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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4세기 삼국시대 한반도에 전래된 이후 고려시대까지 천 년이라는 오랜 기간 국교의 지위에서 통치의 이념이었으며 생활 철학이자 절대적인 신앙이었다. 문화를 그 시대 인간의 정신이 창조해 낸 산물이라고 할 때, 역사시대 이후 우리의 고대문화는 불교문화가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운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보면 머나먼 시골 변방에 불과한 지리산 자락에 경주 못지않은 선진 형식의 최정예 불교문화재들이 그토록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이들 문화재를 통하여 천여 년 전 이 땅에 살았던 옛사람들은 어떻게 지리산을 바라보았는지 말해주고 있다.
불교의 종교적 관점에서 오늘날 최고의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는 불상도 경주에서는 남겨져 있지 않은 선도적인 양식을 지리산에서 만날 수 있다. 지리산에 펼쳐진 당대 최첨단 문화의 가치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하여 불교 성립 이후 인도에서 출현한 불상이 종교적, 문화적으로 지리산 자락까지 흘러온 과정과 불상에 대한 기본적인 소양이 필요하다.
불상숭배 문화에 대한 소양이 중요한 또 다른 이유는, 사찰의 창건 시기를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열쇠인 불탑숭배 문화에 대한 이해를 위해서도 꼭 필요한 예비지식이기 때문이다.
1. 무불상 시대
오늘날 사찰에 가면 많은 전각들 안에는 당연히 불상들이 단독으로 또는 무리지어 모셔져 있으며, 참배객들에게 절대적인 예배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 불교가 탄생하고 난 후 500여년이 지나도록 불상 없이 불교는 번성하였다. 이 시기를 ‘무불상(無佛像) 시대’라고 한다.
1)근본불교 시대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달음을 얻은 때로부터 불교가 성립되었다고 보면, 이때부터 석가의 말씀을 직접 전해들은 직제자들이 불법을 전파하던 시기(~불기 50년경)를 ‘근본불교’ 시대라고 한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진리를 깨달아 가르침(법)을 전해준 ‘위대한 스승’으로서 존숭 받았지만 신과 같이 숭배되는 존재는 아니었다. 그러니 숭배를 위한 불상의 존재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2)초기불교 혹은 원시불교 시대
불교의 발전 단계에서 근본불교 다음으로 ‘초기불교(혹은 원시불교) 시대’로 연결된다. 초기불교는 최초의 소박한 교단이 점차 결집을 이루며 차츰 종교적인 성향으로 발전 전개되는 시기(불기50년~불기150년경)를 말한다. 인도에는 석가와 같은 위대한 성인의 말씀을 글로써 기록하는 일을 천박하게 여기는 문화가 있었다. 석가의 입멸 이후 말씀을 전해들은 제자들의 암송을 통하여 후대로 교리가 전해지다 보니 여전히 본격적인 교단으로 성장하는데 한계가 있었다. 몇 차례 지도급 신도들의 결집을 통하여 암송의 내용을 확인하고 정리하면서 위대한 스승의 말씀을 최대한 정확하게 입으로 전하는데 주력하고 있던 시기였다.
3)부파불교 시대
그러다가 차츰 불교가 넓은 인도 전체로 펴져가게 되면서 새로운 문제가 대두 되었다. 각 지역별로 기후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다 보니 출가승들이 수행을 위하여 반드시 지켜야 할 율법을 일률적으로 적용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전해오는 수행자의 율법을 엄격히 지켜야 한다는 보수적인 성향과 지역의 상황에 맞게 융통성 있게 적용해야 한다는 진보적 성향이 부딪히면서 이단논쟁이 발생하고 결국 입장 차이에 따라 20여개의 교단으로 분열이 일어나게 된다. 처음에는 율법을 둘러싸고 벌어진 분열이 결국 각 부파별로 결집하게 되면서 선의의 경쟁이 불붙어 교리의 해석까지도 독립적으로 발전시켜나가는 이 때를 ‘부파(部派)불교 시대’라고 한다(~기원전후).
이 무렵, 인도에 최초로 통일 대제국을 건설한 마우리아 왕조의 아소카왕(BC269~BC232년경)이 불교에 귀의하여 강력한 불교 부흥 정책을 펴게 되는데, 불탑의 전국 확산과 아울러 그때까지 암송에만 의존하던 석가의 말씀과 교리를 산스크리트어(인도 최상류층인 브라만 계급의 문자) 경전으로 편찬하여 전하게 하였다.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경전이 널리 퍼지게 되자 출가승들은 각 부파별로 교리를 파고들어 불교가 논리학의 정수로 일컬어 질 만큼 논리에 논리를 더하여 발전시켜나갔다. 교리는 깊이 있게 발전해갔지만, 한편으로는 한없이 어렵게 사변적으로 빠져들어 가고 있었다. 한편, 경전의 보급으로 출가하지 않은 재가(在家)신도들도 교리에 밝아지고 의식이 더 깨어나게 되면서 지금까지 출가신도(출가승) 중심이었던 불교계에 재가신도들의 영향력이 커져갔다. 훗날 ‘대승불교’의 등장을 예고하는 장면이다.
아소카왕의 지원으로 인도 전국에 수많은 불탑이 조성되고, 석가의 성지를 순례하는 관습이 퍼질 만큼 불교의 교단이 발전해나간 이때까지도 여전히 불상은 만들어지지 않았다.
근본적으로, 동양에서는 초월적인 존재를 세속적인 인간의 형상을 빌어 표현하는 것을 불손하고 천박한 일로 생각했다. 이슬람에서는 오늘날까지 창시자인 무하마드나 알라신을 표현하지 않으며, 기독교에서 십자가의 예수상이 예배의 대상이 된 것도 수 세기 이후의 일이다.
특히 불교에서는 육신과 감각의 세계를 초월하여 열반의 세계로 들어간 존재를 다시 현상계의 모습으로 재현한다는 것을 쉽사리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다.
출가승들은 경전을 깊이 파고드는 한편으로 석가가 깨달아 전해준 법에 따라 오로지 자신이 불제자로서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경지인 아라한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아 수행에 몰두하였다
4)부처의 불표현 원칙
비록 석가의 형상을 만들지는 않았지만, 불교의 확장에 따라 활발하게 조성된 불탑의 장엄을 위하여 석가의 본생담(本生譚: 전생에서의 석가의 이야기)이나 불전도(佛傳圖:이 생에서의 석가의 이야기를 그린 그림)를 조각으로 장식하는 문화도 발전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석가가 있어야 할 자리에 부처의 불표현 원칙은 절대적으로 지켜져 갔다. 대신 석가를 상징하는 보리수, 발바닥, 터빈, 금강좌 등을 그 자리에 표현하여 그림의 의미는 완성하였지만 무불상 시대는 엄격하게 계속 이어져갔다.
*‘삼십삼천으로부터 강생도’. 부처가 도리천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설화를 표현한 장면.
직접적인 부처의 표현은 없는 대신 도리천으로 올라가는 사다리의 위 아래에 부처를 상징하는 발이 표현되어 있다.
*‘엘라파트라의 예불도’(기원전 2세기). 부처를 향하여 예불을 드리는데 정작 부처는 없다.
