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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영수는 박정희와 김종필의 음모에 희생당했다?
출처: http://c.hani.co.kr/hantoma/1779350
우선 문세광에 대한 일본측의 수사를 보면
우리가 생각하는 북한의 밀령을 받은 흉악한 암살자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도 일본경찰은 한국에서 문세광에 대해 발표한 자료를 전혀 믿지 않고 있다.
( 간첩이 아닌 평범한 조총련계 재일동포 청년이었다. )
가장 핵심적임 의문이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 김종필이 어느 다방에서 육영수 저격사건에 관련된 인물을 만나는 것을
다방주인이 목격했다는 방송이 SBS [그것이 알고싶다.] 프로에서 방영이 되었다.
김종필은 지금 그에 관해서 철저히 부인하고 3자대면을 거부하고 있다.
두번째로 육영수 여사의 머리에 박혔던 탄두를 당시 경호실장 박종규가 수술실에서 빼내어 없애버렸다.
자신은 잃어버렸다고 하나 그것을 그자가 가지고 갈 이유도 없앨 이유도 없다.
그렇게 중요한 단서를 잃어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 탄두에 남은 탄흔을 보면 어느 총에서 나온 총알인지 알 수가 있는데 일부러 증거를 없애버린 것 같다.
그는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옷을 벗었다. 계획대로..? )
이 밖에도 무수한 의문이 육영수 여사 저격 사건의 음모를 뒷받침 한다.
당시 문세광을 담당한 수사관은 문세광은 끝까지 자신은 시키는대로 했을 뿐인데
왜 사형을 당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며 항의를 하였고
그의 표정에서는 사형수들에게서 느낄 수 있는 초조함이 없었다고 한다.
(정말로 살해할 의도였다면 권총보다도 라디오만한 폭탄이 더 위력이 있을텐데...)
문세광이 라디오 케이스에 권총을 넣어 출입을 할 때 검문하지 말도록을 경호원에게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고 한다.
( 대통령이 있는 장소에 금속물질을 가지고 들어가는 자체가 경호관례상 불가능하다고 한다.)
첫번째 탄환은 문세광이 앉은 자세에서 주머니에서 방아쇠를 당겨 자신의 허벅지를 쏘았다고 하는데
암살 공작원이라면 이런 실수가 말이 되는가?
SBS 방송국 [그것이 알고 싶다.] 프로에서 문세광의 총성 말고 다른 총소리가 들어 있었음을 밝혀냈다.
권총의 일정한 격발 간격 사이에 다른 총소리가 있다는 것이다.
( 경호원의 총탄에 애꿎은 합창단 여학생이 한 명 사망했다.)
사건 발생시 육영수 여사를 경호하는 경호원은 없었다.
총에 맞은 후에도 그녀를 무대에서 들어 옮긴 사람은 경호원이 아니었다.
박정희는 육영수가 병원으로 옮겨진 후에도 연설을 계속했는데
그것은 상황을 알고 있는 자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어서 어떤 테러가 현장에서 벌어질지도 모르는 상황에 계속 그곳에 머무는 것이 비상식적인 일이다.
문세광에 대한 일본의 수사가 끝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서둘러 사형을 시켜버렸다.
( 반면에 범인으로 확신하는 대한항공 폭파범은 아직도 살려두고 있다. )
문세광이 총을 쏘기 전에 다른 쪽에서 시선을 집중시킨 공모자가 있었다.
그는 누구이고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그도 사형을 당했을까?
음모에 가담된 또다른 경호원이었을까?..
당시 박정희가 그런 짓을 벌여야 했던 급박한 사정은?
당시 김대중 야당 거물인사를 일본에서 납치해 바다에 수장시키려다 발각이 되어
박정희 정권의 도덕성이 땅에 떨어져 세계적으로 불신을 받고
특히 일본의 자존심을 건드려 나라 안팎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놓여 있었다.
육영수 여사는 박정희의 외도나 독단적인 정치행위를 그냥 내버려 둘 정도로 연약한 여성은 아니었다.
( 박정희를 안에서 (쥐잡듯) 성가시게 잔소리 하는 골치아픈 존재였는지도 모른다.
함부로 어떻게 할 수도 없고...)
그 사건 이후 박근혜와 김종필은 웬수처럼 멀어져 지금까지 더 이상 교류가 없다...
( 알고 있어도 말할 수 없는 박근혜의 처지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까 이 사건은 나라안팎으로 몰락의 위기에 처한
박정희 정권을 살리는 국면전환용으로 내린 극약처분으로 추정된다.
물론 살해까지 하라고 했는지 부상을 입히라고 했는지 그냥 저격소동 쇼를 벌이라고 했는지,
문세광의 총에 맞았는지 경호원의 총에 맞았는지 확실히 모르겠으나
위의 나열된 근거로 추정해 보면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종필과 꾸민 음모로 충분히 추정이 가능하다.
이로 인해 일본은 자국의 경찰서에서 분실된 총기가 한국의 국모를 살해하는데 사용되었다는 책임을 느껴서인지
한국의 인권과 정부에 대한 비난이 줄어들었다.
