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효치 시인이 강희근 교수에게 보낸 편지
강희근 형
오전에 군산에 간다며 전화하신 그 목소리가 오래 지워지지 않습니다.
"자네 고향을 지나면서 생각이 나서…."
바쁜 일정에 어쩌면 무심히 지나칠 수도 있을 텐데
내 생각을 빠뜨리지않으셨다니요.
"전주를 거쳐 군산으로 갈 건데…." 라는 대목에서
내가 전주비빔밥을 먹고 가라고 하니까
"아니 군산에 가서 점심을 먹어야지."라고 할 땐
당장 달려가 군산의 횟집으로 안내하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일에 사정이 허락지 않아 참아야만 했습니다.
'강희근'
당신의 이름 속에는 내 젊은 시절의 추억이 가득 채워져 있습니다.
이것들은 바삐 사는 세월 속에서 저 기억의 창고 밑창에 웅크리고 있다가도
문득문득 솟아올라 내 가슴을 훈훈하게 데워주곤 하지요.
지금 생각하면 그 알량한 시를 가지고 기고만장하던 시절이 좋았던 같습니다.
60년대 초 그야말로 세계 최빈국의 문학 청년 시절이니….
가끔 연탄가스를 마셔 비실거리면서도
막걸리 사발 앞에서 무슨 광기 같은 기운으로 시를 말하곤 했지요.
광희동 당신의 그 싼 자취방이 생각납니다.
손때 전 수건이 걸쳐 있던 그 의자가 생각나요.
내가 언젠가 불쑥 갔을 때 당신이 그 의자에 앉아 시를 쓰고 있었지요.
전화도 귀한 시절이라
친구가 생각나면 그냥 무턱대고 집으로 찾아가곤 하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다듬고 있던 시가 6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되었던 시
<산에 가서>가 아니었던가 생각합니다.
'강희근' 하니까 생각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은 아예 40여 년 전쯤으로 돌아가
그 옛날 만났던 이들은 찾아 하루를 놀아야겠습니다.
청주 어느 다방에서 열렸든 '김남일 시화전' 생각이 나는지요?
대학 3학년 겨울방학 때쯤으로 기억됩니다만,
비교적 부유한 집의 아들이었던 김남일 형이
청주에서 시화전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에서 친구 대여섯 명이 몰려가서 며칠을 뭉개며 놀았던 일 말입니다.
나는 지금도 그때 찍은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사진에는 김남일 유근택 임웅수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이 있습니다.
아직 20대 초반 정말 푸릇푸릇한 젊은이들,
그러나 그들의 표정은 무언가 심각하고 진지합니다.
철없이 까불고 날뛰기에 좋은 시절
그들은 왜, 무슨 번민들이 그리 많았던지요.
좀 거창하게 말하면 인생의 온갖 문제를 혼자서 짊어진 듯
우리는 그랬었지요.
그때 이정호 형네 막걸리는 참 괜찮았었지요.
그 술기운으로 무심천을 걷던 우리는
정말 이 세상 사람이었던가 싶었어요.
길을 걸으면서 형이 연주하던 콧방귀 가야금 소리는
우리를 무척 웃게 했지요.
형네 자취방 근처에 해춘 형과 영의 형이 함께 쓰는 자취방도 있었지요.
해춘이 어머니가 시골에서 날라온 밑반찬을 안주 삼아
거기서도 어지간히 계기고 놀았던 기억이 납니다.
이 사진에 나오는 사람들 외에도
많은 친구가 그곳을 아지트 삼아 자주 모이곤 했지요.
지금쯤 군산의 어느 음식점에 앉아 계신가요.
군산 부둣가의 횟집들이 맛이 괜찮은데 간 김에 회 많이 들고 오세요.
내가 진주에 갔을 때
산청 어디 계류에서 잡았다는 '피리' 구이를 사주던 생각이 납니다.
경상도의 맛과 인정이 혀를 통해 온몸으로 고루 퍼져 스몄었지요.
형은 언제나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어요. 이런 생각도 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형은 언제나 내 앞에 서 있었어요.
