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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과 소돔 땅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vangelio de Hoy
Texto del Evangelio (Mt 11,20-24): En aquel tiempo, Jesús se puso a maldecir a las ciudades en las que se habían realizado la mayoría de sus milagros, porque no se habían convertido: «¡Ay de ti, Corozaín! ¡Ay de ti, Betsaida! Porque si en Tiro y en Sidón se hubieran hecho los milagros que se han hecho en vosotras, tiempo ha que en sayal y ceniza se habrían convertido. Por eso os digo que el día del Juicio habrá menos rigor para Tiro y Sidón que para vosotras. Y tú, Cafarnaúm, ¿hasta el cielo te vas a encumbrar? ¡Hasta el Hades te hundirás! Porque si en Sodoma se hubieran hecho los milagros que se han hecho en ti, aún subsistiría el día de hoy. Por eso os digo que el día del Juicio habrá menos rigor para la tierra de Sodoma que para ti».
불행을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길은?
마태오복음을 잘 살펴보면 예수께서 복음선포를 위해 12제자를 따로 선발하신 후,
그들에게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담은 파견설교를 길게 하신 다음
실제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 마르코와 루카는 12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비교적 간단한 여장규칙과 선교지침을 내려받고
곧바로 나갔으며, 얼마 후 다시 돌아와서 자기들이 한 일과 가르친 것을
예수께 낱낱이 보고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마르 6,12.30; 루카 9,6.10)
마르코와 루카가 이렇게 똑같이 12제자의 파견과 활동보고에 관하여 기록하고 있다면,
이는 분명한 사실일 것인데, 마태오가 이를 빠뜨렸을 수도 있겠다.
하여간 마태오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계속해서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돌아다니시며
복음을 선포하시고 기적을 베푸신 것으로 보도한다.
감옥에 갇혀있던 세례자 요한이 제자들을 예수께 보내
예수께서 진정 메시아인지를 물어보게 한 질문은
요한이 예수를 의심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예수님이 진정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이시다.’는 사실을 한층 강조하기 위한
마태오의 편집으로 볼 수 있다.(마태 11,2-19)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는 말씀을 어제 복음에서 떼 내어
오늘 복음과 연결해서 본다면,
예수께서 주시려는 ‘칼’은 분명 경고와 심판을 의미한다.
오늘 복음에서 보듯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주변의 도시들,
즉 예수께서 지금까지 복음을 선포하고 기적을 행하신 코라진(호수 북쪽 3Km),
베싸이다(호수 동편어촌), 카파르나움(호수 북편어촌)에 불행을 선언하신다.
이 불행선언은 곧 멸망의 경고요 심판이다.
이유는 당신께서 가장 기적을 많이 행하신 곳인데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이 모든 기적들을 차라리 죄악의 온상지였던 시돈과 티로
(당시 페니키아, 현재 레바논의 지중해 연안도시:
이사 23장; 예레 25,22; 에제 26-28장; 즈카 9,2-4; 요엘 4,4 참조)에 베풀었더라면
그들은 자루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을 것이며,
소돔에(창세 19장; 에제 16,48-50) 베풀었더라면 소돔이 유황불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남아있었을 것이라고 넋두리를 하신다.
그리고는 코라진, 벳사이다, 가파르나움의 도시들이 시돈, 티로, 소돔의 도시들보다
훨씬 무거운 벌을 받을 것임을 예고하신다.
참으로 무시무시한 예언이다.
만약에 내가 직접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이 들었겠는가?
마태오복음에 의하면 예수께서는 갈릴래아 지방을 떠나 요르단강 건너편 유다지방으로
옮겨가시고(19,1),
거기서 예리고를 거쳐(20,29) 예루살렘으로 상경할 때까지(21,1)는
줄곧 갈릴래아 주변 마을들을 선교하셨다.
뿐만 아니라 예수께서는 유년시절을 포함한 30년이라는 공생활 준비기간을
나자렛과 이곳 도시들에서 보냈다.
즉 예수님의 고향과도 다름없는 곳이었다.
이 도시들이 오늘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아야 했다.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그 어떤 도시와 마을도
오늘 복음의 불행선언을 남의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행복해 보일지 모르나 밤의 어둠이 죄악을 가리고 있으며,
그 속에는 불행의 씨앗이 싹트고 있다. 어쩌면 이미 뿌리를 내렸을 지도 모른다.
