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전 2:13~20)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그분 앞에서 우리의 소망이나 기쁨이나 자랑의 면류관이
무엇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아니겠습니까?
여러분이야말로 우리의 영광이요, 기쁨입니다.'
(19~20절)
바울이 데살로니가 성도들에게 보내는 서신이다.
성도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사람의 말이 아닌 하나님이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기뻐하고 감사한다.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지만
하나님의 말씀이라 받아들이는 현상.
이 현상 안에도 복잡하고 기묘한 일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이 입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과정에도
순전히 자신의 지식과 능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 재료가 중요한 바탕이 되지만
거기에 더해지는 하나님의 +a적 은혜가 더해져서 역사가 이뤄진다.
그 말씀이 영적으로 갈급한 성도에게 들어가면
내 기억, 지식, 뜨거운 마음, 영감 그리고 표현하기 어려운 확신이
버무려지고 작용해서 은혜로 다가온다.
이런 현상을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전인격적, 성령충만함, 영적?
아무튼 건조하고 단순한 현상이 아닌
하나님께서 개입하심을 통해 느껴지고 믿어지는 과정이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데살로니가 성도들은 세상의 강한 탄압 속에서도
복음을 전했다.
여기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을
단순히 '교리를 전파했다.'로 이해한다면
다소 문제가 있다.
당연히 교리와 메뉴얼을 전하는 것이 포함되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의 하나이지만)
삶과 행동, 모든 인격적 작용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굳이 강조하는 것은,
입으로만 전하는 복음의 부작용이
현세에 '충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균형의 원리를 위해서
행위를 강조하게 될 수밖에 없는데,
또 어리석은 성도들은 '행위'의 부작용을
근본주의적, 이론적으로 거론하며
비판, 또는 악마시 한다.
지금 결핍한 것은 더 강조할 수밖에 없다.
아무튼 그들이 세상의 강한 탄압(실제로 당해보지 않으면
결코 그 강도를 짐작하기도 어려울)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않는 것은,
복음 때문에.
주님 때문에.
사랑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지금의 탄압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크고도 위대하기 때문에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관건은 복음, 주님, 사랑의 위대함을
느끼는 사람인가,
느끼지 못하는 사람인가에 달려 있다.
'주님이 우리에게 진리를 위해
고난을 받게 하신다면 이는 우리에게
크나큰 특권이 아닐 수 없다.' (찰스 스펄전)
"하나님, 아침에 여러가지 세상 일, 업무로
마음이 흐트러집니다. 사실 아무 것도 아닌데
마음의 헝크러짐을 어쩔 수가 없네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잘 마음을 정리하게 해 주십시오.
양정환, 광주의 집에 오랜 만에 복귀하였습니다.
이어질 치료의 과정에 함께 해 주십시오.
양소영, 많은 회복이 있음에 감사합니다.
소영이와 제가 지금처럼 항상 사랑하고
뜨거운 정과 감사 안에서 지내게 해 주십시오.
대학교 일과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복음의 원리대로
행하게 해 주십시오.
감사드리며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