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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의 지름길 / 관응 스님
기도하면 바뀐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고 있다.
모두 자기수준과 생각대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마다 살아가는 방식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범부의 눈에는 눈앞의 모습이 각기 다르게 보이게 된다.
그러나 부처님의 깨달은 눈으로 보면 하나로 보인다.
사람의 살아가는 방식이 하나로 보이는 것이다.
나아가 사람의 사는 방식과 축생의 사는 방식은 같지가 않다.
절세미인을 보면 사람들은 ‘아름답다’며 좋아라 하지만,
새들은 그 절세미인에게 잡힐까 두려워 날아가 버린다.
왜 이러한가?
인간과 새의 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새와 사람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다.
새들의 노래와 사람들의 노래에는 비상한 힘이 담겨져 있다는 것이다.
노래에는 사람을 능히 바꾸어 놓는 힘이 있다.
모든 감정을 털어내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갖게 만드는 힘이 간직되어 있다.
그래서 참된 노래를 ‘진언(眞言)’이라고 하는데,
불교의 진언에는 부처님이 깨달으신 바가 함축적으로 스며있다.
부처님의 깨달은 기운이 진언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진언을 계속 외면 마음자리를 깨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언을 외워서 참된 나를 깨칠 수 있는 바탕을 마련하여야 한다.
또 마음을 편안하게 하여 좋은 생각을 하면 몸속의 백혈구가 왕성하게 활동을 하고
맑은 피가 생긴다고 한다. 나아가 항시 넉넉한 생각으로 보시를 하고
바르게 생활하면 맑은 피가 생겨나서 부유한 골격을 이루게 된다.
마음 씀씀이가 이기적이고 가난하면 빈골, 천골이 되고,
귀한 일을 자주 하면 귀골(貴骨)이 되니, 마음 쓰기에 따라서 몸속의 골(骨)까지 변하게 만든다.
또 덕이 있는 이가 앉아 있으면 그 주변이 온통 환하여지고,
다라니를 외고 경전을 외는 사람이 있으면 그 지방에 풍년이 들고 재앙이 없어진다고 한다.
그리고 가족 가운데 단 한 사람이라도 불교를 믿고 정성껏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큰 공덕이 깃들게 된다.
자비를 쌓아 중생을 제도하는 분이 관세음보살님인 까닭에,
그 이름과 함께하는 것만으로도 어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관음 영험담이다.
약 2백 년 전, 백수동 마을에 은광이 발견되자,
가난한 사람들이 은을 캐기 위해 은광으로 모여들었다.
그 광산에는 일을 마친 다음 씻을 수 있도록 몇 군데에 웅덩이를 파 놓았는데,
하루는 흰옷을 입은 아리따운 여인이 난데없이 나타나서,
한낮인데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목욕을 하는 것이었다.
이상스레 여긴 마을 사람들은 하나둘씩 모여들었고,
마침내 그곳 사람 모두가 여인의 목욕 장면을 구경하기에 이르렀다.
그 순간, 갑자기 ‘쿵’하는 소리와 함께 은광이 무너졌고,
목욕하던 여인도 간곳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관세음보살님이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여인의 몸으로 나타나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 뒤 8년이 지났을 때, 마을 주민들이 산에서 약초를 캐고 있는데,
땅속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땅을 파보니, 실종되었던 마을 노인이 있는 것이었다.
은광이 폐광되면서 자취를 찾을 길 없었던 노인이 8년 동안 살아 있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어
죽지 않게 된 사연을 물었다.
“광산이 무너질 때 나는 작은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서 겨우 목숨을 구했지요.
그런데 한참을 지나자 그곳이 환해지면서 흰쥐 한 마리가 나타났다오.
주위를 돌아보니 내가 집에서 사경을 하여 만든 「관세음보살보문품」족자가 걸려있고,
흰쥐가 그 글자를 혀로 핥고 있었습니다.