“방배동아, 명동아, 남포동아 남천동아, 너희들이 하늘에 오를 성싶으냐?
웃기지 마라. 지옥에 떨어질 것이다.
심판 날이 오면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이와 같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동네가 불행선언을 맞았다고 여겨야 할 것이다.
코라진,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이 티로와 시돈보다 악한 죄악의 도시들이어서
예수님의 불행선언을 맞은 것은 아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통하여 하느님을 직접 보았으며,
그분의 말씀을 직접 들었고 기적의 은혜를 입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회개하지도 예수님을 믿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들이 이 순간 진정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예수님께 믿음을 가진다면
오늘의 불행선언은 곧 행복선언이 될 것이다.
흔히들 불행과 행복의 차이는 그리 멀지 않다고 한다.
그렇다고 자기식대로의 행복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기준으로 삼고 행복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부산교구 박상대 신부
사람을 두려워함은 하느님을 두려워함과 같다
예일대 로스쿨 졸업, 구글과 맥킨지 등 세계적인 기업에서 근무한 경력이 있고,
2006년 미 CBS의 대형 리얼리티쇼 ‘서바이버’ 우승자이기도 하며,
한인 최초 미 국영방송 PBS ‘Link Asia’의 진행자이기도 한
권율 씨가 ‘세바시’에 나와 ‘내 안의 두려움을 극복하는 법’이란 주제로 강의를 했습니다.
그의 경력만 본다면 엄친아로 성공가두만 달려왔을 법하지만
그는 내성적인 성격과 공황장애, 사람들에 대한 두려움으로 자살까지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활달한 성격이었지만
동양인이고, 혀가 짧아 발음이 좋지 않고, 그래서 아예 말을 하지 않아
학교에서는 왕따가 되었고 괴롭힘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화장실에 끌려가서 심하게 얻어맞고 오줌세례를 받은 이후로는
공중화장실에도 제대로 들어가지 못하는 트라우마까지 생겼습니다.
백인이나 여자들을 만나면 셔츠가 다 땀에 젖을 정도로 땀이 나는 증상이 생겼고
결벽증까지 생겨 손이 다 갈라질 지경으로 하루에도 20번 이상 손을 씻어야 했습니다.
중학교 때 세상이라는 이 감옥에서 사는 것이 너무 힘겨워 자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 무렵 자신이 아는 형이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도 이대로 간다면 그런 수순을 밟을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삶을 바꾸어보기로 결심합니다.
수업 때 한 번도 질문해 본 적이 없지만 수업 시작 후 10분 안에 한 번은 질문을 한다든지,
학교에서 하루에 여자에게 말을 한 번은 꼭 걸어본다든지,
드라마 클래스와 토론 클럽에 가입하고 운동도 시작하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정해 놓아도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실패를 인정해주었습니다.
조금씩이라도 매일 나아지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조금씩 발전해나갔습니다.
주위에 부모님도, 형도, 친구들도, 선생님도 자신이 신뢰할 수 있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었던
사람들이 많았다는 것을 그때야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이 두렵게 보이니 모든 사람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런 작은 하루하루의 승리가 지금의 자신을 만들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권율 씨의 하루하루의 일상은 사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한
결심을 실천하는 훈련의 장이었습니다.
이렇게 노력하는 사람과 그냥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크게 벌어집니다.
그는 이 모든 이야기를 ‘나는 매일 진화한다’는 책에 썼습니다.
사람 앞에 설 수 없다면 세상에서 살 수 없습니다.
두려움이 살 수 없게 만드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살려면 세상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해야합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유다 왕국은 큰 위기를 맞게 됩니다.
아람과 사마리아가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진을 친 것입니다.
당시 유다 임금은 아하즈 왕이었고 그는 겁에 질려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이렇게 전하라고 하십니다.
“진정하고 안심하여라, 두려워하지 마라. ... 네 마음이 약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
너희가 믿지 않으면 정녕 서 있지 못하리라.”
두려움은 믿지 않는 데서 옵니다.
하느님께 대한 불신은 자기 자신에 대한 지나친 신뢰 때문에 생깁니다.
