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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혜은사부설직지불교대학 원문보기 글쓴이: 진여
2013년 직지불교대학1기 아나율조 제3차 성지순례
직지불교대학 아나율조에서는 아래와 같이 성지순례를 계획하고,
순례길에 함께할 도반님을 찾습니다.
동참하실 법우님께서는 댓글이나 또는 전화(010-9577-2854 오병관)로
신청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선착순 25명)
아나율조장 진여 오병관 합장삼배 ()()()
-------------- 아 래 -------------------
순 례 지 : 사자산 적멸보궁 법흥사, 태백산 적멸보궁 정암사, 봉황산 부석사
일 시 : 2013년 10월 27일 (일요일) 06시 출발 ~ 21시 도착
출발장소 : 청주 상당공원 옆 (상공회의소 뒤 복개도로 주차장)
참 가 비 : 30,000원
주소 : 강원도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 422-1번지, 종무소 : 033-374-9117~8, 팩스 : 033-374-9176
사자산 법흥사는 신라의 고승 자장율사가 나라의 흥륭과 백성의 편안함을 도모하기위해 643년 신라 선덕여왕 12년에 사자산 연화봉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고 흥녕사(興寧寺)로 창건했다. 중국 선종의 중흥조인 마조도일 선사로부터 선(禪)을 전수받았던 신라의 선승 도윤칠감국사의 제자 징효절중(澄曉折中)이 886년 이곳에 선문을 여니 이것이 바로 라말여초 구산선문 중 하나였던 사자산문(獅子山門)이다.
1163년 고려 의종 때 다시 중창하였으며, 1730년 조선 영조 6년, 1778년 조선 정조2년, 1845년 조선 헌종 11년까지 역사의 부침속에서도 소실과 중창을 반복하며 그 맥을 이어왔다. 그 후 폐사지에 가까웠던 흥녕사가 1902년 대원각스님에 의해 법흥사로 개칭되고 재건되었다. 1912년 또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던 것을 1933년 지금의 터로 적멸보궁을 이전 중수하였다. 1991년 삼보스님이 적멸보궁을 다시 증축하였고 1999년 도완스님때에 이르러 법흥사 전모를 혁신하는 불사를 진행하고 있다.
현재 법흥사의 유적으로는 옛 흥녕선원의 위세를 짐작하게 하는 3개의 석탑과 1개의 수호석불좌상, 자장율사가 수도하던 토굴, 적멸보궁, 사리탑(강원도 유형 문화재 73호),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보물 612호), 징효대사 부도(강원도 유형문화재 72호), 흥녕선원지(강원도 지정 기념물 6호)가 있고 종이가 없던 시절 인도 영라수 잎에 범어로 기록한 패엽경 등의 소중한 삼보종재가 남아있다. 법흥사 주변에는 금강송림으로 우거져있으며 천연기념물 제242호인 까막딱다구리가 서식한다.
[적멸보궁] 태백산 정암사
소재지:강원도 정선군 고한읍 고한15리214-1번지. 종무소:TEL 033-591-2469. FAX 033-591-2333
대한 불교조계종 제4교구 본사인 월정사(月精寺)의 말사. 자장(慈藏)이 636년(선덕여왕 5)에 당(唐)나라에 들어가 문수도량(文殊道場)인 산시성[山西省] 운제사(雲際寺)에서 21일 동안 치성을 올려 문수보살을 친견(親見)하고, 석가의 신보(神寶)를 얻어 귀국한 후 전국 각지 5곳에 이를 나누어 모셨는데, 그 중 한 곳이 이 절이었다고 한다. 신보는 석가의 정골사리(頂骨舍利)와 가사·염주 등인데, 지금도 사찰 뒷편 함백산에 남아 있는 보물 제410호인 수마노탑(水瑪瑙塔)에 봉안되어 있다고 하여, 법당에는 따로 불상을 모시지 않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이 절은 1713년(숙종 39) 중수했는데 낙뢰로 부서져 6년 뒤 중건하였고, 최근에 새로 두세 차례 중건하였다. 이 사찰에는 천연기념물 제73호인 정암사의 열목어서식지(熱目魚捿息地)도 있다.
<정암사와 자장스님>
세연(世緣)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안 자장울사는 강릉에 수다사를 세우고 그곳에 주석하면서 마지막으로 문수보살을 한번 더 친견하길 서원했다.그러던 어느 날 밤. 스님은 중국 오대산 북대에서 범어게를 주던 범승을 꿈에 만났다.
『스님 이 밤에 어인 일이십니까? 밖이 어두우니 안으로 드시지요.』
『내일 밝은 날 대송정(지금의 한송정)에서 만납시다.』
놀라 잠에서 깬 자장 스님은 날이 밝자마자 대송정으로 달려가 문수보살을 염했다.
