) 나도 전화 번호 바꿔야 할 거 같다.
#.34 씬. 길.(낮)
수영, 앞 차문을 열어주는.
진아 : 저 앞으로 쭉 앞에 타요?
수영 : 네.
진아 : (차에 타고)
수영 : (운전석에 타고)
진아 : 이젠 아저씨 뒷머리 보면서 얘기 안 해도 되겠다.
수영 : 배에서 나는 꼬르륵 소리도 더 잘 들리겠네요.
진아 : (웃고) 우리 어디 가요?
수영 : 나 가보고 싶은 데 있는데.
진아 : 어디요?
수영 : ......
#.35 씬. 레스토랑.(낮)
말순, 깨작거리고 있는. 태영 앞에서 말순 눈치 보면서 먹는.
태영 : 이거 비싼 건데 왜 그렇게 깨작거리고 있냐?
말순 : 술병 났다니까.
태영 : 아깐 배고프다면서?
말순 : 다시 도졌다 됐냐?
태영 : 아까 걔 있지.
말순 : (보면)
태영 : 나랑 별 사이 아니야. 별 사이였으면, 이혼하고 나서 바로 만났겠지.
말순 : 남자라는 인간들은 참 편리하기도 하지. 별 사이 아닌 여자와 그 짓거리도 잘 하고.
태영 : 그, 그건. 그래 나 발정난 개다, 됐냐? 발정난 개로 산 놈이라구.
말순 : 그런 말 나한테 왜 하는데?
태영 : (멍하니 보다가) 모르겠다. 왜 너한테 신경이 쓰이는지.
왜 걔 만난 게 이렇게 쪽팔리고 미치겠는지.
말순 : (이게 무슨 뜻일까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보는)
태영 : 아, 몰라, 몰라. 나란 놈은 되는 게 없는 놈이니까.
뒤로 넘어져도 콧등이 깨지는 우라지게 재수 없는 놈이니까.
너 맛난 거 먹이고 싶어서, 맘먹고 근사한데 찾아왔는데
하필이면 이 앞에서 예전에 지저분하게 살 때 엮였던 애랑 부딪치질 않나.
말순 : 지금은?
태영 : (보고) 뭐?
말순 : 예전엔 지저분하게 살았는데, 지금은 어떤 거냐구?
태영 : (가라앉는 느낌으로) 그냥 그랬다. 태어나면서부터, 나랑 우리 형, 경찰서에서 봤지, 우리 형?
말순 : 응.
태영 : 10분 차이 쌍둥이인데, 달라도 어떻게 그렇게 다를 수 있는지.
살면서 내가 제일 많이 들은 말이 뭔지 아냐?
말순 : .....
태영 : 형 반만큼만 해라. 이골 나게 들었다, 그 말.
난 한다고 하는데, 아무리 기를 써도 형 반만큼 못 하겠드라.
말순 : (애잔해지고)
태영 : 살면서 쭉 그 생각만 한 거 같다. 어디 들이받을 때 없나.
그러다 와이프 만났고, 왠지 이 세상에 딱 하나 내 편이 생긴 거 같아서 믿음직스럽드라.
아, 이 여잔 내가 무슨 짓을 해도 다 이해하고 받아주겠지.
그래서 치댄답시고, 지저분한 짓 열나 하면서 살게 됐고.
오늘 네 앞에서까지 이 쪽을 팔고 있는 거다.
말순 : .....
태영 : (무안해져서) 아냐, 아냐, 이거 다 변명이야. 잘나고 반듯한 형에 치여서 막 살았다,
사내새끼가 이런 변명 늘어놓고 있는 게 더 쪽팔린 건데.
말순 : 왜 대답 안 해?
태영 : (보면)
말순 : 지금은 어떤 거냐니까?
태영 : 기운이 없어서 지저분하게 살고 싶어도 못하겠다. 그것도 치댈 때가 있어야 하는 짓이었나 봐.
말순 : (고기 포크로 찍으면서) 너 결혼하지 마라.
태영 : (보면)
말순 : 아니, 재혼인가. 치댈 때 생기면 또 옛날로 돌아갈지 모르잖아.
그니까 결혼인지, 재혼인지, 다시 하지 말고 그냥 살아.
태영 : 네가 그렇게 말하지 않아도 그럴 작정이다.
나란 놈, 비빌 언덕 생기면 뭔 짓을 할지 몰라서 그냥 이대로 살다 죽을까 그런다.
말순 : (고기 먹으면서 고개 숙인 채) 쭉 친구는 해줄게.
