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동강 개비리길-남지수변공원 걷기여행
문경 고모산성의 ‘토끼비리', 안동 하회마을에서 병산서원까지의 ’강변 벼랑길' 등 낙동강을 따라 형성된 아름다운 길은 많이 있습니다. 창녕에는 이방면 덤말리 개비리길, 등리 개비리길, 유어면 이이목 개비리길, 남지 개비리길, 부곡면 임해진 개비리길 등 5개의 개비리길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길이 나면서 대부분 사라지고 남지 개비리길만 남았습니다. 임해진 개비리길 인근 노리마을 앞 도로변에는 개비리길 기념비가 있습니다. '남지개비리' 옛길은 그 낙동강 칠백리 길 중에서 가장 예쁜 길 중의 하나이며, 나라 안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아름다운 길입니다.
낙동강 개비리길
낙동강개비리길은 남지읍 아지리에서 용산리 마을까지 낙동강 벼랑에 나 있는 2.7km의 작은 오솔길입니다. 개비리길 입구의 아지리는 앞이 가려있는 마을이어서 ‘아까리’라 부르다가 조선조 말에 본남곡촌과 아지촌이 합해지면서 ‘아지리’로 개명되었다고 합니다. 과거 창녕현과 영산현의 경계지점이었던 아지리는 두 개의 마을이 있는데, 창녕현의 경계에 속한 아지는 창아지, 영산현의 아지는 영아지가 된 것입니다.
아지마을과 용산마을 사이의 낙동강변에는 수십 길 높은 벼랑이 둘러쳐져 있고 그 아래에는 낙동강물이 흐르고 있습니다. 옛날 영아지마을에서 키우던 개가 용산마을로 팔려가자 영아지마을에 남은 수컷은 여자 친구를 만나러 낙동강변의 벼랑을 타고 다녔습니다. 그리하여 길이 트였기 때문에 '개가 다녔던 벼랑길'이란 뜻으로 '개비리'라고 하였습니다. '비리'('벼리')는 '벼루'의 경상도 방언으로 벼랑을 뜻하는 말입니다.
개비리길의 유래에 대해 창녕군에서는 다른 이야기를 전하고 있습니다. 영아지마을에 사는 황씨 할아버지의 개 누렁이가 11마리의 새끼를 낳았는데, 그 중에 한 마리가 유독 눈에 띄게 조그마한 조리쟁이(못나고 작아 볼품이 없다는 방언)였습니다. 본시 개의 젖이 10개밖에 되지 않아 조리쟁이는 젖먹이 경쟁에서 항상 밀렸고 황씨 할아버지는 이를 가엾게 여겨 새끼들이 크자 10마리는 남지장에 팔았지만 조리쟁이는 집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등(山)너머 시집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이 친정에 왔다 가면서 조리쟁이를 키우겠다며 시집동네인 알개실로 데려갔습니다.
며칠 후 황씨 할아버지의 딸은 깜짝 놀랐습니다. 친정의 누렁이가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누렁이가 젖을 주려고 등을 넘어온 것이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살펴보니 누렁이는 하루에 꼭 한 번씩 조리쟁이에게 젖을 먹이고 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폭설이 내린 날에도 여전히 누렁이는 알개실마을에 나타났고 마을사람들은 누렁이가 어느 길로 왔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누렁이 뒤를 따라갔는데, 누렁이는 낙동강을 따라 나 있는 절벽면의 급경사로 인하여 눈이 쌓이지 못하고 강으로 떨어져 눈이 없는 곳을 따라 다녔던 것을 확인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산고개를 넘는 수고로움을 피하고 개(누렁이)가 다닌 비리(벼랑)로 다니게 되어 ‘개비리’라는 이름으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습니다. 또 다른 유래로는 ‘개’는 강가를 말하며 ‘비리’는 벼랑이란 뜻의 ‘벼루’에서 나온 말로, 강가 절벽 위에 난 길의 뜻으로 벼랑을 따라 조성된 길을 의미한다고 합니다. 강변의 두 마을을 잇는 이 벼랑길은 높은 절벽 위로 아슬아슬하게 이어가며 낙동강이 그려주는 눈부신 풍광을 가슴에 수놓아 올 수 있는, 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걷는 트레킹코스입니다.