오히려 반일감정이 일어 한일관계가 역전이 되었다.
그리고 공안정국의 효과는 극에 달해 흥분한 국민들은 북침을 하자는 소리까지 나올 정도였다...
(무시무시한 반공 공안정국을 만들어 낸 대단히 성공한 작품이었다...?)
5.16쿠데타성공으로 18년간 집권한 박정희의 실체, 그리고 '박정희가 육영수를 죽였다'고 한다.
출처: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ddstar&logNo=220913091175&parentCategoryNo=&categoryNo=19&viewDate=&isShowPopularPosts=true&from=search
5.16쿠데타성공으로 18년간 집권한 박정희의 실체
일본인으로서 수치스럽지 않을 만큼의 정신과 기백으로 일사봉공(一死奉公)의 굳건한 결심입니다
확실히 하겠습니다 ,목숨을 다해 충성을 다할 각오입니다
한명의 만주국군으로서 만주국을 위해 나아가 조국(일본)을 위해 어떠한 일신의 영달을 바라지 않겠습니다
멸사봉공, 견마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고 쓴 친일파 박정희.
박정희 전 대통령(1917~1979)은 어떤 사람인가?
1. 조국의 경제를 살린 위대한 영웅
2. 민주국가를 쿠데타로 전복한 반란군 수괴
3. 권력을 이용해 수많은 정적을 없애고 유부녀를 포함한 수백명의 부녀자를 농락한 희대의 바람둥이(카사노바) 독재자
4. 최고악질 친일파
5. 골수(뼈속까지) 공산주의자 등etc.
완전히 색다른 모습의 얼굴들이 떠올라 혼란스럽다.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압력과 자사이익에 눈이 멀어 권력의 시녀노릇을 자임해왔던
조,중,동 및 KBS,MBC,YTN등 수많은 어용언론과 어용인사들의 저서 등이
너무나 오랫동안 진실을 은폐하고 군사독재정권의 요구대로 국민들을 바보로 세뇌시킨(이미지 메이킹한) 결과,
이제 위 사실 중 1. 조국의 경제를 살린 영웅만 믿고 그 외의 사실(2~5)은 믿지 않는 서글픈 현실이 되었다.
나는 이제 김영랑시인의 아들 김현철 기자가 [시대의 어둠을 밝힌다]에서 그린
박 전 대통령의 진짜 얼굴을 있는 그대로 전하려 한다.
또한 만주국의 모습도 있는 그대로 전한다.
1939년 3월 경북문경 보통학교 교사로 있던 박정희(23세, 일본명 다카키 마사오 高木正雄)는
나이가 많아(20세까지만 입학가능) 만주신경군관학교(2년제)에 입학이 어렵게 되자
손가락을 잘라 盡忠保國滅私奉公 즉 “충성을 다하여
일본(조선총독부)에 보답하고 犬馬(개와 말)의 충성을 다할 결심입니다.라며
일왕(부의황제)에게 바치는 충성혈서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로 보내 입학허가를 받아냈고,
졸업식 때 수석졸업자 연설에서 대동아공영권을 성공시키기 위해 목숨을 바쳐 사쿠라처럼 죽겠다고 강조했는데
일제하 35년간 그 많은 조선인 출신 일본군 장교지망생 중
혈서로 일왕(淸황제)에 맹세한 경우는 다카키 마사오교사가 유일무이한 경우다.
▲ 수석 졸업하는 박정희 생도 신경군관학교 2기생 예과 졸업식에서 박정희는 우등상을 받고
부상으로 부의 황제 명의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대열 앞에서 생도 대표로 인사하는 사람이 박정희다. (만주일보 1942.3.24)
강덕(康德) 9년(1942년) 3월 23일 만주국 수도 신경(新京. 현 長春) 교외 납납둔(拉拉屯) 소재
육군군관학교(일명 同德臺)에서는 제2기 예과 졸업식이 성대히 거행됐다.
1기생 졸업식 때는 부의(溥儀) 황제가 참석했었으나
이번에는 치안부대신, 시종무관, 그리고 관동군의 고위 장성 등 내빈만 참석했다.
(부의가 졸업식에 참석했다는 일부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3월 24일자 <만주일보> 보도에 따르면, 이날 졸업식은
오전 10시, 남운(南雲親一郞. 육군 중장. 교장 재임기간 1940~1943) 군관학교 교장의 '서류봉정과 상황보고'에 이어
우(于) 치안부대신 집행 하에 관병식을 한 후 졸업생 일동은 무도장에 정렬, 생도대표 강견상언(岡見尙彦. 일본계) 등
2명의 강연과 유도 및 검도 시범, 측도 작업 등 실습행사를 가졌다.
이어 11시50분부터 다시 교정에 집결한 후 졸업증서 수여와 함께 시종무관으로부터 우등생에 대한 시상식이 거행됐다.
이날 우등상 수상자는 모두 5명으로, 일본계 2명, 만주계 2명, 그리고 조선계가 1명이었다.
