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부정적 인물: 장형보, 박제호, 고태수, 정주사
속물화되고 타락한 30년대 한국사회 인간상의 대표로 내세웠으며 탁류처럼 혼탁한 의식과 생활 행태를 보이는 인물들이다. 그만큼 이들 모두는 초봉을 이용하고 탐하고 짓밟은 후 효용가치가 없다싶으면 여지없이 버린다.
채만식 그만이 지닌 장기인 특유의 풍자로써 속물들을 꼬집었는데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탁류는 순결한 여인 곧 초봉을 농락하는 고태수, 박제호, 장형보 등, 세 사람의 상징물인 식민시대 당시의 우리 사회를 뜻한다고 볼 수 있으며 그들 모두는 비판과 풍자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러나 연약한 여인 초봉(조선)은 끝까지 이 같은 탁류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하고 물결에 휩쓸리어 끌려 다니기만 한다.
에고 측은한 것.
2) 긍정적 인물: 남승재와 계봉이
지식인으로서 꿈과 희망을 갖고 살아가는 태도를 지녔으며, 제 아무리 열악한 조건을 지닌 현실일지언정 슬기롭게 극복하고 긍정적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하는 인물들이다.
채만식 그는 은근히 남승재와 연인 계봉에게 능력발휘의 기회를 부여하지만 그들에게는 탁류를 헤치고 살아 갈 수 있는 강인한 힘과 애착, 그리고 끈질긴 근성이 모자라게 느껴짐이 조금은 나를 아쉽게 했다.
1930년대와 같은 시대가 다시 한 번 되풀이 된다면 탁류의 주인공들과 똑같은 인물들이 등장하겠지. 하지만, 그때 가서는 초봉이처럼 자신을 무조건 희생하는 여인이 아니라 좀더 강인하고 주관이 뚜렷한 여인이 소설 속을 누비며 주름잡으리라는 사실을 의심치 않는다.
이 소설을 통해 한 시대를 살다간 우리 조상들의 애환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가져본 것은 어느 누구도 지니지 못할 나만의 밀월여행을 실컷 즐긴 기분이 든다.
4. 주제를 찾아 적고 그 이유
주제: 일제 강점기의 혼탁한 사회에서 파멸해 가는 하 여인의 비극적인 삶.
초현대적 페미니즘에 못지않은 여성소설이라고 보는 <탁류>는, 한 여자의 주체할 수 없는 추락을 일제강점기 사회의 부조리로 하나씩 드러낸다. 설령 그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너무나도 비자발적이고 수동적이라 할지라도 열강과 일제에 의해 잠식된 우리나라의 기구한 운명과 계속 동일시되고 비교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초봉의 생애는. 초봉에게는 남성중심의 사상이 만연한 사회에서 여성들이 선택하는 수동적인 삶의 태도와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인 슬픈 연약함이 숨어있다.
신구학문을 두루 공부했음에도 시대의 흐름에 자리를 잃어버린 무능한 아버지의 은근한 강요 아닌 강요에 의해 마음에 두고 있던 연인을 제켜두고 돈이 많고 서울에서 전문학교를 나온 고태수에게 초봉이가 시집을 가는 장면은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인상임을 보여준다. 결혼상대를 물질로 재어보는 실질적 본능을 지닌 여성의 모습에 가깝다. 물론 그 과정에서 아버지의 가난함이 고려할 만한 사정으로 들어갈 수는 있었어도 그것이 초봉의 결혼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지도, 또 미쳤다고 해도 모자란 우리 조선시대의 맏이가 떠맡는 효로 귀결되기에는 무리가 아닐 것이다.