대신에, 부처가 앉았던 보리수 아래 대좌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2. 대승불교의 등장
부파불교에서 경쟁적으로 벌어진 교리의 논리적 심화 발전을 다른 말로 바꾸면 교리가 너무 어렵고 복잡해져간 것이다. 결국 기원 전후(불기 500년경)하여 출가승 중심의 사원불교가 일반 대중인 재가신도들과 공유하지 못하고 괴리가 벌어지면서, 교단으로부터 멀어진 대중들은 교단에 반발하면서 보다 대중적이면서 쉬운 대승불교의 성립을 재촉하게 되었다.
1)부파불교에 대한 대승교단의 비판
출가신도 중심의 부파불교는 타인의 구제 보다는 수행을 통하여 오로지 자신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르는 것에만 몰두하는 이기적인 교단이라고 비판하면서, 대승(大乘:큰 수레)교단은 초심으로 돌아가 석가의 가르침인 중생구제를 중요한 가치로 내세웠다. 널리 일체 중생들을 큰 수레에 태우고 해탈의 바다를 건너는 것을 목표로 삼으면서, 중생을 외면하고 편협한 이기심으로 자신의 해탈에만 목표로 삼는 부파불교를 대승에 빗대어 소승(小乘:작은 수레)이라 비난하면서 ‘소승불교’란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2)보살의 등장
대승불교에서는 자기 자신뿐만 아니라 남을 위하는 이타행의 실천이 크게 강조되어 중생구제를 실천하는 보살이라는 새로운 개념이 등장하였다. 이 시기에, 석가불은 이미 열반에 든 부처이며 미래에 세상으로 내려와 중생을 구제한다는 미륵불은 아득한 56억년 후에나 나타날 것이므로 당장은 중생을 구제해 줄 부처가 없는 세상이다. 그래서 새롭게 도입한 개념이 보살이다. 부처의 경지에 이를 만큼 지혜의 법을 깨달은 존재이기는 하나 부처가 되는 것을 보류하고 현세에 남아 희생적으로 중생구제에 나서는 대승불교의 핵심적인 존재이다.
수많은 중생들의 온갖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하여 다양한 역할을 지닌 보살들이 등장하는데, 문수보살은 지혜의 화신이며 관음보살은 자비의 화신이며 보현보살은 깨달은 법을 실천의 화신이다. 중생구제에 중요한 자비의 화신인 관음보살은 그래서 종류가 한 없이 많다. 후대에 등장한 것이지만, 천수천안(千手千眼)관음보살은 수많은 눈으로 중생들을 살펴보고 수많은 손으로 갖가지 어려움에 손길을 내밀어 주며, 11면 관음보살은 11개의 얼굴로 구석구석 중생들을 살펴보는 역할이다.
3)다양한 부처의 등장
불교는 인도의 전통적인 세계관과 문화를 기반으로 발생하였다. 인도의 우주관은 수미산을 중심으로 하나의 불국토만 인식하였으므로 우주를 관장하는 하나의 부처인 석가불만 있으면 되었다.
그리스의 알렉산더대왕의 동방원정대는 인도의 서쪽 인더스강까지 진출했고, 중국 한무제의 서역 진출로 밀려 내려온 흉노족이 인도 동북쪽에 나타나자 인도인들에게 인도 이외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인식하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껏 믿어왔던 인도대륙 중심의 편협한 세계관을 근본적으로 수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무수한 다른 세계의 존재를 상정하게 되고 그 세계들과의 공존을 당연한 우주 섭리로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이에 불교에서도 석가불과 동등한 부처가 다른 세계에 얼마든지 출현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하게 되었고, 인도에서 나신 부처의 말씀만이 진리가 아니라 모든 부처님 말씀이 다 진리라는 합리적인 사고 속에서 도처에 존재하는 모든 진리는 다 불설(佛說)이라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교리 체계를 확립해 나간다. 이것이 곧 대승(大乘)사상 출현의 원인이자 결과이다.
동방과 서방에도 또 다른 세상이 있고, 갖가지 고난에 처한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다양한 속성을 지닌 많은 종류의 보살이 등장했듯이 각각의 새로운 불국토를 관장하는 부처가 필요했다. 동방정토를 관장하는 약사불과 서방의 극락정토를 관장하는 아미타불 등 끝없이 불교의 논리적 확장성에 따라 석가불 이외에 수많은 부처도 등장하게 되었다.
4)불상 제작의 필요성 대두
대승불교의 등장으로 석가는 이제 더 이상 역사적인 인물이 아니라 초역사적 초월적 존재로 변모하였고, 스스로 수행을 통하여 자신만의 깨달음을 얻겠다는 부파불교의 자력 신앙에서 절대적이며 영원한 존재에 의지하여 구원을 받으려는 타력 신앙의 성격이 짙어졌다. 결국, 영원하고 절대적이고 이상적인 모습의 예배대상이 강력히 요구되었다. 또한, 불교가 대중화 되면서 추상적인 부처의 말씀만으로는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신도들도 많아졌다. 지금까지는 교리 안에서만 존재하던 많은 보살과 부처들의 구체적이고도 실재적인 형상을 통해서만 그러한 가르침을 쉽게 이해시킬 수 있어 불상의 제작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되었다.
3. 불상의 등장
1)불상 제작의 영감
동양에서는 위대한 인물을 인간의 형상을 빌려 상을 만드는 일을 금기시하는 문화가 있음을 살펴보고 왔다. 더군다나 인도에서도 수많은 토속 신이 있지만 형상화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불상을 만들 생각조차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즈음하여 인도인들이 불상 제작의 영감을 얻을 수 있었던 지역이 있었으니 인도 서북부(지금의 파키스탄 동부) 간다라 지역과 인도 중부 마투라 지역에서 일어난 새로운 문화 현상이었다.
기원전 3세기 그리스의 알렉산더 대왕이 동방원정을 하면서 인도를 코앞에 둔 인더스강의 상류 간다라 지역까지 와서 머물다가 인도 침공을 포기하고 되돌아가면서 인간의 형상으로 신상을 만드는 그리스의 문화를 남기고 간 것이다. 동서 교역의 중심지인 간다라에서 발달한 상업은 불교의 최대 지원세력이었으므로 이들의 후원에 힘입어 그리스 신상으로부터 불상 제작의 영감을 얻었던 것이다.
*그리스 신상
한편, 인도 중부 갠지스강 중류 교역의 중심지 마투라 지역에서는 인도의 토속적인 풍요의 신상을 만들어 숭배하는 신앙이 기원전 2-3세기에 대두되었는데, 간다라와 마찬가지로 인체의 형상을 빌린 신상이 등장하자 이 역시 불상 제작의 영감을 얻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인도의 토속신 나무의 정령, 디다르간지 야시상 (기원전 2세기)
2)불상 제작의 자신감을 넣어준 32길상 80종호
불상 제작의 영감은 얻었지만 이때는 이미 석가가 입멸한지 500년이 지났으니 석가의 모습을 기억은 고사하고 전하는 이야기조차 사라진 때이므로 어떻게 불상을 만들어야 할지가 고민이었다. 특정한 상이 어떻게 붓다를 대신할 수 있는지 분명하게 입증할 수 없었던 것이다.
