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월 28일(주일) 낮 설교 - 주현 후 제4주 -
형제에게 덕(德)을 세우는가?
( 고린도전서 8 : 1~13 )
Ⅰ. 「 정직하게 」
한 젊은이가 어느 날 장터에서 길가에 떨어진 가방 하나를 주웠습니다. 그 가방을 열어보니 그 안에는 누구라도 욕심을 부릴 만큼 상당한 거금(巨金)이 들어있었습니다. 돈 가방을 들고 주변을 살피던 젊은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가방을 바닥에 툭 던져 놓고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아 한가로이 햇볕을 쬐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따스한 햇볕에 졸기 시작한 젊은이 앞에 눈에 불을 켜고 땅 바닥을 살피는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젊은이는 그 사람에게 물었습니다.
“혹시 무슨 찾는 물건이라도 있으신지요?” “내가 가방을 잃어버렸는데, 아무래도 이 부근에 떨군 것 같아요.” 그러자 젊은이는 깔고 앉았던 가방을 남자에게 툭 던지며 말했습니다. “당신이 찾고자 하는 가방이 이거 아닙니까?” 가방을 보고 깜짝 놀란 남자는 너무 고마운 마음에 젊은이에게 큰돈으로 사례하고자 했습니다. 하지만 청년은 딱 잘라 말했습니다. “제가 만약에 돈이 가지고 싶었다면, 그 가방을 들고 벌써 가버렸을 겁니다. 돈은 필요한 사람이 요긴하게 잘 써야지요.”
이 젊은이가 바로 우리나라 독립선언서 주창자 33인 민족대표 중 한 분인 ‘손병희’ 선생이십니다. 정직은 마치 집을 세우는 것과 같습니다. 집을 세울 때 약삭빠르게 요령껏 대충 쌓아올리는 것을 현명하고 효율적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튼튼하고 안전한 집을 세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하나하나 정직하고 우직한 마음가짐으로 집을 지어야 합니다. 그렇게 쌓아 올린 집만이 오랜 세월이 지나더라도 참 된 가치를 가질 수 있습니다. 우직해보여도 항상 정직해야합니다.
에머슨은 이런 말은 했습니다. “정직은 가장 확실한 자본이다.” 올 한 해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려고 노력해야합니다.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핑계하지 말아야 합니다. 또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만나든지 거짓됨이 없이 인간관계를 가진다면, 세월이 지날수록 그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수 있습니다. 또한 나 자신 앞에서도 정직해야 합니다. 혹시 다른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라도 자기 자신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나 스스로 보기에도 정직해야 합니다.
Ⅱ.
오늘 본문을 보면, 우리에게는 좀 낯선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거의 2천 년 전의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고린도지역의 당시 상황을 이해해야 이것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고린도사람’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좋은 의미가 아닙니다. 고린도는 고대에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국제적 도시였습니다. 그리스반도와 대륙을 연결하는 지협 남단에 있으며, 겐그리아 항구와 로마의 레기온 항구를 연결하고, 지중해의 동서를 연결하는 묘한 지형으로 상업과 물질적인 번영을 누린 도시이기에 동서 문화와 종교의 혼합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항구에는 동서에서 몰려온 배들로 가득 찼고, 덕분에 돈이 넘쳤던 항구도시요, 사치가 심한 도시로 성적으로 문란한 도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사람’이란 ‘음란한 사람의 대명사’로 사용될 정도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당시 헬라지역의 거의 대부분이 그랬던 것처럼 이방(우상)신전이 고린도의 중심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바로 이 우상 신전과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당시 고린도사람들은 소, 양 등 가축을 잡을 때, 먼저 우상 신전에 바쳤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종교와 삶이 일치된 사회에서 살았습니다. 우리나라도 유교문화권에서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는 풍습이 있습니다. 일단 풍습이 되고 문화가 되면, 왜 그렇게 해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그냥 그 풍습을 따릅니다. 그래서 문화가 미치는 영향력이 매우 큽니다. 제주도에는 독특한 문화가 참 많습니다. ‘괸당 문화’가 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씨족과 가문’문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괸당에 속한 사람들은 너무 끈끈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그들은 괸당이 최우선입니다. 추석이 되기 전에 벌초를 할 때가 되면, 학교들이 벌초방학을 합니다. 괸당에 속한 모든 남자들이 벌초에 참여합니다. 빠질 수 없습니다. 애경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괸당에 애경사가 있으면 반드시 참여합니다. 물론 요즘은 좀 달라졌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것을 풍습이라고 하고, 문화라고 부릅니다. 본문은 우상숭배가 문화였던 그 시대 이야기입니다.