조선계 1명이 바로 박정희 생도였다.
이들은 만주국 부의 황제가 내린 금시계를 은사품으로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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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티시가 만든 만주국과 부의 황제와 만주국군관 박정희
➀청나라 황실세력(브리티시)가 만든 만주국
청교도 퓨리탄 淸나라(대조선코리아가 1881년 망하고 過渡期 政府)는 두 패거리로 나누어진다.
➀청나라 황실세력(브리티시)은 만주국이라도 만들어서 나라를 유지하고,
백인 일본국(서양코리아)의 하부조직(하수인)으로 들어가길 원했다, 진짜 일본국이란 백인들의 역사다.
만주괴뢰국의 신경군관학교2기 박정희(쿠데타로 대한민국대통령이 됨)는 부의황제의 금시계를 하사받았다.
일전에 부의는 청나라가 아니라 만주괴뢰국의 황제이고
박정희도 일본군이 아니라 대동아공영권을 이루기 위한 조선총독부와 관계가 있다했는데
다시 보니 부의의 만주국은 북미만주국에서 아시아로 쫓겨온 브리티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같다.
만주국[ 滿洲國 ]-1932~1945년 列島日本이 新中國 둥베이[東北]지방에 세운 傀儡國家.-멕시코淸나라와 연결 고리로 만듬.
다시 보니 부의의 만주국은 북미만주국에서 아시아로 쫓겨온 브리티시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것이다.
북미 브리티시 코리아, 만주국, 열도일본과의 관계를 푸는 일이야말로 근세역사를 푸는 열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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⑦ 박정희의 창씨개명 - 조선인 흔적 지우기
일제강점기 시대에 조선인들은 강제로 창씨개명 되었다.
박정희도 예외가 아니어서 창씨개명을 하였는데 그 이름은 모두가 알다시피 『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 』이다.
하지만 창씨 개명한 조선인들의 대부분이 그러하듯이 창씨개명에는 조선인의 뿌리가 남아있다.
박정희의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도 마찬가지이다.
다카키 마사오란 이름은 박정희란 조선이름을 응용한 것이다.
다카키(高木)란 성은 고령 박씨에서 따온 것이다.
또한 마사오(正雄)란 이름은 정희(正熙)를 변용 한 것이다.
그래서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호칭에는 약간이나마 조선민족의 뿌리가 남아 있다고 하겠다.
하지만 박정희의 창씨 개명은 여기에서 끝나는게 아니다.
박정희는 일본정신으로 머리 채우고 일본군복을 입고 일본사람보다 일본어를 더 잘해도 핏줄 만은 바꿀 수 없었다.
그는 누가 뭐래도 조선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다.
그러나 박정희는 조선민족이라는 핏줄 끊기를 강행한다.
'다카키 마사오(高木正雄)'란 이름에서는 조선인의 냄새가 난다고 생각하여 다시 작명을 한다.
일본군에 자원입대 했던 것처럼 스스로 작명 실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이름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 이름은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이다.
참으로 경악할 박정희의 행동이다.
자작 이름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조선인의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행동이었던 것이다.
조선인이라는 흔적을 철저하고... 말끔하게... 깨끗히 지우고 완전한 일본인으로 태어 나고자 했던 것이다.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는 진짜 일본이름이다.
이 이름 어디에서도 조선사람의 뿌리를 찾을 수 없다.
만주신경군관학교 수석졸업자로 일본육사3년생으로 편입했던 다카키 마사오소위는
졸업 후 관동군 23사단 72연대 소대장이 된다.
조선인 創氏改名한 냄새가 나는 다카키 마사오에서 당시 일본연대장 오카모토대좌의 성을 본따서
오카모토 미노루로 또 다시 개명한다.
만주에 주둔 중 오카모토 미노루(岡本實)소위는 소대장으로 독립군(당시 中共 八路軍)소탕작전에
무려 110회나 출전, 혁혁한 공로로 중위로 진급한다.
그후 악질 친일파 조선인들로만 구성된 간도토벌대에 소속돼 중대장으로 더욱 큰 공을 세웠으니
애국지사의 희생은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일본육사교장 나구모 쥬이치장군은 다카키 마사오생도는 태생은 조선일지 몰라도
천황폐하에 바치는 충성심은 훨씬 일본인다운데 있다고 그의 적극 친일자세를 극찬했다.
1963년12월17일 박정희대통령취임식에 참가한 일본의 자민당 부총재 오노 반보쿠는
출발전 일본기자회견에서 박정희대통령과는 부자사이 같은 관계로써
아들의 취임식을 보러 가는 것은 무엇보다도 즐겁다... 박정희사 진짜 친일파임을 대변해 주는 말이다.
하우스먼이 친일장교 중 박정희를 특히 눈여겨 본 이유는
민족을 배신하고 혈서를 써서 만주신경군관학교(2년제)에 입학한 친일경력을 소유한 수석졸업자였기 때문이었다.