불상에 권위를 부여하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신성하다고 받아들일 만한 형식적 요소들을 도상적으로 갖출 필요가 있었다. 인도에서는 인간은 갖출 수 없는, 위대한 인간인 전륜성왕이나 깨달음을 얻은 부처는 갖추어야 할 신체적 특징으로 32길상 80종호가 전해지고 있었다. 이제는 더 이상 망설일 필요 없이 불상 제작의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32상 중에 몇 가지만 살펴보면, 마흔 개의 치아가 있다, 혀가 부드럽고 얇다, 몸을 바로 하였을 때 손을 내리면 무릎에 닿는다, 손가락과 발가락 사이에 모두 갈퀴가 있다...... 현실적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것도 있고, 위에 예를 든 것처럼 표현함으로써 이상해져서 오히려 부처의 존엄성이 손상되는 것들도 있다. 그래서 초기에 손가락 갈퀴가 있는 불상의 예도 있긴 하지만 모든 불상이 32상을 다 갖추고 있지는 않다. 합리적으로 취사선택하여 인간의 모습을 띠되 보통 인간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신성한 예배의 대상을 만들어 갔다.
지금까지 불상에 적용되고 있는 길상으로는 정수리에 육계가 있다(상투 같이 머리에 솟아난 뼈), 머리카락이 오른쪽으로 돌아 오른다(나발), 양미간 사이에 털이 나 있는데 눈빛과 같다(백호), 등이 있고, 귓바퀴가 늘어진 것도 80종호에서 채용하여 적용된 것이다.
*불상의 명칭
사실, 32길상도초반부너 모두 정립된 것이 아니라 시대에 따라서 변화를 거듭하며 불상이 출현한 이후에 추가되기도 하였다.
대략 5세기경 굽타시대에 오늘날과 같은 불상의 특징들이 자리 잡았다.
불상이 무슨 부처인지 구분은 주로 수인(手印:손 모양)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불상에서는 정확하게 지켜지지 않으므로 깊이 들어갈 요량이 아니라면 굳이 외울 필요가 없다. 요즘 사찰에 가면 불상 앞에 명패를 써놓았다. 앞으로 구체적인 불상의 예가 나올 경우, 그때 하나씩 살펴보면 보다 쉽게 이해할 수 있게 될 것이다.
3)초기 불상
불상 제작의 영감과 자신감을 갖춘 인도의 간다라 지역과 마투라 지역에서 대승불교의 융성에 따라 드디어 기원후 1세기 경, 500년간의 무불상 시대를 끝내고 최초의 불상이 제작되었다.
새로운 문화가 유입되면 일단 모방부터 하게 된다. 간다라 지역에서는 그리스 신상에서 영감을 얻어 불상을 제작하다 보니 선정(깨달음의 삼매경)에 든 듯 우수에 찬 눈을 가진 서구인의 모습, 머리는 곱슬머리에다가 곁에 걸치는 대의는 목 아래 가슴을 휘감아 반대편 어깨로 넘긴 그리스풍이다.
*간다라 지역의 초기 불상.
오른쪽 어깨를 감고 돌아온 대의를 왼쪽 어깨로 넘긴 착의법을 ‘통견법(通肩法)’이라 한다. 간다라 지역에서 그리스 신상을 모방하여 불상에 채용한 통견법은 불상의 발전 과정에서 눈여겨 볼 주요한 양식적 특성 중에 하나이다.
마투라 지역에서도 마찬가지로 이 지역에 성행하던 풍요의 여신 야시의 신상을 모방하여 불상을 제작하다 보니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은 활짝 뜨고 환희에 찬 얼굴이며, 대의는 몸에 밀착하여 가슴의 반은 드러내어 관능적이다.
*마투라 지역의 초기 불상
대의가 간다라 불상과 조금 다른데, 오른쪽 어깨는 드러내놓고 왼쪽 어깨로 넘긴 착의법을 ‘편단우견(偏袒右肩)’이라 한다. 마투라 지역에서 토속 신상들을 모방하면서 채용한 착의법인데 인도 전통에 오른쪽을 드러내는 것은 상대에 대한 존경의 표시라고 한다.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각각 등장한 통견법과 편단우견은 곧 양 지역의 문화가 융합하면서 지역 구분 없이 사용하게 된다.
*불상 출현의 시기 인도 지도
인도 서부 파키스탄과 경계를 이루는 인더스강 상류에 간다라 지역이 있고, 중부 캔지스강 중류에 마투라 지역이 있다. 고대문명의 발상지이기도 한 이 지역들은 교역의 발달로 상업계급이 강력한 불교 후원세력으로 성장하여 대중적인 대승불교를 견인했으며 불상의 등장을 재촉한 것이다.
4)보살상
보살은 부처가 되기를 미루고 중생과 함께 성불하기 위하여 비장한 각오로 실천행을 닦고 있는 존재이다. 위로는 깨달음을 구하고 (上求菩提;상구보리) 아래로는 중생을 교화하는 (下化衆生;하화중생) 매우 중요한 역할을 맡는 대승불교의 핵심 개념 중에 하나이다.
부처의 다양한 속성을 가지고 있는 보살도 타력신앙이 등장한 대승불교 시대에는 중요한 숭배의 대상이 되었으므로 부처의 상에 이어 보살상의 제작도 요구되었다. 세속을 떠난 부처의 상과 세속에 머물고 있는 보살상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게 제작할 것인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사실 보살이라는 용어 자체는 대승불교가 등장하기 훨씬 전부터 있었다. 석가가 이생에서 부처가 될 수 있기까지 전생에서 선업을 쌓았으므로, 부처가 되기 전 전생의 석가를 구분하여 보살이라 불렀다. 그래서 대승불교에서 도입한 보살의 개념도 부처가 되기를 미루고 중생구제에 나선 존재이다. 같은 논리로 이 생에 대입해서, 석가가 부처가 되기 전 태자 시절의 석가도 보살이라 불렀다. 그래서 보살상을 만들면서 세속적 존재로서 건장하고 화려한 태자 시절의 모습을 담아낸 것이다. 머리에는 화려한 장식이나 보관을 썼고, 귀걸이 화려한 목걸이 팔찌 장식에다가 천의를 몸에 둘러 신체에 율동감을 주고 있다. 세속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보살의 자비행 공덕을 기리기 위하여 위대한 존재로 장엄한 것이다.
*초기 간다라 지역의 미륵보살상
건장한 태자상을 표현하였기에 콧수염이 있는 남성상이다.
부처의 상과 대비하여 보살상을 구분하는 특징은 머리에 관을 쓰고 있거나 혹은 리본으로 장식을 하였으며, 목걸이 팔찌 등 왕실의 태자답게 화려한 장식을 하고 있다. 오늘날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부처상과 보살상을 구분하는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머리에 보관이 있으면 보살이고, 나발과 육계만 있으면 부처상이라는 원칙은 엄격하게 지켜지고 있다.
부처든 보살이든 남녀와 같은 인간성으로 구분하지 않는데, 현재 우리나라의 보살상은 명백히 여성상이다. 초기의 건장한 남성상인 보살이 어떻게 변천되었는지 앞으로 살펴볼 것이다.