태영 : (보면)
말순 : (고개 들고) 혼자 살려면 외로울 거 아냐? 그럼 친구라도 있어야 할 거 아니냐구?
태영 : 넌?
말순 : 나 뭐?
태영 : 내 친구 해주면서 쭉 혼자 살래?
말순 : .....
태영 : 네 남편이 나 같은 친구 놈 좋다고 하겠냐구?
말순 : 아, 그럼 나도 혼자 살지 뭐.
태영 : 그게 되겠냐? 장동건 닮은 형사한테 몸 비비 틀면서 교태까지 부리는데?
너 그거 시집가고 싶어서 몸살 난 제스처거든.
말순 : 너 그거 질투지?
태영 : (놀라서 보는) 질투는 얼어 죽을.
말순 : 장기가 그러던데, 너 그거 질투 같다구?
태영 : 내가 너 여자로 보는 날까지만 살아라. 그럼 세계 최장수 할머니 될 수 있을 거다.
#.36 씬. 야외 장소.(낮)
벌판, 수영, 진아 서있는.
진아 : 크지 않은 고아원이었는데 몇 년 전에 없어졌어요.
보고 싶은 보모 선생님이 계셔서 3년 전인가 연말에 선물 사가지고 찾아왔었는데,
이렇게 돼 있더라구요.
수영 : .....
진아 : 그런데 왜 여기가 와보고 싶으셨어요?
수영 : 진아씨, 자란 곳이니까요. 날 괜찮은 사람으로 느끼게 해주는 귀한 사람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니까.
진아 : (눈물이 글썽해서 보는) 아저씨?
수영 : (보면)
진아 : (옆으로 다가와 조심스럽게 수영의 손을 잡는)
수영 : (멈칫 했다가, 진아의 손을 잡는)
진아 : 그날 경찰서 앞에서, 왜 그렇게 비참했던 날 아저씨를 만났는지 이제는 알 거 같아요.
수영 : .....
진아 : 걸지 말았어야 할 내 마음이 아까워서 왜 그렇게 안타까웠는지, 이제는 알 거 같아요.
만나야 할 사람을 못 만나서였다는 거.
(옆으로 고개 돌려 수영을 보면서) 그리고 그 사람이 아저씨여서 너무 다행이라는 거.
수영 : (보다가) 다른 건 약속 못해요.
하지만 살면서 여자 손 잡는 건, 진아씨 뿐일 거란 거. 그거 하나는 약속할게요.
진아 : (천천히 수영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벌판을 바라보는)
수영 : ......
#.37 씬. 커피숍. (낮)
강석, 단아 차를 마시고 있는.
강석 : 그리고.
단아 : (보면)
강석 : 선 볼 겁니까?
단아 : .....
강석 : 그쪽 새어머님께서 근사한 놈으로 붙여줄 작정이신가보던데?
단아 : 어떻게 아세요?
강석 : 진행 중인 건 맞나보군.
단아 : (보면)
강석 : 어떻게 안 건 중요한 게 아니고, 볼 거냐구요?
단아 : ......
강석 : 그런데 나가면 죽는 수가 있습니다.
단아 : (어이없고)
강석 : 봤죠? 애인이 선본다고 하면 이 정도는 해줘야 분위기 팍 잡히는 거?
단아 : 분위기 잡으실 거 없어요. 안 볼 거니까.
강석 : 그건 알고 있었어요.
단아 : ....
강석 : 나 같은 놈이 흔들어대는데도 까딱 않는 여잔데 선보러 나가라고 한다고 나가겠어요.
이것도 해보고 싶었거든요. 딴 놈 만나면 너 죽는다, 그런 말.
단아 : 진짜 해보고 싶은 거 참 다양하세요. 그런 생각 안하고 살아왔다면서.
강석 : 원래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하잖아요. 말 참 잘 듣네요?
단아 : (보면)
강석 : 이 안 좀 더운 편인데, 그 목도리 계속 하고 있는 거.
단아 : 약속 한 거잖아요.
강석 : 약속만 하면 꼭 지킵니까?
단아 : .....
강석 : 하긴, 그래서 한번 같이 가기로 한 그 사람도 못 잊는 거겠지. 나갑시다. 또 뭔가 해봐야죠.
#.38 씬. 한강변. (낮)
강석, 단아, 이인용 자전거를 타고 있는.
단아 : 이러다 저 올림픽에 출전하겠어요. 체력 훈련 잘 받아서.
강석 : (웃으면서) 꼭 금메달 따와요.
#.39 씬. 동네 길.(낮)
운전하는 태영, 그 옆에 말순.
말순 : 나 슈퍼 앞에 좀 세워줘.