또한 박정희는 일본육사 3학년으로 편입후 3등으로 졸업했고, 조선인으로서는 유일하게 일본교육총감 상을 받았으며,
남로당 한국군 책으로 있을 때 일어난 여순반란사건 주모자의 하나였다.
하지만 살기위해 조직과 명단을 넘겨주어 7백명이 총살, 4천명이 투옥되고 유일하게 사형을 면했기 때문에
공산당이 집권할 경우 처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미군이 활용하기에 가장 적합했던 자가 박정희였다.
이러한 하우스먼의 보고서가 미국정부에 직접 보고되었고 맥나마라 미 국방장관은 하우스먼에게 공로표창장을 주었고,
이후 미국의 對韓政策은 하우스먼에 전적으로 의존하게 된다.
1958년 3월 박정희가 소장 진급할 때도 미 고문단의 강력한 추천이 있었다.
1959년 7월 박정희는 수도권 방위하는 6관구사령관으로 임명된다.
박정희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쿠데타계획을 세운다.
무능과 부패를 이유로 장면내각을 몰아낸 1961년 5.16쿠데타는
장면내각이 들어선 1960년 8.12보다 훨씬 이전부터 미 군사고문단의 묵인 내지 교사로 계획되었던 것이다.
미대사관과 주한 미군사령부는 합헌정부를 지지한다 해놓고
매그루더 유엔군사령관은 윤보선대통령을 만나 군을 동원해서 쿠데타를 진압하라고 요구한다.
다시 말해 미국은 쿠데타를 사전에 알았거나 지지하지 않았다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
2중외교인 양면작전을 구사했던 것이다.
한편 미국무성은 미 대사관의 성명에 대해 사전 승인을 받지 않은 것이라고 부정하면서도
쿠데타에 대해 반대하지 않은 채 노코멘트로 일관하거나 불간섭주의를 표방한 것도 양면작전의 하나로 보아 무리가 없다.
당시일본의 주간신조는 5.16쿠데타 직후
“미CIA는 약하고 무능한 장면내각을 무너뜨리고 강력한 반공정부로 교체시키기 위하여
한국군부에게 쿠데타를 감행하도록 교사하였고
그 후 그런 전략을 은폐시키기 위해 미 국무성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서울의 미 대사관과 미국 당국에 장면 지지성명을 발표하도록 했다.”는 내용의 글을 실었다.
한국일보1990.11.28.자 기사 [하우스먼의 회고록]을 보면,
하우스먼은 1961년 3월1일 실제 쿠데타 45일전에 나는 한국군내의 쿠데타기도가 있음을 상부에 보고했다.
나는 이 상황이 실제 폭풍일 것이라는 것을 한국군 육본 김형일 참모차장(1961.3월까지 재직)이 확인해 주었다.
하우스먼은 여순반란사건을 진압할 때 박정희를 구명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서
미국은 쿠데타발생 훨씬 이전에 계획을 미리 알고 있었으나
그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는커녕 오히려 방조 내지 교사하였다.
더구나 유엔군사령관의 특별보좌관인 그가 알고 있던 그 엄청난 사실을 매그루더 사령관이 몰랐다면 말이 되는가?
사실은 “한국군대를 동원하면 무력충돌로 희생자가 많이 난다,”는 이유로
쿠데타진압을 거부한 윤보선대통령 등 몇몇 국내 정치인들은
하우스먼과 박정희가 사전내통(민의원의장 곽상훈)하는 등 쿠데타계획을 세웠던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1961년6.16 세벽 쿠데타를 일으킨 군인들이 한강다리를 건너 서울시내로 들어오고 있을 때
현장을 목격했던 시민은 쿠데타군 앞에 “미군헌병(M.P.)차가 선도(칸보이)하고 있었다”고 증언한 바 있다.
이날 쿠데타 당일 새벽 하우스먼은 장도영 참모총장을 만나기 위해 육본으로 갔다가 육본에서 박정희를 만난다.
그날 새벽 이 짧은 만남이후 두 사람은 계속 메시지를 주고받는다.(한국일보 1990년 12월5일)
[하우스먼 회고록]에 따르면,
박정희의 혁명위원회 측은 연락관(한국군 대위)을 통해 구두 또는 서면으로 많은 문제에 대해 의견을 물어 왔다.
하우스먼도 그 연락 장교 편에 몇 가지를 강력히 권고한다.
그것은 미 8군 안에 혁명군을 들여보내지 않는 문제, 혁명군의 팔에 두른 하얀 완장을 제거하는 문제 등
비교적 단순한 형식상의 문제에서부터 한국군 장성들의 신상 문제,
박정희의 얼굴 드러내기 등 까다로운 정치 문제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것이었다.
특히 하우스먼은 박정희에게 적어도 한 개 이상의 공식적인 최고 직책을 가져야 하며,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모자를 빼앗아 써야 한다고 말했다.([한국일보] 1990년 12월12일).