4. 인도 불상 예술의 절정기
모든 문화의 발전단계는 초기 모방에서 출발하여 주변 다양한 문화를 흡수 통합하면서 토착적인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예술적으로 성숙을 거듭하다가 드디어 최절정기에 도달한다. 한바탕 완숙기의 절정을 누리고 나면 물이 차면 넘치듯 주변으로 확산되어가는 한편으로, 절정을 이루던 곳에서는 물이 고여 흐려지듯 매너리즘에 빠져 형식화되고 점차 퇴보해가는 것이 모든 문화의 순환 과정이다.
대승불교의 출현으로 1세기 경 인도의 간다라와 마투라 지역에서 그리스 문화와 인도 토속문화에서 등장한 신상을 모방하여 최초의 불상이 등장했음을 살펴보고 나왔다. 두 지역에서 독자적으로 형성되어 가던 불상이 자연스럽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면서 현란한 발전을 거듭하였으니, 4-5세기에 인도 전역을 통일한 강력한 굽타왕조의 출현과 지원에 힘입어 인도 불교미술의 황금기를 이루면서 불상 조각사상 가장 신비로운 이상미의 극치를 이룩했다는 굽타 양식의 불상 출현이 그것이다.
오늘날 불상에서 당연히 볼 수 있는 육계, 나발, 삼도, 어께까지 늘어진 귀불, 수려하게 빼어난 용모에 윤곽선이 분명한 이목구비 등 신비감을 강조하는 구체적인 특징들이 이 시기에 안착하여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로 혹은 동남아로 전파된 불상의 전형이 되었다. 또한, 상체에 걸친 투명하게 비치는 얇은 대의에서 비쳐 나오는 육체의 아름다움은 중인도 토속신 야시상에서 보았던 전통인 관능미를 더욱 증가시키고 있다.
*굽타양식의 불상
초기 미투라 양식의 불상을 기반으로 하되 한층 세련되고 우아한 모습이다. 통일제국을 이룬 강력한 굽타왕조의 왕 찬드라굽타의 자신감과 신비감 넘치는 모습이 반영된 것임을 짐작해볼 수 있다.
간다라와 마투라 양식의 불상이 융합하면서 4세기 인도에서 출현한 굽타양식 불상은 예술적 성취가 정정을 이루고 넘치면서 중국과 우리나라로 흘러와 훗날 통일신라에서 불상의 꽃을 피울 수 있는 밑거름이 되었다.
한편, 문화의 순환 속성에 따라 최정점을 찍은 인도에서의 불교예술은 주변 정세의 영향으로 불교를 후원하던 상업세력이 쇠퇴하고 농업이 다시 부상하면서 토속적이고도 주술적인 힌두교가 득세를 하게 되었다. 여전히 대중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불교도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하여 몇 세기 후에는 불교의 발상지 인도에서 불교는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5. 불상 동진의 전초기지 서역(西域)
굽타양식으로 인도에서 최전성기를 누린 불상은 동쪽으로 넘쳐 서역을 적시고 중국으로 흘러 극성기를 보낸 후 다시 동진하여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으로 흘러들어간 것이다.
*불교와 불상의 동진 개념도
실크로드는 중국의 장안에서 출발하여 돈황과 타클라마칸사막을 남북으로 지나 페르시아로 간다.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인 타클라마칸사막 주변과 돈황 주변의 간숙성 지역이 서역으로 불리는 실크로드의 허리이다. 인도에서 출발한 불교는 서역을 거쳐 중국의 장안으로 동진하였다.
인도에서 무불상시대가 끝나고 불상이 신앙의 중심이 되어가면서 불교는 불상과 함께 동쪽으로 전래되기 시작하였다. 인도의 불상은 히말라야 산맥을 피하여 인도 서북부를 통하여 서역의 입구인 호탄으로 전파되어 갔다. 서역이란 중국의 입장에서 서쪽 지역에 있다고 붙여진 이름으로, 위 개념도에서 타클라마칸사막 주변 지역에 해당된다. 서역은 실크로드가 중국과 페르시아와 유럽을 연결하는 허리와 같은 곳이라 척박한 땅임에도 불구하고 교역을 통하여 동서의 다양한 문화가 교류하던 독특한 지역이다. 신라의 구법승 혜초(慧超:704~787)도 인도 여행을 마치고 중국으로 돌아오는 길에 서역의 돈황 석굴에 왕오천축국전(往五天竺國傳)을 남겼다.
인도의 간다라와 마투라에서 보았듯이, 불상이란 어차피 인간의 형상을 기본으로 만들어졌으므로, 어디서든 그 지역 또는 민족 특유의 이상적인 얼굴형이나 표정이 반영되기 마련이다. 인도에서 처음으로 불교와 불상이 외부로 전파된 서역에서도 볼 수 있는 현상이다. 불상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들어와 완숙기를 이루는 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개념으로서 서역 불상들의 모습을 보고 넘어가자.
* 대표적인 서역 불상들
임영애교수의 ‘서역불교조각사’ 책 표지 사진
지금까지 보아온 인도의 불상뿐만 아니라 후에 등장할 중국이나 우리나라의 불상 모습과는 전혀 다른 형상이다. 실크로드를 따라 서역에 몰려들었던 페르시아를 비롯하여 다민족의 얼굴이 불상에 반영된 것임을 알 수 있다.
6. 중국의 불상
1)불교의 중국 전래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시기는 한나라 때인 1세기 무렵이지만, 이때는 인도에서도 아직 불상이 출현하기 전이므로 불상 없이 불교만 전래되었다. 그러나 왕실을 통하여 들어온 불교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여 일반인들에게 널리 퍼지지 못하였으니 곧 서역을 거쳐 인도의 불상이 뒤따라 들어왔지만 200년 동안 본격적인 불상 제작은 되지 못했다. 종교와 같은 심오한 사상은 새롭게 도입되더라도 한 동안 자체적으로 이해하고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함을 보여주는 보편적인 현상이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로, 4세기에 불교가 전래된 이후 200년의 공백기를 거친 후 6세기 가까이 되어서야 비로소 불상이 나타난 데서도 알 수 있다.
중국은 220년 한나라가 멸망하고 삼국시대를 거쳐 양자강과 황하를 사이에 두고 북방의 호족(胡族)들이 세운 나라들과 남쪽의 전통 한족(漢族)의 나라들로 크게 갈린 남북조(南北朝)시대를 이룬 시기에 비로소 불경의 한문 번역이 이루어지고 불교의 교리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되면서 대형 불상을 제작하기 시작한다.
*불교가 중국의 남북조를 거쳐 우리나라로 흘러온 경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된 200년 후인 3세기에 돈황으로 표시되어 있는 서역을 통하여 불상은 남북조로 각각 전래되었다. 이후, 372년에 북조의 전진(前秦)에서 고구려에 불교를 전래했으며, 384년 남조의 동진(東晋)에서 백제에 불교를 전래하였다. 백제 무령왕 때까지 당시 남조인 양(梁)과의 활발한 문화교류가 이어지며 백제 불상은 남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즉, 중국의 남북조에서 북조는 지정학적으로 가까운 고구려에, 남조는 백제에 각각 불교문화를 전해 준 것이다.
