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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 유발 하라리 (김영사, 2018)
제4부 진실
: 세계가 굴러가는 과정은 이제 어느 한 개인이 이해하기에는 너무 복잡해졌다. 세계에 관한 진실을 알고 선전물과 거짓 정보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15장 무지 : 당신은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무지하다
- 지난 수 세기 동안 자유주의 사상은 합리적 개인에 대한 엄청난 믿음을 키워왔다. 개개인을 독립적 이성의 주체로 설정하고, 이 신화적 창조물을 근대 사회의 기초로 삼았다. 민주주의는 유권자가 가장 잘 안다는 생각 위에, 자유시장 자본주의는 고객은 언제나 옳다고 믿고, 자유주의 교육은 학생들이 스스로 사고하도록 가르친다.
- 하지만 합리적 개인을 과신하는 것은 실수. 탈식민주의 사상가와 페미니즘 사상가들은 이 ‘합리적 개인’이 상류층 백인 남성 권력을 찬양하는 서구의 국수주의적 환상이라고 지적. 행동경제학자들과 진화심리학자들은 인간의 결정은 대부분 이성적 분석보다는 감정적 반응과 어림짐작식의 방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
- 합리성뿐 아니라 개인성 또한 신화이다. 인간은 스스로 생각하는 경우가 드물다. 그보다는 집단 속에서 사고한다. 도구를 발명하고 갈등을 풀고 질병을 치료하는 데도 부족이 힘을 모아야 한다.
- 인간 개인이 세상에 관해 아는 것은 매우 적다. 역사가 진행돼가면서 개인이 아는 것은 점점 더 줄어들게 되었다. 석기시대 수렵채집인은 자기 옷을 만들고 불을 붙이고 토끼를 사냥하고 사자를 피하는 법을 알았다. 오늘날 우리는 그보다 더 많이 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개인의 차원에서 보면 실제로 우리가 아는 것은 훨씬 적다. 우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 거의 전부를 다른 사람의 전문성에 의존해서 얻는다.
- 세계는 점점 복잡해지고 있는 반면, 사람들은 세상의 상황에 자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지 못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기상학과 생물학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람들이 기후변화와 유전자변형농작물에 관한 정책을 제안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무지를 헤아리는 경우가 드문 이유는, 같은 생각을 가진 친구들로 가득한 반향실과 자기 의견을 강화해주는 뉴스피드 안에만 갇혀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더 나은 정보를 더 많이 제공한다고 해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 과학자들은 보다 나은 과학 교육을 통해 잘못된 시각을 퇴출시키기를 바라고, 사회평론가들은 오바마케어나 지구온난화 같은 이슈에 관한 정확한 사실과 전문가 보고서를 대중에게 제시하는 방법으로 여론을 움직일 수 있기를 희망한다. 하지만 그런 희망은 실제로 사람들이 어떻게 사고하는지에 관한 오해에 기초하고 있다. 대부분의 우리 견해는 개인의 합리성보다 공동체의 집단사고에 의해 형성된다. 우리가 이런 견해를 고수하는 것도 집단을 향한 충성심 때문이다.
사람들에게 사실을 제시하고 무지를 드러내도, 역풍을 맞기 쉽다. 대다수 사람들은 너무 많은 사실을 싫어한다. 티파티 운동 지지자들에게 지구온난화에 관한 통계 자료를 보여주고 진실을 믿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
집단사고의 위력은 너무나 만연해서 얼핏 자의적인 것처럼 보이는 믿음도 좀처럼 깨지지 않는다. 심지어 과학자들도 집단사고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않다. 마찬가지로 개인의 합리성에 대한 자유주의자의 믿음 자체가 자유주의자들의 집단사고의 산물일 수 있다.
- 세계를 지배하면서 진실을 알아내기란 극도로 어렵다. 하지만 어떤 주제를 깊이 파고들고 싶다면 그만큼 많은 시간을 들여야 한다. 특히 시간을 낭비할 수 있는 특권이 필요하다.
진심으로 진실을 바란다면 권력의 블랙홀을 피하고, 중심에서 떨어진 주변부에서 이리저리 방황하며 오랜 시간을 허비할 수 있어야 한다. 혁명적인 지식은 권력의 중심에서 출현하는 경우가 드물다.
