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인간을 상대로 전면전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사스와 관련된 '충격과 공포'는 과장된 측면도 많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사스에 감염된 환자의 90% 이상이 단순한 감기 정도의 증상에 그치며, 치사율도 일반 폐렴보다 높지 않다고 한다. 왜 세계는 사스의
공포에 사로잡혀 있는가? 바로 '불확실성' 때문이다. |
지난해 11월
중국 광둥성에서 시작된 정체 불명의 괴질이 확산되면서 지구촌이 두려움에 떨고 있다. 사스 SARS (Sever Acute Respiratory
Syndrome, 중증 급성 호흡기 증후군)로 명명된 이 질병은 알려진 대로 전 세계 30개 이상의 국가에서 수천 명의 감염자를 낳았으며, 수
백명의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세계보건기구 WHO는 여행 제한을 권고하기에 이르렀으며, 세계 각국의 환자 통계를 취합해 환자 발생 일보를
내는 조치를 내렸다, 과연 이것은 정확한 판단과 대처법일까? 사스와 관련된 충격과 공포는 과장된 측면도 없지 않다. 실제로 사스에 감염된 환자의
90% 이상이 단순 감기 정도에 그치며, 치사율도 3~4%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은 일반 폐렴 치사율보다 낮은 수치다. 이렇게 임상학적으로
사스의 위험성은 다른 전염병에 비해 높지 않지만 전 세계가 '제3차 세계대전의 양상'이라며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바로 '불확실성' 때문이다.
'천의 얼굴' 바이러스의 또 다른
이름
바이러스는
라틴어로 독毒을 의미한다. 전자 현미경으로 보아야 할 만큼 크기가 작다. 생존에 필요한 물질인 핵산(DNA 또는 RNA)과 소수의 단백질 만을
가지고 있으므로, 그 밖의 모든 것은 숙주 세포에 의존하여 살아간다.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증식과 유전이라는 생물 특유의 성질을 가지고 있어
대체로 생명체로 간주된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의하면 4000개 이상의 바이러스가 존재하며, 감기를 비롯해 에이즈·인플루엔자·천연두·간염·홍역·헤르페스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문제는 바이러스가
숙주에 기생하며 사람의 몸도 여기에 해당된다는 점이다. 그리고 바이러스가 '천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끊임없이 진화하고 돌연변이를
거듭하기 때문에 바이러스와의 전쟁은 힘겹고 고단한 '네버엔딩 스토리'다. 사스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만 해도 실은 감기를
일으키는 비교적 얌전한 병원체다. 보통 감기의 3분의 1이 이 바이러스 때문에 일어난다. 그런데 동물의 몸속에서 만들어진 새로운 변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출현해 홍역과 비슷한 치사율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동물로부터 인간에게 전이되어 강력한 독성을 나타내는 바이러스는
1990년대부터 계속 출현하고 있다. 동물에 적응된 바이러스가 어느순간 돌연변이를 일으켜 사람에게 전이되면 백신이 개발되기 까지 속수무책으로
바이러스의 위협을 받게 된다.
람세스 4세와 아즈테카 문명을 둘러싼 수수께끼
인류의 탄생 이후
끊이지 않은 수많은 질병은 바로 바이러스와의 싸움을 의미한다. 진퇴를 거듭하는 바이러스 때 인간의 싸움은 끝날 줄 모르는 진행형이다. 인간이
18세기 에드워드 제너가 개발한 백신을 무기로 대항하고 있다면, 바이러스는 사스의 경우처럼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형태로 변신을 거듭하며 인간을
괴롭히고 있다.
바이러스가 인류를
상대로 한 전쟁의 흔적은 무수하다. 기원전 1100년 이집트의 파라오였던 람세스 4세의 미라는 얼굴 부위에 천연두를 앓았던 흉터가 남아 있는 채
카이로 박물관에 안치되어 있다. 또한 아메리카 대륙 정벌이 한창이던 16세기 유럽을 휩쓸었던 천연두가 남미의 아스테카 문명권을 덮치면서 350만
명의 원주민이 사망, 스페인 군이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가장 끔찍한 피해로 기록된 바이러스는 단연 1918년 전 세계에서
2000여 만 명의 사망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다. 1990년대 들어 당시 사망한 군인의 시체로부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를 분리해 분석한 결과,
인간의 세포에 침투할 때 필요한 헤마글루티닌 유전자가 그 이전에 발견된 것과 다르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변종을 만들지 않아
인간에게 완패를 당한 바이러스도 있다. 천연두 바이러스는 원래 감염자의 20%가 목숨을 잃고 살아남은 사람의 65~80%는 얼굴에 곰보 자국이
선명하게 남을 정도로 위력적인 바이러스였다. 하지만 변이를 선택하지 않는 바람에 세상에서 자취를 감췄다. 백신의 보급과 함께 위세를 잃기 시작해
1978년 8월 이후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치료제가 밝혀진 바이러스의 종류는 그다지 많지 않다. 따지고 보면 바이러스의 존재를 알아낸 것도
그리 먼 과거의 애기가 아니다. 1982년 러시아의 이바노프스키가 담뱃잎에 해를 입히는 모자이크병의 병원체가 세균을 걸러내는 여과기를 통과할
정도로 작은 물체라고 보고함으로써 인간에게 처음 감지된 것이다.
바이러스 대 인간의 대결, 끝나지 않는 전쟁
그렇다면 인류는
변신의 귀재인 바이러스를 정복할 수 있을까?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일이지만
의학계는 '붉은 여왕 효과 Red Queen Effect' 를 빌려 현실적인 답을 내놓고 있다. 루이스 캐럴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면 앨리스가 붉은 여왕을 만나 그에게 손목을 붙잡힌 채 정신없이 시골길을 달리는 대목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무리 빨리 달려도 제 자리
걸음을 할 뿐이다. 의아해하는 앨리스엑 여왕은 "이곳에서는 있는 힘을 다해 달려야만 제자리에 머물 수 있다"고 말한다. 이처럼 생물들은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끊임없이 진보하는 것이 아니라 도태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바이러스가 반드시 사람을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는 점이다. 한정된 지역에 있는 사자가 자신의 먹잇감을 다 먹어버리면 그 자신도
굶어 죽을 수 밖에 없는 것처럼, 바이러스 역시 적당한 독성을 발휘하는 종들만 살아남아 숙주인 사람을 죽이지 않고 적절히 이용해 번식하는 길을
찾는 다는 것이 바이러스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특히 사람만을 숙주로 하는 바이러스들은 사람과 거의 공존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를 두고 일부
전문가들은 숙주인 사람과 우리가 병원체로 생각하는 바이러스가 공존하는 것도 하나의 자연 질서라고 입을 모은다. 어차피 인간의 방어 노력이
지속되는 만큼 바이러스 역시 새로운 숙주를 찾아내 그 속에서 번식하고 생존하기 위한 돌연변이를 계속해 나갈 것이다.
<집단 정신의 진화>를
펴낸 마이크 블롬은 바이러스를 포함한 고대의 미생물들이 장거리 전달, 데이터 교환, 새로운 해결의 열쇠를 끌어내기 위한 유전적 변형, 게놈을 재
조작하는 능력 등을 각추고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다. 인류의 지적 성과물을 세계적으로 소통시키는 정보 통신 네트워크가 인류의 미래를 바꿔놓을
것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고 있는데, 고대의 미 생물은 세계적인 정보 교환의 기술을 이미 오래전에 습득한 셈이다. 어쨌든 지금까지 숙명적
적대 관계로 인식된 바이러스와의 새로운 관계 설정이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될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글·노중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