2) 강력한 왕권을 표현한 불상
4세기 북조에서 강력한 왕권을 확립한 북위(北魏:386~534)는 본바탕이 오랑캐인 선비족(호족)이므로 유교로 무장한 남조의 한족에 비하여 문화적 열등감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본격적으로 전래된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고급 사상을 보완하는데 활용하였으며, 강력한 국가의 지원에 힘입어 불교문화는 비약적인 발전을 이루게 된다. 불상도 왕조의 이러한 의도에 따라 당시의 풍속이 반영된 양식의 중국화가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다. 모방을 거쳐 토착화가 이루어지는 시기이다.
불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은 북위는 왕이 곧 부처라는 사상을 만들어 왕권의 강화에 이용하면서 불상의 조성에 열을 올렸다. 이때까지 조성되던 50센티 이하의 소형 불상과는 달리, 신앙적으로 절대적인 존재인 불상에 왕의 얼굴을 반영하여 절대적인 왕권을 표현하려 했으므로 불상의 얼굴도 강력하고 자신감 넘치는 대형 불상 양식이 등장하게 된다. 북위 왕조가 운강석굴에 조성한 매우 건장하고 우람한 불상들이다.
*북위의 건국자 태조의 모습을 불상화한 운강석굴 제20동 본존선정불좌상.
더 이상 표현할 수 없이 자신감 넘치고 당당한 불상의 모습은 전무후무하다.
3)중국의 토착적 불상 양식인 포복식 대의의 출현
이 시기에 등장한 대표적인 중국식 불상 양식이 중국의 전통복식인 포복식(袍服式:옷고름이 있는 곤룡포) 대의(大衣:부처나 승려의 곁옷)이다. 불상의 대의는 앞서 살펴보고 나온 인도의 초기 불상에 등장하는 통견식(간다라 불상)와 편단우견(마투라 불상)의 기존의 양식 이외에, 중국에서 토착화 과정을 거치며 현지의 문화가 반영된 새로운 포복식이 등장하여 오늘날까지 대부분 불상의 대의는 크게 이 세 종류로 분류될 수 있다.
*포복식 대의를 입은 불상 (운강석굴 제6동 포복식 불상입상)
옷고름을 매는 곤룡포와 같은 대의를 포복식이라 한다.
4)보살의 여성화
초기 인도 간다라에서 출현한 보살의 양식은 세속적인 석가의 태자상을 표현하여 콧수염이 있는 건장한 남성의 모습을 하고 있음을 살펴보고 내려왔다. 북위 시대에 보살상이 중국에 전래되어 토착화되는 과정에서 여성상으로 양식화 되면서 우리나라에 흘러온 이래 오늘날 볼 수 있듯이 보상상은 여성상을 하고 있다. 그 이유로 몇 가지 설이 거론되고 있다.
이 무렵 삼존불상(가운데 부처상 및 좌우의 보살상이 자리한 삼존으로 구성된 불상)이 유행을 하는데, 전통적으로 음양오행사상이 투철한 중국인들은 부처를 남성신이라면 좌우에 서있는 보살은 음양의 섭리에 따라 여성이어야 한다는 생각이 작용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일설에는, 변방의 선비족이 북위를 건설하고 북중국에 발호하던 강호의 틈바구니에서 나라를 이루면서 황후들의 결사적인 모성애에 힘입은 바가 컸으며, 이 중에서 많은 여걸들이 등장하며 국정을 휘잡는 일이 이어졌다. 북위 왕실이 운강석굴의 수많은 불상을 조성하면서 황후를 모델로 삼아 보살상을 만들어 아첨하려는 경향에서 비롯되었다는 설이다.
위에 언급된 설들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겠지만, 이 보다는 북위 시대에 들어 불교의 교리에 대한 이해가 한층 성숙해진 결과로 보고 싶다. 한나라(1세기) 때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기는 했지만 심오한 교리를 이해하지 못하다가 이 무렵에서야 비로소 불교 경전들이 본격적으로 한문으로 번역되면서 제대로 이해하게 되었다. 태자상을 빌려 보살상을 만드는데 급급하던 초기가 지나고 자비의 화신으로서 보살의 개념이 정착되고 이해되면서, 자비로운 보살상에 모성을 느끼게 하는 여성의 모습으로 바뀐 것이다.
그래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있는 일이기는 하나, 상대를 높여 불러주는 풍습에 더하여 오늘날 사찰에서 여신도를 보살이라고 부르는 이유이기도 하다.
*자비로운 여성상을 하고 있는 북위시대 보살상
5) 인도 굽타 양식의 흡수와 남북조 양식의 융합
기세 높게 강성하던 북위의 권위적인 왕조도 전성기를 넘어가면서 불상에서도 초기 선비족의 야성미가 퇴조하고, 한층 부드러운 남조 문화와 마침 인도 불상의 최전성기를 이루던 관능미 넘치는 굽타 양식의 불상까지 들어와 다문화의 융합을 이루면서 양식의 변화를 겪게 된다. 인도의 마투라 양식 불상에서 토속적인 낙천성이 가미되어 깨달음을 얻은 환희를 나타낸 듯 환한 표정이 등장하긴 했지만, 불상은 대체적으로 종교적 예배대상으로 근엄하거나 명상에 잠긴 표정이었다.
포복식 불상에서 볼 수 있듯, 이 무렵부터 불상이 온화해지면서 우아한 모습을 띄기 시작한다. 둥근 얼굴에 온화한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되며 몸은 풍만해져서 어깨 가슴 손 등이 둥근 맛을 띄며 굽타의 영향으로 옷은 몸에 밀착되어 세련된 느낌이다. 이때 불상에 나타난 미소는 그윽하고 내면적이어서 매혹적이다. 이러한 미소는 결국 백제로 전해져 백제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대표하는 ‘백제의 미소’를 창조해낸 후 통일신라에까지 이어져간 것이다.
*남제 영명 원년(483년)명 무량수불좌상
포복식에 매혹적인 미소를 띠며 한층 부드러워진 불상
6)중국 불교와 불상의 전성기
중국의 남북조 시대가 수나라(581~618)에 의한 통일로 막을 내리고, 수나라도 세 차례의 고구려 정벌에 실패하면서 국력을 소진하여 38년이라는 짧은 역사에 막을 내리고 당나라(618~907)에 왕조를 넘겨주고 만다.
모방-통합-절정-쇠퇴로 이어지는 문화의 순환과정은 인도의 불교문화를 받아들여 토착, 발전시켜 우리나라로 전파해준 중국의 불상에도 예외가 아니다. 강력한 통일왕조를 구축한 당나라의 수도 장안은 실크로드의 시작점으로서 전세계의 다양한 문화가 집결하여 교류한 국제도시였다. 기독교, 페르시아의 조로아스터교, 아랍의 이슬람교 등 외래종교가 전래되어 신선한 문화의 자극제가 되었으며, 왕가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어 불교는 교리적으로 문화적으로 최절정기를 맞이하였다.
이때 왕가에서 불교부흥의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중국 역사상 여성으로 유일하게 황제의 자리에 오른 측천무후(則天武后:624~705)였다. 태종의 후궁이었던 그는 태종의 아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다시 고종의 후궁으로 들어가 황후의 자리를 꿰차고 올랐으며, 고종 사후에 자신의 아들 네 명을 차례로 황제로 옹립했다가 폐위시키는 등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다가 마침내 마지막 아들 예종을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던 기상천외한 불세출의 여걸이었다.
