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9월 8일 온고을교회 주일설교 – 황의찬 목사
《 하나님의 비웃음 》
시 2:1~6
〈 밀레니엄 웃음 〉
성경에 나오는 ‘웃음’ 중에서 가장 유명한 웃음은 어떤 웃음일까요?
대부분 ‘사라의 웃음’을 꼽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사라의 남편 아브라함에게 말씀했습니다.
“내년 이맘때 네 아내 사라가 아들을 낳으리라!”(창 18:10)
이때 사라의 나이 89세입니다. 남편 아브라함은 99세입니다.
생리도 끊어지고 갱년기가 지난지도 까마득합니다.
더욱이 이때까지 사라는 아이를 낳은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들을 낳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이때 사라는 장막 뒤에 있었습니다.
장막 뒤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사라는 “속으로 웃었습니다.”(창 18:12)
사라가 웃었는데, 하나님은 남편인 아브라함에게 말씀합니다.
“사라가 왜 웃느냐?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못 믿겠단 말이더냐?”
장막 뒤에 있다가 남편이 꾸중 듣는 것을 보고 사라가 나섭니다.
“내가 웃지 아니하였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뭐라고 말씀하십니까?
“아니라, 네가 웃었느니라!”(창 18:15)
그리고 열 달이 지났습니다. 사라가 아들을 낳고 기뻐서 노래를 부릅니다.
창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아들을 낳고 아들 이름을 ‘이삭’이라 지었습니다.
‘이삭’은 ‘그가 웃었다’라는 뜻입니다.
이삭의 어머니 사라,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은 웃음, 이 웃음이야말로 ‘세기의 웃음’
아니, ‘세기의 웃음’으로는 부족합니다. ‘밀레니엄 웃음’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라가 장막 뒤에서 웃은 이 웃음, 순수한 웃음입니까, 아니면 비웃음입니까?
비웃음이지요! ‘쳇, 내 나이 89세, 남편 99세, 평생 애 한 번 못 낳아봤는데, 무슨 아들?’
누가 생각해도 ‘밀레니엄 웃음’ 사라의 웃음은 분명히 비웃음이었습니다.
사라는 비웃었지만, 하나님은 진심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사라의 비웃음을 진짜배기 웃음, 가장 화려한 웃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 하나님은 사람의 비웃음을 생명의 웃음으로 바꾸시는 분입니다. 할렐루야~
〈 하나님도 비웃으신다고? 〉
“하나님은 사람들의 비웃음을 생명의 웃음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우리가 한 평생 살아가는 도중, 얼마나 많은 비웃음을 웃습니까?
겉으로 드러내지는 않을지라도, 속으로 얼마나 비웃으면서 세상을 삽니까?
“흥~” “쳇~” “지까짓 게 뭘~”
우리가 살아오면서 숱하게 비웃은 ‘비웃음’ 이거 죄입니까, 죄가 아닙니까?
우리가 누군가를 비웃을 때마다 양심의 밑바닥에서 “너 그래도 되는 거야?”합니다.
비웃음이 왜 죄가 됩니까?
비웃음은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비웃음으로 상대방과 냉소적 관계가 됩니다.
냉소 관계가 지속되다가 끝내 관계가 끊어지고 맙니다.
잠시 생각해 봅니다. 이렇게 비웃음으로 시작하여 관계가 끊어진 사람들…
무심코 살아갈 때는 몰랐는데, 하나하나 떠올려 보면 꽤 있습니다. 잊혀진 사람들…
가능하면 우리는 ‘비웃음’을 자제하려고 무진 애를 씁니다.
‘비웃음’이 악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다쳐도, 분명 비웃음이 선은 아닙니다! 그렇지요?
마음 속에 “비웃음은 나쁜 것”으로 새겨집니다.
특히 저는 마음 속에 “비웃음은 나빠!” 이 의식이 강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보니, “하나님도 비웃으신다고?”
(4절) “하늘에 계신 이가 웃으심이여 주께서 그들을 비웃으시리로다”
저는 시 2:4을 읽으면서 마음이 몹시 불편했습니다. 어찌 하나님이 비웃으신단 말인가?
창조주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고, 졸지도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분인데!
하나님도 비웃으신다니, 처음에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받아들이기 싫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비웃으신다는 대목이 나오면 외면하고, 빨리 지나쳤습니다.
그런데, 시편을 차례대로 설교하고자 하니, 2장에서 딱 마주쳤습니다. 이를 어쩌지요?