개비리길 주변은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 장군과 의병들이 육지에서 첫 승리를 거둔 기음강 전투의 역사적 현장이기도 합니다. 기음강의 기강나루는 가야 때의 나루요 신라 때는 군대의 주둔지이기도 했습니다. 옛날 아지리 주민들이 남지장에 가기 위해서 이용하였던 길이고, 서울로 가려면 반드시 이 길을 통과해야 했기에 '서울나들이길'이라고도 했습니다. 강바람만이 스쳐갈 뿐 호젓하고 아름다운 이 길은 1022번 지방도로 공사가 예정돼 있다가 아름다운 옛길을 보존해야 한다는 여론에 밀려 계획이 취소되기도 했습니다.
개비리길이 끝나는 곳에 용산리 첫 마을인 창나리가 있습니다. 창이 있던 나루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창진(倉津)’이라 적고, 창나리라 불렀는데, 나리는 나루의 지방 사투리입니다. 신라 때 산 앞의 낙동강이 가야국과의 국경을 이룸으로 마을에 군사가 주둔하면서 군사용 큰 창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곳의 창나루는 두 강의 물줄기가 만나는 합강 지점으로, 옛날 음력 칠월 보름 백중날이면 가근방 사람들이 모여들어 월주(月柱)놀이를 행했다고 합니다. 창나루에서 강 건너 합강정(合江亭) 쪽을 바라보면 떠오르는 보름달의 달그림자가 강물에 비치는데 그것이 마치 달기둥처럼 보여 월주라 부르며 그 절경을 감상하고 보름밤을 즐겼다고 합니다.
남지수변공원
창나루에서는 마을 뒷산인 마분산 등산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본래는 창진산으로 불리다가 임진왜란 때 곽재우 장군의 죽은 말의 무덤이 있는 산이라 하여 ‘말무덤산(馬墳山)’으로 바뀌어 불리고 있습니다. 또 강변에는 남지수변공원 산책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유유히 흐르는 낙동강물을 곁에 두고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 사이를 발길 닿는 대로 걸을 수 있는 아름다운 걷기코스입니다.
워낙 광활한 면적이어서 직선거리로 걷는 데만 50분 이상 소요됩니다. 억새밭 사이 물길을 건너는 아치형 목교도 있고 억새숲길 곳곳에는 아름다운 시를 새겨 놓은 목판들과 석재 조형물들도 있고, 성루처럼 3층으로 된 고층 억새전망대와 나룻배 모양의 쉼터도 있습니다. 산책로는 6.25전쟁의 낙동강 최후 방어선으로 전쟁의 상흔이 남아 있는 남지철교(등록문화재 제145호)까지 이어집니다.
우포늪
창녕군 대합면, 이방면, 유어면 일대에 우포 ‧ 목포 ‧ 사지포 ‧ 쪽지벌의 네 개 늪이 있는데, 통상 이 네 개의 늪을 통틀어 우포늪이라 하기도 합니다. 92만5천 평의 넓이로 서울 여의도의 면적에 근접하며, 가장 큰 우포는 51만 평으로 여의도광장의 다섯 배에 달하는 넓이입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광활한 늪지에 개구리밥, 생이가래, 물억새, 창포, 부들, 가시연꽃 등 수 많은 물풀들이 수면을 덮고 있고, 나무들이 물속에 하반신을 담그고 있는 모습은 신비로움을 자아냅니다.
이번 여행에서는 우포늪 전망대에 올라 340여 종의 식물과 62종의 조류, 78종의 어류가 서식하고 있는 우리나라 최대의 내륙 습지 우포늪의 전체 경관을 살펴보고 산책로 걷기를 즐깁니다. 겨울 우포늪은 겨울 철새들의 천국입니다. 덩치 큰 기러기가 거대한 날개로 우아하게 하늘을 날며 안식처와 먹이를 찾기에 분주합니다. 늪 한가운데에는 우아한 자태로 휴식을 취하고 있는 고니 무리를 볼 수 있습니다.