- 지도자들은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만약 권력의 중심에만 머물러 있으면 세계를 보는 눈이 극도로 왜곡될 것이다. 그렇다고 주변부로 모험을 감행하면 귀중한 시간을 너무 많이 허비할 것이다. 그런 조건하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 개개인의 무지를 인정하는 것이다.
16장 정의 : 우리의 정의감은 시대착오적일지도 모른다
- 다른 모든 감각들처럼 정의감도 오랜 진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인간 도덕은 수백만 년에 걸친 진화 과정에서 형성. 수렵채집인이 소규모 무리로 살면서 직면했던 사회적, 윤리적 딜레마를 해결하는 맞게 진화. 그 시절 정의감은 수십 제곱킬로미터 넓이 지역에 모여 사는 수십 명의 생활에 대처하도록 구성된 것. 그렇게 형성된 도덕감으로 오늘날 온 대륙을 가로질러 수백만 명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려고 할 때는 압도될 수밖에 없다.
정의를 실행할 때에는 일련의 추상적인 가치뿐 아니라 구체적인 인과관계까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ex1) 당신이 아이를 먹이려고 버섯을 캐 왔는데 누군가 버섯 바구니를 강제로 빼앗았다면, 이런 행동은 당신 행동을 헛수고로 만들고 아이들을 굶주리게 만들기 때문에 누가 봐도 부당하다. 이런 예는 인과관계를 파악이 쉽기 때문에 이해하기 쉽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오늘날 우리가 사는 지구촌 세계의 특징은 인과관계가 고도로 분화되고 복잡해졌다는 것이다. ex2) 나는 남에게 해를 끼칠 만한 일은 그 무엇도 하지 않고 집안에서 평화롭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좌파 운동가들에 따르면, 이런 나는 요르단강 서안 지구의 이스라엘 정착민들과 병사들이 저지르는 잘못을 수수방관하는 협력자가 된다. 또한 사회주의자에 따르면, 내가 누리는 안락한 삶은 비참한 제3세계 노동착취공장에서 자행되는 미성년 노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동물복지 운동가들은 내 삶이 인류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범죄 중 하나에 얽혀 있다고 일깨운다. 그 범죄란 수십억 마리에 이르는 농장 가축들을 잔인한 착취 체계 아래 둔 것.
그 모든 것에 대해 나는 정말 비난받아야 할까? 나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경제적, 정치적 유대의 연결망에 의존해야 하고, 전 지구 차원의 인과관계까지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에 가장 단순한 질문에조차 답하기 어렵다.
- ‘의도의 도덕성’이라는 개념으로 문제를 피해 가려고 시도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가 실제로 한 것이나 행동 결과가 아니라, 내가 의도한 것이라는 이야기다. 하지만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된 세계에서 최고의 도덕적 정언명령에 따르면 아는 것도 의무가 된다. 근대 역사에서 최대 범죄는 증오나 탐욕이 아니라 무지와 무관심에서 더 많이 나왔다. 사실을 알려는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사람이면 의도와 무관하게 잘못된 일에 연루될 수 있다. (ex. 나치에 협력한 우체국 직원)
- 지금 세계에서 불의의 대부분은 개인 선입견보다는 대규모 구조적 편향에서 온다. 하지만 우리 수렵채집인의 뇌는 그런 구조적 편향을 감지하도록 진화하지는 않았다. 그런 편향 일부에 우리 모두가 함께 연루돼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것을 발견할 시간과 에너지가 없다.
- 세계가 당면한 주요 도덕적 문제들을 진심으로 이해하고 싶어도 대부분은 더 이상 그럴 능력이 없다. 사람들은 수백만 시리아인이나 5억 명의 유럽인, 혹은 지구상의 모든 교차 집단과 하위집단 간의 관계를 이해할 능력이 없다.
그러한 규모의 도덕적 딜레마를 이해하고 판단하려 할 때 사람들은 흔히 다음 4가지 방법 중 하나를 사용한다.
(1) 이슈를 축소하는 것. 가령 시리아 내전을 마치 2명의 수렵채집인 사이에 일어난 일처럼 이해하는 것이다. 아사드 정권과 반군을 각각의 인격체로 보고, 하나는 착한 사람, 다른 하나는 나쁜 사람으로 상상한다. 분쟁의 역사적 복잡성은 단순명료한 줄거리로 대체된다.