태영 : 뭐 살 거 있냐?
말순 : 커피 없어.
태영 : 혹시 너 또 나 네 집으로 끌어 들이려구?
말순 : 매 열심히도 번다.
슈퍼 앞에 차를 세우고. 태영, 말순 차에서 내리는.
태영 : 커피 없는 줄도 모르고 잘 살았으면서 갑자기 커피 산다니까 하는 말이잖아.
내가 집에 올 걸 대비해서 아니겠냐 그거지.
말순 : 커피 물에 빠져죽고 싶냐?
걸어오는 장기, 목욕 가방 들고.
장기 : (다가서며) 제 짐작이 틀림없었네요. 일요일에도 데이트를 하시는 거 보니.
말순 : (동시에) 데이트는.
태영 : (동시에) 데이트는.
장기 : 궁합도 잘 맞으시고.
하는데, 동동이 슈퍼에서 나오는.
동동 : 아빠?
태영 : 어, 어, 동동아?
말순 : (태영과 동동이를 번갈아 보는)
태영 : 왜 여기까지 왔어?
동동 : 게임기 건전지 떨어져서 건전지 사러왔어. 우리 동네 슈퍼엔 다 팔렸다고 해서.
태영 : 어, 어, 그랬어.
동동 : (말순 보는)
태영 : 어, 동동아. 아빠 친구. (말순에게) 내 아들이야.
장기 : 아이고, 아드님이 아주 귀엽게 생기셨네요.
태영 : (멋쩍고)
동동 : 여자하고 남자가 친구가 어딨어?
태영 : 왜 없어. 아빠 친군데.
동동 : 아빠가 여자하고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면서?
태영 : 아빠도 그런 줄 알았는데, 이 아줌마하곤 진짜 친구야.
동동 : 아빠? 또 바람 펴?
태영 : 이 자식은. (쥐어박지도 못하고, 말순 앞에서 무안하고 왠지 답답하기도 하고,
아들까지 있다는 현실에 암담한 느낌도 들고) 인사해.
동동 : 바람 피는 거 아냐?
태영 : 아니야, 임마. 인사나 하라니까.
동동 : 안녕하세요?
말순 : 어, 그래. 안녕.
태영 : 나 얘 데리고 가야 할 거 같은데.
말순 : 그, 그래. 가봐.
태영, 동동이 데리고 걸어가려는데.
말순 : 동동이라고 했지?
동동, 태영 돌아보는.
동동 : 네, 하동동이예요.
말순 : 이름.....너무 귀엽다. (동동이를 보는 심정이 복잡하다) 또 보자.
동동 : 안녕히 가세요. (인사하고 태영 따라서 차에 타는)
태영 : (슈퍼 앞에 서있는 말순을 보면서 착잡한 느낌이고. 동동에게) 안전벨트.
동동 : (안전벨트 매는)
그러는 사이에도 말순은 슈퍼 앞에 서서 보고 있고.
태영 : (차 출발 시키면서. 쓸쓸한 느낌으로 동동의 머리를 쓰다듬는)
동동 : 아빠, 진짜 바람 피는 거 아니지?
태영 : (힘없이) 아니라니까.
서있는 말순과 장기.
장기 : 아들까지 있으시네요, 저 양반. 안되겠어요, 선배. 저 양반은.
아들 입에서 바람피는 거냔 소리나 나오게 하고.
바람 피냐는 소리 하는 거 보니, 그럼 와이프도 있는 거잖아요?
말순 : .....
#.40 씬. 만기의 방.(낮)
만기, 주정을 보는.
주정 : 제 몫으로 된 고향 땅 있잖아요? 그거 팔아 달라구요.
그것도 담보 잡혀 있어요? 담보 잡혔어도 팔수는 있는 거잖아요.
만기 : 네 이름으로 된 땅은 담보 넣지 않았다.
주정 : 그럼 가격만 내려 내놓으면 팔리겠네요. 싸게라도 팔아주세요.
아님, 문서 주시면 제가 알아서 처분 할게요.
만기 : 그걸 뭐에 쓰게?
주정 : 그냥 좀 쓸데가 있어서 그래요.
만기 : 큰 돈은 되지 않겠지만, 아버님께서 네 이름으로 된 땅을 남겨주시고 싶으셔서 장만해두신 거다.
주정 : 그러니까 알아서 잘 쓰겠다구요.
만기 : 뭐에 쓸지는 알아야 하지 않겠냐?
주정 : 저 마흔 넘었어요. 어쨌든 저한테 남겨진 유산이고,
처분해서 제가 쓰고 싶은 데 쓸 나이 정도는 된 거잖아요?
