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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백작의 역사관은 과거도 오늘도 아닌 미래지향이다
<평창읍 동북 오층석탑-조선고적도보 6권>
<동 탑의 감상 소견에서 미래지향적이란 사실은??>
오늘은 지난 1918년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평창읍의 동북 오층석탑에 관한 감상으로부터 과연 역사는 무엇인가??
나의 친구들왈,, 역사가 돈이되냐 뭐냐하고 무식하게 이야기하지만 정녕 역사는 오늘을 파악하여 미래를 준비하는
인간의 생활에서는 떨칠수 없는 필수불가결한 점이란 것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동 탑은 현재로서는 그 위치를 알 수 없는데 중리 오층석탑과 상리 오층 석탑에 관한 이야기는 잇고 이 두탑이 모두
현 평창경찰의 오층석탑이라 하지만 경찰서의 탑은 옥개석이 5개 쌓아 올렸지만 두곡내지 세곳에 다른 탑재이며
또한 기단석은 없는 점으로 어디에 있었던 하나의 오층석탑이라 하기는 모순이며 아마도 삼층석탐의 짬뽕인 것입니다.
본 글에서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보다는 이 탑을 보며 이해할 수 있는 감상소견을 피력하고저 합니다.
탑의 전문적 지식이 없이 보통 사람이 이 탑을 감상한다면 위 사진에서 보는바와같이 탑의 옥개석이 반듯하지 못하고
각층마다 옥개석의 전각이 (처마지붕) 제각각의 곡선을 그리는 어수선한 졸작으로 치부해 버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나라 학계는 탑의 미학적인 자취는 뒤로하고 안상이니 팔부중상이니 옥걔석의 반전이니 옥개석의 층급이
3, 4, 5층의 여하등으로 시대순만 정열하는듯 합니다만, 본인의 감상소견은 동 탑을 만든 석수 스님은 최소한 2명 이상일
것이고 탑신부에서 5층까지의 옥개석 조각에 두개의 양분된 조각 수법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동 탑은 옥개석 층급이 4개이라 신라시대엔 5개. 고려시대는 3개의 과도기 시기로 신라말쯤의 석탑으로 구분해보며.
초층(1층)과 맨 위의 5층 옥개석은 위로 반전되는 곡선으로 나타나고 2,3,4층의 옥개석은 직선에서 끝만 들려올라간
것을 볼수있다.
여기서 2,3,4,층의 옥개석은 신라적 경향을 띠는데 비해 초층과 5층 옥개석은 고려적 색체를 나타낸다면 두 사람의
석수공이 다른 출신이란 점으로 볼 수 있고 그래도 그들이 똑같은 모양을 하지 못하고 자기의 특성을 살리는 것은
무엇일까 하는 관점에 이해를 그려 보이겠습니다.
2, 3, 4층의 신라양식의 조각을 한 석수공은 "정형탑"이라고 이름붙여진 신라탑 양식의 전통적 조각 수법 그대로 이어서
무리없이 잘 하였다고 칭찬받고 편안한 행보를 하였슬 것이다.
하지만1, 5층 석탑을 조각한 석수공은 위에서 언급한 고려적 조각 수법이 아니라 기실 정확히 이해하자면 고려 양싱의
출현이 도래되기 이전에 조각으로 고려양식이 아니라 이러한 변형으 발전이 고려양식으로 굳혀지는 것이다.
그는 전통양식을 따라가면 문안할텐데 왜 당 시대의 이상적 아룸다움인 "정형탑"의 범주를 넘어서 주관적 견해로 무엇인가
새로움을 찾고자 하였다.
어찌보면 그것은 기존의 완벽함속에서도 또 다른 도전이고 새로움을 창조하려는 미래에 대한 도전이다. 이러한 도전은
기존질서에서 보면 자신들의 美의 질서를 파괴하는 추함으로 인식되는 것이고 이로서 민심은 외면할 수도 있어 찬밥신세가
될 수도 있는데, 이러한 위기상황을 알면서도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창조와 도전은 아마도 인간의 본능 아닌가 합니다.
여기에서, 신라양식을 추구하던 석수공은 일 잘하고 별탈없이 편한 인생을 즐기지만 그에겐 머리가 필요없지 않은가??