자신을 믿으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하느님도 두렵지 않습니다. 두려운 사람을 믿을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이란 믿고 사랑하는 분의 마음을 아프게 할까봐 두려워하는 마음이지
하느님 자체를 두려워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은 믿을 분입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세상이 두렵지 않습니다.
반대로 말하면, 사람이 두려우면 하느님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두려워한다는 말은 믿지도 사랑하지도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상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야 하느님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연습해야 할 것은 하느님 나라에 살 때 그분이 두려워
나무 뒤로 숨지 않기 위해 하느님께 대한 두려움을 없애는 법을 터득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보이시지 않기 때문에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그 훈련을 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면 하느님 앞에서도 설 수 없게 됩니다.
그러니 두려운 사람들이 있다면 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기 위한 연습을 해야 합니다.
성경에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이 365번 나온다고 합니다.
매일 매일 두려움과 싸우라는 뜻일 것입니다.
예수님도 수없이 제자들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을 보고도 두려워하지 말고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이 세상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그들 앞에서도 서지 못하면
하느님 앞에서도 서지 못할 것입니다.
두려운 사람들은 우리의 훈련 대상입니다.
피하지만 말고 극복해봅시다.
모든 불행은 두려움에서 시작됩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사랑합시다.
그런 연습을 오늘도 구체적으로 해 봅시다.
두려움을 극복하면 극복할수록 그만큼 하느님과 더 가까워집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마태 11,20).”
이 말에 대해서, “예수님께서 기적을 덜 일으키셨는데도 회개한 고을들을
칭찬하신 일은 있었나?”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그런 일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개인이 칭찬받은 일은 많지만, 칭찬받은 고을은 없습니다.)
여기서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은
예수님께서 상대적으로 좀 더 많이 활동하셨던 고을들입니다.
(‘가장 많이 일으키신’이라는 표현 때문에
예수님께서 어떤 고을에서는 기적을 더 많이 일으키시고,
어떤 고을에서는 기적을 덜 일으키시고,
그렇게 차별 대우하신 것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닙니다.)
사람들 쪽에서 생각해서, 이 말은 “다른 고을보다 예수님을 좀 더 많이 만나고,
그래서 예수님의 설교를 들을 기회가 좀 더 많았고,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기적을 체험할 기회도 좀 더 많았던 고을들”로
생각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이 말은, 어떤 ‘아쉬운 일’이 있을 때에는 예수님을 찾아와서 간청하고,
그 일이 해결된 다음에는 예수님을 떠나버리는 사람들,
받은 은혜에 감사할 줄 모르고, 회개하지도 않고, 청하기만 하는 사람들,
현세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라고 구원과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에 대해서는
관심 갖지 않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꾸짖으셨다는 뜻입니다.
또 이 말은, 예수님께서 당신이 사람들에게 베풀어 주신 은혜에 대해서
사람들이 고마워하지도 않고, ‘회개’로 응답하지도 않는 것을
서운하게 생각하셨다는 뜻은 아니고,
사람들이 회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더 큰 은총을, 즉 구원과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예수님께서 안타까워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꾸중은 위협이나 협박이 아니라,
심판의 날이 닥치기 전에 빨리 회개하라는 ‘호소’입니다.)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 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1-22).”
이 말씀에서 ‘코라진’과 ‘벳사이다’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 사람들로,
‘티로’와 ‘시돈’은, 예수님의 복음을 들을 기회가 없었던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예수님께서 티로와 시돈을 언급하신 것은,
코라진과 벳사이다의 죄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입니다.
즉 안 믿는 사람들을 언급하신 것은,
‘믿는다는 사람들’의 죄가 크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고,
티로와 시돈 지역 사람들을, 또는 안 믿는 사람들을 칭찬하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이 말씀의 뜻은, “믿는다면 믿는 사람답게 살아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산상 설교에서,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만일에 어떤 사람이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믿음을 실천하지도 않고,
회개하지도 않으면, 그 사람은 ‘믿는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
실천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기 때문입니다(야고 2,17).
(죽은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마태 11,23-24).”
여기서 ‘카파르나움’은 오만한 사람들로 해석됩니다.
그들은 “나는 틀림없이 구원받는다.” 라고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고,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멸시하는 사람들입니다.
루카복음 18장을 보면, 그런 사람들에게 하시는 예수님 말씀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또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며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에게
이 비유를 말씀하셨다. ‘두 사람이 기도하러 성전에 올라갔다.