5.16 발발 이틀 후 하우스먼이 8군 캠퍼스 안에 있는 자기 집에 찾아 온 박정희를 만났을 때,
박정희는 하우스먼에게 “혁명위원회는 하우스먼 당신친구들이 거의 전부이니
실은 당신네들(하우스먼과 친구들=미국) 혁명이요” 라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미 CIA 한국지부장 실바는 5월 15일 오전에 김종필(중앙정보부의 창시자)을,
다음 날에는 박정희를 자주 만났으며 그 후 박종규(청와대 경호실장)와 더욱 자주 만났다.
하우스먼은 [회고록]에서 쿠데타설이 나돌던 시점에
육본작전참모부장으로 있던 박정희를 찾아가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기록하고 있다.
1952년 개헌을 둘러싼 부산 정치 파동 때 이승만이 계엄령을 선포하고 군의 출동을 명령하자,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이종찬은 군의 통수권이 미군에 있음을 환기시키면서 군의 부산 출동을 거부한다.
오히려 이때 이용문 소장과 박정희를 비롯한 일단의 군인들은
유엔군 사령관과 미 8군 사령관의 지원을 받아 이승만을 제거하려는 쿠데타를 계획했다.
1953년 5월 미국은 이승만이 계속 휴전 협상을 방해하자 이승만 제거 계획을 더욱 강경하게 바꿔
군부에 의한 쿠데타를 일으켜 이승만을 축출하려는 이른바 에버 레디 계획을 수립했는데,
미군 수뇌부의 지원을 받아 박정희가 이 음모를 주도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5.16군사쿠데타는 이미 9년 전부터 (미국에 의해) 착착 준비가 진행되어 왔음이 분명해진다.
당시 미 중앙정보국 CIA국장이었던 델레스는 1964년 5월 3일 영국 BBC 텔레비전에 출연해서
“내(CIA국장)가 재직 중에 CIA의 해외 활동에서 가장 성공한 것이 바로 이 5.16혁명이다.
미국의 일부 지도자가 지지하고 있는 장면 내각은 부패해서 이승만 정권을 타도한 민중의 기대에 응하지 못했다.
참 위험한 순간이었다”고 술회하였다.
미국이 5.16군사쿠데타에 직접 개입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구데타 성공 후 박정희군사정권은 자주적 발전을 지향하기보다는
‘용공분자’를 색출하고 체포하는 일에 최대의 역점을 둠으로써,
자주적 성향을 보인 4.19민주혁명의 주도 세력을 가장 철저하게 탄압한다.
이는 바로 미국이 쿠데타를 통해 얻고자 했던 한국 민족주의의 제거 목적과 일치한 것이다.
해제된 미 국무성 비밀문서에 따르면, 5.16군사쿠데타 직후
박정희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케네디 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에 처음 방문했을 때
전례 없이 대통령을 대신해서 존슨 부통령이 공항에까지 나와
박정희 의장을 환대했다는 사실은 위에 지적한 모든 내용이 사실임을 보여주는 증거라고 할 것이다.
박정희는 자발적으로 베트남 파병을 케네디대통령에게 제의, 케네디 암살 후 존슨이 받아들인 결과였다.
결국 베트남파병은 박정희가 이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힘으로써
장기집권과 경제발전을 이루기 위한 치밀한 포석이었다.
한국경제를 살린 공로로 국민영웅 박정희가 된 것도 실상 알고 보면
증권파동. 화폐교환 등 서툰 경제정책실패로 북한보다 너무 경제가 뒤떨어져
또 다른 4.19의거 내지 남한적화를 두려워했던 미국이
경제에 무식한 박정희의 반대에 부딪칠 때마다 경제학교수까지 미국에서 파견하여
수출주도형 경제정책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한 결과 오늘날 한국경제부흥의 바탕이 된 것이다.
한국경제는 미국이 일으켰다.
박정희가 자발적으로 주월파병을 미국에 제안했다.
그 자식(박근혜)을 모르겠거든, 그 부모(박정희)를 보라고 했다.
박정희가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재되자
반대자들이 나라를 이 정도로 잘살게 한 대통령이 어떻게 친일파냐? 하는 것은
御用言論만 보는 사람들의 무지의 소치일 뿐이다.
역사적인물의 평가는 功과 過를 엄격하게 구분해야하고 또 公正해야 하는 법이다.
2017.01.17. 靑栽 成 榮大
[뱀의 발]
위기의 박정희정권은 육영수의 죽음. 한방으로 모든것이 극복 됩니다.
박정희 바로알기(1) 누가 육영수를 죽였는가?
이승만 바로알기에 이을 근.현대사 인물중에 어디로 가지를 쳐나갈지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1. 이승만→김구→여운형
2. 이승만→박정희→전두환
고민끝에 후자인 역대 대통령 쪽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저의 어머니께서는 동향(同鄕)이며, 동성(同姓)인 박정희 대통령의 업적을 존경하는 분으로써
박정희가 없었더라면 우리가 이렇게까지 발전하지 못했을 것 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이시며,
육영수 여사 또한 성품과 외모에 칭찬을 아끼지 않는 분이십니다.
블로그 이웃인 어머니에게 헌정하는 마음으로 포스팅을 하겠습니다.