그의 인생은 개 목줄이 끓리듯 지배층이 이리끌면 이리로, 저리로 끌리는 인생에 머리작용 또한 없으니 돼지같은
끼니만 해결하는 인생이라. 그저 덧없는 세월만 흐르다 저세상으로 가는 개. 돼지만도 못한 인생이리라,
천년 문화역사를 지닌 신라는 세계 어디에도 유래가 없는 장구한 역사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백제도
600여년의 장수 국가로 그들은 강감찬, 을지문덕, 김유신등의 장수가 외세를 물리치는 국력도 가지고 있던 강대하면서도
문화적으로도 살기 좋은 나라였습니다만 모든게 영원이란 없듯시 천년 고도의 신라도 흥망성쇠에 쇠약해 집니다.
위 탑은 고려시대이든 신라말이든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러한 신라 역사의 말기적 현상에 예술이 시대를
앞서간다는 말처럼 신라 말기의 문화적 이탈현상을 그대로 보여주는 도표이기도 합니다.
그러기에 후자는 머리가 없는 개, 돼지에 비유하였지만 전자는 창조정신에 이름 석자는 남을 수도 있고 목구멍에만
연연하지 않은 미래 도전의 창조적 인간형이다. 그런 노력들이 있었기에 탑파에서 후일 고려 양식이 구현되는 것이다.
결말부에서 다시 이 두가지 유형을 다시 한번 인용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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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들 인용 비교론에서>
그럼 여기서 시골 나의 친구 두명을 들어 두가지 유형을 얘기 합니다.
엇그제 시골친구와 통화에서 부드럽게 말 잘하던 친구에게 너 조동리 좀 아냐고 물었더니 군에서 철거했다는데 그
암자말고 돌기와 나는곳인가에 있슬 절골말이다 했더니 어 거기 하면서 내 좀잇다 전화할께 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곤 몇일을 두고봐도 연락이 없었다. 내가 그런 글쓴지도 모를친구가..이 자석...내가 책장사인줄 아는 모양이지??
아마 지난 겨울 나에게 재수없는 불똥 하나에 대해 소문을 들은듯 하다. 읍네에서 방귀뀌면 조동에선 똥쌓다고도
할 일이겠지. 본론도 꺼내기 전에 이 친구도 그런역사 뭐 돈되냐고 하는 생각인듯 하다.
또 한명의 친구는 지난해인가 "김삿갓은 죽어서 천동을 다녀간듯"이란 글을 쓰다가 영월로 넘는 엣날길은 어디일까
하는 의문에 고도치재 아래 골짜기에 들어가면 딱 한집이 친구집이라, 그의 친구치고는 본인만 그 친구네 집을 방문한
적이 있는데..지도를 보니 거기에 다래산인가 해발 500m이니 기준표고 350m만 잡으면 150m 산을 오르면 영월 공기리
아랫골로 들어가게 보이던데, 그곳으로사람이 넘어 다니냐 하고 물어본 적이 있다.
그곳엔 길이 없고 역시 천동에서 도마치 골로 상도마치 아래 내려서면 공기리 골로 통하는게 옛날 길이었다고 볼수 있다.
그래 끝 인사에서 그 친구왈,, 연구 잘 해서 평창을 위해서 좋은글 잘 쓰라고 한다.
친구사이에 이런 인사가 정상적 예의일텐데..
아니 이보다 더욱 열의있는 친구는.. 언젠가 지동리 사는 친구와 통화중에 그곳에서 청옥산을 오르는데는 어떻냐,
시간은 얼마 걸리냐 하고 소상하게 물어보니 왜 그러는고 묻길래..청옥산의 아리랑의 상징이고 정선아리랑이 차용해가서
자기내 아리랑이라고 찍어 메달았는데, 미탄으로 오르는 길 말고 이쪽 길도 용이하다면 평창사람들과 청옥산의 관계는
어떨까 하는 생각에서다. 그저 그래 하고 답을 했더니 그 친구왈 그럼말이야 이곳 지동리는 더 이상 갈길이 없는 끝으로
아주 오지인데 왜정때 일본놈들이 지동리라 했지 그 이전엔 큰 못이있어 못골이라 했는데 혹시 이거좀 찾아보고 연구해
관광객이 좀 들어오게 해 주라는 부탁이다.
말 하나라도 놓치지 않고 혹시나 하는 느낌에 던지는 부탁의 그의 애향심에 정말 감사한다.
물론 밀린숙제하듯 간밤에 장문을 쓴다고 개발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말에 오르내릴때 자기 고향에 더 애착이
가지 않으련가?