(2) 감동적인 휴먼스토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 그 이야기는 분쟁 전체를 피상적으로 대표한다. 분쟁의 복잡한 진상을 통계와 정확한 데이터로 사람들에게 설명하려 하면 실패한다. 하지만 한 어린이의 운명에 관한 사적인 이야기는 사람들의 눈물샘을 자극하고, 피를 끓게 하고, 허위의 강한 확신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은 많은 자선단체들이 오랫동안 알고 있었던 방법이다.
(3) 음모 이론을 짜는 것. 세계 경제는 어떤 식으로 작동할까? 경제는 너무나 복잡해서 파악할 수가 없다. 그 대신 스무 명이 억만장자들이 부를 얻기 위해 언론을 지배하고 전쟁을 조장하며, 막후에서 조정한다고 상상하는 것이 훨씬 쉽다. 이는 언제나 근거 없는 환상이다.
(4) 도그마를 만들고, 모든 것을 안다고 주장하는 이론이나 제도, 우두머리를 믿고 어디든지 이끄는 대로 따라가는 것. 오늘날 과학의 시대에도 종교적, 이념적 도그마는 대단히 매력적이다. 왜냐면 현실의 복잡함에 좌절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세속주의 운동도 이런 위험으로부터 면제받지 못했다.
17장 탈진실 : 어떤 가짜 뉴스는 영원히 남는다
- 만약 지금이 탈진실의 시대라면 진실의 태평성대는 정확히 언제였나? 역사를 대충 훑어보기만 해도 정치 선전과 거짓 정보는 새로운 게 아님. 심지어 민족을 통째로 부인하고 가짜 국가를 만드는 습관조차 유서가 깊다.(만주국, 이스라엘, 미국, 호주 등등)
사실 인간은 늘 탈진실의 시대를 살아왔다. 사피엔스는 탈진실의 종이다. 호모 사피엔스 특유의 힘은 허구를 만들고 믿는 데서 나온다. 석기시대 이래 줄곧 자기 강화형 신화는 인간 집단을 하나로 묶는 데 기여해왔다. 모두가 같은 허구를 믿는 한, 우리는 다 같이 동일한 법을 지키게 되고, 그럼으로써 효과적으로 협력도 할 수 있다.
그러니 무서운 탈진실의 새 시대가 도래한 것을 두고 페이스북이나 트럼프, 푸틴을 탓한다면, 수 세기 전 수백만 기독교인이 자기 강화형 신화의 버블 속에 자신을 가둬둔 사실을 떠올리기 바란다. 어떤 가짜 뉴스들은 영원히 남는다.
이처럼 종교를 가짜 뉴스와 동일시하는 것에 많은 사람이 분노할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다. 1,000명의 사람이 어떤 조작된 이야기를 1달 동안 믿으면 그것은 가짜 뉴스다. 반면에 10억 명의 사람이 1,000년 동안 믿으면 그것은 종교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가짜 뉴스’라 불러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들어왔다.
- 종교나 이데올로기 외에 상업회사들도 허구와 가짜 뉴스에 의존한다. 브랜딩 작업은 흔히 동일한 허구 이야기를 반복해서 들려준다. 사람들이 진실이라고 믿을 때까지 계속된다. 코카콜라를 생각하면 어떤 이미지가 먼저 떠오르는가? 건강한 젊은이들이 운동을 즐기며 노는 장면이 연상되나? 아니면 과체중의 당뇨환자가 병원 침상에 누워 있는 모습이 떠오르나?
- 사피엔스의 의제에서 진실이 높은 순위를 차지한 적은 한 번도 없다.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교나 이데올로기가 현실을 잘못 전달하면 머지않아 지지자들이 그런 사실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럴 경우 현실을 더 정확히 반영한 경쟁자들에게 뒤질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글쎄, 그런 가정 역시 또 하나의 마음 편한 신화다. 현실에서 사람들 간의 협동력은 진실과 허구 사이에서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는 데 달렸다.(현실 왜곡이 지나치면 행동도 비현실적이 되면서 오히려 힘을 잃을 수 있다)
- 허구나 신화보다 공동의 합의를 통해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반론이 있다. 경제 분야를 보면 돈과 협력이 어떤 신이나 신성한 경전보다 사람들을 훨씬 더 효과적으로 결속시킨다.