호암 이병철 생가
타계 20주년을 맞아 개방된 호암 이병철(1910-1987) 생가는 전국 10대 명당으로 꼽히는데, 좋은 기운을 받으러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여행 명소가 되었습니다. 풍수지리에 따르면, 이곳은 곡식을 쌓아놓는 노적봉 형상의 기가 산자락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이 맺혀 있어 그 지세가 융성할 뿐만 아니라 남강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흐르고 있어 명당 중의 명당으로 불립니다.
이병철 회장은 1910년 이곳에서 2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해 1938년 삼성기업의 모체가 되는 삼성상회를 설립했습니다. 1851년 당시 노비만 130명이었다는 만석지기였던 조부가 세운 이 집에서 출생한 뒤 결혼해 분가하기 전까지 이곳에서 살았습니다. 분가해서 살던 집은 들어오는 골목길에 위치해 있습니다. 전체 가옥은 일자형 평면 형태로 사랑채와 안채가 나란히 배치되어 있습니다.
대문채를 통해 들어가면 사랑채가 나오고 그 맞은편에 안채가 있습니다. 부엌은 유난히 작은데, 당시 참숯을 피워 밥을 해먹었다고 합니다. 왼쪽에는 장독과 삼성상회 당시 사용했던 물건들이 전시돼 있는 광이 있습니다. 광 입구에서 오른쪽 작은 창을 바라보는 위치는 기가 세게 흐르는 곳이라 합니다. 집 주변은 낮은 토담과 퇴적암의 바위벽으로 이뤄져 있으며, 집 뒤에는 대나무숲과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바위벽은 쌀가마 모양, 자라목 모양, 시루떡 형상을 보이는데, 허리께까지 오는 바위벽에 몸을 기대면 좋은 기운을 얻을 수 있다는 설이 있습니다. 이 바위벽 옆에는 태풍으로 쓰러져 지금은 기둥만 남아 있는 회화나무가 있습니다. 품계 5급 이상의 고관이나 만석지기 이상의 갑부 집안에서만 심었던 회화나무는 산소를 가장 많이 내뿜는 나무로 탄소동화작용이 가장 활발합니다. 따라서 이 나무를 심으면 질병이 예방되고 머리가 명석해진다고 합니다.(참고자료: 필 경남 · ‘부자 기받기 순례1번지’)
곽재우 장군 생가마을
큰 북을 매달아 의병을 모았던 현고수(懸鼓樹) 뒤편의 의병장 곽재우 장군 생가 터에는 최근 조선 초기 건축양식으로 안채 등 7동의 건물과 부대시설을 갖춘 정겹고 아담한 생가가 복원되어 있으며, 역사적 의미가 큰 생가는 나라사랑의 산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1592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에 침입하자 당시 41세이던 곽재우가 4월 22일 이곳 의령군 유곡면 세간리의 이 느티나무에 큰 북을 매달아 놓고 치면서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켰습니다. 임진왜란 때 의병이 처음 일어난 곳이어서 해마다 열리는 의병제전 행사를 위한 성화가 이곳에서 채화되고 있습니다. 현고수는 북을 매단 나무란 뜻으로 수령 520여 년으로 추정되며, 높이 15m, 가슴높이 둘레 7m의 고목입니다.
주남저수지
약 180만평 넓이의 저수지이자 철새도래지입니다. 광활한 늪지와 갈대가 자생하고 있는 섬이 있어 개구리밥, 붕어마름 등 각종 먹이가 풍부해 철새도래지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곳입니다. 150여 종의 다양한 철새들과 갖가지의 수생식물, 곤충 등으로 아름다운 사계를 선보이며 감동을 전해주는 살아있는 자연사박물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창원의 동읍 판신마을과 대산면 고등포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주천강(注川江)에 가설되어 있는 주남돌다리는 800년 전 자웅석을 옮겨다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 있는 아름다운 다리로, '주남새다리'라는 이름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800여 년 전 강 양편 주민들이 정병산 봉우리에서 길이 4m가 넘는 자웅석(雌雄石)을 옮겨와 다리를 놓았다는 전설이 있을 뿐 건립시기, 경위 등이 확실치 않습니다. 1967년 집중호우로 대부분이 붕괴된 것을 1996년 복원한 것으로 다리를 세운 정확한 시기나 경위 등은 알려진 것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