하지만 친구사이에 무슨 손해를 본다고 말도꺼내기 전에 박절하게..결론적으로 그 친구는 그런 역사가 뭐 돈이되냐,
뭐가 된다고 떠드냐 하는 식이다.
남을 좀 도와주면 무엇이 덧난다고 배타적이고 이기적인가?? 그저 연금생활로 끼니는 굶지않으니 괜스레 머리 아프게
할게 뭐있냐 하는 식으로 배만 부르면 된디는 식은 개. 돼지의 인간형일듯 하다. 친구에게 탑골하나 물어본게 큰
실례일까? 그러기에 본인은 이런 친구는 이제 친구로 삼지 않는다. 다만 동창생일분이다
너 있다가 다시 부를테니 집에 가지말고 기다리게.. 어디 재판이 한두번에 끝나던,,
이 글의 결론의 판정을 내릴테니 기다리게.
(저는 드라마는 질색입니다. 왜냐면 아무리 인기 배우라도 감독이 울어 하면 울고하는 로봇이기에.. 하지만 이는 대본을
쓰는 작가 마음대로이기에... 이처럼 글을 쓴다는 것은 주유천하를 마음대로 돌아다니고, 총을 쏘면 1초전에 즉사하고
아무것도 남지 않습니다만 글을 쓰면 죽이지는 않고 천년을 가도 똑같은 내용을 가지고 있습니다.
글은 이렇게 총구도 돌리는 힘을 가지고 있는데 친구하나 잡아때는거야...)
이렇게 역사는 지나간 역사를 보관하자는게 아니라 그 역사를 통해 현재보다 더 좋은 미래를 지향하자는데
역사의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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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H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그러면 이제 시야를 좀 더 넓혀서 역사란 나에게 무엇인가 재고해 봅니다.
나의 친한 친구왈 평창에 역사를 쓴다고 그게 돈이되냐 뭐가되냐고 가끔 말을 하는데 굉부도 좀 하고 이름있는 대학도
다닌 친구가 사상적 폭도 없고 어째 저래 소견도 없는가 하고 속마음에선 인민재판이나 하듯 내까리곤 합니다.
그럼 역사의 명저속에 역사란 무엇인가 하는 이야기를 잠시 소개합니다.
E.H 카는 역사를 " 현재와 과거의 대화"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인간의 역사는 끊임없는 변화를 가지며 이러한 변화를 진보라 생각한 것으로, 이러한 변화는 우리의
가치와 관점의 변화에 따라서 언제나 다르게 해석될 수 있으며 그렇게 해석되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역사를 보는 눈은 항상 상대적일 수 밖에 없고 언재나 항상 절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과거에
비추어 현재를 보며 현재에 비추어 과거를 보면서 언제나 미래를 전망하고 있는 것이란 점 입니다.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란 책 1장에서 그는 역사적 사실은 단순히 과거에 있엇던 사실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가가 그 사실의 중요성을 인정하고 자신의 해석에 따라 재 구성함으로써
역사적 사실이 되는 것이다.
물론 역사란 과거의 사실이 없이는 역사는 성립될 수 없지만, 통산 과거의 사실에 의미를 의미를 부여하는
역사가의 해석 기능이 없어도 역사는 성립되지 못한다.
이러한 해석은 현재의 자신의 입장과 가치관의 반영으로 역사는 과거의 사실과 역사가의 해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따라서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는 것이다.
또한 E.H 카는 현대인의 특성을 자기의식의 발달과 역사의식의 고양에 있다면서 역사에 대한 관심이 오늘날만큼
고조되고 또 강조되는 시대는 없었다 한다.
역사의 본질이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의 정체는 무엇인가, 역사적 사실에 역사가의 해석이 어느정도 석여야
하는가 문제에 눈을 뜨고 이러한 開眼을 통해 역사를 보다 깊게 이해하고 통찰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제 4장에서는 역사는 한 사건에 여러 원인이 복합되어 있으며 따라서 역사가는 여러 원인의 상호관계
상하관계를 결정하고 한 사건에 통일성을 부여해야 한다. 이러한 역사가의 해석과 가치판단은 반드시 유익한
일반화를 이끌어내야 한다.
그러면서, 역사는 보조과학인 고고학, 금석학, 연대학등에 의존할 필요도 있다.
