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7월25일(일)맑음
토지공개념에 기초한 토지세의 원조라 할 수 있는 헨리 조지(Henry George, 1839~1897)를 알아보다. 그는 미국의 저술가, 정치가, 정치경제학자이다. 그는 단일세(Single tax)라고도 불리는 토지가치세의 주창자였으며, 조지주의(Georgism)라고 불리는 경제학파의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헨리 조지는 19세기 후반에 카를 마르크스와의 논쟁에서 자본과 토지를 구분하지 않는 마르크스 경제학을 비판하였다. 특히 마르크스의 이론대로 가면 독재가 들어설 위험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실증되었다. 그의 저서 <진보와 빈곤 Progress and Poverty, 1879>에서 말했다.
인간이 창조주의 평등한 허락을 받아 이 땅에 존재한다고 하면
우리는 창조주의 하사품을 평등하게 향유 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으며
또 자연이 공평하게 제공하는 모든 것을 평등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
이것은 자연적인 권리이며 양도할 수 없는 권리이다.
이것은 또 모든 인간이 세상에 태어나면서 취득하는 권리이며
살아가는 동안에는 타인의 권리와 충돌되지 않은 한 제약될 수 없다.
자연은 상속 무제한 토지소유권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토지의 배타적 소유를 정당하다고 인정할 수 있는 권원(권리의 원천)은 어디에도 없다.
현재 살아있는 인류가 합의하여 토지에 대한 자기들의 평등한 권리를 포기한다고 하더라도
후세대의 권리까지 포기할 수 없다.
인간은 지구에 임시로 세 들어 사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후세대가 세 들어 살 권리를 우리가 대신 결정하다니,
도대체 우리가 지구를 만들기라도 했단 말인가?
부의 평등한 분배가 이루어진 사회에서는, 그리하여 전반적으로 애국심, 덕, 지성이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가 개선된다. 그러나 부의 분배가 매우 불공평한 사회에서는 정부가 민주화될수록 사회는 오히려 악화된다. 부패한 민주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국민성은 권력을 장악한 자, 그리하여 결국 존경을 받게 된 자의 특성을 점차 닮게 마련이어서 국민의 도덕성이 타락한다. 이러한 과정은 역사의 긴 파노라마 속에서 수없이 되풀이 되면서, 자유롭던 민족이 노예상태로 전락한다. 가장 미천한 지위의 인간이 부패를 통해 부와 권력에 올라서는 모습을 늘 보게 되는 곳에서는, 부패를 묵인하다가 결국 부패를 부러워하게 된다. 부패한 민주정부는 결국 국민을 부패시키며, 국민이 부패한 나라는 되살아날 길이 없다. 생명은 죽고 송장만 남아, 국가는 운명이라는 이름의 삽에 의해 땅에 묻혀 사라지고 만다. (진보와 빈곤, 531~533)
<지금 한국인은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지금 한국인은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자신을 돌아봐야 한다. 국민 각자가 부동산투기꾼의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지, 아니면 이웃과 함께 잘 살자는 공동체를 만들려는 염원이 있는지를. 부동산정책에 실패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실망과 절망에 빠진 민중은 자신들의 분노와 좌절을 해결해줄 것처럼 선전하는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을 내줄 수도 있다. 마치 모든 사람을 부자로 만들어 줄 것처럼 대중을 들뜨게 했던 이명박 정권을 선택했던 것처럼. 무능하여 정책에 실패한 민주 정부에서는 언제나 최악의 인물에게 권력이 돌아간다. 정직성, 애국심은 압박받고 비양심이 성공을 거둔다. 최선의 인물은 바닥에 가라앉고 최악의 인물이 정상에 떠오른다. 악한 자가 나가면 더 악한 자가 들어선다. 그러나 국가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 공공선을 지향하는 정치세력에 힘을 실어줄지, 기득권자의 사익을 유지하는 정치세력에 힘을 실어줄지는 국민의 선택에 달려있다. 깨어있는 국민만이 깨어있는 정부를 가질 수 있다. 나는 한국민의 영성을 믿는다. 언제나 공생과 정의가 승리하며, 사랑과 평화가 번영한다.
<눈알을 돌리면 즉시 깨어난다>
안도 없고 바깥도 없다. 나갈 수도 없고 들어갈 수도 없다. 올라갈 그 위도 없고 내려갈 그 아래도 없다. 여기가 어딘가?