만기 : 그건 그냥 땅이 아니다. 아버님이 널 얼마나 귀히 여기셨는지를 보여주는 증거 같은 땅이다.
종택 중에서 가장 양지바르고, 수확도 가장 실하고.
주정 : 땅은 땅일 뿐이에요.
만기 : 주정아?
주정 : 팔아주세요, 오빠.
만기 : 대체 뭐에 쓰려는 건지는 얘길 해야 하지 않겠냐?
주정 : 그냥 좀 팔아 주시라구요, 오빠. (일어나서 나가는)
만기 : (왜 저럴까 암담한)
#.41 씬. 마루.(낮)
주정, 방에서 나오는, 삼월 찻상 들고 서있는.
삼월 : 왜 그래?
주정 : 할멈, 엿듣는 버릇없잖아?
삼월 : 찻상 들이려다가 그냥 듣게 됐어.
주정 : 모른 척해.
#.42 씬. 만기의 방.(낮)
만기, 앉아있고, 그 앞에 삼월 찻상 놓고 앉아있는.
삼월 : 생전 돈 얘기 안하던 사람이 무슨 일일까요?
만기 : (근심스럽고)
#.43 씬. 목욕탕.(낮)
태영, 동동의 등을 닦아주고 있는.
동동 : 나 목욕 했는데.
태영 : (등만 미는)
동동 : 집에 가서 게임해야 하는데.
태영 : 동동아?
동동 : 응.
태영 : 내 아들 동동아?
동동 : 왜?
태영 : 넌 임마, 이 아빠처럼 살면 안돼. 알았지?
동동 : 그러려고 해.
태영 : 우리 아들 어느새 많이 컸다. 동동아?
동동 : 왜 또?
태영 : 아빠, 너 크는 것만 지켜보면서 살 거야. 바람 같은 거 안 피고.
동동 : 엄마가 그랬어. 아빠, 이제 이혼 한 거니까, 여자 만나는 건 바람 피는 게 아니고, 연애하는 거라구.
태영 : 아빠, 연애 같은 것도 안 해. 그냥 이렇게 너랑 둘이서만 살 거야.
동동 : 우리가 왜 둘이야, 식구가 얼마나 많은데.
태영 : 그래, 둘이 아니구나. 우리 식구들이랑 이렇게 살 거다, 아빠는.
동동 : 알았어, 빨리 하고 가자.
태영 : (쓸쓸한 느낌으로 동동의 등을 어루만지는)
#.44 씬. 말순의 집(낮)
말순, 커피를 타서 앉는. 태영이 동동을 내 아들이야 했던 모습이 스치고.
말순 : 아들까지 있었구나, 하태영.
아들까지 있으면서, 왜 그러고 살았니? 너 혼자 애를 어떻게 키우려구.
#.45 씬. 한강변.(석양 무렵)
강석, 단아 앉아있는.
강석 : 아무 것도 안하고 연인이랑 해 지는 걸 보는 게 이런 느낌이군요.
단아 : (보면)
강석 : 살면서 해가 뜨는지, 해가 지는지 별 관심 없었습니다.
날이 밝으니 해가 뜨고, 날이 지니 해가 지겠거니 그랬습니다.
그런 걸 멍청하게 지켜보고 있는 인간들이 참 한심하다 그랬구요.
저 인간들은 참 시간도 많구나, 할 일이 저렇게 없나. 그런데 이게 해볼만한 일이었군요.
단아 : 살면서 가끔 노을이 지는 걸 보면서, 다행이다 그랬어요. 오늘도 하루가 흘러가줬구나.
강석 : 왜 울지 않습니까?
단아 : (보면)
강석 : 그 사람 얘기 할 때. 꼭 울 거 같은 얼굴을 하고서도 절대 울지 않더군요.
단아 : .....
강석 : 너무 많이 울어섭니까? 그 사람 떠났을 때, 너무 많이 울어서 더 울 게 없는 겁니까?
단아 : 못 울었어요.
강석 : (보면)
단아 : 그 사람 가고 한 달 만에 깨어났으니까요.
강석 : .....
단아 : 사람들이 그 사람이 갔다고 하는데, 믿기지 않아서 못 울었고,
나중엔 믿어지니까, 정말 간 거구나, 믿어져서 울어지지 않았어요.
증조 할아버님 위독하시다는 소식 듣고 공항으로 가서 그쪽에게 비행기 표 좀 양보해달라고 했던 그날.
비행기 못타고 항구를 헤매고 뛰어다녔어요. 비를 맞으면서 뛰어다니는데도 추운 줄도 몰랐어요.