또한 역사사에서 정확은 의무이며 미덕이 아니라고 영국의 고전학자 하우스만의 이야기도 인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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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 영, 정의 현재의 역사에서>
이러한 여러가지의 이야기들을 인용하면서 평창의 현재의 역사는 어떤가 하는 문제를 파악해보며 여러 유형의 생각과
그리고 평창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한가지의 목표물보다는 어떻게 해야 할까 하는 방법론적 문제를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E.H 카의 역사는 무엇인가를 읽으며, 우리가 미래로 향한 의지의 준비물로 평창의 역사에서 영서지방 삶의 정체성이
무엇인가?? 또 어떠한 칼라의 유니폼을 입고 있는가에 역사를 통해야만 알 수 있고 이를 근거로 미래에 대한 도전하기
위한 준비하기위해 과거의 역사는 현재의 역사를 파악키 위해 꼭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앞으로 10년, 30년 후의 평창의 미래는 어떻게 변화가 될까하고 의문을 해 본다면, 그에 답으로 본인의 생각은 평창은
윗문장에서 전화를 끊던 친구처럼 연금생활에 먹을 거야 있으니 별 신경안쓰고 평온하게만 산다면 주변 정선, 영월,
봉평의 비약적 발전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낙오가 될 것을 면치 못할듯 합니다.
그럼 무엇이 문제일까??
그 친구와 전화끊기 조금전 통화에서 그래 뱍수양반 요즘 뭘하고 지내시냐 하고 물으니 그래야 시골에서 뭐 할게있냐는등
반문조로 답을 하는데.. 속으로는 에라 이 멍청한 통수야..
내가 평창을 위해 공무원으로 한평생을 살았고 또한 정년퇴임은 했지만 지금의 평균수명까지 앞으로 30년간 처마밑에
채마밭이나 뜯어먹고 30년을 개길 것인가?? 30여년을 평창을 위해 일하면서 평창의 부족함점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말인가??
평창을 위해 헌신하며 또한 우리세대는 보릿고개를 넘어서서 문필을 숭상하던 시대라,,아랫동네 천석띠기 부자집에
장가를 가기엔 소 닷마리 농사짓습니다하면 장인 어른이 농군집 마누라는 고생한다고 그래도 펜으로 먹고사는 공무원을
선호하였듯이 그대가 평창에서 엘리트 집단에 속했었다면 당연 퇴임후엔 봉사정신도 뛰따라야 함이 의무아닌 묵언의
의무는 아닌가??
그러기에 그대가 시골에서 할게 없다면 지금이라도 친구 두서명과 마이크 하나 들고 경로당을 찾아다니며 경로 오락회라도
한번 하렴. 음악에 소질이 없다면 스팀 청소기 들고다니며 청소라도 스팀청소라도 한번씩 해주는 봉사는 좋치 않을까..
그보다 좀더하다면 위에 언급한 조동리 돌은 우리가 흔히 <돌기와>라 부르는 천연슬레이트로 조동리와 미탄면에서
나는 돌로 5억년 압력과 열에의해서 굳혀진 변성암으로 요즘은 돌기와보다 벽면 모자익 타일로,, 아니면 잔디밭에 징검돌등
다양한 인테리어 소재로 각광받는데 값이 조금되니 지동서 미탄까지 잘 살피고 연구해봄직도.
아니 그보다 그래도 농산, 임업의 군에서 가장 대표적 작물은 무엇일까??
역시 감자와 옥수수라 하지만 월정리의 당근은 전국20%를 생산했었고 그래도 평창지역 정반에 걸처 가장 많이 생산되는
것은 배추와 무우이다. 횡게는 말할것도 없거니와 방림이든 청옥산이든 평창 전 지역의 농민들의 주 생산품이다.
우리나라는 각종 브랜드가 즐비하지만 우리 몸에 가장 많은 영양을 공급하는 주식인 쌀과 무우, 배추에 대한 믿고 찾을
브랜드가 없다
우선 쌀을 이야기하자면 가령 철원지역의 쌀과 홍천지역의 이름이 붙어있는 쌀이 차이범은 무엇일까?? 잘은 모르지만
생산에 차이가 아니라 금액의 차이뿐이 아닌가 하는 점이다.
전국에 쌀값을 비교하면 A지역에 B지역에 쌀값이 20KG 한 푸대에 무려 2~3만원 차이가 난다. 그러면 A지역의 농사법에
차별성은 무엇이고 또한 그 지역 범위는 어떻게 설정하는가?? 가령B지역의 쌀이 A지역으로 운반되어 그곳 정비소에서
도정하여 A 지역 부대에 담으면 차익금이 발생한다. A지역에 범위를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이런 방법은 불법인가??