한 사람은 바리사이였고 다른 사람은 세리였다.’(루카 18,9-10)”
비유 속의 세리는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기도만 하는데(루카 18,13),
바리사이는 자기가 한 일을 자랑하면서,
옆에 있는 세리를 죄인 취급하고 멸시하는 기도를 합니다(루카 18,11-12).
(바리사이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라, 잘난 체하는 일일 뿐입니다.
그는 기도한다면서 다른 사람을 죄인 취급하는 죄를 짓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말씀하신 다음에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8,14).”
의로움을 인정하는 것은 하느님만의 권한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자기 자신을 높이는 것은 교만죄를 짓는 일이 될 뿐입니다.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라는 말씀은,
사람들의 ‘오만함’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기도 하고,
하늘에 오르는 것은, 즉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그 나라의 주님이신 하느님의 허락이 있어야만 가능하다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힘만으로는 하늘에 오를 수 없습니다.)
이 말씀에서 아담과 하와의 죄가 연상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느님처럼 되려고 선악과를 따먹었다가(창세 3,4-6)
에덴동산에서 쫓겨났고, 영원한 생명도 잃었습니다(창세 3,23).
여기서 예수님께서 ‘소돔’을 언급하신 것은,
소돔 사람들이 지었던 죄가 작다는 것을 말씀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오만함’이라는 죄가 얼마나 큰 죄인지를 강조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사실 소돔 사람들의 성적인 타락은 도시 전체의 멸망을 초래한 ‘큰 죄’였습니다.
그러나 잘난 체 하는 사람들의 ‘오만함’은 더 큰 죄입니다.
오만은 하느님의 권한을 침해하고, 하느님을 무시하는 죄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은 창조주 하느님 앞에서 아무것도 아닌 존재입니다.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대단히 어리석은 일이고, 큰 죄를 짓는 일입니다.)
송영진 모세 신부
«¡Ay de ti, Corozaín! ¡Ay de ti, Betsaida!»
Rev. D. Pedro-José YNARAJA i Díaz
(El Montanyà, Barcelona, España)
Hoy, el Evangelio nos habla del juicio histórico de Dios sobre Corozaín, Cafarnaúm y otras ciudades: «¡Ay de ti, Corozaín! ¡Ay de ti, Betsaida! Porque si en Tiro y en Sidón se hubieran hecho los milagros que se han hecho en vosotras, tiempo ha que (...) se habrían convertido» (Mt 11,21). He meditado este pasaje entre sus negras ruinas, que es todo lo que queda de ellas. Mi reflexión no me ha llevado a alegrarme del fracaso que sufrieron. Pensaba: en nuestras poblaciones, en nuestros barrios, en nuestros casas, por ellas también pasó el Señor y... ¿qué caso se le hizo?, ¿qué caso le he hecho yo?
Con una piedra en la mano, me he dicho para mis adentros: algo así quedará de mi existencia histórica, si no vivo responsablemente la visita del Señor. He recordado al poeta: «Alma, asómate ahora a la ventana: verás con cuánto amor llamar porfía», y avergonzado reconozco que yo también he dicho: «Mañana le abriremos... para lo mismo responder mañana» (Lope de Vega).
Cuando cruzo las inhumanas calles de nuestras “ciudades dormitorio”, pienso: ¿qué se puede hacer entre estos habitantes con quienes me siento incapaz de establecer un dialogo, con quienes no puedo compartir mis ilusiones, a quienes me resulta imposible trasmitir el amor de Dios? Recuerdo, entonces, el lema que escogió san Francisco de Sales al ser nombrado obispo de Ginebra —el máximo exponente de la Reforma protestante— en aquel tiempo: «Donde Dios nos plantó, es preciso saber florecer». Y si con una piedra en la mano meditaba el juicio severo de Dios que puede recaer sobre mí, en otros momentos —con una florecilla silvestre, nacida entre los hierbajos y el estiércol de la alta montaña— pienso que no debo perder la Esperanza. Debo corresponder a la bondad que Dios ha mostrado conmigo, y así mi pequeña generosidad depositada en el corazón del que saludo, la mirada interesada y atenta hacia el que me pide una información, mi sonrisa dirigida al que me cede el paso, florecerá en un futuro. Y nuestro entorno no perderá la Fe.