고태수의 죽음 이후 박제호와의 결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고태수와의 혼인보다는 그 자발성이 뒤쳐지지만 15일만에 박제호에게 몸을 허락하는 순간에도 초봉은 억지만이 아닌 능동이 부여된 자발적으로 박제호와 관계를 갖는다. 그 후 박제호에게 부인과의 관계를 들으면서 은근히 기대하는 그 어떤 요행을 지닌 자발적을 가미시킨 채 그의 첩이 됨에 있어 작가는 초봉의 이런 자발성을 직접적으로 비판하기도 한다. 결국 초봉은 여성의 무기로서 지닌 미모와 성을 매개로 남성에게 기대어 육체적인 안위를 취하려는 근대여성의 비극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고태수와 박제호와의 관계가 초봉의 자발성에 근거한 것이라면 장형보와의 관계는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의 오는 분노와 비극을 극단적으로 그리고 있다. 만약, 고태수 박제호와의 관계도 장형보와 같이 비자발적이었다면 장형보와의 관계에 있어 초봉이 특별히 분노할 이유나 정당성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매우 비자발적인 강간, 또 그로 인한 뜻하지 않은 임신은 초봉을 수동적으로 만듦으로서 어찌보면 자신의 삶을 스스로 뭉개버린다고 볼 수도 있겠다. 슬픔과 분노와 치욕을 견디지 못한 초봉은 끝내 장형보를 죽이는 극단적인 행동을 선택한다.
5. 작가소개
채만식(1904∼1950) ◦ 소설가·극작가. 아호는 백릉(白菱). 전라북도 옥구(沃溝) 출생. 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를 졸업하고 일본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부속 제일와세다고등학원 영문과를 중퇴한 뒤 귀국, 동아일보·조선일보·개벽사 기자를 지냈다. ◦ 1924년 단편 <새 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되면서 문단에 등단한 뒤 290여 편에 이르는 많은 작품을 썼다. 초기에는 카프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1930년대에 들어서 동반자적(同伴者的) 경향이 짙은 <사라지는 그림자> <부촌 富村> 등의 단편과 희곡 <화물자동차 貨物自動車>,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를 발표했다. 1933년 <레디메이드 인생>을 발표, 당시 지식인 사회의 고민과 약점을 파헤쳐 풍자 작가로서의 재능을 보였으며, 1937년 장편 <탁류 濁流>에서는 당대 사회 현실의 부조리와 갈등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 ◦ 1935년 기자 생활을 청신하고 한때 금광업(金鑛業)에도 손을 대었으나 주로 창작에 전념, <인텔리와 빈대떡> <명일 明日> <예수나 믿었더면> <집> <치숙 痴叔> <쑥국새> <소망 少妄> <패배자(敗北者)의 무덤> <모색 摸索> <냉동어 冷凍魚> <근일 近日> 등의 단편과 <太平天下> <금(金)의 정열(情熱)> 등 장편을 발표했다. 해방 후에도 중편 <민족의 죄인> 단편 <역정, 歷程> <돼지>, 장편 <옥랑사, 玉浪祠> 등을 발표했는데 폐환(肺患)으로 죽었다. <서울大學校 東亞文化硏究所 編, 國語國文學事典, 新丘文化社,1986> ◦ 희곡으로는 《제향날(1937)》, 《당랑(螳螂)의 전설(1940)》 등이 있다. 또한 《자작안내(自作案內, 1939)》는 그의 문학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다. 그의 작품세계는 대체로 당시의 현실을 반영하고 사회의 비리를 풍자·비판한 것이다. 73년에는 중편 《소년은 자란다》 《과도기》와 희곡 《가죽버선》 등의 유작들이 발굴되어 《문학사상》지에 발표되었다. 89년 그의 작품을 모두 수록한 《채만식전집》이 창작과 비평사에서 완간되었다. ◦ 채만식 소설의 바탕은 아이러니이다. 부정적 인물을 소설의 전면에 내세우고, 긍정적 인물을 후면에 두거나 희화화(戱畵化)할 때, 이 아이러니는 두드러진다. 특히, 부정적 인물들은 더욱 치밀하게 묘사되거나 확고한 신념의 소유자이며, 긍정적인 인물들은 부정적 인물의 조롱의 대상이 되거나 소심한 심성을 지니고 있다. ◦ 채만식은 문학을 '역사를 밀고 나가는 힘'으로 보고, 민족·역사·사회를 제재로 삼았다. 1920년대부터 30년대초까지는 농촌 현실·인텔리의 궁핍상·노동자의 갈등·유이민 현상 등을 부정하는 단편들을 발표했으며, 34년부터 38년까지는 현실 인식의 성숙도와 예술적 성취도가 최고 수준에 이른 시기로, '레디 메이드 인생', '탁류', '태평 천하', '치숙' 등의 대표작들이 나왔다. 39년부터 해방까지 한때는 내선 일체적 작품도 썼으나, 진보적 중간파의 입장에서 당대의 혼란상과 부정적 현상들을 풍자, 비판하였다. 대표작으로 '레디메이드 인생', '치숙', '태평 천하', 논 이야기' 등이 있다.
