國朝人物考續六
조태래(趙泰來) 묘갈명(墓碣銘) - 권상하(權尙夏)
공(公)의 휘(諱)는 태래(泰來)이고 자(字)는 백휴(伯休)이다. 한양 조씨(漢陽趙氏)는 고려 때 판중추원사(判中樞院事)를 지낸 조잠(趙岑)을 상조(上祖)로 삼는다. 문강공(文剛公) 조말생(趙末生)에 이르러 우리 세종(世宗)을 섬겨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을 지냈으며, 이로부터 고관(高官)을 대대로 배출하였다. 증조(曾祖)는 조존성(趙存性)인데 지돈녕부사(知敦寧府事)로 시호(諡號)는 소민(昭敏)이다.
조고(祖考)는 조계원(趙啓遠)인데 판서(判書)로 시호(諡號)는 충정(忠靖)이다. 위의 두 대(代)는 모두 영의정(領議政)에 추증(追贈)되었다. 선고(先考)는 조희석(趙禧錫)인데 군수(郡守)를 지내고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선비(先妣)는 수원 백씨(水原白氏)로 휴암공(休菴公) 백인걸(白仁傑)의 현손(玄孫)이자 군수(郡守) 백홍일(白弘一)의 딸이다.
공은 숭정(崇禎) 경진년(庚辰年, 1640, 인조 18) 정월 7일에 태어났다. 어려서는 충정공(忠靖公, 할아버지 조계원을 말함)에게 수학하였는데, 여러 번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합격하지 못하였으며, 부친을 여의자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았다. 경신년(庚申年, 1680, 숙종 6)에 처음으로 벼슬하여 선공감 감역(繕工監監役)에 제수되었으며, 겨울에 혼전 도감(魂殿都監)을 감독한 공로로 장원서 별제(掌苑署別提)에 승진되었다.
그 이후로 역임한 벼슬은 내직(內職)으로는 장악원 주부(掌樂院主簿)ㆍ평시서 영(平市署令)ㆍ의빈부 도사(儀賓府都事)와 인의 겸 참군(引儀兼參軍)ㆍ오위 조사장(五衛曹司將)ㆍ중추원 첨지(中樞院僉知)ㆍ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을 지냈고, 외직(外職)으로는 용인 현령(龍仁縣令)ㆍ합천 군수(陜川郡守)ㆍ무주 부사(茂朱府使)ㆍ원주 목사(原州牧使)를 지냈으며, 관직이 내려졌으나 부임하지 않은 것은 평양 서윤(平壤庶尹)과 공주 목사(公州牧使)였다.
공은 을유년(乙酉年, 1705, 숙종 31) 10월 26일에 집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목천(木川) 납안리(納安里) 자좌 오향(子坐午向)의 묏자리에 장사지냈다. 뒤에 아들이 귀하게 되어 이조 참판 겸 지의금부사(吏曹參判兼知義禁府事)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管都摠管)에 추증되었다.
공은 일찍 엄친(嚴親, 아버지)를 여의고 자친(慈親, 어머니)을 받듦에 있어 효성을 다하였고 아우와 매씨(妹氏)들과 우애하였으며, 아들들을 매우 엄격하게 가르치어 앉고 일어서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을 명령하지 않으면 감히 마음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남의 곤궁한 처지를 구제해주는 일에는 마치 미치지 못할 듯이 하였다. 남의 과실을 보면 용납하지 아니하여 비록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 가운데서도 용서해주지 않았으므로 이 때문에 세상 사람들과 거슬림이 많았다. 고을을 다스릴 때에는 간사하고 호강(豪强)한 자들을 엄중히 단속하고, 마음을 다하여 정사를 보살피어 부임하는 곳마다 많은 폐단을 모두 제거하였으며, 부고(府庫)가 충실(充實)하여 치적(治績)이 항상 남보다 앞섰다.
통정 대부(通政大夫)로 승진한 것은 실로 합천(陜川) 고을에 있을 때에 포상을 받은 때문이었다. 기사년(己巳年, 1689, 숙종 15)에 충정공(忠貞公) 오두인(吳斗寅)의 상소(上疏)에 참여하였다가 간당(奸黨)에게 미움을 받아 은미(隱微)한 글로 모함하여 논죄(論罪)받고 유배를 당하니, 사람들이 모두 애석하게 여기었다. 공은 정사를 다스릴 때에 위엄이 사랑보다 지나쳤다. 이 때문에 비방이 먼저 일어나 그 재능을 다 펴보지 못하였으니 개탄스러운 노릇이다.