나보다 먼저 등단한 형이 처져 있는 나를 안타까워하면서
미당 선생님께 사사를 받도록 길을 열어 주려고 마음을 써 주던 일 말입니다.
'동대문학회' 시 합평회에 좋은 작품을 내놓아
강평하는 미당 선생님의 기억에 남도록 하라고 독려해 주신 일은
잊혀지지 않습니다.
나는 지금도 45년 전의 그 합평회 작품집을 가지고 있습니다.
필경사가 기름종이를 철필로 긁어서 등사한 얇은 책인데
거기에 나는 형의 말대로
당시로는 내 최선의 작품인 <산에서 부른 노래>라는 시를 냈었습니다.
가슴 두근거리며 내 차례를 기다리던 생각이 지금도 납니다.
명진관 지하 강의실,
몇몇 사람이 내 작품에 대해서 거드는 말을 했지만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았고
오직 미당 선생님의 강평을 기다렸을 뿐이었습니다.
그날 미당 선생님은 내 작품에 대해서 매우 좋다는 평을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나는 비로소 선생님께 내 이름을 기억시켜 드릴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은 합평회가 끝나고 함께 걸어나오면서
"내일 우리 집에 놀러 오게"라고 말씀하셨고
그렇게 해서 나는 그때부터 미당 선생님 댁을 드나들게 되었지요.
임웅수 형이
"효치는 부끄러워서 그동안 선생님 댁에 못 갔었대요."라고 하니까
"시인은 부끄럼이 많아야 해."라고 말씀하셨는데
이 말의 뜻이 무엇인지 지금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아마도 늘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만족하거나 과대평가하지 말고
부끄럽게 생각하면서 정진하라는 뜻일 거라고 막연히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더욱 긴장하면서 바짝 습작에 열을 올렸어요.
주변을 돌아보면
강희근 유우희 박제천 김초혜 임웅수 정의홍 홍희표 등이 이미 등단했거나
<<현대문학>>지의 추천에 1,2회씩 걸쳐 있었던 상황이었으므로
나만 뒤처진 느낌이었답니다.
그 다음 해 나는
<서울신문>과 <한국일보>에 당선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친구 친지들로부터 축하 편지를 많이 받았어요.
그중에서도 형의 편지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편지글 중에
'발광으로 달려가고파'라는 구절을 굵은 글씨로 쓴 기억이 나시는지요?
그때 형은 '발광'처럼 나의 등단을 기뻐해 주었습니다.
우리가 등단한 지도 벌써 40년이 훨씬 넘었네요.
가난한 시절
허술한 문틈으로 새어드는 연탄가스와 함께 추위를 견뎌내면서
문학을 싹 틔우고
그 꿈을 펼쳐나가던 우리가 이제 머리 허연 할아버지가 되었어요.
그러나 형의 따뜻한 우정이 있어서 좋아요.
'동국문학연'을 베풀면서 맛보았던 문학 행사의 첫 경험들,
의기투합해서 동아리를 만들고 행사를 기획하며 주선했던 일,
습작에 열 올리며 서로 격려하고 힘을 부추겨 주던 일,
미당 선생님과의 재미있는 일화들 등등
형과 나눌 수 있는 이야기가 참 많아서 좋아요.
'문학의 집'의 원고 청탁 덕분에
오랜만에 종이 편지를 쓰니 정말 수다가 많았졌어요.
그러나 이 수다를 떠는 동안 나는 즐거웠어요.
군산에서 하시는 일 잘 보시고 편안히 진주로 돌아가세요.
언제 한 번 내가 진주에 가든지 아니면 형이 서울에 오세요.
만납시다. 안녕.
- 2009.03.27. 문효치배 -
강희근 교수가 문효치 시인에게 보낸 편지
- 우리는 한 스승 밑에서 배운 도제,
시의 언어, 정서, 형식 등에 유사성 있어, 문효치 시인에게 답함 -
문효치 인형(仁兄)!
당신이 군대 하사관으로 전방 근무를 하고 있을 때
엽서를 자주 보내 주셨지요.
