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고성 화진포 여행기-2
(이기붕부통령별장, 화진포호수)
화진포콘도 바로 옆 숲속에서 화진포호수를 바라보고 있는 이기붕부통령 별장 후면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대통령, 이기붕 부통령 만들기와 자유당의 장기집권을 획책했던 3.15부정선거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에서 일어난, 전국 학생시위가 있었던 날이다.
4.19학생시위는 국민들 각계 각층으로 번졌고, 비상계엄령 발효와 발포명령에 의해, 국민들의 희생자가 겁 없이 늘어났다.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 국민이 원한다면 나는 대통령직에서 하야할 것입네다....."
대통령 직을 하야하고, 이국 먼 땅 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났다.
그리고 끝내 고국의 땅을 밟아보지 못한 채, 이국 땅에서 숨을 거두었다.
이승만 박사에게는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사이에서 자식이 없었다. 프란체스카 여사가 이기붕의 장남 이강석을 총애하여 양자로 세웠더니, 4월28일 경무대에 피신해 있는 아버지 이기붕, 어머니 박마리아, 자기동생 이강욱을 차례대로 사살하고, 육군소위 이강석 자기 자신도 권총으로 자살하는 비극을 낳아, 양자를 새로 입양해야 하는 절차를 밟아야 했다.
그래서 양자로 입양한 아들이 이인수 박사(이승만 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이사장)이다.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 여사 사이에서는 자식이 없었고, 83세에 들인 첫째 양아들 이강석의 자살로,
두번째 양아들로 지금의 이인수 박사를 입양, 현재 종로에 있는 이화장에 거주하고 있다]
이기붕 부통령별장 정면
탐욕은 비극을 부른다.
(탐욕으로 망친 이기붕 부인 박마리아 이야기)
박마리아(朴瑪利亞 1906~1960.4.28)는 “권력욕의 화신”으로 불렸던 여인이다.
일본의 식민지 기간에는 친일인사였고 해방 후에는 남편 이기붕 뒤에서 정계를 주물렀다.
박마리아는 1906.3.26(음) 강원도 강릉에서 가난한 농부의 외동딸로 태어나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시절 가난에 찌든 생활을 하면서 성장했다.
홀어머니는 감리교 정춘수목사의 가정부로 일하면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이 후 정춘수목사 주선으로 전도사로 생활했지만 생계를 잇기가 쉽지 않았다.
어린 시절 박마리아는 남의 집 어린아이를 봐주고 때로는 채소밭에 나가 일을 해주면서 받은 품삯을 생활비에 보탰지만 겨우 입에 풀칠하기도 벅찰 지경이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지독한 가난 때문에 여자이면서도 출세와 입신양명에 대한 강한 집념이 이때 다져진 것 아닌가 싶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박마리아는 민며느리로 들어가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정춘수목사의 주선으로 개성에 있는 감리교가 세운 호수돈여자고등보통학교에 진학했다.
박마리아는 교역자의 딸이라는 명분으로 학비를 면제받았지만 그 외 생활비는 개성갑부 친일파 윤치호의 딸 윤봉희 학우의 도움을 받았다.
해방 후 윤봉희의 친척들을 취직시켜 주는 등 나름대로 과거 신세를 많이 갚았다고 한다.
호수돈여고보를 졸업하고 경제적으로 어렵자 일단 고향인 강릉에 내려와 어머니와 함께 교회 일을 하던 중 호수돈여고보의 학우였던 조현경의 도움으로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에 입학을 하게 되었다. 박마리아는 이화여전 4년간 늘 공부를 잘하여 반장을 도맡았고 또 수석으로 졸업하면서 수재였음을 입증하였다.
졸업 후에는 호수돈여고보에서 잠시 교편을 잡았으나 이화여전 선교사 아펜젤러의 적극 추천과 후원으로 미국 유학이라는 행운을 얻었다. 마운티 홀리옥 대학과 스카릿대학을 졸업하고 피바디 사범대학에서 문학석사를 받고 귀국한 후 3년 동안 모교 이화여자전문학교에서 영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러다가 유학시절에 만났던 10살 연상인 이기붕과 국내에서 다시 가깝게 지내다 1935년 그와 결혼했다.