『자장 스님, 잘 찾아오셨군요. 소승은 문수보살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어떤 말씀이지요?』
『태백산 갈반지에서 만나자고 하시더군요.』
『그게 언제쯤인가요?』
『그것은 스님이 선정에 들어 관해 보시면 알 것입니다.』
범승은 작별인사를 할 새도 없이 어느 결엔가 사라졌다.
이튿날 자장 스님은 대중을 모아놓고 「계율은 공부의 등불이니 필히 지켜 도업을 이룰 것」을 당부하고는 갈반지를 찾아 길을 나섰다.
태백산에 이르러 마을 사람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갈반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태백산을 헤매던 스님은 혼자 생각했다.
『갈반지라? 갈이란 칡을 뜻하고 반이란 소반을 말함일 텐데, 거참 묘한 지명이로구나.』
스님은 제자들에게 칡넝쿨이 있는 곳을 찾도록 지시했다. 그렇게 사흘간 산 속을 헤맨 일행은 드디어 칡넝쿨이 엉켜 있는 곳을 발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칡넝쿨 위에는 10여 마리의 구렁이가 또아리를 튼 채 엉켜 있었다. 제자들은 모두 놀라 뒤로 물러섰다.
『오! 이곳이 바로 갈반지로구나. 여기서 우리가 할일은 저 구렁이들을 제도하는 일이다. 이제부터 모두 《화엄경》을 독송토록 해라.』
염불소리가 고요한 산 속에 울려퍼지자 이상하게도 엉켜 있던 구렁이들이 스르르 몸을 풀었다.
그날 밤 자장 스님의 꿈에 뱀이 나타나 울면서 말했다.
『스님, 저희는 전생에 불법을 공부하던 승려였지요. 수행을 게을리 하고 시물을 아까운 줄 모르고 낭비하다가 그만 뱀의 과보를 받았습니다. 그 동안 참회를 거듭하면서 큰스님이 나타나 제도해 주시길 학수고대하던 중 스님을 만났으니 몸을 바꾸도록 경을 독송하고 법문을 설하여 주옵소서. 저희는 지금부터 단식에 들어가겠습니다. 그리고 저희가 누워 있는 자리 밑에는 금은보화가 묻혀 있으니 그 재물은 절을 창건하시는 데 쓰십시오.』
경을 독송하기 7일째 되는 날. 구렁이들은 해탈하여 죽었다. 구렁이들을 화장하여 천도한 후 그 자리를 파보니 과연 금은 보화가 가득 묻혀 있었다. 자장 스님은 그곳이 바로 문수보살을 친견할 인연지로 생각하고 석남원을 창건하니 그 절이 바로 오늘의 갈래산 정암사이다.
그 후 스님은 산정에 탑을 세우려 했으나 어찌 된 일인지 세우면 쓰러지고 또 세우면 쓰러졌다. 스님은 백일기도에 들었다. 기도가 끝나는 날 밤. 눈 덮인 산 위로 칡 세 줄기가 뻗어 내려와 지금의 수마노탑(보물 제416호), 적별보궁, 법당자리에 멈추니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 하여 정암사를 속칭 갈래사라 불렀고 갈래란 지명도 생겼다.
수마노탑이란 서해 용왕이 물 위로 운반하여 보낸 마노석으로 세운 탑이란 뜻에서 연유된 이름이다.
스님은 정암사 불사에 전력을 다하면서 문수보살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다 떨어진 방포를 걸친 늙은 거사가 칡삼태기에 죽은 강아지를 담아 가지고 절 앞에 와서 자장율사를 만나기를 청했다.
괘씸하게 생각한 시봉은 한마디로 거절했다.
『우리 스님이 뉘신 줄 알기나 하고 감히 법명을 함부로 부르는게요. 시장하여 정신이 왔다갔다 하나 본데 밥이나 줄 테니 잠자코 먹고 돌아가시오.』
『웬 말이 그리 많으냐? 어서 가서 내가 자장을 만나러 왔다고 일러라.』
시자는 늙은 거사가 하도 강경하게 말하므로 하는 수 없이 자장 스님에게 사실을 전했다. 전갈을 들은 자장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잘 타일러서 보내도록 해라.』
시봉이 나와 거사를 내쫓듯 큰소리로 나무랐다.
『아상(我相)을 가진 자가 어찌 나를 보겠느냐.』
거사는 혼자 중얼거리며 삼태기를 거꾸로 쏟았다. 그러자 그 안에 들었던 죽은 강아지는 땅에 떨어지면서 큰 사자보좌로 변했고 거지노인은 사자를 타고 빛을 발하면서 허공으로 사라졌다.