사진출처:네이버검색 -박정희대통령,육영수여사-
육영수 여사의 죽음에 많은 의혹들을 말해보려 합니다.
1974년 8월15일 대통령과 영부인은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광복절 기념행사에 참석합니다.
그리고 조선호텔에서 출발한 포드 M-20(렌터카) 승용차가 국립극장에 도착하고,
운전사가 내려 문을 열어주자, 오사카에서 온 23세의 재일교포 문세광이 내립니다.
재일교포 문세광은 실탄5발이 장전된 미제 38구경 권총을 허리춤에 차고 국립극장에 도착한 시간은 8시59분 경입니다.
의혹1. 승차 입장카드가 부착되지 않는 승용차가
대통령 내외가 참석하는 행사에 어떻게 아무런 검색도 받지 않고 정문을 통과하는가?
문세광은 계단을 올라 남문 입구를 통해 로비로 입장합니다.
남문 입구에는 청와대 경호원1명과, 경찰관4명, 행사안내자3명이 있었지만,
비표(입장표식)를 달지 않은 문세광을 검색하거나 체크하지 않고 통과 시켜 줍니다.
의혹2. 대통령 내외가 참석하는 행사에 어떻게 아무런 검색도 받지 않고 행사장에 들어갈수 있는가?
행사장에 안에 들어간 문세광은 아무 빈자리에 앉았고,
행사장 안에 있던 경호원이 비표를 달지 않은 문세광에게 다가가서,
"리본가 나이까라 로비니 데떼구다사이"(비표가 없으니깐 로비로 나가주세요) 라고 합니다.
경호원에 의해 로비로 쫓겨난 문세광은 다시 들어갈 기회를 엿보다가, 10시10분경 경호계장에게
"우찌니 하이떼 다이또오료 노 가오오 아이따이"(안에 들어가서 대통령 얼굴을 보고싶다.)
라고 말을 했고, 경호계장은 들어가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허락받은 문세광이 들어가려는 순간, 경찰관이 비표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출입을 막습니다.
경호계장은 "장관을 만나러 온 일본인이다.
들여보내." 라고 말해주었고, 문세광은 행사장에 들어가서 B좌석군 맨 뒷열에 앉습니다.
의혹3. 문세광은 장관이라는 단어는 쓰지도 않았다.
그리고 경호계장은 비표도 없는 문세광을 왜 들여보내 주려 했을까?
자신이 쫓아낸 문세광이 자리에 버젓이 앉아있는 것을 본 후
수상하게 여긴 경호원은 만일의 사태를 대비하여 문세광의 바로 뒤에서서 경계를 합니다.
경호원들의 리시버를 통해 "자리에 앉은 경호원 외에는 모두 뒤로 빠져"라는 무전이 들렸고,
문세광을 마킹중인 경호원도 빠질수 밖에 없었습니다.
의혹4. CP는 왜 문세광을 밀착마크 하고있는 경호원을 빠지라고 했을까?
국민의례등의 식순이 진행된 후 박정희의 축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조국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하면서
우리가 그동안 진정" 이라고 말하는 순간 행사장에는 총성이 들리고 장내는 아수라장이 됩니다.
경찰과 중정의 수사기록은
그러나 이날 울린 총성은 총 7발이였습니다.
3탄이 불발탄이였기 때문에 총8발을 쏜 것입니다.
의혹5. 저격범이 안전장치도 채우지 않은체 총을 허리춤에 찬다는 것은..
기초적인 사격훈련 조차 받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도 의혹이 있습니다.
단상밑에 있던 문세광의 총알이 육영수 머리를 우에서 좌로 관통 시킬수 있는 각도가 안나온다는 겁니다.
관통부위를 봤을때 단상위에 있던 누군가가 쏜 총에 맞았다고 주장을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육영수의 머리속에 총탄이 발견되지 않았기에 관통하였다고 추정)
사람 키보다 높은 단상 밑에있는 문세광의 시야로 봤을때
박정희가 서있는 연설대 보다 더 깊숙한 곳에 앉아 있는 육영수가 보이긴 했을까 하는 의혹입니다.
일부 사람들은 경호원이 실수로 쏜 총에 맞았다는 주장도 합니다.
총 꺼내다가 실수로 쐈을 가능성이 전혀 없다고는 볼수 없으니깐요.
1989년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이였던 이건우가 국회에서
'문세광의 네번째 총탄에 육영수가 맞았다'는 수사결과 발표는 사실이 아니었다고 양심고백을 합니다.
사진출처:네이버 -당시 서울시경 감식계장 이건우-
돌진하던 문세광을 앞줄에 앉아있던 이대산이라는 사람이 발을 걸어서 넘어트리고,
경찰관이 문세광을 제압했는데.. 총기수거결과 문세광의 권총에 1발이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즉, 문세광은 오발.불발탄을 포함하여 총 4발을 쏜 것이고, '육영수는 문세광이 쏜 총에 맞지 않았다' 입니다.
4탄이 태극기를 맞췄다는 얘깁니다.
