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색을 조건으로 해서 육입이 있다. 육입은 육내입처(六內入處)다. 명색이 생기면 명색이라는 대상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로 냄새 맡고, 혀로 맛보고, 몸으로 감촉을 느끼고, 뜻으로 생각하면서 그러한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보고, 촉감을 느끼고 생각하는 주체가 곧 ‘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명색을 감각하는 존재를 ‘나’라고 착각하는 의식이 바로 육입이다.
당연히 이 육입은 멸해야 할 것이다. 육입을 멸한다는 것은 곧 ‘나’라는 허망한 착각을 멸하는 것으로, 이는 곧 무아를 깨닫는 것과 다르지 않다.
앞에서 설명했듯이 육입은 육경[명색]이라는 인연과 화합하여 연기적으로 생겨난 것일 뿐 실체가 아니다. 연기는 곧 비실체성이며, 무아이기 때문이다.
육입이라는 허망한 착각을 소멸시킨다는 것이 곧 여섯 가지 감각기능이 마비되어 쓰지 못한다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사라진다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여섯 가지 감각기능과 활동을 보고 ‘나’라고 착각하지만 않을 뿐, 우리는 여전히 여섯 가지 감각기능을 잘 사용할 수 있다. 그것이 바로 육근청정(六根淸淨)이다. 육근이 청정해지면, 눈으로 무엇을 보든, 귀로 무엇을 듣든, 코로 어떤 냄새를 맡든, 혀로 어떤 것을 맛보든 그 대상에 휘둘리지 않고, 사로잡히지 않는다. 괴로움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십이연기에서는 식-명색-육입의 순서로 나와 있다 보니 이를 시간적인 선후관계로 착각할 수도 있지만, 사실 식, 명색, 육입은 동시적인 것, 연기적인 것이다. 연기적으로 생겨난 것은 동시생 동시멸이며,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 연기적으로 생겨난 것은 생겨나도 생겨난 바가 없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은 식, 명색, 육입을 실체적으로 존재하는 자아와 대상과 의식이라고 파악하기에, 그렇듯 실체화하는 허망한 착각을 소멸시켜야만 착각으로 인한 모든 괴로움이 소멸될 수 있는 것이다.
글쓴이:법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