Α. 우상이란 무엇인가? (4-6)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셨습니다. 그 내용의 첫 번째와 두 번째가 ‘다른 신(神)’과 ‘우상숭배(偶像崇拜)금지’ 조항입니다. 다른 신을 섬기지 말고 우상을 만들어 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언뜻 보면 다른 신이 있고, 우상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이나 구약의 다른 성경들을 살펴보면 다른 신도 없고, 우상도 원래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4절 중반 이후를 보면, “우상은 세상에 아무것도 아니며 또한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는 줄 아노라”고 했습니다. 신명기를 보면, “그런즉 너는 오늘 위로 하늘에나 아래로 땅에 오직 여호와는 하나님이시오 다른 신이 없는 줄을 알아 명심하고”(신 4:39)라고 하여, 다른 신 자체가 없다는 것입니다. 다른 신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여 만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없는 신을 만들까요? 인간은 창조 때부터 하나님과의 관계성에서 살아야 할 존재입니다. 그런데 하나님 앞에 죄를 짓고, 하나님을 떠나 살다보니까 그의 영성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스라엘만 보아도 잘 알 수 있습니다. 모세의 인도로 홍해를 건너서 시내 산 아래 시내광야에서 진치고 있었고,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갔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내려오지 않았습니다. 그 산 정상부근에 식량이 될 만한 것이나 물이 없었기에, 모세는 하나님을 만나러 올라가서 ‘죽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했을까요? 신을 만들자고 결의합니다. 그래서 만든 것이 ‘금송아지 우상’입니다. 이스라엘이 이 지경이라면,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사람들은 어떻겠습니까? 기독교가 전파되기 전에 다른 종교나 다른 신이 없었던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Β.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을 먹어도 되는가? (7).
본문은 다른 신이 없다는 전제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원래 다른 신도 없고, 우상도 사람이 만든 것이기에 시장에 내다파는 고기는 다른 신이나 우상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을 사다가 먹는다고 하여 아무 문제될 것이 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들의 생각이 그다지 틀리거나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어찌 보면 바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눈에 보이는 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시장에서 파는 그 고기들은 다른 신이나 우상에게 바쳐진 고기이기에, 그 고기를 사먹는 것은 ‘우상의 제물’을 먹는 것이고, 결국 우상숭배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아무리 다른 신이 없다고 설명해도 그들은 ‘무슨 소리냐? 분명히 우상이 있는데!’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고린도지역에 워낙 우상의 제단도 많고, 신전(神殿)도 많다보니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문제될 것이 없었겠지만, 고린도교회 안에서는 문제가 심각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고기를 사먹어도 아무 상관없다’고 주장했고, 또 다른 이들은 ‘그것은 우상의 제물이니 안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7절을 볼까요?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7) 채식주의자라면 몰라도, 육식을 하는 사람들은 시장에서 파는 고기를 사다 먹어야 하는데, 우상의 제물을 먹는다는 양심의 가책을 받는 것입니다. 웬만하거나 한 두 사람의 문제라면 문제될 것이 없었겠지만, 이 문제로 고린도교회가 양분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제물은 먹어도 될까요? 우상의 제물이기에 먹으면 안 될까요?