당시 영상분석 결과 확대해보면 발사 섬광까지 뚜럿하게 목격됩니다.
문세광은 앞자리에 있던 경찰관에게 제압 당하고 육영수는 병원으로 긴급 호송 되지만 50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그리고 박정희는 "자~연설을 이어서 하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저라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만..
아내가 머리에 총을 맞았어도,
국민들과의 약속인 연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겠습니다.
국민들은 "박정희 대통령은 역시 대단하다." "강하다." "아내보다 국민들이 우선이다."
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세광의 총탄은 운좋게 방탄 연설대 밑으로 피해서 목숨을 건졌다 치더라도.. 공범이 2차 저격을 한다면??
의혹6. 만약 문세광에게 공범이 있다면 VIP의 안전은 누가 책임지나?
연예인 경호도 이렇게는 하지 않는다. 공범이 없다는 걸 알았나?
필자는 20대에 사설 경호업체 경호주임으로 근무한 경력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는 우리나라 경호 역사상 처음이자, 마지막 경우입니다.
그럼 이제 문세광은 누구인가에 대해서 알아봐야겠지요?
문세광은 일본국적의 재일교포 출신이며 한국말은 전혀 할줄 몰랐다고 합니다.
어린나이였지만 가정도 있었고, 일용직 노동자였기 때문에 금전적으로 어려움이 있었다고 합니다.
금전적으로 어려웠던 문세광은 도쿄에서 온 A모氏를 만난 후
자동차도 사고, 돈도 흥청망청 썼다고 하는 증언이 있습니다.
근데 놀라운 건 중앙정보부는 육영수 사건 전 부터 문세광을 알고 있었다는 겁니다.
육영수 사건 1년전쯤에 김대중 납치사건이 있었습니다.
일본에서는 독재에 대항하는 민주주의 투사 이미지로 인해 김대중은 인기가 매우 좋았다고합니다.
(겨울연가 배용준급 정도가 아니였을까 추정합니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일본내에서는 "박정희는 물러가라" 라는 반한시위가 잦았는데..
그 시위 선봉장에 문세광이 있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정에서도 유심히 지켜봤던 인물입니다.
이런 요주의 인물이 한국에 들어온다는데 비자가 나왔네요?
지금도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 그 당시에 벌어졌다는 것에 의혹을 제기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요주의 인물이라서 가능했는지는 모르겠으나..
중앙정보부는 육영수가 피살되고 10분여만에 문세광이 묵었던 조선호텔을 급습하여 수색했다고 합니다.
조선호텔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조선호텔에 묵던 문세광에게 호텔직원이 물어볼 것이 있어서 객실전화로 연락을 했는데
『 의문남 : 여보세요?
직원 : 문세광씨 있나요? 있으면 좀 바꿔주세요.
의문남 : 조또 』
의문남은 잠시 기다리라 했고, 호텔직원은 문세광과 통화했다고 합니다.
문세광은 한국말을 전혀 할 수 없었기에,
최소한 1명의 공범자가 있었다는 전제하에 수사 해야하는 결정적인 증거인데..
중정 수사결과에서는 문세광의 단독범행이라고 확정합니다.
중정이 조선호텔에 수사하고 있을때 그 호텔직원은 당시 상황에 대해 증언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한 남성이 그 직원에게 "당신 지금 한 말, 죽을때 까지 입 밖에 내지마라." 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 말을 한 사람은 바로 당시 국무총리 '김종필' 이라고 합니다.
사진출처:네이버 -젊은시절 김종필-
호텔직원은 실제로 침묵을 지키다가 30년쯤 후에 양심고백을 했고, 40년이 지난 뒤 이제서라도 진실이 알려지게 된거죠.
의혹7. 왜 김종필은 공범의 가능성에 대한 증언을 폐기했는가?
육영수를 저격한 총은 어디서 구한걸까요?
일본 오사카 고진 파출소에서 순경들이 잠을 자고 있는 사이에 훔친 총이라고 자백했습니다.
사진출처:네이버 -오사카 고진 파출소-
하지만 조사결과 오사카 파출소에 총 두자루가 도난된 건 사실이였으나,
지문과 족적이 문세광과 일치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즉, 문세광이 직접 구한 총은 아니라는 겁니다.
그리고 나머지 한자루의 총은 어딧냐는 질문에 문세광은 오사카 호주에 버렸다고 했습니다.
많은 병력을 동원해 호수 바닥까지 수색하였지만 총은 발견 되지 않았고,
나머지 한자루의 총은 문세광의 자택에서 발견 됩니다.
문세광의 가택 1차수색때 없던 총이 2차수색때 '다다미' 밑에서 발견 됩니다.
의혹8. 1차 수색때 없던 총이 2차 수색때 나왔는데..
누군가가 1차때 의도적으로 감추었거나 2차때 의도적으로 갖다놨다고 의심된다.
의혹9. 일본에서 훔친 총을 어떻게 한국에 가져 왔는가?
일본에서 한번. 한국에서 한번. 총 두번의 공항 검색대를 통과했다?
