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스텝은 10일 만에 나가버렸어요. 그래도 공백 없이 새로운 스텝이
들어와서 다행입니다. 막내 삼촌 '고희' 연에 참석하기로 해서 준비물을
챙겨놓고 잤는데 잠을 설쳤어요. 주일 am 11시 30분 중구 신당동이라서
9시에 집을 나섰어요. '동대문 운동장역' 을 나와 행사장까지 걸어갔어요.
-
역사공원은 동대문의 등대처럼 핫플레스의 센터로 손색이 없었어요.
제가 17살 때 원규 녀석이랑 상경했을 때 서울 여자들은 다들 연예인
같았어요. 시즌이 여름이었고 팍팍 찌는 아스팔트 열기에도 낯선 서울이
너무 좋아서 종일 목적지도 없이 몇 날 며칠을 돌아다녔을 것입니다.
-
‘노란 우산 시장’지나 신당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떡 볶기 골목’이고
맞은편 ‘광동수산’ 2층에서 게임장을 했어요. 우리 게임장에서 보면 '쌍방울
빌딩'이 보입니다. 김성태와 통성명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신당 사거리에서
우회전하면 kt 건물과 ‘디오트‘사이에 행사장이 있었습니다.
-
결국 왕십리 토박이인 삼촌과 현홍의 나와바리에서 고희 연을 하는 셈입니다.
신당역 11번 출구에서 바로 행사장까지 에스컬레이터가 연결되어 있었어요.
70세 젊은 삼촌이 반갑게 맞아주었고 행사장 인원 60 여명중 40여 명과
일일이 허그를 하며 페스티발에 조인했어요. 오늘의 주인공은 바로 나야.
-
어머니가 행사장 인원 중 가장 연장자(87)입니다. 광산 김씨 패밀리 좌석에
앉아 식사했는데 구운 안심 몇 점에 과일 두어 개 주워 먹었어요. 제가 오늘
주인공인 막내 삼촌과 처음 대면한 것은, 제 나이 5살(1968), 막내 삼촌 15살
때 면목동 판자촌 장례식장입니다. 외할아버지(이 성동) 5일장을 여름날 한
-
칸 짜리 방에서 치렀어요. 김 양선 할머니가 '실비집'을 했고 엄마 나이 32살,
큰삼촌이 22살, 막내 이모가 17살이었나 봐요. 사위들은 없었고 어머니가
머리를 풀고 대성통곡을 했어요. 5살 철부지인 제가 뛰어다니다가 수의 입고
주검으로 누워계신 망자에게 엎어져 맨 먼저 하직 인사를 했다는 것 아닙니까?
-
무섭진 않았어요,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막내 삼촌(15)이 폭죽을 가지고
부랑아처럼 방치되었는지 하루는 큰삼촌이 하꼬방에 쳐넣고 가죽 허리띠로
동생을 무섭게 패는 겁니다. 훗날 우리 어머니가 저를 때릴 때 손발을 묶고
가죽 허리띠로 린치를 가한 건 이 씨 집안 내력인가 봅니다. 20살이 안 된 막내
-
이모가 선을 본다고 해서 흰 고무신을 제가 깨끗이 닦아놓았더니 막내 이모가
제게 20원을 주었던 기억이 또렷합니다. 나머진 패스. 그 후로도 방학 때마다
왕십이에서 살았는데 하루는 완전 소피마르소 같은 여자(20세)가 롱부츠를
신고 셋째 이모네 공장에 있는 겁니다. 누군가 했더니 막내 외숙모였어요.
-
막내 삼촌이 어떻게 막내 외숙모를 업어왔을까 궁금했는데 물어보지는
않았어요. 막내 이모가 삼양동으로 독립하기 전에 왕십리에서 셋째 이모와
같은 공장을 사용했어요. 셋째 이모부는 염색 기술자였고 세째이모는 평화
시장에 가게가 있었어요. 5살 꼬마 생각에도 이모는 잘나가는 게 분명했어요.
-
삼양동 합판으로 지은 집에서 막내 삼촌과 고 이병주 씨가 한 판 붙었습니다.
잘은 모르나 막내 삼촌을 셋째 이모가 싼 인력에 사용하려 했을 것이고 막내
삼촌이 들이대면서 형제간 싸움이 있었는데 큰삼촌이 오기 전에 고 이병주
씨가 이겼어요. 경상도 사투리를 쓰면서 “내가 죽기 살기로 돈 버는 이유는
-
처자식 때문이라는”말을 어떤 문맥에서 했는지 모르지만 워딩이 거의 정확
할 것입니다. 그렇게 셋째 이모부는 죽기 살기로 큰돈을 벌어서 쓰지도 못
하고 이미 돌아가셨어요. 혹시 이모가 그 많은 돈을 언제, 어디에 쓰려는지
아시나요? 2남 4녀 중에 둘째 이모가 얼마 전 돌아가셨고 셋째 이모가 불참
-
해서 그런지 고희 연이 쓸쓸하기까지 했어요. 알츠하이머투병 중인 영등포
갈매기가 밥먹는데 열심입니다. "큰 삼촌 내가 누군지 알아?" "효석이"(--)
후, 요양원에 계시다 돌아가신 선친 생각이 이미지모션 되면서 저절로
울컥하더이다. 돌자갈 같은 분이셨는데 아, 인생무상 세월이 무심합니다.
