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곁에 룻이 있다.
찬송: 새 찬송가 429장 (찬송가 489장)
[룻기 (Ruth) 1:15 - 1:22]
나오미의 거듭된 권고에도 룻은 돌아가지 않고 시모의 백성과 하나님께로 들어옵니다. 한편 자신을 알아보는 여인들에게 나오미는 쓰디쓴 인생을 한탄합니다.
{룻 1:15~22}
15 그러자 나오미가 다시 타일렀다. “보아라, 네 동서는 저의 겨레와 신에게로 돌아갔다. 너도 네 동서의 뒤를 따라 돌아가거라.”
16 그러자 룻이 대답하였다. “나더러, 어머님 곁을 떠나라거나, 어머님을 뒤따르지 말고 돌아가라고는 강요하지 마십시오. 어머님이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님이 머무르시는 곳에 나도 머무르겠습니다. 어머님의 겨레가 내 겨레이고, 어머님의 하나님이 내 하나님입니다.
17 어머님이 숨을 거두시는 곳에서 나도 죽고, 그 곳에 나도 묻히겠습니다. 죽음이 어머님과 나를 떼어놓기 전에 내가 어머님을 떠난다면, 주님께서 나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더 내리신다 하여도 달게 받겠습니다.”
18 나오미는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마음먹은 것을 보고, 더 이상 말리지 않았다.
19 그 두 사람은 길을 떠나서, 베들레헴에 이르렀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니, 온 마을이 떠들썩하였다. 아낙네들이 “이게 정말 나오미인가?”하고 말하였다.
20 나오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나를 나오미라고 부르지들 마십시오.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몹시도 괴롭게 하셨으니, 이제는 나를 마라라고 부르십시오.
21 나는 가득 찬 채로 이곳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나를 텅 비어서 돌아오게 하셨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치시고, 전능하신 분께서 나를 불행하게 하셨는데, 이제 나를 나오미라고 부를 까닭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22 이렇게 하여 나오미는 모압 여인인 며느리 룻과 함께 모압 지방에서 돌아왔다. 그들이 베들레헴에 이르렀을 때는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하나님은 어떤 분입니까?>
21,22절 텅 빈 인생을 은혜로 채우시는 분입니다. 흉년 때 나갔던 나오미가 “보리 추수 시작할 때”돌아옵니다. 주님의 시간에는 착오가 없습니다. “때를 따라 아름답게” 하시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전도서 3장 11절) 비어 돌아왔지만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 주님은 나를 괴롭히는 분이 아니라 위로하시는 분입니다. 인생을 빼앗는 분이 아니라 빼앗긴 인생을 되찾아주시는 분입니다. 가장 적절할 때에 가장 선한 것으로 채우시는 주님을 신뢰하고 계십니까?
<내게 주시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15~17절 오르바는 돌아갔지만, 룻은 하나님과 그의 백성에게로 돌아갑니다.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다(신명기 23장 3절)는 큰 장벽에도 이방 여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 되지 않고 하나님을 믿는 길은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몸에 속하지 않고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안전하고 편한 신앙’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들에게, 그들은 내게 오도록 용납하는 믿음의 모험을 감행하고 있습니까?
15~18,21,22절 나오미에게 룻은 상실의 증거이자 잊고 싶은 과거일 것입니다. 분명히 “룻과 함께 돌아왔는데” 나오미는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고 말합니다. 나오미가 간과한 룻을 성경은 드러냅니다. 내가 숨긴 기억을 주께서 드러내십니다. 누구다 따라오지 않기를 바라는 과거가 있습니다. 자랑스럽지 않은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과거가 내게 복이 됩니다. 상처가 나를 구원합니다. 내가 무시하고 싶지만 내 곁에 두신 복, 나의 룻은 누구입니까?
19,20절 자신을 알아보는 여인들에게 나오미는 자신을 ‘마라’라 부르게 합니다. 자신의 인생에는 더 이상 ‘기쁨’이 없고 ‘괴로움’만 남았다고 여겼습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하나님에 대한 기대도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론이 너무 성급합니다.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라는 다시 나오미가 될 것이고, 웅성대던 여인들은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4장 14절) 현실이 어둡다고 해서 너무 빨리 마침표를 찍지 마십시오.
<기도>
공동체- 믿음의 공동체에 헌신하기로 한 다짐을 잘 지켜내게 하소서.
열방- 유럽 전역에는 난민을 향한 증오 범죄와 인권침해 사례가 증가하고 있다. 각국 정부와 사회가 난민을 인도주의적인 차원에서 대우하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