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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염불(念佛, pali. Buddha-anussati, skt. Buddha-smrti) >
염불의 원래 의미는 ‘부처님에 대한 선정’의 개념이며,
‘부처님에 대한 간단(間斷) 없는 염염상속(念念相續)의 조견(照見) 상태’로 정의된다.
즉, 염불이란 말 그대로 부처님이나 보살의 이름과 모습을 끊임없이
마음에 집중함으로써 번뇌와 망상을 없애 깨달음을 이루고 불국정토에 왕생하는 수행방법이다.
우리나라 불교는 대표적인 염불불교다.
원래 염불에서 ‘염(念)’은 부처님에 대해 염한다는 뜻으로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사념처(四念處)의 ‘염(念)’을 뜻한다. 즉, 빠알리어 사띠(sati)를 뜻한다.
염불을 할 때도 모든 것을 관찰하는 사띠가 없으면 아무리 염불해도 소용이 없다.
즉, ‘염(念)’이란 팔정도의 하나인 ‘삼마 사띠(正念)’라고 하는
매우 중요하고 핵심적인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표의문자인 중국어에서 ‘생각할 념(念)’자로 번역했고,
그것을 다시 그대로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종래에 사띠를 "기억"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최근엔 다소 수정해서 마음챙김, 마음집중, 알아차림 등으로 번역하고 있다.
따라서 올바른 염불을 하려면 마음챙김을 제대로 해야 한다.
염불의 종류에는 부처님 명호를 외우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 있고,
부처의 32상 80종호를 갖춘 원만 덕상을 마음속으로 관찰하는 관상염불(觀像念佛)이 있으며,
부처님을 마음속을 상상하면서 염불을 하는 관상염불(觀想念佛)이 있다.
염불의 대상은 대개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 지장보살이 되는 경우가 많다.
예로부터 ‘노는 입에 염불한다’는 말이 있듯이 평소 염불을 꾸준히 하면
저절로 마음이 안정되고 환희심이 생기는데, 가장 손쉬운 수행방법 중 하나이다.
그리고 염불을 함에도 일정한 가락이 있다. 그 가락이 우리나라 전통 민요 가락이라고 한다.
선종 제4조 도신(道信, 580~651) 선사 선법인 염불선(念佛禪)은
초기불교 염불관을 계승 발전시킨 형태로서, 부처님 존재를 우주의 원리이자
생명의 근본인 법신불(法身佛) 관점에서 인식하고 닦는 수행법이었다.
청화(淸華, 1924~2003) 스님도 염불선의 효시를 4조 도신이라 진단하고
대승불교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초기불교에서 그 근원을 찾았다.
이와 같이 청화 스님은 일찍이 염불선을 부처님 당시 초기불교로부터 구했다.
그리하여 청화 스님은 “염불은 부처님 당시부터 염불(念佛)ㆍ염법(念法)ㆍ염승(念僧)이라고
모든 경전에 나와 있고, 원래 우리가 부처이기 때문에, 또 부처가 돼야 하기 때문에,
염불은 따지고 보면 내가 ‘참나’를 생각하는 것이다.”라고 해
불심(佛心) 또는 불성(佛性)을 내면화하고 체화하는 행법임을 분명히 했다.
그리고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시 선(禪)이 된다.”고 했다.
염불법이 또는 염불행위가 바로 선(禪)으로 나아갈 때 염불선이라 했다.
이는 이미 초기불교에서 부처님이 증상심(增上心)이 곧 심학(心學)이며
선정수행이라는 가르침과 일치한다.
‘본래부처가 부처를 생각’한다는 ‘불불상념(佛佛相念)’은 불(佛)과 불(佛)이
서로 염한다는 뜻으로 초기불교에 내장된 염불의 선적(禪的) 이해를 잘 보여준다.
※증상심(增上心)---최상의 마음 혹은 집중된 마음이라는 말이다.