-
큰삼촌과의 썰은 이쯤 해서 패스합니다. 영삼이가 테이블에 앉아 우두망찰
하고 있네요. 부모님 모두 하늘나라에 보내고 생각이 많을 것입니다. 너무
안쓰러워 안아주고 왔습니다. "부모님 먼저 보낸 네가 나보다 더 어른이야."
외가 쪽 사촌 동생들이 10명 이상 되지만 영삼이가 가장 정이 갑니다.
-
30일 어머니 첫 기일이라는데 불러주면 참석할 생각입니다. 영삼아! 힘!
훤칠하게 생긴 놈이 서글서글하기까지 해서 누군가 했더니 한나 신랑입니다.
2남 1녀인 철홍이가 아들 두 놈을 인사시켰는데 글쎄 나이가 20살이라고 해요.
아이들 얼굴이 밝은 이유는 아버지가 이종복이라서일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
2남 4녀 중에 막내였던 삼촌은 의무교육도 받지 못했지만 늘 긍정적이었고
한 번도 일을 쉬지 않았어요. 현역 땐 친구 놈이 '종복이 형'을 아냐며 물어
와서 난처한 적이 있긴 했어도 종복 삼촌은 울 엄마에게 너무 잘했고 형제들
에게도 언제나 호스트 노릇을 했어요. 저는 오늘날 삼촌의 오픈마인드가
드디어 열매를 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여름 방학 어느 날 셋째 이모 집에 있는데 옆집과 음식 쓰레기 문제로 시비가
벌렸어요. 딱새 이모가 옆집 남자랑 언성이 높아지자 남편인 고 이병주 씨가
나와 상대편 남자 턱 밑에서 말싸움이 벌어진 걸 지켜본 나는 빛처럼 날라서
공장에 알렸어요. 당시 이모 집이 지금 00호텔 옆 가정식당이었으니까 공장
-
까지 300m쯤 될 것입니다. 제가 닦아준 고무신 신고 선보러 나갔던 막내
이모가 첫눈에 윤 철삼 씨를 보고 반했던지 공장에 건장한 지원군이 한 명
있었어요. 호들갑을 떨며 사건 진상을 알리자, 거인 발걸음으로 단숨에
막내 이모부가 달려와 상대남 멱살을 잡고 분위기 제압을 하는 겁니다.
-
셋째 이모부는 상대남에게 한 방 맞고 이미 퇴장했는데 셋째 이모가 분이
안 풀렸는지 "우리 큰오빠"를 연발하더이다. 사건 현장에서 덩치 남을 삐쩍
마른 새 이모부가 제압하는 걸 보면서 멋져 보였을 것입니다. 막내 이모부
리스팩트! 이하 패스. 17살 때 원규 녀석과 겨울 방학을 맞아 무작정 서울
-
방문했고 단칸방 신혼집에 살던 지금의 막내 삼촌 부부와 몇 날 며칠을 함께
잤다는 것 아닙니까? 그때도 조금 미안하긴 하더라고요. 그래도 노상에서
잘 순 없잖아요. 스무 살 때는 '그 다방' 2층에서 둘째 이모가 제품공장을
했었는데 제가 입대 전까지 용돈을 번다며 둘째 이모부 밑으로 일하러 간
-
적이 있어요.친구 정환이랑 같이 시다발이 하면서 제단을 배웠을 것입니다.
그때는 공장 밥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어요, 성동소방서 옆에 '돌체 다방'이
있었는데 일 끝나면 뮤직 box에 ‘pick up the phone’(f.r David)을 신청하고
통바지가 구겨질까 봐 편하게 앉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정환이 녀석은
-
도끼빗을 기지 바지 뒷주머니에 넣고 틈만 나면 머리를 빗는 겁니다.
삼 일째 되던 점심시간에 갑자기 정환이가 재단 가위를 들고 재단사와
싸우는 겁니다. 저는 말리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10대 소년이 40대 제단
사를 눕혀놓고 배 위에 올라타서 가위를 목에 대고 있는데 장 사장님이
-
목격을 한 것입니다. 아뿔사! 장이모부가 놀라셨는지 아무 말도 안 하더이다.
저는 괜찮겠지 했는데 이모가 해고를 알려왔어요. 그땐 너무 어려서 용서를
구하는 방법을 몰랐어요. 막내 삼촌이 오더니 저를 불러 다짜고짜 배에 펀치를
한방 놓는 겁니다. 상당히 아파서 열 받더라고요. 한참을 갈등하다가 그 자릴
빠져나와 버렸어요. 용서하시라. 질풍노도잖아요.
-
삼촌 고희연을 마지막으로 이 씨 패밀리 시대는 저물었고 바야흐로 육 남매
시대입니다. 희변이 아이돌마냥 몸을 만들어왔고 희블리가 얼굴이 활짝피었어요.
혈육 중에 희변이 가장 내스타일입니다. 큰누나는 답답하고 둘째 누나는 미안
하고 막내는 짠합니다. 동생 김 장로는 노코맨트하겠습니다.
-
석훈이가 바로 앞 테이블에 있어서 "너는 왜 형 싫어하냐? " 고 물었더니 아니
라고 했어요. 고맙다 말이라도. 명석이를 불러 일부러 담배를 피우러 나갔다가
왔고 41살, 양평 고읍에 살림을 차렸다고 했어요. 뺀질이 재홍이 녀석 퍼머
머리에도 제법 서리가 앉아있더이다. 유전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