사고 직후 이건우 감식계장이 탄두.탄흔을 수거 하러 갔지만
경찰이 조사하기 전날 밤에 중정이 먼저 수거한 상태였습니다.
가장 중요한 육영수 머리를 관통한 총알을 경호실장 박종규가 수거해 가지고 있다가 중정에 넘겼다고 했는데
중정에서는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내지 않았다고 합니다.
박종규는 이 사건으로 인해 파직됩니다. 경호실장으로써 VIP 지키지 못하였으므로 당연하다고 봅니다.
의혹10. 박종규는 중요한 증거를 왜 중정으로 넘겼고, 중정은 왜 국과수에 의뢰하지 않았나?
문세광의 죄목은 살인미수죄인가?
1974년 8월15일에 검거된 문세광은 16일 저녁 김기춘을 만나기 전까지 묵비권을 행사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김기춘에 대해서는 나중에 따로 포스팅 할 것이므로 다른 설명 없이 바로 넘어가겠습니다.
다음은 중정 수사기록에 남아있는 김기춘과 문세광의 8월16일 저녁 대화내용 입니다.
김기춘 : '자칼의 날'을 읽었지요?
문세광 : (벌떡일어나며) 네! 봤습니다. 선생님도 읽으셨습니까?
김기춘 : 네. 저도 읽었습니다.
그렇게 진정한 테러리스트가 되려고 하시는 분이 왜 이렇게 비겁하게 입을 다물고 계십니까?
※'자칼의 날'은 프랑스 드골 대통령을 암살 하려는 킬러와 막으려는 정부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스릴러 소설임
(테러리스트 지망생에게는 바이블 같은 책이라 생각하면 됩니다.)
그 뒤로 문세광은 묻지도 않은 말까지도 상세히 진술 했다고 합니다.
김기춘은 묵비권을 행사하던 문세광의 입을 열게 했다는 자부심이 대단하여
수차례 자랑하는 인터뷰도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김기춘과 문세광은 1974년 8월16일 저녁에 만났는데,
16일 조간 신문에 이미 두사람의 대화내용이 실렸습니다.
1974년 8월16일 경향신문 (조간호)
한글변환한 기사 내용입니다.
의혹11. 경향신문은 문세광의 자백내용을 어떻게 알고 미리 신문 기사를 썼는가?
경향신문은 미래를 내다보는 신문인가 봅니다.
문세광이 사형판결은 이 사건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짐작할 수 있는 것인데, 본인 또한 알았을터인데
재판장에서 겁에 질린 표정은 커녕, 오히려 가끔씩 미소도 지었다고 합니다.
이 모습을 본 일본기자는 "문세광은 자신이 죽지 않는다고 생각하는건가?" 라고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김구를 죽인 안두희도 안 죽었는데, 설마 나를 죽이겠어?"
라고 생각 한 것 같다고 추정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하더군요.
문세광은 1974년 11월20일 최종 사형판결 확정을 받고, 한달뒤인 12월20일 오전7시30분에 형이 집행 되었습니다.
육영수의 죽음으로써 박정희가 얻은 것이 너무나 많다.
1. 미국과의 관계
미국내에서 박정희의 독재는 인권문제에 대해 맹비난을 받았고,
미국의 당시 대통령 지미 카터는 진보적 민주주의 인사였는데,
"박정희 대통령은 자기 명대로 살기 힘들 것이다." 라고도 할 정도였습니다.
2. 일본과의 관계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인해 일본내에서는 '박정희 퇴진'시위, 반한시위가 거세게 일어났습니다.
3. 국민들과의 관계
긴급조치 남발, 인혁당사건 등으로 국내에서도 학생시위가 빈번했고,
지도자로써 박정희의 인기가 많이 떨어진 상태였습니다.
위기의 박정희정권은 육영수의 죽음. 한방으로 모든것이 극복 됩니다.
미국 : 인권문제에 대해서 함구하게 됩니다.
영부인이 살해당해 슬픔에 잠긴 대통령에게 인권문제를 꺼내는 건 쉽지 않다고 봅니다.
일본 : 문세광은 어쨋든 일본국적이며, 일본 파출소에서 분실한 권총에 의해 육영수가 죽었기 때문에
반한시위는 없어지게 되고, 일본수상 다나까는 직접 방문해 고개 숙여 사과까지 합니다.
국내 : 학생들의 시위는 당연히 잠잠해졌고, 오히려 반일감정이 심해져 일본 대사관 앞에서 반일시위가 일어납니다.
김두한의 후계자 조일환은 깡패 동생들과 함께 '손가락 절단'시위도 벌였습니다.
사진출처:네이버 -美 대통령 지미 카터-
사진출처:네이버 -박정희에서 사과하는 日 수상 다나까-
박정희는 이승만에 비해 엄청나게 많은 자료가 남아있습니다.
그래서 인물과의 관계로 풀어 나가보려 합니다.
조금의 근거. 약간의 논리라도 가지고 오신다면.... 반론. 토론 다 받을 준비가 되어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