최상(adhi)과 마음(citta)의 합성어이다. 증상심은 초기불교경전에서
삼학 가운데 정학(定學)의 다른 말로 달리 심학(心學)으로 쓰이기도 했다.
불자들의 기도는 대부분 불ㆍ보살을 염하는 칭명염불(稱名念佛)이다.
그런데 염불을 할 때면 잡념이나 망상이 자주 일어난다.
불ㆍ보살의 명호를 염할 때 발음을 분명히 하고 잡념이 일어날 경우
염송하는 소리가 귀에 들리도록 해서 다른 소리를 차단하라고 한다.
그래도 잡념이 일어날 경우 굳이 그것을 가라앉히려 애쓰지 말고
염불에만 마음을 쓰다 보면 저절로 사라진다.
범부들은 온갖 것에 마음을 쓰기 때문에 마음이 산란하다.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고자 참선이나 염불을 계속하면,
정신이 한 곳에 모아지고 산란함이 잦아든다.
가령 나는 아직 살날이 많고 그러니까 아미타 부처님보다도
지금 현실적으로 내가 바라는 게 많다고 하면, 관세음보살 기도를 해야 한다.
관세음보살 기도의 핵심은 관세음보살을 반복해서 외우는 것이다.
관세음보살 기도를 할 때는 관세음보살을 계속해서 염송을 한다.
그러면 내 마음의 주파수와 관세음보살님의 마음 주파수와 진동수가 같아진다.
그래서 정화가 되고 맑고 밝아지면서 지혜가 나고
거기서 행동할 수 있는 행동능력이 나오면서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관세음보살의 명훈가피(冥熏加被)를 입게 된다.
명훈가피력이란 것은 나는 인식을 못하지만 그냥 은은하게 스며든다.
새벽안개 길을 가면 안개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스며들듯이 그런 것을 명훈가피력이라고 한다.
몰입해서 관세음보살님만 계속 염송을 하게 되면 그런 효과가 있다.
깊은 고려 없이 염불은 하근기 중생이 하는 것이라고 하면 문제가 크다.
우리네 할머니나 어머니처럼 천념(千念)을 헤아리면서 애쓰고 몇 십 년 동안 염불한 분도,
어느 스님이 “염불은 근기가 낮은 사람들이 하는 것이다.
화두를 해야 한다” 그렇게 해버리면, 염불은 그만두고서 억지로 화두 의심을 하게 된다.
그렇게 하는 것은 시간 낭비인 동시에 병통이 생기기 쉽다.
근세에 수월(水月, 1855-1928) 스님은 일자무식인데도 천수다라니로 깨달음을 얻은 분이다.
모두가 다 부처라 생각하고서 노력하면 되는 것이지,
섣부른 졸도(拙度, 옹졸한)법문은 소경이 길을 인도하는 격이다.
『우리들이 기도를 할 때 법당에서 불ㆍ보살님의 명호를 부르게 된다.
그것을 염불(念佛)이라 한다. 염불이란 부처님을 간절히 생각하는 것이다.
입으로 부처님의 명호를 부르면 송불(誦佛)인데 염불이라 부르는 것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 부처님 생각하기 때문이다.
염불의 기원은 부처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석가모니 부처님 당시 상공업의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도시가 바이샬리(Vaishali)였다.
바이샬리는 <유마경>의 설법지로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인데,
그곳에 무역하는 상인들이 지역의 특산물이나 공산품을 가지고
서북인도 지금의 파키스탄 탁실라까지 수 천리를 걸어가서 장사를 했다.
그러나 길을 가는 도중에 강도나 도적이 출몰해 물건을 빼앗고 목숨을 죽이는 일까지 빈번하게 일어났다.
상인들은 불안과 공포를 벗어나기 위해 부처님을 찾아와 어려움의 극복방법을 여쭈었다.
부처님은 상인들에게,
“너희가 무인광야를 가게 될 때 여러 가지 공포가 있을 것이며,
마음이 놀래고 머리카락은 곤두서리라.