HOME 신학과 영성 신학 슬픈 예수-마태오복음 편
‘신자’는 ‘불신자’와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슬픈 예수] 마태오 복음 해설 - 70
20 예수께서 이적을 가장 많이 행한 마을들이 회개하지 않으므로 그 동네들을 꾸짖으셨다. 21 “코라진, 너는 화를 입으리라. 베싸이다, 너도 화를 입으리라. 너희에게 베푼 이적을 띠로와 시돈에서 보였더라면 그들은 벌써 베옷을 입고 재를 머리에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띠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오히려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23 너 가파르나움, 네가 하늘에 오를 성 싶으냐? 저승에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행해진 이적이 소돔에서 보였더라면 그 도시는 오늘까지 남아있을 것이다. 24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 소돔 땅이 너보다 오히려 더 가벼운 벌을 받을 것이다.” (마태 11,20-24)
▲ ‘베타니아의 예수’, 제임스 티소의 작품(1894년)
갈릴래아에서 예수의 활동이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으로 마무리됨을 암시하는 단락이다. 코라진은 갈릴래아 호수 북쪽으로 약 3㎞에 위치한, 가파르나움 위쪽 마을이다. 요르단강과 이어지는 호수 동쪽에 위치한 마을 베싸이다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딸 율리아를 기념하기 위해 영주 필리푸스가 공통년(서기) 2년 전에 세우도록 명령한 마을이다.
막달라, 티베리아스, 세포리스 등과 달리 갈릴래아 호수 북쪽 마을만 언급된 점이 특이하다. 유다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이기에 그런 것 같다. 띠로와 시돈은 이방인들이 많이 살던 지역으로 공동성서(구약성서)에 이스라엘의 적으로 표현되었다(이사 23; 에제 26―28).
코라진을 저주한 20절은 의아하다. 예수는 거기서 이적을 행한 기록이 복음서에 없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밖 시리아에 살던 마태오 공동체는 이 말에서 그들의 이스라엘 선교 노력이 실패하리라 예수가 예상했다고 느꼈겠다. 회개할 때 쓰는 베옷(요나 3,5-)과 재(다니 9,3)는 공동성서적 표현이다.
오늘의 심판 예고는 두 가지를 전제한다. 심판 날에 의로운 이의 부활 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부활이 기대된다. 심판의 상벌은 여러 가지로 다르다. 심판 날은 공동성서에서 익숙한 표현이다(이사 34,8; 유딧 16,17). 심판(krisis)은 마태오 복음서에 12번 나오는 단어다. 영어 crisis(위기)는 여기서 비롯된다. 하늘과 저승은 공동성서에 반복되어 나타난다(아모 9,2; 시편 139,8). 저승(sheol)은 처벌받는 지옥이 아니라 모든 죽은 이가 가는 곳이다. 오늘의 단락과 가장 가까운 표현은 이사야서 14,9-15 같다. 띠로와 시돈은 그 부유함과 사치로 공동성서에서 비난받던 상징적인 마을이다. 소돔은 저주받은 땅 자체를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된 곳이다.
가파르나움이 어디라고 예수는 저주를 퍼붓나. 그곳은 예수가 살던 마을이다(마태 9,1). 그곳으로 이사 온 것은 예언서의 말씀을 이루기 위한 것일 정도로 의미 있는 사건이다(마태 4,13-). 그런 고향을 예수가 저주했으니 마을 사람들의 충격은 대단하겠다. 예수에게 특혜 받은 지역은 없다는 뜻이다.
예루살렘, 로마, 미국 등 예수에게 특혜 받을 땅은 지구상에 없다! 예수에게 특혜 받을 사람도 지구 위에 없다. 가난한 사람들과 성인성녀만 예수에게 특혜 받는다. 오늘 등장하는 마을이 예수에게 저주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예수의 이적(異蹟) 행위에 나타난 하느님 나라를 깨닫지 못하고 회개를 거절했기 때문이다. 특정한 지역이나 그룹을 비난하자는 뜻이 전혀 아니다.