여기는 먼 길에서 돌아온 곳이며, 모든 길이 끝난 곳이다. 다시 여기에서 모든 길이 시작되고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간다. 일체가 여기서 시작되고 여기서 종말을 고한다. 그러나 여기는 사람도 없고 사물도 없고, 한 물건도 없다. 여기는 어디인가?
저녁놀 불그스레 구름을 물들이니 하늘은 비취색으로 빛난다. 배롱나무 꽃이 사릉사릉 날리어 금모래 위로 떨어진다. 金砂場금사장에 비단풀이 수를 놓아 天宮의 앞뜰인 듯, 풀이 푸르고 꽃이 붉은 것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새가 울고 지나간 이낀 낀 돌담이 귀엽다. 눈에 가득한 밝음은 무한한 어둠에 안겨있다. 한밤의 어둠은 무한한 밝음의 품에 안겨있다. 앎은 알-수-없음의 품에 안겨있고, 알-수-없음은 앎의 품에 안긴다. 무는 유의 품에 안기고, 유는 무의 품에 안긴다. 유무가 서로를 포옹하니 유의 무요, 무의 유다. 유무가 중첩되니 텅-빔-사랑이다. 빠져있음과 깨어있음이 겹쳐 있으니, 눈알을 돌리면 즉시 깨어난다.
2021년7월26일(월)구름 많음
오전에 금당선원 마당에 풀 뽑고 도량 정리하다. 다각실에서 커피 한잔하면서 환담을 나누다.
법흥왕이 이차돈에게 한 말:
鸞鳳之子 幼有凌宵之心, 난봉지자 유유능소지심
鴻鵠之兒 生懷截波之勢; 홍곡지아 생회절파지세
爾得如是 可謂大士之行乎? 이득여시 가위대시지행호
난봉의 새끼는 어려도 하늘을 꽤 뚫는 마음이 있고
홍곡의 새끼는 태어남에 파도를 끊은 형세를 품는다.
네가 이리 행하면 보살의 실천이라 할 것이다.
이에 서기 527년에 이차돈의 순교로 말미암아 불교를 국교로 공포할 수 있었다.
2021년7월27일(화)맑음
알릴레오 22회 시청하다. <아인슈타인이 괴델과 함께 걸을 때- 짐 홀터 저>를 읽으면서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눈다. 제일 마지막에 우주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질문이 나온다. 이 질문은 인간은 왜 존재하는가, 혹은 나는 왜 존재하는가? 라는 기초존재론적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유시민의 답은 “우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조금 놀랐다. 유시민의 세계관이 우연론이라니? 모든 것이 태어나보니 이렇게 벌어져 있는 세계 속에 자신이 놓여있음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연히 일어난 일이다. 모든 게 내가 원했던 일이 아니라는 토로이다. 유시민의 살아온 이력을 감안하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해가 간다. 좌파지식인으로서 현실정치의 한복판에서 공동선을 실현하려고 분투하다가 좌절하였고 이제는 은퇴하여 재야지성으로 살아간다. 좌파지성은 현세 중심주의, 무신론적 인문주의에 기초하여 세계를 조망하므로 창조론도 아니고 숙명론도 아니니 남은 것은 우연론이다. 그리고 그것은 유물론에 가깝다. 그래서 “내 마음 가는 대로 삽니다.” 그리고 그는 상호혐오와 적대관계가 일반화된 한국의 정치현실에 좌충우돌 시행착오를 거듭하면서 상처받고 환멸을 느껴 은퇴한 까닭에 일종의 낙향한 선비의 허무주의적 경향을 보인다. 자유분방해 보이는 그의 지적탐구는 어디로 향해갈까? 그것이 그의 영혼을 안식과 해탈로 인도할까? 방송 매체를 통한 그의 활동이 시민의 의식을 일깨우는 데 상당한 일을 하고 있다. 이제까지는 정치평론가로 알려져 있었는데 앞으로는 지혜와 자비를 갖춘 평론가로 거듭나길 바란다.
*읽을 책:
①아인슈타인과 괴델이 함께 걸을 때
②괴델의 증명
③수학의 확실성
④아름다움은 왜 진리인가? -이언 스튜어트
⑤뷰티플 퀘스쳔 –프랭크 윌첵
⑥김상욱의 양자공부
2021년7월28일(수)맑음
삭발목욕일이다. 진주보살님들 수박 가지고 공양 오다. 점심 공양하고 플래닛1020에서 차 마시며 환담 나누다. 천은사 호수가 산책하고 돌아가다.