그런 때는 마땅히 여래(如來)를 염하라. 여래를 염하면 공포가 사라지리라.”고 하셨다.
<잡아함경>에 나오는 부처님의 말씀이다.』- 일광 스님
그런데 염불이란 ‘지금의 마음 그대로가 부처’라는 믿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입으로 염불한다는 것과 그 사람이 염불하고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차원이다.
염불이란 입으로 떠드는 게 아니다.
입으로 표현하는 것은 내 몸에 박힌 습(習)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지, 그 자체가 목적은 아니다.
자신의 생명전체를 오로지 부처로만 꽉 채우고 사는 사람이 염불행자(念佛行者)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마음이 오로지 부처일 때 염불한다고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염불하고 있는 당사자가 따로 있거나 염불의 대상인 부처를 내 밖에서 구하려 해서는 안 된다.
유불여불(唯佛與佛)이라, 다만 부처가 부처를 염(念)하는 것이지, 중생이 부처를 염하는 게 아니다.
본래부터 부처인 내가 스스로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 염불에도 여러 방법이 있다. 염불의 종류는 종밀(宗密, 780~840)이 말한
칭명염불, 관상염불(觀像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의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 네 가지 속에 모든 염불의 종류가 속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를 또 크게 나누면 입으로 하는 칭명염불과 생각으로 하는 관념염불(觀念念佛)의 두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관상염불(觀像念佛), 관상염불(觀想念佛), 실상염불(實相念佛)은
모두 마음으로 떠올리는 관념염불에 속하기 때문이다.
1) 칭명염불(稱名念佛) ― 부처를 생각하며 입으로 불명을 칭함이다.
2) 관상염불(觀像念佛) ― 부처의 32상 80종호를 갖춘 원만 덕상을 관하며 하는 염불이다.
3) 관상염불(觀想念佛) ― 정좌하고 불(佛) 상호공덕을 관념(觀念)함이다.
부처님을 마음속을 상상하면서 염불을 하는 것이다.
4) 실상염불(實相念佛) ― 불(佛)의 법신이 무량무변하고 만공덕을 갖춘
중도실상(中道實相)의 리(理)를 관조함이다.
4조 도신(道信, 580~651)의 선법인 염불선(念佛禪)은 초기불교에 근원이 닿아 있다.
곧 염불선의 초기불교적 근거로 ‘정학(定學)의 증상심(增上心) 차원에서 말하는 염불’을 말하며,
그 후 염불선이 천태지관법(天台止觀法)과 달마(達磨) 선(禪)의 융합으로 발전했다.
염불선은 일상삼매(一相三昧)와 일행삼매(一行三昧)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때 일상삼매는 정견(正見)과 혜(慧)에 해당하고,
일행삼매는 정정(正定)과 정(定)에 해당하므로,
결국 염불선은 일상삼매와 일행삼매, 정견(正見)과 정정(正定),
혹은 정혜쌍수(定慧雙修)와 동의어라고 하겠다.
• 그리하여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어야 한다.
삼매(三昧)란 것은 어느 한 것에 몰두하는 것이다.
그래서 먼저 참선(參禪)을 하든지 염불(念佛)을 하든지 해서 번뇌를 쉬고 망상을 끊어야 한다.
번뇌 망상을 쉬는 방법이 팔만사천가지로 많은데, 자꾸 마음공부를 해서 마음을 안정해야 한다.
가령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일념(念佛一念)에 들어도
하루 종일 여섯 자 그 소리뿐이지 다른 잡념 망상은 다 없어져야 한다.
이렇게 되면 그것을 염불삼매(念佛三昧)에 들었다고 한다. 염불삼매를 염불정(念佛定)이라고도 한다.
그리고 염불삼매(念佛三昧)는 부처님을 염원하는 것으로 얻어지는 마음의 안락이다.
평안과 안정된 마음으로 염불에 전념하는 것이다.