■연보
◦ 1902년 전라북도 옥구군 임피면 읍내리에서 다섯째 아들로 6월 17일 출생1923년 처녀작 중편 [過渡期]탈고 ◦ 1924년 단편 [세길로]가 {조선문단}에 추천됨 ◦ 1925년 단편 [불효자식]이『조선문단』에 추천됨 ◦ 1933년 장편 [인형의 집을 나와서] 단편 [팔려간 몸], [레드메이드 인생] 평론 [백 명이 한 개를 낳더라도 은 프로 작품을] ◦ 1936년 단편 [언약], [보리방아] 중편 [정거장 근처] ◦ 1939년 장편 [탁류] 上梓함 ◦ 1941년 장편 [금의 정열], [아름다운 새벽] 上梓함 단편 [近日]을 발표 ◦ 1943년 중편 [배비장] 장편[어머니]를 조선총독부의 검열로 [여자의 일생으로 改題발표 ◦ 1946년 [제향날] 발간 ◦ 1947년 창작집 [잘난 사람들] 上梓함 ◦ 1948년 [태편천하] 발간 ◦ 1949년 [옥란사] 탈고 중편 [소년은 자란다] ◦ 1950년 49세를 일기로 永眠(영면)미완성 소설 [소]를 남김
6. 감상
버티고 버틴다고 모래알 같은 애정이 환생인들 할까, 끝내는 비극의 정점에 도달할 수 밖에 없이 뻗어버린 여인의 삶 한 줄기를 읽으며 내뱉은 한숨마저 막힘직한 순간, 다행히도 뾰죽한 끝 하나가 콧속을 쑤시더니 끝내는 눈물을 흘리고 야 말았다 통곡에 가까운. 나도 여자랍시고 본능, 이런 것들이 작용한 것일까?
아무리 픽션이라지만 뒷짐진 채 수수방관 할 수만은 없는 그 시대의 풍자- 풍자라고 해서 그런가보다 하지 단순한 나로서는 사실 풍자임을 알 턱이 없다 그저 한 여인의 고달픈 생애가 가슴을 짓누를 뿐- 이따금씩 고개를 치켜드는 낯설은 언어, 일제 치하였음을 증명하듯 종종 등장하는 일본말이 다르게 느껴질 뿐 내가 사는 이곳과는 30년 이상이나 앞선 시대의 이야기임에도 현실인 것만 같은 느낌은 왜일까?
빈부의 격차, 사기와 공금 횡령, 도박으로 인한 가산탕진, 매춘 행위, 주색을 밝히는 남자들의 속성, 물질 만능주의, 달라진 것이 있다면 옷차림과 거리, 미전이 화투나 카지노로 바뀌었다는 것 뿐. 사회를 비판하는 시선은 현재를 꿰뚫고 미래까지 꿰뚫어 볼 수 있게 하는 것일까? 마치 작가가 몇십 년 후까지도 예언한 것 같은 느낌이다.
이따금씩, 굳혀진 채로 내 안에 잠재되어있는 어릴 적의 모습을 꺼내본다. 들판을 쏘다니다 목이 마르면 언제든 엎디져 마실 수 있는 냇가의 물. 그렇다, 그건 분명 샘물이 아니었음에도 마실 수 있었고 타는 갈증을 풀어줄 뿐만 아니라 상쾌함도 있었다, 이따금씩 목마른 소가 남겨놓은 배설물이 있을지라도 말이다. 게다가 주변엔 그 물맛을 더욱 향기롭게 해주는 들꽃이란 동무들이 있었다.