당나라는 기본적으로 도교가 국교의 지위에 있었으며 유학이 통치와 생활규범으로 자리 잡고 있다 보니, 이들 도교와 유교의 전통적인 종교관에서는 여자가 천하를 지배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측천무후는 자신이 황제에 올라 정권을 창출하기 위해서 새로운 정치적인 이념이 필요했으며 불교에서 찾았다. 스스로도 독실한 불교 신도였던 측천무후가 불교를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면서 불교문화도 융성기를 맞이하는 한편으로, 불교계도 측천무후 정권의 정당성을 합리화하기 위하여 경전을 왜곡하는 등 혼돈의 시기였다.
*용문석굴 봉선사동 노사나불
위풍 넘치는 당당한 체구, 얇은 불의의 유연한 옷 주름선, 둥글고 복스러운 얼굴, 두툼하고 반듯한 입술선, 꿰뚫을 듯 인상적인 눈동자 등에서 신체의 사실감이 넘치는 당대 불상의 우아한 걸작이다.
불상은 종교적 권위를 위하여 당대의 이상적인 인간상을 표현해왔음을 누누이 보아왔다. 측천무후가 황후가 되자마자 후원하여 조성한 용문석굴 봉선사동의 노사나불은 당연히 막후 후원자인 측천무후의 초상을 이상적으로 표현하였다고 전한다.
7)중국 불교문화의 퇴조
측천무후가 부흥시킨 중국의 불교문화는 절정기를 이루며 차고 넘치자 통일신라로 흘러들어 우리나라의 불교문화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한편으로, 중국에서는 서서히 퇴조하기 시작하였다. 845년 일어난 화창폐불(會昌廢佛: 회창 연호를 사용한 당나라 무종 때 불교탄압) 조치로 승려 26만 명이 환속당하고 절 4만 여개 소가 폐쇄되는 등 대대적인 불교탄압을 겪으면서 정치적 통치 이념은 도교에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다.
중국 불교를 초토화시킨 회창폐불은 엉뚱하게도 우리나라 선종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는데, 훗날 다시 살펴볼 것이다.
7. 고구려 불상
고구려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불교가 전래된 만큼, 현존하는 우리나라 불상 중에서 가장 오래된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서울뚝섬 출토 금동 선정인 여래좌상이 고구려 불상으로 추측되고 있다.
*국립발물관에 전시중인 뚝섬 출토 금동선정인여래좌상
5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되는 4.5cm 높이의 작은 불상은 당시 민간에서 소지하고 다닐 용도로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초기의 불상표현은 머리 부분이 크게 강조되었고 불신의 입체감이나 신체적인 구조는 거의 무시되었으며 법의의 주름 표현 역시 형식적이다. 그러나 마주 잡은 두 손만은 유난히 크게 표현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아직 예술적인 조형미에는 눈 뜨지 못하고, 불신의 사실적인 묘사 보다는 불교의 교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선정의 경지에 든 손 모습 등이 비정상적으로 강조된 초기 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조잡하고 거칠던 초기 불상이 백년 세월이 지나면서 서서히 조형성을 갖춘 불상이 등장한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연가7년(539년)명(延嘉七年銘) 금동여래입상(국보119호)
경남 의령에서 출토되었으나, 불상 광배 뒷면에 연가7년(539년)에 평양 동사(東寺)에서 제작되었음을 명확히 밝히고 있어, 우리나라에서 제작 연대가 확실한 가장 오래된 불상이다.
포복식 대의를 입은 불상은 자신감 넘치는 활달한 선과 기세가 고구려 미술의 상승하는 기세를 그려냈다. 중국 불상을 수용하면서도 생략할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거나 단순화 하고 강조할 부분은 강조하면서 자신들의 정서와 미감에 어울리는 조형미를 창출해 내어 한국적인 조형감각이 본격적으로 발휘된 최초의 불상이라 평가되고 있다.
중국 한나라 때 불교가 유입되고도 200년이 지난 후에야 불상이 등장하였듯이, 우리 삼국시대에도 마찬가지 문화현상으로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된 200년이 지난 6세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토착화된 불상이 만들어진 것이다. 일반 대중이 외래 종교를 이해하고 토착화 시키는데 소요되는 필수 기간이라고 볼 수 있다.
삼국 중에서 가장 먼저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의 불교문화는 연가7년명 불상처럼 조형미를 갖춘 불상을 만들어낸 기세로 계속 발전해나갔더라면 수준 높은 문화를 만들어 갔을 것인데, 연개소문이 642년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자 도교를 국교로 삼고 불교를 억제하는 정책을 편 탓에 불교문화는 남겨준 문화유산도 거의 없이 668년 멸망하여, 기세 좋게 연가7년명 불상을 만들어내던 고구려의 문화적 역량도 꽃피우지 못하고 막을 내리고 말았다.
8. 백제의 불상
백제도 384년 중국 남조의 동진에서 건너온 마라난타에 의해 불교가 전래된 이래, 한동안 불상 조성 흔적이 없다가 200년이 지난 6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우리나라 특유의 특징이 엿보이는 불상을 만들어내기 시작하였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중인 부여 군수리 납석제 석조여래좌상(보물329호)
동글고 통통한 얼굴과 자비스러운 미소를 띤 표정에서 따뜻한 인간미를 느낄 수 있고, 긴장을 푼 듯이 자연스럽게 앉아 있는 자세에서 중국이나 일본의 상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한국적인 친근감이 풍긴다. 이미 북위 말 부드러운 남조의 문화를 받아들여 웃음 띤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하였음을 살펴보고 나왔다. 남조의 양나라로부터 불교문화를 받아들인 백제에서 모방을 거쳐 토착화시키면서 온화하고 따뜻한 감성을 지닌 백제인 특유의 미의식을 불어넣은 것이다.
*서산 마애삼존불(국보84호)
백제인의 미의식이 극치를 이루며 풍부한 감성으로 빚어낸 불상이 서산마애삼존불이다. 만면에 따뜻한 웃음이 가득한 석가불을 가운데 두고 좌측에 미륵반가상과 우측에 봉주지보살상도 조화를 이루며 세련된 조각 솜씨로 암벽에 새겨져 있다.
600년 전후하여 만들어진 서산매애불의 얼굴에 감도는 백제 특유의 부드럽고 온화하면서도 유쾌한 미소는 ‘백제의 미소’로 명명되고 있다. 자비롭고 순진무구하면서도 쾌활한 백제의 불교적 이상을 잘 표현한 것으로 보아 좋을 것이다.
백제의 불교문화가 전성기를 이루면서 차고 넘치니 문화 순환의 법칙에 따라 새로운 곳으로 흘러가게 마련이다. 백제 문화가 일본으로 대거 전해지는 시기였으며, 서산마애불의 불상 양식을 본뜬 일본의 불상으로 나라의 법륭사 금동불입상이 있다.
*일본 나라 법륭사 금동불입상 (지금은 도쿄박물관 소장)
티 없이 웃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친근한 인간적인 표정의 서산마애삼존불 양식이 일본식으로 변하여 조성한 일본 불상의 심각하고 굳은 얼굴표정에서 두 나라 민족의 심성과 미의식의 차이점을 볼 수 있다.