이런 점에서 정부의 고지가는 의미가 없고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현재의 쌀값은 시민 권익단체에서 생산비 도표를
마련하고 불매운동을 벌여야 한다. 작금의 쌀은 이런한 속성을 가지고 있지만 정말 쌀의 생산적 차이의 고품질 브랜드화는
없슬까??
가령 평,영,정의 축협조합의 "대관령 한우"의 고급화 브랜드처럼 혼자만이 아닌 태백산 영서의 이 3개군의 컨소시움의
가장 청정지역에서 가장 맑은 동강과 서강의 물에서 생산되고 농약도 기준치의 절반으로 사용하였다는 표기와 수급,
경매까지의 방법은 조합을 결성하여 믿고 먹을 수 있는 쌀의 생산과 유통 시스템의 개혁이다.
만약 이런 성공은 생산자 농민은 비싼 값에 쌀을 팔고 스스로는 다시 저렴한 값의 쌀을 사먹는 경우도 발생할 수 있어야
한다. 이렇게 임금님도 이젠 평창쌀을 찾는 고급 브랜드화는 못 만들까??
그럼 평창산 배추와 무우는 대관령 고냉지 채소로 어느 길을 통하든 장평에서 보면 영동고속도로에 하루 150~200여차
싣고나간다고 한다. 여기사 미탄까지의 생산량은은 상당한 수량인데 공급곡선에 따라 값이 폭락될 수도 있고 영세성을
면치못해 덤핑도 되는 실정이다.
그러나 이만한 물동량이면 이를 조합을 결성하여 등급별 값을 고지하여 전국적 값의 키를 잡고 농민의 이익을 증대시켜
주었어야 할 점이 평창의 과제인 것이다. 이도 평창배추라는 청정, 고냉지 배추의 상품화로 조직을 갖추고 연구하여
생산자가 키를 잡을 수 있어야 농민은 살아 나는 것이다.
하지만 평창은 지금 고냉지 특용작물에 촛점을 맞추는듯 하는데 특용작물이란 시간과 비용등으로 대다수의 농민이
할 수 없는 한계점과 또한 고령화된 농민들에 문젯점에서 무엇이 진정 도시로 간 젊은이들의 귀향에 발맞출것인가도
고려해 보아야 한다.
배추값이 폭락하여 배추밭을 갈아 엎어도 정부도 손 못대는 실정의 까다로운 현안이다.
배추는 중간상인들이 돈번다 하지만 인터넷이 발달한 지금 현지싯가보다 가락시장의 값이 싸다면 그 손해는 중간
상인들이다. 이렇게 정부나 국민들은 기본 식량인 쌀과 식품에 관해서 정확한 데이타네 유통과정의 보장등 대책을
세울수 없는 실정이다. 이것이 영세성이라는 표현을 많이 쓰는데 그렇다면 조합으로 묶어 하나의 목소리를 내서
생산자가 싯가를 결정하는 주도권을 잡고 정확한 유통경로등 품질을 보증하는 방법은 강구되어야 한다.
이것이 말도 안되는 소리라 한다면 그를 결성한다면 그만큼 더하는 메리트가 있다는 얘기일 수도 있다.
특용작물로서는 농사에 종사하는 군민 전체를 아우르지는 못할것이고. 평창의 지리. 자연 환경상 농사는 작물로
배추, 무우, 감자, 옥수수이다. 이를 조직체를 갖추어 영세업의 약점을 보완해줄때 평창의 농민은 살맛이 나는 것일듯하다.
또 한편으론 평창은 농업만으론 역부족이다. 5,16이전 유엔산하 운크타드 보고에 의하면 한국은 농법국가로서는
부적격 판정을 받았다. 그것은 평지보다는 습곡산지지형이기 때문일것이고 영서지방은 그 대표적 예인 것이라면
우리는 농업은 치중하여야 하지만 다른 곳으로도 눈을 돌려봐야 한다.
'70년대 말 어느 지리교수의 논문에서 보면 이미 그는 강원도의 농사는 수확율이 적다는 생각인지 강원도 고 산지는
산업사회속에 쉴 수있는 여가 선용지로 레져의 공간으로 노력해야 될 것이라고 하였듯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언젠가는
강원도 전체가 여행과 각종 테마가 있는 여행지로 탈바꿈화 되었다.