예수를 오래 알아왔지만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큰 문제다. 오늘 그리스도교의 위기는 대부분 내부에서 생겼다. 그리스도교 밖보다 내부가 사실 더 심각한 위기다. 지금 그리스도교에 가장 시급한 것은 선교가 아니라 회개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리스도교가 진실로 회개한다면 선교는 저절로 될 것이다. 회개를 회피하려고 선교에 집중하는 수법은 헛된 작전이다. 자신부터 회개해야 할 사람들이 회개하자고 외쳐대는 풍경은 참 야릇하다. 개혁 대상들이 개혁하자고 깃발 들고 완장 차는 모습과 비슷하겠다. 정치에만 그런 술수가 있는 것이 아닌 듯하다. 그런 교묘한 술법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교황 프란치스코 취임 이후 느닷없이 개혁을 외치는 종교인들―그들의 평소 모습과 달리―이 가톨릭에 수두룩하다.
오늘 단락에서 마태오는 예수의 사명에 대한 사람들의 책임 있는 태도를 강조한다. 하느님의 은총은 인간의 책임을 박탈하지 않고 무시하지도 않는다. 하느님의 은총은 제대로 깨달은 사람일수록 책임감이 더 강하다.
마태오는 또한 믿음의 공동 운명을 강조한다. 가파르나움 사람들 모두가 예수를 거절한 것은 아니다. 거기에도 예수를 따른 제자들은 있었다. 그럼에도 가파르나움은 저주받은 것이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게 우월감을 가질 것이 아니라 공동 책임을 져야 한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쓸데없는 우월감은 신학적으로도 근거가 없다.
성서에서 심판이나 저주 같은 낱말을 보고 당황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느님이 뭐 저리 옹졸한가? 어떤 부모가 자녀에게 닥칠 위험을 마련해 놓을까? 자녀에게 닥칠 위험을 부모는 미리 알리려 애쓸 뿐이다. 저주받지 않도록, 심판에서 살아남도록 예수는 사람들에게 알리려는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예수는 그렇게 표현하였다. 구원도 심판도 사람들 수준을 감안한 교육학적 방식을 통하여 전달되었다. 하느님이 옹졸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뜻을 전하는 예수의 방식이 인간적이다.
예수의 언어 사용에 몇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청취자의 운명에 동참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같이 식사한다. 둘째, 청취자가 쓰는 언어를 존중한다. 비유를 즐겨 사용한다.
가난한 사람들과 예수처럼 식사를 자주 한 위대한 인물이 어디 그리 흔한가. 그러나 사람들의 운명에 동참하긴 싫고 하고픈 말은 많다면 어찌 될까. 오늘 종교인들의 말에 힘이 없는 까닭이 거기에 있지 않을까. 말을 많이 하되 삶이 귀족적이면 어떻게 될까? 귀족적인 삶을 포기하지 않고 설교를 자주 하면 그 말은 추락할 뿐이다.
그러나 예수는 말과 삶이 다른 분이 아니었다. 예수는 현장에서 신학을 설파한 분이다. 구원은 현장에서 시작된다. 신학자 또한 현장을 의식해야 한다. 성서신학도 현장을 주목해야 한다. 성서신학이 그저 옛 문헌을 연구하는 학문인 것은 아니다. 성서에 등장한 단어와 문장 분석으로 세월 보내는, 그래서 오늘을 판별할 수 없는 성서신학자라면 아직 반쪽짜리 학자다.
성서 저자들은 언어의 힘을 믿은 사람들이다. 진리는 언어 속에 온전히 담겨 있진 않지만, 진리는 반드시 언어를 통해 전달된다고 그들은 믿었다. 언어 아닌 방법으로 진리가 전달된다고 믿은 사람들에게 진리의 대중적 전달 방식인 언어를 무시하고 비밀스런 엘리트적 전달 방식을 더 좋아하는 경향이 흔히 있다.
그러나 성서는 언어로 기록되었다. 성서가 만일 기록되지 않고 일부 특수한 사람들의 비밀스런 방법으로 후대에 전승되었다면 그리스도교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 복음서 저자들이 예수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고 바울의 편지만 남아 있었다면 또 어찌 되었을까.
김근수 (요셉)
연세대 철학과, 독일 마인츠대학교 가톨릭신학과 졸업. 로메로 대주교의 땅 엘살바도르의 UCA 대학교에서 혼 소브리노에게 해방신학을 배웠다. 성서신학의 연구성과와 가난한 사람들의 시각을 바탕으로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역사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마르코 복음 해설서 <슬픈 예수 : 세상의 고통을 없애는 저항의 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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