7세기 초반 전후한 한국 불상을 대표하는 보살반가사유상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것이 국립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국보 78호와 83호이다. 각각의 불상이 어느 시기에 조성되었는지 명확하게 단정 지을 근거는 없지만, 전문 학자들의 대체적인 의견으로는 국보 78호는 백제 작품이며, 83호는 신라 작품으로 보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전시중인 보살반가사유상 (국보78호)
‘가만히 실눈을 뜨고 콧방울을 벌리며 입술을 펴서 반가운 웃음기를 머금은 표정을 지었으니 그 얼굴에 반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더구나 오른팔을 반가한 오른쪽 무릎 위에 굽혀 대고 집게손가락과 가운데손가락을 펴서 오른쪽 빰을 살짝 받치고 있어 무슨 생각에 잠겼다가 만족한 결론을 얻은 듯 지그시 반가운 미소를 머금었음 에랴! (중략)
중국 미륵반가상 양식을 수용해 들이고 나서 미구에 이와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미륵반가상 양식을 완성해낼 수 있었던 것은 백제 문화의 독자적 역량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지만, 우리가 인공미를 싫어하고 천연미를 좋아해 아무리 고도로 세련된 인공미라 할지라도 반드시 천연미로 환원시켜 놓으려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더욱 이를 부채질했을 것이다.‘
-최완수 실장의 [한국 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
걸작 서산마애불과 보살반가사유상을 만들어낸 백제인들에 의해, 익산에 거대한 미륵사를 조성할 정도로 강력하게 불교를 후원한 무왕(武王:재위 600~641)의 41년간이라는 기나긴 재위기간에 불상미술도 눈부시게 발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쉽게도 현재까지 남아 있는 걸작품이 별로 없다. 마지막 의자왕도 초반에는 성군으로 불렸을 만큼 문화 융성을 지원하였지만, 660년 허무하게 멸망해버리자 백제 미술의 명맥도 끝나고 그나마 있던 예술품도 파괴되거나 일본으로 반출되는 등 사라져버렸다.
9. 신라의 불상
초기부터 국가적으로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일찍이 민간을 통하여 불교가 전래되었을 것이지만 국가적인 공인은 약 200년이나 지체되었다. 토속적인 자연신을 믿는 토착 귀족들에 대항하여 새로운 통치 이념으로 불교를 채택하려던 법흥왕을 중심으로 왕가의 치열한 투쟁 끝에 이차돈의 순교라는 치열한 절차를 거친 후 527년에야 국가적 공인을 받게 되었다. 중국이나 우리 삼국 모두 불교 전래 이후 200년의 공백기를 거친 이후에야 비로소 불상이 등장하는 불상문화의 보편성은 신라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주 배리 삼존석불(보물63호)
투박스럽게 빚은듯하면서도 어딘가 애기 같은 체구에서 풍기는 격의 없는 친밀감이 사람들의 마음을 머물게 한다.
신라에도 소형불상의 예가 있지만, 신라 불상 문화에 변곡점이 되는 이른 시기의 등신불(사람의 크기와 비슷한 불상)로 대표되는 경주 남산자락 배리 삼존석불부터 살펴보자. 특히, 이 불상은 백제의 서산마애삼존불과 비슷한 시기(7세기 초반)에 조성되어 백제와 신라의 미적 감각을 비교해볼 수 있다.
백제의 서산마애삼존불에서 느꼈던 인간적인 친근한 미소는 여기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삼국을 뛰어넘는 한반도 사람들 공통의 낙천적인 심성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차이점을 찾는다면, 신라 배리 삼존석불은 다소 사색적이다. 백제는 국가적으로 일찍 불교를 받아들여 교리에 대한 이해가 풍부한 자신감의 표현이라면, 신라는 아직 예배의 대상에 대한 조심스러운 접근으로 보인다. 이점은 서산마애삼존불의 체형이 비례적으로 완전하데 비하여 배리 삼존석불은 고구려 초기 뚝섬출토 불상에서도 보았듯 머리와 손이 과도하게 크게 표현된 데서도 알 수 있다. 자연스럽게 신앙의 대상으로 경외심이 닿게 되는 얼굴과, 불상이 표현하고자 하는 경전의 내용이 응집되어 있는 수인(手印:불보살의 깨달음의 내용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불상의 손 모양)을 강조한 것이다.
이와 같은 신라 불상의 특징은 비스한 시기에 조성된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에서도 잘 볼 수 있다.
*경주 남산 불곡 마애여래좌상(보물 198호)
바위에 감실을 만들어 내부에 새긴 마애불로서, 친근하면서도 사색적인 미소를 지닌 신라인의 미감을 잘 담고 있다.
배리 삼존석불과 유사하지만 조형적으로 한 단계 뛰어난 불상을 경주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중인 삼화령 석조미륵삼존불상(국보118호)
얼굴의 표정과 신체의 비례는 배리삼존석불이나 불곡 마애불상과 유사하지만 다소 투박하던 조형이 한층 세련된 걸작이다. 신라인들의 미적 감각과 돌을 다루는 기술이 급격히 발전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무렵, 보다 제작이 용이한 금동 주조품의 소형불상에서는 선행적으로 조형적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었기에 까다로운 대형 석조를 다루는 역량이 축적되자 석조불상의 비약적인 발전이 뒤따를 수 있었던 것이다. 조형적으로 예술적 성취를 이루고 있던 소형 금동불이 신라의 불교 전파경로 상 경주로 들어가는 입구에 해당되는 선산에서 출토된 금동관음보살입상이 대표적이다.
*선산출토 금동관음보살입상(국보184호)
종교적으로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신라에서도 불상에 예배 대상으로서의 신비적인 종교성을 표현하려던 경직성에서 벗어나, 이제는 좀 더 자신감 있게 인체의 비례에 가깝고 사실감 있는 아름다운 자태에서 신성한 부처의 이상형을 모색하는 단계로 변해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예술적 성취도를 한껏 끌어올린 불상으로서 조형적으로도 아주 아름다운 수작이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국보83호)
앞서 보고 온 백제작 국보78호 반가사유상과 아주 유사한 불상이 국보83호로 지정되어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서 두 불상이 교대로 상설 전시되고 있다. 과감한 생략으로 절정의 정제미를 뽐내는 이 반가사유상은 국보78호 보다 조금 늦은 시기 신라에서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불상이 석굴암 불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특징은 깊은 삼매경에 잠겨 있다가 한순간 해탈의 깨달음을 얻은 듯 깊은 내면에서 막 번져 나오는 은은한 미소와 살짝 긴장한 듯 꿈틀거리는 손가락과 발가락에서 느끼는 생동감이다. 가공품인 불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신앙의 대상으로 극대화한 것이다.
지금까지 한민족의 낙천성을 보여주던 천진하고 친근한 미소는 더욱 세련되게 불교의 종교적인 교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심오한 미소로 발전하고 있었다.
10. 통일신라의 불상
호국불교를 국교로 삼은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어 정치적 안정을 찾으며 국력이 부강해지자 대대적인 불교문화 융성에 나섰다. 나름대로 수준 높은 불교문화를 이룩하였던 백제와 고구려 장인의 유입은 물론이고, 국제적인 문화의 전성기를 누리던 당나라와의 빈번한 교류를 통하여 새로운 외래 요소가 융합되어 삼층석탑을 비롯하여 통일신라만의 독특한 불교문화의 황금기를 이루어갔다.