여기에 평창은 정선 아리랑이 아닌 원래는 후렴도 없는 평창아라리가 민족 아리랑의 모체의 전통성을 가지고 있는데
본인이 요즘 쓰고잇는 평창아리랑의 논조는 우리가 모두 숨을 거둔후 정선 아리랑 향수자들이 아닌 객관적 눈을 가진
학자들이 나올때엔 본인의 평창아리랑 이론은 그 가치의 중요성을 판정받을 것이다.
그럼 여기서 정선 아리랑의 향수자가 많은것은 그들은 돈을 아끼지 않고 정선 농협 회이실, 즉 아리랑 회관도 없으면서
이러한 장소에서라도 학계의 교수들을 모아 아리랑의 심포지엄을 수 없이 계최하니 자연 정선 아라링의 미화의 글이
많아지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 비하면 누가 평창아라리의 이론을 한번이라도 두드려 보았던가... 이제는 공주 의병 아리랑이니 청주아리랑,
문경새재 아라랑 , 인제 뗏목 아라랑이니 수없이 많이 태동하건만,,가장 전통성을 지닌 평창아리랑은 그 틈에 끼지도
못한다.
이 글에서 정선 아리랑을 이야기하는 것은 정선인들은 아리랑을 축으로 5일장이니 각종 볼거리를 창출하고있다.
또한 영월은 동강댐 백지화를 들때 하루 일만오천명씩 동강댐을 방문하엿고 이에 연계로 김삿갓 문화의 장을 열고
이제는 박물관이 30개 이상 있으며 아프리카 룰루랄라라 박물관도 있다.
생소한 이름부터 신경을 자극하지만 전국의 초교생 학부모들의 선호도 1위는 영월이다. 영월은 김삿갓 문학의 기저아래
이렇게 생소한 박물관도 초교생들에게 학습효과로 각광을 받고있다. 그러기에 연휴때면 펜션 주인도 스스로 대박이라
하듯이 영월의 레져문화는 영월의 생산성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이에 비하면 평창은 전국각지의 레저 문화에도 아랑곳하지 못할 형편에 연휴철이면 밤으론 컴컴한 유령도시처럼 보인다.
여기에 평창에서의 농박이라 하던 펜션들은 자체적 프로그램을 개발하지만 여행객은 평창 폔션에 오면 근교의 어디를
재미있게 찾아볼까??
여행의 묘미는 쏘아 다니는 재미와 볼거리, 먹거리가 좀 있어야 재미있슬텐데 평창은 평창아라리에 묻어나는 곤드레,
딱죽이 비빔밥이라도 먹을려면 한참을 찾아 보아야 할듯 하다.
이렇게 평창은 농업군으로서도 생산성, 고령화로 농업이 낙후되며 또한 전국적 레져붐에도 동승하지 못하는 결과를
가지고 있다. 이제라도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과거의 인구 10만대에서 이제 절반도 못 미쳐서 국회의원은 두개군에서
다섯개 군으로 범위가 넓혀지며 정부측에 요구도 힘들어지는 이 마당에 가설적으로 평창군 하나에 국회의원이 한분이라면
평창지역사회의 미래는 얼마나 좋을까??
이러한 가설에서 본다면 인구의 증가가 가장 큰 힘의 요소로 작용함을 알 수 있다.
그러기에 농업만으로는 귀향을 유도하기는 어렵고 무엇인가 새로움을 창출해야 하는 것이다. 이제 평창의 재건의 기치를
들 수있는 것은 지난번 발표에서처럼 청동기 유적 박물관이다, 2,500여년된 전신장의 무덤에서 출토된 20세 여자의
고인골과 그 옆에 청동검이 반 뿌려뜨려 있던점. 이것이 한 자리에서 출토된것은 처음이다.
이미 지난 몇해전에 다수의 발표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런청동기 유적 박물관은 우리가 아는 엿날 역사의 보관용이
아닌 그로인하여 현재의 영서의 숨결이 살아숨쉬는 테마를 구축하여 각종 문화, 볼거리에 시너지 효과를 부여해야 하는
점이다.
만약 봉평의 메밀꽃 문화에서 이효석 문학관이 빠진다면 지금과 같은 메밀꽃 고장으로 랜드 마크를 찍었겠습니까??