그러다 큰 오빠한테 할아버님 돌아가셨다는 소식 전화로 듣고 주저앉아서 울었어요.
마음속으로.....할아버지, 고맙습니다. 이렇게 마음 놓고 울게 해주셔서.
그 사람 갔을 때, 차마 소리 내 울지 못한 거 지금 다 울게요, 할아버지 그러면서.....
강석 : 그쪽 사진 왜 가지고 왔는지 압니까?
단아 : .....
강석 : 장례식 때, 손으로 입을 가리고 서럽게 우는 그쪽 보면서
진짜 증조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게 정말 저토록 서러운 일일까 의아했어요.
나하고 정말 다르게 살아온 인간이 저기 있구나, 그런 느낌이었던 거 같습니다.
그러다 어린 시절의 사진을 봤습니다. 해맑게 웃고 있는 어린 여자 아이의 사진.
이렇게 티 없이 해맑게 웃는 여자 아이가, 아까 서럽게 울던 그 여자였나,
그 묘한 느낌 때문에 가져오게 된 거 같아요.
단아 : 해가 지는 게 참 빠르네요. 어느새 밤이에요.
강석 : (쓸쓸하게 강을 보면서) 이제 가끔 이유도 없이 해가 지는 걸 보게 될 거 같아요.
한 때는 나의 연인이었던 여자와 나란히 앉아 해 지는 걸 봤었는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단아 : .....
#.46 씬. 커피숍.(밤)
여자 아이 큰 소리로 울고 있는. 그 옆에 엄마와 아빠 안절부절하는 모습으로,
현규 난감한 표정으로 서있는.
엄마 : 딸기 아이스크림이 없다는데 어떡해.
현규 : 미안해, 꼬마야.
엄마 : 그냥 다른 거 먹자. (메뉴판 보여주면서) 여기 맛있는 거 많잖아?
뒤에 서있는 혜주,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있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혜주의 귀에는 유독 크게 들리는.
혜주 : (끝내는 귀를 막아버리는)
엄마 : 파르페 먹자, 파르페, 파르페도 좋아하잖아.
현규 : 저기, 저 앞 아이스크림 가게엔 딸기 아이스크림이 있을지 모르는데, 거기로 가보시는 게 어떨까요?
엄마 : 미안해요. 가, 여보.
아빠 : (아이 안아 올리면서) 웬 고집이 이렇게 센지.
엄마 : 우리가 너무 응석을 받아줘서 애가 더 떼장이가 되나봐.
우는 아이를 안고 나가는 아빠와 엄마. 그 사이에도 아이는 연신 울어대고.
엄마 : 딸기 아이스크림 먹으러 간다니까, 그만 좀 울어.
현규 : 자식, 무섭게 울어대네. (하면서 돌아서는데)
혜주 : (귀를 막고 서서 겁에 질려 눈을 꼭 감고 있는)
현규 : (당황해서 다가서며) 왜 그래요?
혜주 : .....
현규 : (혜주 어깨 잡고 흔들면서) 왜 그래요?
혜주 : (겨우 귀에서 손을 내리는데, 눈에 눈물이 가득하다)
현규 : (얜 대체 왜 이럴까 하는 표정으로 보는)
혜주 : .....
#.47 씬. 말순의 집 앞 길.(밤)
수영의 차에서 내리는 수영과 진아.
수영 : 들어가요.
진아 : 아저씨?
수영 : (보면)
진아 : 다음에요. 저 다음에 태어나면, 아저씨랑 똑같은 나이로 태어날 거예요.
수영 : .....
진아 : 가세요.
#.48 씬. 한강변.(밤)
차에 앉아있는 강석과 단아.
강석 : 또 해보고 싶은 게 있는데 들어줄 겁니까?
단아 : 한강에서 수영해보고 싶다는 것만 아니면요.
강석 : (웃고) 그건 아닙니다.
단아 : (보면)
강석 : 해 뜨는 거 같이 봐줄 수 있습니까?
단아 : .....
강석 : 밤새 여기서 이러고 얘기하다가 해 뜨는 거 보고 싶은데.
단아 : ....
강석 : (보면)
단아 : (보다가 핸드폰 꺼내 버튼 누르는) 할머니? 저예요. 오늘 학교에서 일이 있어서 못 들어갈 거 같아요.
걱정하지 마시고 주무세요. 네. 네. (핸드폰 끊는)
강석 : 왜 이렇게 나한테 너그러운 겁니까?
단아 : (시선 돌려서 차 창 밖을 보며) 오늘 하루만 살지도 모를 내 연인이니까요.
그런 두 사람의 모습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