Γ. 중요한 기준은 형제에게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9-13).
먹어도 된다! 먹으면 안 된다! 서로 주장하다보면, 편이 갈리게 됩니다. 사람들은 이성적으로 생각할 것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적인 대응을 하게 되면, 나중에는 문제의 옳고 그름은 사라지고, 나의 생각을 반대하는 사람에 대한 적개심만 남게 됩니다. 그러지 않아도 고린도교회는 파벌이 심각했습니다. “나는 바울 파, 나는 베드로 파, 나는 아볼로 파, 나는 이도저도 다 싫으니까 그리스도 파다!” 이렇게 나뉘다보면, 본질이나 진리는 사라지고 다툼만 남게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주 중요한 한 기준을 정해줍니다. 우상의 제물이 아니라고 생각하든지, 우상의 제물이라고 생각하든지, 가장 중요한 문제는 ‘형제에게 덕을 세우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런즉 너희의 자유가 믿음이 약한 자들에게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되지 않도록 조심하라”(9) 걸려 넘어진다는 말의 원어가 ‘스칸달론’입니다. 우리가 흔히 쓰는 ‘스캔들’이라는 말입니다. 형제를 먼저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형제가 걸려 넘어진다면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바울은 이렇게 선언합니다.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13) 바울이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선언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믿음의 약한 형제를 먼저 생각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형제의 믿음을 세워주기 위해 삼가겠다는 것입니다. 왜 이런 생각을 했을까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굳건하게 세우기 위함입니다. 교회를 세우기 위해 웬만한 것은 희생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중심의 사고방식을 가진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나 중심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야합니다. 우리는 항상 그리스도를 먼저 생각해야 교회를 굳건하게 세울 수 있습니다.
Ⅲ.
한 식당에서 라면을 시켰는데 우동이 나왔습니다. 그리고 햄버거를 시켰는데 만두가 나왔습니다. 이럴 때 문득 주문을 잘못 넣었는지 한번은 의심하게 되는데, 나오는 음식마다 매번 다른 음식이 나오게 된다면 과연 어떨까요? 일본에 있는 이 식당은 ‘주문 실수가 넘치는 식당’입니다. 장사할 마음이 있는 걸까요? 그런데 항상 손님이 북적북적하고 인기 있는 ‘맛 집’입니다. 주문한 것과 달리 엉뚱한 메뉴를 가져다줘도 화내는 손님은 한 명도 없습니다. 이 식당에는 특별한 이해와 배려가 넘치는 음식을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식당이 특별한 이유는 다름 아니라 아르바이트생들 때문입니다. 이곳의 아르바이트생들은 모두 치매에 걸린 할머니들입니다. 때로는 직전에 받은 주문을 잊어버리기도 하고, 주문과는 전혀 다른 메뉴를 가져다주는 실수를 범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최선을 다해 일하고 계십니다. 웃음을 잃지 않고 노력하고 계십니다. 많은 자원봉사자와 더불어 운영되고 있는 이 식당은, 치매환자들에게 사회구성원으로 이 사회의 일부분이라는 소속감을 주고, 함께하는 공동체의식을 불어넣어주고 있습니다. 이 식당의 성공비결은 바로 ‘이해와 배려심’입니다. 그리고 어떤 손님도 화를 내거나 얼굴을 찡그리지 않습니다. 손님들도 모두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금 실수하고, 조금 느리고, 조금 서툴어도 괜찮습니다. 이분들은 다른 누구의 가족이 아니라 어린 시절, 우리의 모든 실수를 보듬고 길러주신 우리의 ‘어머니’이시기 때문입니다. 마크 트웨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람이 사람을 헤아릴 수 있는 것은 눈도 아니고, 지성도 아니거니와 오직 마음뿐이다.”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므로 덕교교회를 아름다운 믿음의 공동체로 세워나가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복(祝福)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