놀란 시자로부터 이 말을 들은 자장은 크게 탄식했다.
『참으로 나의 아상(我相)이 문수보살 친견을 막았구나. 나의 수행이 헛것이라니….』
자장은 법복으로 갈아입고 거사가 사라진 남쪽 산으로 올라갔으나 아무 흔적도 없었다.
자장은 제자들에게 말했다.
『육신으로는 문수보살을 만날 수가 없어 내 이곳에서 입정에 들어 만나뵙고 참회할 것이니 3개월간 내 몸을 잘 보관토록 해라.』
말을 마친 자장은 조용히 바위에 앉아 입정에 들어갔다. 그 후 3개월이 되어도 신체와 안색은 평상시와 다름이 없는데 자장은 깨어나질 않았다.
대중들은 이제 그만 다비식을 하자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그렇게 백일이 되는 날. 어느 스님 한 분이 와서 스승이 열반에 들었는데 왜 다비를 하지 않느냐고 호통을 쳐 제자들은 자장이 입정에 든 바위에서 다비식을 가졌다.
식이 끝나자 공중에서 자장율사의 소리가 들렸다.『내 몸은 이미 티끌이 되었으니 의탁할 곳이 없구나. 너희들은 계에 의존하여 생사의 고해를 건너도록 해라.』
주소 : 경북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 148. 전화 : (054) 633-3464 팩스 : (054) 634-3464
신라의 불교는 눌지왕 때에 들어와 법흥왕 때에 수용된 뒤에 크게 발전하였다. 중국을 통하여 전입된 교학 불교는 신라 불교로 하여금 종파성을 띠게 하였는데 가장 특징적으로 운위되는 종파는 화엄종과 법상종이다. 그 가운데에서도 전법 사실이 뚜렷하고 종찰이 확실한 것은 의상의 화엄종이다.부석사는 우리나라 화엄종의 본찰로 초조인 의상 이래 그 전법 제자들에 의해 지켜져 온 중요한 사찰이다.의상은 676년 부석사에 자리잡은 뒤 입적할 때까지 이곳을 떠나지 않았고 그의 법을 이은 법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부석사 원융국사비에는 지엄으로부터 법을 전해 받은 의상이 다시 제자들에게 전법하여 원융국사에까지 이른 것과 원융국사가 법손이 된 뒤 부석사에 자리잡았다는 사실 등이 밝혀져 있다.
영주의 부석사(浮石寺)는 큰 법당인 무량수전과 진입로인 은행나무길로 널리 알려진 사찰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외에도 부석사는 단아하고 엄정한 기품이 살아있는 고찰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부석사는 신라시대인 676년 의상대사가 창건한 사찰로, 의상대사와 중국 여인인 선묘의 사랑 이야기가 창건설화로 전해오고 있다. 의상대사가 당나라에 유학할 때 선묘라는 여인이 의상대사를 사모하다가 의상이 신라로 돌아오자 바다에 뛰어들어 자살을 했다고 한다. 그후 의상대사가 부석사를 창건할 때 도적들 때문에 어려움을 겪었는데, 선묘의 영혼이 나타나 도둑들 앞에서 큰 돌을 공중으로 들어올려 도둑들이 도망가고 이 자리에 부석사를 창건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 설화에 따라 절 이름도 ‘뜬 돌’이라는 뜻의 부석(浮石)사가 되었다.아직도 부석사 무량수전 옆에는 부석이 놓여 있고, 선묘각이라는 아주 작은 사당도 있다.부석사의 은행나무 길은 일주문에서 천왕문에 이르는 약 500m 도 채 안되는 짧은 길이다. 가을이면 길 양쪽의 은행나무잎들이 노랗게 물들어 예쁜 은행나무길이 펼쳐진다. 무량수전은 배흘림기둥으로도 유명하고 또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 중의 하나로도 유명하며, 또 팔작지붕의 효시라고도 알려져 있다. 이렇게 무량수전에 대해 온갖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실제 그 의미를 차치하고라도 건물 자체가 지닌 품격 때문이다. 실제로 무량수전은 일반인들이 보기에도 흠잡을 곳이 없는 거의 완벽한 구조라는 느낌을 받는 건물이다. 부석사에는 이 외에도 유명한 안양루, 범종각, 조사당 등의 건물이 있다.
첫댓글 아나율조 20명외 25명 신청받아요.
곽훈기, 구광희, 윤명순, 이문종, 이정훈, 최병돈, 최용문 신청합니다.
가고 싶은데 그날 수계식이라 죄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