부처님을 억념(憶念)해 마음의 통일과 안정이 실현된 상태이다.
참고로 염불한다고 해서 꼭 목탁을 두드려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합장하고 입으로 염하면 된다.
그냥 마음속으로 염해도 된다. 방법이 문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자기 편한 대로 하면 된다. 다만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염불삼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세 가지 요소가 있어야 한다.
우선 서방정토가 있다고 믿는 신(信)이 있어야 한다.
아울러 자신과 자신의 일가친척과 이웃이 극락왕생하기를 간절히 소원하는 원(願)이 따라야 한다.
그리고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을 염송하는 행(行)을 갖추어야 한다.
‘삼매’란 인도 말이고 우리말로 하자면 「마음이 똑바로 정해졌다. 마음이 제자리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이리저리 끌리고, 현상에 이끌리고,
사랑에 이끌리고, 돈에 목매어 번뇌 망상에 흔들리고 했는데,
이런 것들이 없어지고, 무엇을 보나 아무 생각이 없을 때,
그때엔 마음이 제자리에 바로 선 것이다.
「일체 생각 없이 마음 저 혼자 아무 상대 없이 꼭 제대로 마음이 섰다.」
대체로 이런 의미를 가진 말이 삼매(三昧)이다.
그리고 염불삼매엔 인행삼매(因行三昧)와 과성삼매(果成三昧)가 있다.
• 인행삼매(因行三昧)
일심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든지 불명을 칭하든지, 일심으로 불(佛)의 상호(相好)를 관하든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을 관조하는 수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 함.
• 과성삼매(果成三昧)
인행의 염불삼매가 성숙되면 마음이 선정에 들어가고,
혹은 시방불(十方佛)이 현전(現前)하며, 혹은 법신의 실상에 계합(契合)되는데
이를 과성(果成)의 염불삼매라 한다.
우리 중생 마음은 항시 산란해서 선정에 들기가 어렵다. 삼매에 들어가야
우리의 근본번뇌를 없앨 수 있는 것인데, 따라서 삼매에 들려면 오로지 지속을 해야 한다.
화두나 염불이나 주문을 지속시켜야 마음이 한 곳으로 모아지고, 그래야 선정에 들 수 있다.
그렇게 해서 삼매에 들어가면 우리 업장이 녹아서
부처님의 광명신(光明身)이 자기 앞을 훤히 비추고, 동시에 부처님의 실상에 계합(契合)하게 된다.
이것이 이른바 과성삼매이다. 인행삼매가 근본이 돼
그 결과로 열매가 맺어서 과성삼매를 얻어야 염불삼매를 성취하게 되는 것이다.
<화엄경>에서 염불삼매는
반드시 부처님을 보게 되고 목숨을 마친 뒤엔 부처님 앞에 태어난다는 말이 있다.
「염불삼매필견불 명종지후생불전
(念佛三昧必見佛 命終之後生佛前)」을 말하는 것이다.
일심으로 부처님 이름을 외운다든지 불명을 칭하든지,
일심으로 불(佛)의 상호(相好)를 관하든지,
또는 일심으로 법신(法身)의 실상(實相)을 관조하는 수행법을
인행(因行)의 염불삼매라 하는데, 그렇게 열심히 수행하면 반드시 죽어서 부처님 앞에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염불을 열심히 하면 살아서 부처님을 친견하고,
그 다음에 죽어서 부처님 전에, 즉 극락세계에 간다, 그런 말이다.
다음은 청화(淸華, 1924~2003)께서 염불수행에 관한 말씀이다.
“모든 명상법이 다 좋기는 좋은데, 그런 법은 해탈의 법이 아닙니다.
이른바 생사(生死) 대사를 해탈하고 성자가 되는 법이 아니라,
불교적인 의미로 말하면 유위법이라.
삶의 유한적인 공덕을 위해 하는 법이기 때문에 몸이 좋아진다든가,
머리가 맑아진다든가 하는 데에 관심을 둔 사람들은 좋겠지요.