내가 보는 초봉이는 분명 그 맑은 냇가에서 살아가는 청초한 한 떨기의 야생화였다. 아름다움을 소유하고 싶어서, 약이 된다고 해서, 돈이 된다는 이유로 혹은 그냥 심심풀이 갖가지의 이유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이 소중한 우리의 들꽃을 멸종위기에까지 몰아놓고 있다. 이 소설 속의 고태수, 박제호, 정주사, 장형보 이들은 들꽃을 멸종시키는데 동조하는 무리가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아마도 여고시절인 듯 싶다. 일요일, 오래 전에 과수원으로 변해버린 밭의 옆을 끼고 있는 냇가를 통통 뛰어 다니다 어느 바위 틈에서 어린 시절의 한 때를 발견하곤 얼굴을 들이대고 물을 마셨다. 나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입을 닦게되는 것이 왜 이러나 싶어 어머니에게 달려갔더니 기겁을 하신다. 저 냇가에 수도 없이 버려진 쓰레기들을 보아라. 뒹굴고 있는 농약병을 보아라 그래 그 물을 마셨더란 말이냐? 시골 사람들의 마음에 도시가 스며들어 산성비가 내리고 도랑의 오염을 쓸어모아 하천에 모여들고 다시 오염을 긁어모으며 탁류화 되어 강가로 흘러든다. 도시가 흘러든 사람들의 마음은 제 욕심을 챙겨들고 들을 찾아 야생화를 뽑고 짓밟고 캐고 제 집 꾸미고.
비극의 시발점은 바로 이것이 아니었다 싶다. 왜 하필 도시로 흘러 들었드냔 말이다. 대자연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초봉의 가족이 도시로 흘러들며 1920, 30년대 한국사회의 한 단면을 포착해 내어 그 당시 도시의 밑바닥에서 열악한 삶을 영위하다가 점차 몰락해가거나 이를 극복하기 위해 펼쳐가는 하층민들의 삶을 생생하게 그려내고 있다. 특히 중산층 농민의 몰락과 도시 하층민의 생성이라는 문제가 이 작품에 제시되고 있으며, 그들이 자본주의의 과도기적 병폐에 시달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온갖 부정적인 요소들을 동원하여 탁류에 휩쓸려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자신의 살을 갉아먹는 도시 하층민의 생활 방식을 고발하고 있는 반면, 절망감을 딛고 일어서서 당대 사회의 속악성(俗惡性)과 대결할 것을 기약하는 계봉과 남승재 등의 새로운 인간상도 보여준다. 마지막 장의 제목이 '서곡(序曲)'인 것은, 탁류가 몰고 온 찌꺼기들을 씻어내고 청정시대가 오리라는 희망을 암시한다고 하겠지만 내일에의 기약은 희망으로 예비해 둘뿐 작가 자신도 어쩔 수가 없었나보다.
작가가 그만의 특유한 장기인 풍자로써 초봉의 속물들(세 사람)을 꼬집고 있는데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탁류는 곧 순결한 여인 초봉을 농락하는 고태수, 박제호, 장형보 등 세 사람의 상징물인 식민시대 당시의 우리 사회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연약한 초봉(조선을 지칭함)은 시대의 희생양으로 물결에 휨쓸리여 끌려다니기만 한다. 도시가 쉼 없이 날라다 주는 잔인성에 우롱 당하고 있다.
누군가가 자꾸 깨우는 듯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히 눈을 떠보니 낯선 차에 내가 있었고 낯선 이가 나를 깨우고 있음을 알았다. 낯선 상황은 다름 아닌 교통사고로 인해 가해자의 차에 실려 병원으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사고가 일어난 줄 조차고 모르고 있는 나였는데 그러고 보니 죽음, 그것은 순간에 일어나는 찰나의 행위일 뿐이었다. 나도 모르는 새 저승을 다녀 온 것이었다. 응급실의 간이침대에 누워있는데 응급환자가 들어왔고 응급진들이 오락가락하는 새 시체가 되어 나갔다 내 눈 앞에서. 불과 일년 여전, 생각지도 못했던 내 막내 동생의 경우만 보더라도 당연 그랬다. 죽음이란 그저 순간일 뿐인 것이다.