‘나도 한 번 따라 해볼까?’
그러면서 흰쥐처럼 보문품 글씨를 혀로 핥았더니 시간이 흘러도 배가 고프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쥐와 나는 번갈아서 글씨로 요기를 하며 연명하였습니다.
그런데 햇수로 8년이나 되었다니...”
집으로 돌아온 노인은 족자를 살펴보았다.
그런데 보문품의 글자가 한 줄 반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소설 같은 이야기이다.
관세음보살의 자비원력이 보문품을 사경한 그를 살아나게 하였으니...
[삼국유사]에는 서라벌의 관음신앙의 터전으로 중생사, 백률사, 민장사 이야기를 싣고 있는데,
그중 민장사(敏藏寺)의 영험은 감동적이다.
경주 북쪽 우금리(寓金里) 마을에 사는 보개(寶開)라는 여인에게는 장춘(長春)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한 달 뒤에 돌아올 것을 기약하고
장사꾼을 따라 배를 타고 떠났으나, 한 달이 지나도 무소식이었다.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소식이 없자 어머니 보개는 민장사의 관세음보살 앞에서 7일 기도를 올렸다.
그런데 회향 전날, 스님 한 분이 먼 길을 가는 중이라며,
도중에 먹을 음식을 부탁하였다. 그녀는 음식과 함께 신발 한 켤레를
기꺼이 보시하였다.
그러고는 다시 기도를 하고 있는데, 문밖에 아들이 나타났고,
장춘은 돌아오게 된 내력을 말하였다.
"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배가 부서져서 일행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다행히도 저는 판자에 몸을 기대어 며칠 동안 표류를 하다가,
홀로 당나라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부잣집의 일꾼이 되어 농사일을 돕고 있었는데,
어느 날 꿈속에 민장사의 관세음보살님이 보였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관세음보살'염불을 하였는데, 때마침 그곳을 지나가던
승려가 신라 말로 염불하는 것을 듣고 '함께 고향으로 가자'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스님이 건네준 신발을 신고 깊고 넓은 개천을 뛰어넘었는데,
문득 민장사 경내에 와 있는 것이었습니다."
수만 리의 서해를 개천 뛰어넘듯이 하여 무사히 귀국한 장춘!
장춘이 살아오게 된 가장 큰 힘은 어머니의 간절한 정성이었다.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지극한 사랑과 정성에 감동한 관세음보살이 데려다주었다는 것이다.
기도의 대상은 관세음보살이 아니어도 좋다.
성인이 아닌 작고 보잘것없는 신일지라도, 정성 가득한 간절한 기도라면 반드시 원을 성취할 수가 있다.
기도 등을 통하여 꾸준히 덕을 쌓고 복을 짓는 작업을 계속하게 되면,
좋은 결과가 반드시 도래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인정하고 칭찬하라.
모름지기 우리는 즐겁고 좋은 생각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
마음이 즐거우면 눈에 그 즐거움이 나타나게 된다.
'눈이 웃는다'는 말이 있듯이, 즐거움을 드러내려고 애를 쓰지 않아도
저절로 눈웃음을 짓게 되는 것이다.
마음이 불안해도 그 불안은 눈에 나타나게 된다.
형사는 범인을 잡을 때 눈을 보면 느낌으로 알 수 있다고 한다.
눈은 마음의 창(窓)이라고 하지 않던가. 마음먹은 것들이 가장 먼저 나타나는 곳이 바로 눈이다.
마음의 상태가 눈에 드러나듯이, 몸이 안정되지 않으면 행동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실로 우주의 법칙에는 거짓됨이 없다.
이 거짓됨이 없는 우주의 법칙을 성현들은 도(道)라 하였고,
이 도가 외부로 발현된 것을 덕(德)이라고 하였다.