또 화나는 지난 80년에 평창에서 이효석 문학에 밤을 봉평으로 옮겨쓸때 봉평인들은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여 이루어진
결과이지 손쉽게 얻은 것은 아니란 점입니다.
이제 봉평은 마치 이스라엘의 기브츠같은 협동농장처럼 5000천여 면민이 합심이되어 모든 국민에게 문학이 깃든 쉼터를
제공하며 또한 메밀로 기백억을 창출하여 부유한 면으로 태어났습니다.
이렇듯 평창도 이제라도 잠에서 깨어나 봉평을 우상으로 보면서라도 기약없는 전진을 시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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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창의 임란사 연구>
과연 평창은 무엇을 해야할까??
본인은 영서지방 정체성의 역사를 지닌 박물관을 설립해야한다고 하였고 이것이 하나의 축으로 보든 이야깃 거리에
시너지 효과를 불어넣고 모든게 연계가 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창했지만 과연 다른것은 지금 무엇이 있겠습니까??
언젠가 저는 평창의 항전의 모습을 평창 제일의 기상이라 하였던 것은 적장의 항복하라는 문서를 가지고 온 자를 목을
베고 대항하는 그 기상을 말함이지만 군수이하 지방관리와 무관들은 적의 숫자가 중과부적인 점을 알고 군미의 생명의
안전을 도모키 위해 부득히 피난하는 것이지 노산위에 서워진 근자의 임란전적비는 무엇을 이야기 하는지 저는 모릅니다.
항간에,, 어느 인터넷방송에 임란시 평창에서는 왜군을 백여명 죽였다 하지만 그런 사서를 보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기에 본인으로서는 평창의 모든 글을 다시 열거하여 쓰지만 그에관한 글은 별도로 쓰고싶지는 않습니다.
다른 글들은 모르고 잘못해서 역사적 사실이 변했거나 관점의 차이를 보이지만 노산전적비나 왜구 100여명을 죽였다는
이야기는 의도적 이야기이게 그런 역사서 스스로가 문제의 인식을 갖어야 옳은 일기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조목조목 대차대조의 글은 별도로 쓰지는 않습니다만 그것의 역사 문제는 다른시각이 아닙니다.
평창에 전하는 응암록은 아마도 후일 평창전사를 위해 호구록을 재편집한 책인듯 내용도 비슷하고 문장의 표현력도
일치하는 지점이 많습니다. 그렇치만 호구록은 임란사를 격은 평창군수 본인의 일기 형식의 글로 그곳엔 오류도 있고
또한 번역하신 권태하님의 오기도 있습니다만 그 일기 자체의 모습이 평창의 당시 상황이지 노산성 뒤에서 싸웠다는등
피맛골이라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란 이해입니다.
호구록에서는 왜구가 곧 평창으로 쳐들어 온다고하자 권 군수는 동촌(마탄읍 정도)으로 피난가자고 하자 지사함등이
응암굴에 이미 식량등을 준비해두었고 굴 내에 샘도있는 천연 요새이니 그리로 가자고 하여 군관, 민 모두 100여명
조금 넘는 사람들이 그리로 피난하였다 한다.
만약 여기서 평창시내에 단 한명이라도 남겨놓았다면 왜구들은 그를 고문하여 피난지를 알아내고 그는 죽은 목숨이
되기에 피란가는 의미가 없다.그래서 단 한명도 열외없이 모두 따라나셨을 것이다, 또한 10명의 장수들도 응암굴에
같이 피난하였다
그런데 100여명 죽이는 시간은 언제이고 또한 장수들은 응암굴에 전부 있는데 누가 어디서 언제 죽였다고 잘라 말을
할 수 있는가??그리고 다음날 발각되어 공격하는 왜구들에게 방어하다가 전사하고 일부는 포로가 되어 권군수 일행은
약수리 본영에서 하룻밤을 자고 왜구들의 이동방향인 영월을 경유하여 원주감영으로 압송된다
또한 군, 관민의 부녀자, 아이들까지 합하여도 백오십여명이 안될텐데 유효사거리 50m의 조총을 가진 왜구들을
100여명이나 죽일수 있다하니..응암굴에서는 장수들은 다 죽고 아마 고인영만 살아서 군수와 같이 포로가 되는데
이렇게 비교해본다면..왜 이렇게 크나큰 거짓말을 하는 의도보다 무엇때문에 그래했슬까 하는 의도는 무
또한 노산위에 장엄하게 세워진 임란 전적비는 셑트장이면 모를까 본인으로서는 이해부재의 사안이다.