그때마다 첫머리에 ‘인형’이라고 불러 주었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어진 구석이라고는 없는 내게 인형이라 불러 줌으로써
앞으로 아무쪼록 ‘어질어져라.’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여겼지요.
오늘은 내가 당신에게 인형이라 불러 주면서
그동안 내가 인형이 되었었는지 반성하는 마음을 가져 볼까 해요.
당신은 R.O.T.C 과정을 거쳤지만,
사정이 있어 하사로 입대하게 되었지요. 그 아픔을 속속들이 함께해 주지
못했던 것이 하나의 아픔으로 남게 되었었는데,
당신은 1966년 서울신문과 한국일보 신춘에 동시 당선하면서
어느 쪽에다 쓴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아픔’에 대해 살짝 비추고 넘어갔지요.
아마도 당신은 대학 친구 중에서 가계도를 놓고 보면
가장 불행했던 삶을 살았던 것으로 볼 수 있어요.
그런데도 늘 밝고 의연하고 친절했지요.
그래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나는 대학시절이나 그 이후나 무슨 무슨 회장자리가 있으면
꼭 문효치 ‘라는 생각이 들었었지요.
당신은 동국대 문과대 학생회장을 했고 또 당신과 내가 뜻이 맞아 만든
’동대문학회 ‘회장도 당신을 앉혔지요.급기야 당신은
우리나라 문단의 총수 자리인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시장 자리까지 갔지요.
이번에 물러났지만,
당신은 그 말 많았던 복마전 같은 펜클럽을 평화롭게 만들었지요.
당신은 눈에 보이지 않는 인화와 화평과 같은 관념을
가시적으로 돌려놓는 데 특별한 자질이 있지 않은가 해요.
문효치 인형!
당신과 나는 한 스승 밑에서 공부를 한 도제로서,
빚어내는 시의 언어나 정서나 형식들이 누구보다도 서로 유사성을 갖고
있을 것으로 추정되지요.그러므로 스승이 중심에 서 계시고
우리는 좌·우로 나뉘어 서서 품계를 형성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럼에도 나름대로는
‘탈스승’ ‘탈미당’으로 가는 몸부림을 치기도 했지요.
어쨌거나 우리가 신입생이 되어 들어간 동국대학교는
60년대 초반가지 볼 때 우리 시단의 거의 반에 속하는 시인들을
배출해 놓고 있었고 국문과 교수로 양주동, 서정주, 조연현, 정태용,
조종현 교수 등이 있어서 어찌 보면 캠퍼스에
한국 문단이 걸어 다니고 있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기고만장(남산 실비 집 같은 데서)할 수 있었고
한국 문단의 성골로 자처하면서 시를 썼지요.
동국문학회나 동대문학회가 열고 있었던 합평회는
옛날 과거제의 향시(鄕 試)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었어요.
향시에서 서정주나 조연현 교수에게 눈에 띄어 인정을 받게 되면
그대로 대과(문과)에 진출하는 관문이 눈앞에 다가서는 것이었고요.
재학 중 선배로는 이우석, 조윤호, 최원식,박진호 등이
시인으로 활약 중이었고 조정래 김초혜의 대척점에
당신과 나와 하덕조, 소설 쓰는 유우희, 그리고 문정희가 서 있었고,
그 사이에 홍신선, 박 제천, 정 의홍, 홍희표,송유하,신용선,문인수
등이 서 있었지요. (이 배치도는 전혀 내 정서임, 오해 없기를)
그때 당신은 담배의 골초여서, 우리 하숙에서 함께 다른 친구들과
어울려 잠잘 때면 담배 내놓으라고 졸랐지요. 그러면 나는 속으로
“아시아의 마지막 밤이 되려나, 꽁초 오상순이 되려나?”하고
투덜댔어요. 그러다가 방학이 되어 시골로 갔다가 서울로 올라갈 때면
당신의 비상 실탄으로
우리 어머니가 태우던 말초(봉초)를 몇 봉지 얻어서 싸 가지고 가서
책상 안에 넣어 놓기까지 했지요.
기억하시는지요.