우리의 모습과 형상을 육근(六根)이라고 하는데,
사람은 눈, 귀, 코, 혀, 몸, 뜻의 육근이 모두 갖추어져 있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 여섯 가지 중 한 가지만 잘못되면 불구라고 칭한다.
인간 세상에는 신체장애의 불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정신적인 불구도 한없이 많다.
부모에게 불효하고 부부가 서로 공경하지 않는 것도 불구의 모습이다.
안정된 눈으로, 도덕의 눈으로 바라보면 이 세상에는 불구가 지천이다.
살아 있는 아귀라고나 할까? 욕심은 한량없는데 억제할 수 있는 인내력이 적다 보니
매일 매일을 아귀다툼으로 살아간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나라의 약산 유엄선사는 도를 묻는 이에게,
'구름은 푸른 하늘에 있고, 물은 병에 있다'고 하셨다.
이는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이 도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업(業) 밖의 허황된 것에 욕심을 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행복이나 도의 경지와는 점점 더 멀어지고 만다.
그럼 사람들끼리 도와 행복을 증장시키는 방법은 없을까?
있다. 그것은 인정(認定)이다.
사람은 인정을 받으면 좋아한다. 반가워한다.
상대방이 자기를 알아주고 인정해 주는 것은
함께 사는 즐거움 가운데 으뜸가는 것이다.
가수들이 노래를 하면 대중들이 박수를 치고 좋아한다.
이 좋아함 때문에 가수가 노래에 더 재미를 붙이듯이,
누구든지 칭찬을 받고 인정을 받으면 그 일을 더 잘하게 된다.
그런데 어린이들에게 노래를 지도하는 교사가 노래를 잘 못하는 아이를 나무라게 되면,
그 아이는 평생 노래를 안 하게 된다.
그러므로 교육에 있어 칭찬의 말 한마디는 참으로 중요하다.
'한 번 더 해 보아라, 아까보다 나아졌다'고 하면서 의욕을 북돋우어 줄 때,
아이는 잘못을 고치고 더 향상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대자대비(大慈大悲)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남을 칭찬하고 함께 기뻐하면서 잘되게 하는 것이 자(慈)요,
남이 잘 못 되는 것을 함께 슬퍼하는 것이 비(悲)이다.
특히 아이들에게 칭찬하여 용기를 북돋아 주는 것이야말로,
생각 이상의 발전을 가져다주는 자비라는 것을 명심하여야 한다.
젖먹이 어머니가 부드러운 생각을 하면 부드러운 성품이 모유를 통해 아기에게 전달되고,
성이 난 상태에서 젖을 먹이면 아이가 성난 나쁜 기운을 그대로 받게 됨을 마음에 새겨 실천하는 것도 자비요,
아이 스스로 행동할 수 있도록 하는 것도 자비이다.
아이가 여섯 살 무렵이 되면 과거 업을 통해 스스로 변화를 하지만, 4~5세까지는 그저 받기만(受) 한다.
따라서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촉각으로 알고 배운다.
아이들은 장난감을 직접 만지고(觸) 두드리고 깨뜨리고 확인하기를 즐겨하면서 지혜를 키워가는데,
어머니는 고정관념 속에서 '비싼 물건 깨질까'
걱정을 한다. 사람은 성장하여서도 촉이 지속되는데,
남녀간의 관계도 촉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어릴 때 촉을 바르게 길러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윤회를 벗고 잘살려면
그럼 생사윤회는 어떻게 해야 벗어날 수 있는가?
윤회의 미망에서 해탈하려면 눈, 귀, 코, 혀, 몸, 뜻의 색신(色身)이 공(空)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서 수양하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은 업으로 뱀의 몸을 받게 되면 '어떻게 하면 개구리를
한 마리라도 더 잡아먹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하지 않고,
고양이가 되면 '쥐 한 마리 더 잡아먹으려는' 생각밖에 하지 못한다.
자유당 시절에 권세를 누렸던 장관들은 5. 16 후에 서대문형무소에 갇힌 이들이 많았다.