조선인의 고통을 낳은 식민지 시대의 타락을 배양시켜나가는 고태수, 박제호, 장형보 이 속물들은 누구의 후손일까? 누울자리도 보지않고 다리를 뻗던 장형보 그는 왜 초봉을 비극에 빠트리며 그를 빌어 순간뿐인 죽음을 맞았단 말인가? 그는 스스로 화를 불렀으며 저승길로의 왕도에 초봉이가 안내자 역할을 했을 뿐이라 여겨진다. 병신 지랄 육갑떤다는 게 진리가 되는 양 증명하기 위해 발악하는 자였고 장애자의 망신을 자청한 자라고나 할까? 어쩌면 필요악인 인간이었다 내가 이 글을 읽는 동안에 가진 느낌으로는. 굳어져버린 천품, 넉자 다섯 치의 박절한 일신은 멸시받을 짓만 골라 했고 사악한 천재로 가기 위한 몸부림과도 같았다. 마지막에 가서 장형보를 죽였다는 이유로 초봉을 잔인하다고 해야만 할까? 고태수, 그가 이 장형보를 친구로 두지 않았던들 상황은 달라졌으리. 좋은 친구를 둠은 가장 확실한 사유재산 마련이라는 결론을 얻었다.
문득, 내가 어렸을 때 보아왔던 저주의 모습(폭력, 앙칼진 모습 등등)을 내 것으로 소유하는 순간순간을 발견하고 부르르 몸을 떤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내가 이 글의 주인공이었다면, 알게 모르게 동안 내가 소유해 온 저주의 모습들을 수도 없이 나타냈으리.
글에서 보면 정 주사를 다섯 자의 키라고 했는데 그의 키가 정말 다섯 자라면, 왜 작은 고추의 매운 맛을 보여주지 못했을까? 남편을 잘못 만난 것도 억울한데 우유부단하고 무능한 아버지의 능력까지 책임져야 하다니 여자팔자 기구하다는 그 운명이란 의미가 절로 느껴진다.
장녀로서 가졌던 가족에 대한 희생정신, 그것은 정작 자신의 말세를 부르기 위해 키워왔던 줄기에 매달린 바이러스에 불과했단 뜻일까? 첫걸음 실패 후면 앙칼져질 만도 한데, 선량한 어리석음으로 인해 잡쳐버린-너무 화가 나서 이리 표현했습니다-인생을 그 시대의 나라가 보상해 줄 수는 있을까? 슬픈 건, 내가 시대를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시대에 선택되어져 그 틀에 살아갈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이다 비록 소설 속이라 할지언정.
지금 내가 흘리는 이 눈물도 금강의 한 줄기에 끼어 들어 초봉의 아린 가슴을 쓰다듬어 줄 수나 있을까? 다시는 이 땅에 초봉과 같은 여인이 있어서는 안 된다. 아니 초봉은 그녀 한 명으로 넘치도록 족하다. 집 앞 전봇대 끝에서 까마귀가 진혼곡을 부르는듯 서글프게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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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께서 방향을 잡아 주신 덕분에 서툴게나마 첫번째의 과제물 무사히 마쳤습니다. 고맙습니다.
이 리포트 제출할 때 참고하신 사이트나 도서 목록 제일 하단에 같이 적으셔서 제출하기 바랍니다..... 요즘은 인터넷이나 도서를 많이 이용하고 리포트 쓰기 때문에 도움을 받은 분들에게 예의상 참고문헌 적는게 예의입니다.정말 정리 잘하셨습니다.
자칫, 가장 소중한 부분을 빼고 제출할 뻔 했드랬어요. 덕분에 출근하고선 한 번 더 점검하고 맞춤법이며 등등 살피고 난 다음 목차에 참고 사이트를 넣고 맨 뒷장에 네이버와 채만식 연보 그리도 다음카페 eea-- 엘리트 글쓰기 논술 교실을 넣었습니다. 오늘, 지도 선생님께 호된 채찍을 받았는데 그럴 수록 하찮은 글
하나 내 보이가 두려운 반면 채찍해 주는 분이 계시다는 사실이 뿌듯합니다. 알게 모르게 나의 발전을 이뤄가는 과정이겠죠? 다시금 감사의 마음 전합니다.
지도교수의 채찍이라..... 글쎄요..... 주부에게 너무 지나친 것을 기대하시는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지도교수의 말씀은 아마도 자신의 생각을 더 깊이 서술하라는 의미가 있는 것 같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