공의 배필은 해평 윤씨(海平尹氏)로 참찬(參贊) 윤계(尹堦)의 딸인데 공순 온화하고 유순하여 부도(婦道)가 모두 마땅하였다. 찬성공(贊成公, 아버지 조희석을 말함)이 일찍이 이르기를, “우리 며느리처럼 덕이 있고서 복을 누리지 못하는 자가 어찌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부인은 공과 같은 해에 태어났고 공보다 8년 먼저 세상을 떠났다. 공과 무덤을 함께 하였으며 공의 관작에 따라 추증되었다.
2남을 두었는데, 장남 조행빈(趙行彬)은 부솔(副率)이고 차남 조도빈(趙道彬)은 감사(監司)이다. 부솔(副率)은 딸이 한 명 있는데 신사적(申思迪)에게 출가하였으며, 서자(庶子)인 조영무(趙榮茂)가 있다. 감사(監司)의 아들은 조영보(趙榮普)와 조영증(趙榮曾)과 조영로(趙榮魯)인데, 조영증은 큰집에 양자(養子)로 들어갔으며 딸은 송징리(宋徵履)에게 출가하였다.
나의 선친(先親)께서 찬성공(贊成公, 조희석을 말함)과 교분이 매우 돈독하였으므로 나도 또한 공과 더불어 세의(世誼)를 맺어 변하지 않았다. 지금 감사공(監司公, 차남 정도빈을 말함)이 나에게 묘문(墓文)을 부탁한 것은 진실로 이 때문이다. 마침내 명(銘)을 지었는데 명은 다음과 같다.
혁혁한 가문(家門)에 뛰어난 재능을 갖추었고,
일심(一心)으로 나랏일에 봉사하였는데 일은 제대로 수행하였으나 비방이 일어났네.
어찌하여 풍부한 재주를 타고나서 벼슬길이 이렇게 막혔단 말인가?
황파(黃巴, 황사(黃蛇)의 뜻으로 기사년(己巳年)을 말함)의 상소문은 나의 명문(銘文)이 부끄럽지 않네.
---------------------------------------------------------------------------------------------------------------------------------------------------------
[原文]
趙泰來 墓碣銘[權尙夏]
[公諱泰來, 字伯休。 漢陽之趙, 以高麗判中樞院事岑爲上祖。 至文剛公末生, 事我世宗, 官兵曹判書、大提學。 自是簪組代承。 曾祖諱存性, 知敦寧, 諡昭敏: 祖諱啓遠, 判書, 諡忠靖, 兩世俱贈領議政。 考諱禧錫, 郡守, 贈左贊成。 妣水原白氏, 休菴公仁傑之玄孫, 郡守弘一女也。
公以崇禎庚辰正月初七日生。 幼受學於忠靖公, 屢擧不中, 旣孤不復就公車。 庚申, 筮仕, 拜繕工監役。 冬, 以魂殿都監監董勞, 陞掌苑別提。 自此所歷, 內則掌樂主簿、平市令、儀賓都事、引儀兼參軍、五衛曹司將、中樞僉知、敦寧都正, 外則龍仁縣令、陜川郡守、茂朱府使、原州牧使。 其不赴者, 平壤庶尹、公州牧使也。 以乙酉十月廿六日, 考終于第, 葬於木川納安里負坎原。 後以子貴, 贈吏曹參判、兼金吾摠府。
公早違嚴顔, 奉慈氏竭其誠, 與弟妹友。 敎諸子甚嚴, 坐起言動, 不命不敢。 至於急人之困, 如恐不及。 見人過失, 不能容, 雖於稠廣之中無所饒, 以故與世多抹摋。 若其治邑, 則嚴束奸强, 竭心脩擧, 所在衆瘼悉祛, 府庫充羨, 治行輒居人先。 其陞通政, 實以陜邑時褒典,
而己巳參吳忠貞公斗寅疏, 爲奸黨所嫉, 中之以微文, 至於論配, 人皆嗟惜。 蓋公爲政, 雪霜過於雨露, 以致謗訕先行, 不克展布, 其才具可慨也已。
公配海平尹氏, 參贊堦女。 恭和柔順, 婦道咸宜, 贊成公嘗曰: “豈有德如吾婦而不福者乎?” 生與公同年, 歿先公八年, 與公同塋, 從贈視公爵。 二子: 行彬, 副率; 道彬, 監司。 副率一女, 適申思迪。 庶男榮茂。 監司男榮普、榮曾、榮魯, 榮曾爲長房後。 女適宋徵履。
余先子與贊成公交誼深篤, 故余與公亦世講不替。 今監司公之托以墓文, 有以也。 遂爲之銘。 銘曰:
爀爀華胄, 恢恢利器。 一心官政, 事修謗起。 何才之富, 何世之隘? 黃巴一疏, 銘筆不愧。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