남편 이기붕의 살아온 과정을 살펴보면 1896년 충북 괴산군 청천면 후산리에서 몰락한 양반가의 독자로 태어나 과부인 어머니 밑에서 가난으로 생활고를 겪으면서 성장했다. 교회를 착실히 나가면서 알게 된 선교사의 도움으로 서울에 있는 보성고보를 나왔고 또 다시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미국으로 유학을 떠나 아이오와주 데이버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했다. 졸업 후 대한국민회 회장으로 있던 이승만을 만났고 허정과 함께 ‘삼일신문’(三一新聞)을 발간하기도 했다.
유학시절 신민회 집회에서 박마리아를 만났으며 1931년 약혼했다가 박마리아가 일찍 귀국하는 바람에 약혼을 취소했으나 귀국 후 다시 만나면서 결혼을 하게 된 것이다. 박마리아는 결혼과 동시에 학교생활을 접고 조선YMCA에서 일제시대 대표적 여성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노골적으로 친일행각을 벌렸다.
특히 박마리아는 김활란, 유각경과 함께 태평양 전쟁을 치루고 있는 일본을 위해 1942년 친일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에 가입했으며 각종 간담회에서 징병제에 적극 호응할 것을 촉구했다. 이렇게 반민족적 행위를 했음에도 해방 후 박마리아가 친일행위를 반성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었다.
영어가 유창했던 박마리아는 해방 후 이승만 초대대통령의 부인 프란체스카여사의 비서를 지내면서 남편을 출세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 결과 이기붕은 일제 말기 종로 국일관 지배인에서 일약 이승만정권의 2인자로 떠올랐고, 이런 결과는 박마리아의 역할이 절대적이었다.
남편 이기붕은 대통령 비서실장, 서울특별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지냈고 자유당 창당 주역으로 독재정권의 핵심 멤버로 활약했다.
그리고 박마리아는 대한부인회 부회장에 선출되었으며 이화여대 문리대학장, YWCA회장 직에 오르면서 여성계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키워 나갔다. 이 정도면 권력의 정점이나 다름없었지만 박마리아의 욕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식이 없는 이승만 부부에게 1957년 장남 이강석을 양자로 들여보냈고 급기야 1960년 3.15선거에 남편 이기붕이 부통령후보로 나서자 여성단체 조직을 선거운동에 활용했다가 여성계의 큰 반발을 사기도 했다.
이처럼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물불을 안가리고 현실을 인식하지 못한 결과 부정선거의 원흉으로 지탄을 받게 되었고 전국 각지에서 시위가 격화되자 ‘神을 두려워할 줄 아는 국민이라야 위대한 國家를 건설할 수 있다‘며 말도 안 되는 논리를 펴기도 했다.
결국 4.19혁명으로 자유당 정권이 붕괴되자 이승만 대통령은 하와이로 망명 길을 떠났고, 박마리아 가족은 데모군중을 피해 경무대별관에 기거했다. 드디어 가족들에게 마지막 날이 되는 1960년 4월 28일 큰아들 육군소위 이강석이가 권총을 들고 가족들 앞에 나타났다.
이강석은 아버지 이기붕과 어머니 박마리아 그리고 동생 이강욱을 차례로 권총을 쏴 모두 살해한 뒤 자신도 권총으로 자살하고 말았다. 죽음의 자리에서 박마리아가 마지막 순간 어떤 말을 남겼는지 전하는 바는 없다. 어쨋든 '마리아'라는 이름이 아까울 뿐이다. 마리아처럼 살기 바라면서 부모님이 이름을 지어 주셨을 텐데 권력욕에 찌들어 만인이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인물이 되었으니 참으로 안타까울 뿐이다.
마리아!..... 참으로 아름다운 이름인데......... -인테넷에서 발췌 정리(가져온 글)-
지금은 모두 저세상 사람이 된 이승만대통령과 프란체스카 그리고 이기붕의 가족들
(왼쪽부터, 이강석,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이 때만 해도 누가 이들의 운명을 알고 있었을까?
천일의 앤
화진포콘도를 나오고 있다. 이렇게 잘 자란 소나무들이 아름다운 숲 터널을 이루어 경관이 수려하다.
콘도 앞 사거리 : 직진하여 호수다리를 건너면 이승만대통령별장이 있고, 오른쪽은 휴전선 통일전망대 가는길, 왼쪽은 속초로 내려가는 길.
이승만 초대대통령별장 가는 길
화진포 호수 전경
저 멀리 오른쪽 위쪽에는 해양박물관이 보인다.
화진포 생태박물관 옥상 전망대에서 촬영한 화진포 호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