특히, 당나라로부터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불경의 영향으로 불교 교리에 대한 해석과 이해의 폭이 널어짐에 따라 불상 표현 방법도 풍부해지고 기술도 세련되어 신라의 고유색을 띄는 새로운 불상양식을 형성하였다.
이와 같은 신라인의 불상표현에 대한 새로운 미의식 변화의 일면을 잘 보여주는 예가 경주 구황동 삼층석탑 사리함에서 나온 순금제 아미타여래좌상과 여래입상이다. 692년 신문왕이 사망하자 아들 효소왕이 부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석탑을 제작하여 사리함에 입상을 넣어 봉안하였고, 706년 효소왕이 사망하자 다시 성덕왕이 좌상을 추가하고 사리함에 봉헌 기록을 새겨놓아 통일신라 초기 제작 연대가 명확한 불상으로 전해지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구황동 금제여래입상(국보80호)과 금제아미타여래좌상(국보79호)
알맞은 비례와 균형을 이룬 불신의 단정한 자세, 통통하면서 잘 다듬어진 얼굴의 미소 띤 표정, 그리고 자연스럽게 늘어진 법의의 주름 표현에서 삼국시대의 조각과는 달리 균형과 조화를 이룬 새로운 조형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광배의 정교한 투조 문양에서 세련된 금속세공 기술도 보여준다.
삼국시대 불상의 소박한 미소에서 다소 인위적이나마 인간적인 친근미를 느낄 수 있었다면, 구황동 아미타여래좌상에서는 좀 더 위엄이 서린 자비스런 미소를 느끼게 한다. 이때부터 불상이 위엄을 띄고 근엄해지게 되는데, 통일 이후 강성해진 왕권의 권위가 반영되고 종교적으로도 교리에 대한 이해와 신앙심이 깊어짐에 따라 예배의 대상에 대하여 엄숙해진 영향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구황동 불상에 이어 제작된 불상이 감산사지 석조미륵보살과 석조아미타불입상이다. 불상 뒷면에 제작 배경과 연대를 기록해 놓아 719년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국립중앙방물관에 전시하고 있는 감산사지 석조비륵보살(국보81호)과 석조아미타불입상(국보82호)
불상에서 친근한 미소는 점차 사라지고 있지만, 화강암 석조에 새겼다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균형과 조화를 이루면서 정교하게 돌을 다듬은 솜씨가 빚어낸 걸작이다. 대의가 몸에 달라붙어 신체의 윤곽을 드러내고 있지만 결코 천박하게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불신의 아름다움에 세련미를 더해주고 있다.
이 시기에 형성되었던 국제적 양식이 중국을 거쳐 우리나라에 흘러왔을 것인데, 당나라에서 토착화한 불상과 비교를 해보면 신라인의 종교적인 경건함과 예술적인 미의식을 알 수 있다.
*중국 산서성 천룡산석굴 제21굴 석조여래좌상
당시 당나라는 풍요롭고 개방적인 사회풍조로 불상도 매우 사실적이면서 풍만감이 넘쳐흐르고 있다. 관능적인 신체 표현이나 긴장감이 풀어진 조형성이 신라에 와서는 우아하고 단정하게 종교적인 경건함을 유지하고 있었으니 당시 당나라에 비하여 품격 높은 신라인의 미의식을 비교해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신라인의 미의식, 종교적 신앙심, 석재 제작 기술 역량이 절정을 이루며 가장 이상적인 불상의 형상으로 만들어낸 인류문화의 걸작이 석굴암 석조여래좌상이다.
*석굴암 본존 석가여래좌상(국보24호)
건장한 체구에 강직한 인상을 주면서도 부드럽고 유연하게 흐르는 불신의 곡선미, 생명이 없는 찬 석재이지만 마치 숨을 쉬고 있는 듯 생명감과 긴장감을 느끼게 한다. 동시에, 번뇌에서 벗어나 무아의 경지에 든 듯 숭고한 얼굴 표정 또한 종교 예술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삼국유사’에 751년 재상 김대성이 전생과 이생의 부모를 위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을 조성하였다고 전하지만 삼국사기에는 일체언급이 없는 설화적인데다가, 불사의 규모와 통일신라 불교미술 황금기의 정점을 찍은 예술성으로 미루어보아 신라 왕실의 주도와 대대적인 후원이 없이는 불가능한 대 역사이다. 이 때, 통일신라는 성덕왕(聖德王:재위 702~737)의 36년이라는 긴 재위 기간에 이룩한 정치적 안정을 이어받아 효성왕(재위기간 6년으로 단명)에 이어 왕위에 오른 경덕왕(景德王:재위 742~765)대에 이르러 강력한 왕권과 부강한 국력을 바탕으로 불교문화 황금기를 이루었다. 성덕대왕신종 제작을 비롯하여 불국사와 석굴암의 조성도 경덕왕의 불사 의지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이다.
인도 굽타왕조의 찬드라 굽타, 중국 북위의 태무조, 당나라 측천무후의 통치기에 절대권력자의 초상을 이상적인 형상으로 불상화한 예들을 살펴보고 나왔다. 석굴암의 불상은 왕즉불(王卽佛:왕이 바로 부처) 사상에 따라 당당하고 건장한 체구로 절재적 권위를 발휘했던 경덕왕의 이상적인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5세기 중국에서 한반도로 들어온 불상이 모방과 토착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삼국을 통일한 신라인에 의하여 융합을 거듭하며 축적된 불상 제작의 역량과 미의식이 8세기 석굴암을 정점으로 최절정의 황금기를 꽃 피웠다.
위에서 살펴보았듯, 모든 문화는 전성기를 누리면 차고 넘쳐 주변으로 흘러간다. 통일신라의 수도 경주에서 화려하게 꽃을 피운 불상 문화가 첫 번째로 흘러간 곳이 바로 지리산 자락이다.
인도의 간다라지방에서 출현한 불상이 머나먼 신라 땅 경주까지 흘러와 전성기를 누린 기나긴 여정을 살펴보았다. 여정을 통하여 이해하게 된 문화의 보편성을 무장하고 다시 여정을 이어 지리산 자락까지 달려볼 것이다. 경주에서는 더 이상 채울 것 없이 차오른 문화적 성취의 욕구를 새롭게 꽃 피운 불상문화를 찾아서.
*이 글은 아래의 참고문헌을 발췌, 편집하여 작성하였습니다.
1. 최완수, 한국불상의 원류를 찾아서
2. 김리나, 한국고대 불교조각사 연구
3. 이주형, 간다라미술
4. 임영애, 서역불교조각사
5. 왕용, 인도미술사
6. 배진달, 당대 불교조각
7. 진홍섭, 한국의 불상
8. 문명대, 관불과 고졸미
9. 문명대, 한국불교미술사
10. 강우방, 한국불교조각의 흐름
11. 국립중앙박물관, 고대불교조각대전
12. 곽동석, 한국의 금동불
13. 시즈타니 마사오, 대승불교
[지리 99]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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