정해춘네 자취방에서 친구 조정래와 다투었던 한 작은 해프닝을,
우리 둘이서
‘동대문학회’를 따로 만들어 회원 확보에 심혈을 기울였던 그 일을,
그런 뒤 학교신문에 났던 ‘시 분과회장’ 자리다툼 기사를,
서오능 봄 소풍 가서 제대 파들에게 쫓겨 도망쳤던 일을,
그때 내가 성취했던 줄행랑의 탁월한 면목을 기억하시는지요.
그럴 때마다 당신은 내 뒤에 서서 그림자처럼 보호막이 되어 주었어요.
내가 대학 2학년 때부터 학교방송국 국원이 되어 학내방송 아나운서로
일을 하고 있는 시간은 우리 둘은 헤어져 있게 되었는데
당신은 한 번도 “경상도 친구가 웬 아나운서니?”라고
힐난을 할 만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지요.
어쩌다 학교 방송국으로 당신을 데리고 들어오면 후배 여학생 국원들이
참 미남이라고 당신에 대한 코멘트를 달았지만
나는 그 말을 당신에게 전해 주지 않았다는 것을 이제야 말하지만
이런 말들은 끝까지 모르고 지나가는 것이 좋을 듯해요.
당신의 시는 대숲 바람처럼 칼칼하고 청순했어요.
행간에 바람이 말리며 지나가고 거기에 연이 하나쯤 떠오르는 것이었지요.
연 꼬리 몇 번 말리고 연 머리가 직각으로 오르면
그때부터 당신과 나의 유년이 함께 섞여 박수를 치고 있는 것이었어요.
사실 당신과 나의 피에는
밀어낼래야 밀어낼 수 없는 우정과 정서와 거기 나름의 코레스트롤이
쩌려 있어서 나 스스로도 당신 사진이나 얼굴을 보면
그냥 나의 어떤 물 끼 같은 게 섞여 있다는 느낌을 받곤 놀랄 때가 있지요.
우리의 품계가 놓이는 자리는 한 스승이 주관하는 문예지
‘H 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70년대 말 이후 문예지의 다양화 추세 속에
당신과 내가 쇠잔해진 왕조의 회랑을 돌고 있다고 여겨질 때
나는 두문동 같은 한 지방의 국립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로
은신해 있었던 것이지요.
당신은 그 바람 부는 언덕에 서서 고군분투하고,
나는 꼭꼭 비켜 숨어서 한국 문단을 관음증으로 바라보며
시를 분석하고 말하고 가르치는 쪽에 힘을 들이고 있었지요.
그런 점에서 현실 광야에 던져져 있었던 당신에게
나의 물 끼 젖은 눈으로 한 번씩 위문공연을 가면
당신은 의연히 회장의 자세가 되어 진접읍 왕숙천의 경관을 보여주며
지나간 왕조의 정서로 설명해 주곤 했어요.
효치 인형!
당신과 내가 이제 왕조를 세울 차례가 되었어요.
놀랍게도 당신과 나는 지금 시가 쓰여지고 있어요.
들녘을 거닐다가도 시가 내 낚싯바늘에 와 낚이고
제방을 거닐다가도 시가 예외 없이
당신이 드리운 낚싯바늘에 가 낚이는 게 보여요.
당신과 나는 다 같이 정년의 나이를 이제 통과하고
더욱 심도 있는 세계를 원고지 칸칸에 적어 넣을 수 있다는
어떤 보이지 않는 계시 앞에 서 있지요.
당신은 내 앞에 서고 나는 당신 뒤에 서기로 해요.
한쪽이 “술 익는 마을마다” 하면
한쪽은 “타는 저녁 놀”이라 화답하기로 해요.
한쪽이 “향단아” 하면 한쪽은 “그넷줄을 밀어라” 하기로 해요.
건강을 위해 많이 걷고 많이 사색하기로 해요.
나는 점심 먹고 2킬로쯤 걷다가 지금 막 들어와 이 글을 썼다니까!
오늘은 이만.
|
|
첫댓글 감동입니다.
아름다운 우정이 부럽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렇죠 은자 교수님
우리의 정도 아름답게 쌓아 갑시다
박정이 교수님도 저와 평생을 함께하는 정인이 되여주세요.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