東皐樹鬱蒼, 동고수울창
西山戴雲光; 서산대운광
个中有何事, 개중유하사
暮庭蟬嘯長. 모정선소장
동쪽 언덕에 숲이 울창하고
서산 머리엔 구름이 빛난다
이 가운데 무슨 일이 있는가?
해 저문 뜰에 매미가 길게 우네
2021년7월30일(금)맑음
불확실한 정도를 확실하게 아는 것이 과학이다.
무엇을 모르는지, 모르는 범위를 이야기해주는 게 과학이다. (불확정성 원리)
네가 본 것은 이미 거기에 없다. 너의 봄이 그 대상의 상태를 벌써 교란시켰기 때문이다. (예, 전자를 관측할 경우)
이런 의미에서 일체는 사물의 집합이 아니라 사건의 집합이다. (이것은 관계론, 불교적으로 연기론의 관점이다)
<텍스트밖에 없다> 데리다의 관점
바로 그 (세간의)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진제(眞諦)는 가르쳐질 수 없다.
바로 그 진제(眞諦)를 알지 못하고서는 열반은 얻어지지 않는다. <중론>에서
이 이제(진제+세제)론의 문제야말로 용수의 철학적 사유를 포함한 중관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척도다. ‘바로 그 (세간의) 언어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진제(眞諦)는 가르쳐질 수 없다.’는 주장은 연기실상의 세계는 오직 우리의 언설을 통해 드러나고, 우리가 논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언설뿐이라는 뜻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오직 텍스트(문자화된 경전과 구전으로 전승된 가르침, 즉 言說)뿐이라는 점이다.
<말과 문자는 서로 상보적이다>
말과 문자는 서로 상보적이다. (말이 진짜이고, 문자는 기록일 뿐이라는 관점과 말이 있기 전에 문자가 있었다는 관점을 서로 상보적으로 보아야 한다. 말은 빠롤parole(일상어, 생활)이고 문자는 랑그langue(구조, 문법)이다.)
<모든 텍스트는 해석되고 이해된 것이다>
텍스트와 현실은 상호의존적이다. 텍스트라는 게 신의 말씀이거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의미연관전체성에서 해석되어야 할 자료이다. 텍스트는 세계성Weltlichkeit이라는 구조의 산물이다. 텍스트를 읽고 이해하려는 사람은 ‘지금 여기’ 생활세계를 살고 있는 현존재(이것이 현사실성이다)이기에, 텍스트는 언제나 재해석되기 마련이다. 사실 모든 텍스트 자체가 이미 해석되고 이해된 것이다. 텍스트에 대한 해석은 언제나 이미 이데올로기의 흔적이 남는다. 모든 저자는 자기 이데올로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독자는 저자를 비판적 관점에서 보아야 한다. 모든 경전은 ‘如是我聞 evam maya surutam. Thus is heard by me. 이와같이 나에게 들려졌다. 이것은 나에게 들린 것(이다)’라고 시작된다. 이것은 화자(話者)가 무슨 말을 하였든 청자(聽者), 즉 들은 자의 기록이 곧 붓다의 가르침인 경(經)이라는 뜻이다. 또 붓다가 어떤 이야기를 하였든 그 기록이 남긴 것은 중생의 근기(비록 아난존자가 듣고 기억한 것을 재생한 것일지라도)에 따른 해석일 뿐임을 가리킨다. 이런 전통은 오늘날에도 ‘저작권’에 대한 개념과는 정반대로, 저자에게 저작권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자에게 그 권리가 있다는 의미와도 일맥상통한다. 불법은 ‘듣는 사람을 위한 것’이다.
<세계화된 시대의 불교는 보편적 가치를 지향하라>
역사적으로 오늘날처럼 각국의 전통들이 세계불교 ‘시장’에 매물로 나와 고객들을 기다리는 시기는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세계화된 시대에 자신의 불교만을 전통으로 간주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파는 것과 같다. 字句자구에 얽매이지 않는 붓다의 가르침에 대한 독자적인 해석이 오늘날처럼 필요한 시대가 또 있을까? -신상환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