그러나 종교인으로서 정말로 생사윤회를 떠나서 부처가 돼야겠다,
성자가 돼야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에겐 미흡합니다.
미흡하기 때문에 부처님께서 제시한 수행법으로 나아가기 위해 준비하는 데는 좋지요.
그러나 그것이 구경(究竟)의 경지라고 하면,
한계에 부딪히게 되고, 부처님법과는 거리가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근본불교의 수행법인 위빠사나도 삼매에 들기 위한 하나의 과정입니다.
위빠사나가 끝이 아니라 이 위빠사나를 통해서 삼매로 나아가면 좋지요.
그러나 보통은 위빠사나가 제일 수승하다고 해서 문제가 돼요.
부처님의 명상법이 제일 완벽하고, 가장 최상의 수행법입니다.
부처님 명상법은 바로 성인이 되고, 생사 대사를 초월해서 영생으로 가는 법이기에 가장 완벽한 법입니다.
다른 법은 최상의 법으로 나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일 뿐입니다.
다른 법은 유한적인 공덕이 크므로, 한계가 있습니다. 그 한계성을 알고 하면 좋습니다.……
부처님 법은 쉽다고 하면 제일 쉽습니다. 어째서 쉽다고 하느냐면
우주의 원리를 보탬이 없이 그대로 정확히 말씀하신 것이 부처님 법이기 때문입니다.
생활 속에서 가장 쉽게 행할 수 있는 수행법은 염불입니다.
염불이라는 것이 굉장히 소중한 것인데,
요즘 사람들은 체계가 복잡한 것만을 높은 줄 알고 염불은 너무 쉬우니까 소홀히 생각한단 말입니다.
명호 부사의(名號不思議)라! 그 이름 자체에 부사의한 의미가 있다는 말입니다.
모든 음성 모든 형체 하나하나에 다 의미가 있습니다.
최상의 개념이 담겨있는 것이 바로 부처님 이름입니다.
제일 쉽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 부처님, 관세음보살, 나무아미타불입니다.
삼세제불이 모두 순수한 이름입니다. 우주의 자비가 바로 관세음보살인 것이고,
우주 생명자체가 바로 나무아미타불이기 때문에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염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한 청화 스님의 말씀을 되새기다 보면,
“원효 스님과 청화 스님은 시대를 달리 살았지만 발보리심과 십념염불 및
일상삼매와 일행삼매를 통해 일심 즉, 유심의 정토와 안심 즉 순선의 정토를
이 땅에 구현하려 했다는 점에서 상통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하겠다.” - 고영섭
그런데 우리는 염불선과 그냥 염불과의 구분을 해야 한다. 이 구분 잘못 하면 혼동돼버린다.
어떤 사람은 “염불은 하근기(下根機) 중생이 한다. 염불은 근기 낮은 분이 하는 것이다”
이렇게 함부로 말하기도 한다. 그리고 심하게는 “염불이 무슨 선(禪)이야” 이렇게도 말한다.
그런데 그냥 일반 염불과 염불선의 한계를 잘 알아야 한다.
자기 마음의 본질이 부처고 또는 우주가 바로 부처인데, 부처를 자기 마음 밖에서 구하고,
극락을 자기 마음 밖의 저만치 십만억 국토 밖에서 구하는 염불은 방편염불(方便念佛)이다.
참다운 염불은 자기 마음의 본바탕이, 자기 마음이 바로 부처다.
또한 동시에 우주가 바로 부처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는 염불이 바로 염불선이다.
따라서 방편적으로 하는, 즉 자기 마음 밖에서 부처와 극락을 구하는 식이 아니고
내 마음이 바로 부처다. 내 마음의 본바탕이 부처라고 확신을 가지고,
극락 또한 내 마음 속에 있다고 확신하고서 하는 염불이 염불선(念佛禪)이다.
[출처] 블로그 아미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