하지만 그런 협약도 허구적인 이야기와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성경과 화폐의 차이만 해도 첫눈에 보이는 것보다 작다. 대부분 사람들이 성경이나 경전을 신성시하기 시작하는 것은 그것을 신성시하는 다른 사람들을 오랫동안 반복해서 접하고 난 다음이다. 우리가 신성한 책을 존중하는 과정이나 지폐를 존중하게 되는 과정이나 동일하다.
- 허구와 현실 사이의 경계 흐리기는 여러 목적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재미를 위한 필요에서 생존의 차원에 이르기까지 용도는 다양. 우리가 게임이나 소설을 즐길 때에는 잠시 동안만이라도 불신감을 접어둬야만 한다. 축구를 제대로 즐기고 싶다면 경기 규칙을 온전히 받아들여야 하고, 시합이 계속되는 동안에는 그 규칙이 인간의 협약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잊어야 한다. 축구는 개인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대규모 공동체를 결속시키기도 하고, 때로는 폭력 사태의 원인도 제공. 그럼 점에서 민족과 종교는 한층 강화된 축구 클럽.
- 호모 사피엔스 종으로서 인간은 진실보다는 힘을 선호한다. 세계를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통제하려는 데 훨씬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인다. 따라서 진실이 지배하고 신화는 무시되는 사회를 꿈꾼다면 호모 사피엔스에게서 기대할 것은 거의 없다.
- 이 모든 말이 가짜 뉴스는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거나 정치인들과 성직자들은 내키는 대로 거짓말을 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또한 모든 것은 그저 가짜 뉴스일 뿐이고, 따라서 진실을 발견하려는 어떤 시도도 실패하기 마련이며, 진지한 저널리즘과 선전선동 사이에는 아무런 차이도 없다고 결론 내린다면 완전히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가짜 뉴스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그것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허구의 실체를 구분하기 위해 더 열심히 분투해야만 한다. 난무하는 허구들 중 가장 큰 허구는 세계 복잡성을 부인하면서 순수 대 사탄 같은 악이라는 절대적 용어로 생각하는 것.
- 어떻게 하면 세뇌를 피하고, 현실과 허구를 구분할지에 관한 2가지 요령.
(1) 믿을 만한 정보를 얻고 싶다면 그에 합당한 만큼의 돈을 지불해야 한다.
(2) 어떤 이슈가 중요해 보인다면 관련된 과학문헌을 찾아 읽으려고 노력하는 것. 여기서 과학문헌이란 동료 평가를 거치는 논문, 저명한 학술 출판사가 낸 책, 명망 있는 기관의 교수가 쓴 저술이다.
18장 공상과학 소설 : 미래는 영화에서 보는 것과 다르다
- 오늘날 공상과학 소설의 최악의 잘못은 지능과 의식을 혼동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 그 결과 로봇과 인간 사이의 전쟁 가능성을 지나치게 우려한다. 사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증강된 소수의 슈퍼휴먼 엘리트와 무력해진 다수 하위 계층의 호모 사피엔스 간의 갈등을 두려워해야 한다.
- 영화 <매트릭스>와 <트루먼 쇼> 모두 매트릭스의 함정에 빠진 인간에게 여전히 때 묻지 않은 진짜 자아가 있고, 매트릭스를 넘어서면 진짜 실제가 있으며, 주인공 영웅들이 노력만 하면 진짜 실제에 접속할 수 있다고 가정한다. 매트릭스는 단지 내 안의 진짜 자아와 바깥의 진짜 세계를 가로막는 인공 장애물일 뿐이다. 하지만 희한하게도, 그렇게 해서 도달한 진정한 약속의 땅 역시 중요한 면에서는 조작된 매트릭스와 다 똑같다.
오늘날 과학 기술 혁명의 결과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는, 진정한 개인과 진짜 현실이 알고리즘과 티브이 카메라에 의해 조종될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진정성 자체가 신화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나온 최선의 과학적 이론과 최신 기술 장비에 따르면 정신은 어떤 경우에도 조작에서 자유롭지 않다. 조작용 껍질 안에서 해방되기를 기다리는 진정한 자아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