그리고 지사함은 한해 500여명 뽑는 무과시험에서 300여등으로 오른 무인으로 그는 비록 중과부적의 숫자에 군민을
보호하려고 피난갔지만 피난지에서도 군민의 안영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고 왜구에 대항하다 전사한 점을 기려서
장군이란 칭호로 불리어진듯 합니다.
이것이 호구록의 기록에 의해 전개해본 상황으로 본인은 노산위의 임란 전적비에 그 전투는 무엇일지 찾을 수 없는
미 증유전투라는 사실로 취급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임란당시의 평창인의 기상은 위에서 언급하는 평창역사의 큰 기둥의 메인이 될 수없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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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미에서>
나의 친구야,, 무엇이 할게 없뇨..
아니 그런 자리가 어디있냐.. 그것은 만들어주는게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갖추어야 자리가 생기는 것이네..
빈말 한번 더 할까... 평창은 올림픽을 치렀다고 큰 소리 치지만 기실 평창군 소재지는 애들 물놀이 분수나 그 흔한 미니
레프팅이나,페러글라이딩이 회원만이 아닌 초보자도 태워주는,,그리고 고급 레포츠인 승마라도,,남들은 하다못해
빙벽을 만들고 얼음축제도 하는데 평창은 뭐 하나 있뇨.. 그러고 돈이되냐 따지며 자리탓만 하실련가??
참으로 그러고도 펜션이 살아남는다는게 용하지. 아마 올림픽에만 신경을 썼는지 행정력도 마비가된듯 이것은 타 군이나
비교차잇점으로..
그래 일년에 평창읍내는 관광객이 몇 명 다녀갈까... 아마도 제로의 "0"을 나타낸다.
정선군, 영월군은 수백, 천만이 관광하기에 단위를 백만으로 잡고 30( 3천만) 이라 기입할때 그 사이에 있는 평창은
백만이 채 안되는 80만이라면 그도 많은 숫자이지만 위 도표에서는 기본단위 이하라 "0'으로 나타날 것이다.
친구야 이게 평창이고 나의 고향이지만 지금 네가 사는 곳이라.
이제 알았으면 내일아침 집을나서며 무언가 남에게 들이되는 행동을 하고 돌아가라.그것이 쌀이면 주변이 좋아지고 너
또한 할 일도 많아지리라.
이 말에 이해가 불확실하다면 구체적인 예로 일전에 청옥산 개발이란 글에서 친구도 뜻이 있어 여러사람과 이러한
형태의 구상을 실행에 옮긴다면 그곳에도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고 너 또한 안내나 무엇이라도 자리가 없겠는가..
이것으로 인한 저변에 상권이나 사업성등에 젊은이들의 귀향을 만드는 계기도 되는 일이다.
귀향이란 농사만으로는 힘들지 않은가?? 젊은이들이 돌아와 각종 레포츠에 운영도, 교육도 하는 일자리 창출등,,
평창은 이러한 위락시설들이 없어서 공무원 퇴직하면 무언가 일을 할게 없다는 소리만,,
그래도 평창읍은 타면보다 군 소재지라 각종 기관이 많아서 공무원 퇴직자가 많은 사회인데 이제라도 서로의
머리를 맞데고 무엇을 할 것인가는 뻔한 답이다. 레져의 관광객 유치를 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아이디어와
중요한것은 일단 취하고 보는 액션이다.
백수양반,,,
평창사회의 주역으로 멋진 평창을 만들고
또한 그 속에서 멋지게 살아가렴,
그런사회, 나 또한 고향이라고 한번쯤 다닐때엔 얼마나 기분좋켔냐??
첫댓글 엄기종님 안녕하세요
어제 세미나를 찹석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 세미나에서 궁중예법이라 하던 이야기에 관해서 알고 싶습니다.
그 이야기와 본인은 무관하지만 본인은 그런 출처를 찾지 못했고
본인의 논고에서 국구사우 제레시 흑단자. 곤두령은 정 1품이 착용하는 복식이기에
그러면 왕의 제례법이 아니라 왕의 제례에 준하는 례를 치르는것 아닌간 하는 생각의 글과 또한
당사자에게 직접 이야기 한적은 있습니다만,, 그런 기록도 있었는지 알고 싶기도 합니다.
8월중으로 한번 찾아 뵙고 이야기를 듣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