그때 그들은 장관할 때의 생각은커녕,
'어떻게 하면 오늘 밤은 담요 한 장 더 얻어서 춥지 않게 잘 수 있을까'를 꿈꾸면서 지냈다고 한다.
이처럼 자신이 처한 형편 속에서 괴로움을 면하려는 생각을 하며 사는 것,
이것이 실제 우리의 삶인 것이다.
따라서 불교의 진리로써 올바른 인생관을 세우고, 진리에 어긋남 없이
착하게 사는 것이 바로 불교를 믿고 공부하는 목적이라 하겠다.
그러나 싫은 생각 없이 착하게 사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중국의 한 장자는 길을 지나다가 구두 수선집 앞에서 발길을 멈추었다.
그 수선집에 엄청나게 큰 신이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장자의 선친이 평생에 신던 신으로, 돌아가신 뒤에 묘에 넣었던
바로 그 신발이었다.
그런데 얼마 오래지 않아 신발을 찾으러 온 이가 있었다.
돌아가신 아버지였다. 장자가 뒤따라가며 '아버님'을 애타게 불러도
아버지는 뒤를 돌아오지 않고 걸어만 갔다.
"아무리 인연이 달라졌다 해도 어찌 부자의 인연을 거들떠보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하나만 여쭙겠습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 남의 미움을 받지 않고,
남에게 장애됨 없이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아들이 공손히 묻자 아버지는 돌아보지도 않은 채 한 마디만 남기고 사라졌다.
"갈번이를 배워라"
장자는 알 만한 사람들에게 '갈번이가 무슨 뜻인지'를 물었고,
마침내 갈번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게 사는 사람의 이름임을 알게 되었다.
장자는 갈번이를 찾아가 '장한 명성을 떨치게 된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갈번이가 답하였다.
"나는 좋은 일이라고는 아무것도 한 적이 없습니다.
다만 남에게 덕이 되는 일을 할 따름입니다."
이후로 장자는 평생토록 덕(德)을 쌓으며 살았다. 남에게 덕이 되는 일은 흔하게 널려 있다.
신발이 비뚤어지게 놓여 있으면 바르게 놓고, 길 가는 이가 목말라 하면 물 한 그릇 떠 주는 것,
이 모두가 남에게 덕을 베푸는 일이며 나의 공덕을 쌓는 일이다.
어느 나라의 태자는 아무런 사는 낙을 느끼지 못했다.
임금의 아들이 되어 온갖 부귀와 영화 속에 살면서도 즐거움이 없었던 것이다.
임금은 '태자를 즐겁게 만드는 사람에게 큰 상을 내리겠노라' 공고하였다.
그러자 허름한 옷차림의 요술사가 나타나서, 태자에게 조그만 쪽지 하나를 건네주었다.
"내가 떠나거든 읽어 보시오."
'세상을 사는 재미란 남을 즐겁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루 한 번씩 남을 웃기는 일을 하십시오.'
쪽지를 본 태자는 그날부터 매일 부모님과 궁녀들에게 웃음을 주는 일을 궁리하고 직접 행하였다.
그랬더니 웃음꽃이 피어났고 모두 즐거워하였다.
이후로 태자는 쓸쓸함과 재미없음에서 벗어나 즐겁게 생활하였다.
이렇듯 내 힘으로 땀을 즐겁게 만들고 보람을 느끼는 것,
이것이 삶의 즐거움이요, 해탈의 주춧돌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가정에서는 부모 자식 간에 즐겁게 보내고, 부부간에 서로 즐거워하고,
형제간에 우애 있으며, 문 밖에 나가서는 이웃과 즐겁게 생활하는 것이
바로 공덕 쌓는 일이요 해탈의 지름길임을 잊지 말기 바란다.
나무 마하반야바라밀
-월간 <법공양> 372호/불교신행연구원-
출처 : 금음마을 불광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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