이번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웃음” 분명히 짚어야 합니다.
확실히 알고 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비웃으신다는 대목은 여기 말고도 더러더러 나옵니다. 그러니 부인 못합니다.
☞ 하나님의 비웃음, 그 의미는 무엇일까요?
〈 성경 해석의 3원칙 〉
사람들의 ‘비웃음’은 관계의 단절을 가져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내가 비웃은 사람, 마주치기 싫습니다. 외면하고 싶어요! 하나님도 그러실까요?
하나님도 그러십니다. 하나님도 하나님이 비웃은 사람들 외면하십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이 비웃으신 다음에 어떻게 하는지 5절에 나옵니다.
(5절) “그 때에 분을 발하며 진노하사 그들을 놀라게 하여 이르시기를”
비웃으신 다음, 분을 발하십니다. 그리고 진노하십니다.
우리가 비웃고, 화를 내면서 그 사람과 관계를 끊는 것과 매우 흡사합니다.
사람들의 비웃음은 피조물 인간이 물려받은 ‘하나님의 형상’ 중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비웃음 뒤끝은 분을 발하시고 진노하시고, 끝내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비웃음”입니다.
아, 소름 돋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향하여 비웃으시면 나는 어찌 될까?
어떠한 일이 있더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비웃으시는 일이 없어야 하겠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나를 보고 비웃으시고, 나에게 분을 발하고 진노하시면 어찌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 저를 보고는 웃어주기만 하시고요, 결코 비웃지는 말아 주옵소서!”
이것이 우리의 기도가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오늘은 그래서, 어떤 경우에 하나님께서 비웃으시는지 알아야겠습니다.
마침 시편 2편에 잘 나와있습니다. 먼저 6절을 보셔야 합니다.
(6절)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 하시리로다”
이 구절을 해석할 때는 “성경 해석의 3원칙”을 적용하는 것이 유익합니다.
① 문자적 해석-역사적 ② 구속사적 해석-그리스도 중심 ③ 개인적 해석-영적 해석
① 문자적 해석 ; 하나님이 시온에 세운 왕은 ‘다윗’입니다.
하나님은 다윗을 시온, 지금의 예루살렘에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② 구속사적 해석 ; 시온의 왕 다윗은 장차 오실 예수님입니다. 할렐루야~
③ 개인적 해석 ; 시온의 왕 다윗은 “나” 자신이 됩니다. 우리가 기름부음받은 자이잖아요!
☞ 우리는 하나님이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이요, 거룩한 나라입니다.(벧전 2:9)
〈 하나님이 비웃는 사람들 〉
시편 2편은 ‘왕의 대관 시’입니다.
왕이 지금 취임식을 하는 중입니다. 그 왕이 누구라고 했습니까?
① 문자적으로 다윗 ② 구속사적으로는 예수 ③ 개인적으로는 ‘기름부음받은 나’입니다.
이 거룩한 취임식을 까칠하게 보는 이들이 있습니다.
_(1) 이방 나라 ; 어찌하여 이방나라들이 분노하며(1절)
_(2) 이방 민족 ; 민족들이 헛된 일을 꾸미는가(1절)
_(3) 세상 군왕 ;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2절)
_(4) 세상 관원 ;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2절)
하나님과, 하나님의 기름부음받은 자에게 맞서고 있습니다.(3절)
하나님은 바로 이들을 향하여 웃으시고,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시온에 세운 왕을 거역하는 사람들을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의 비웃음, 하나님의 속성에 속하는 하나님의 형상 중 하나입니다.
이 형상이 피조물 인간에게 흘러갔습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았습니다.
사람도 타인을 향하여 비웃습니다. 비웃으면서 살아갑니다.
사람의 비웃음은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비웃었습니다. 나와 그 사람 사이 관계가 단절됩니다.
비웃음 끝에는 앙금이 남습니다. 죄의식, 죄의 결과가 남게 됩니다.
우리 인간의 비웃음은 결국 ‘죄’로 앙금이 되어 가라앉습니다.
하나님의 비웃음은요?
하나님의 비웃음은, 하나님이 분을 발하여 진노하사 심판에 이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중에 그 누구도 비웃지 않으면서 살아가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에 이기심, 자만심, 자기중심적 사고가 있습니다. 언제부터 있습니까?
태어나면서부터 있습니다. 원죄입니다. 우리는 비웃음의 죄를 지어가며 삽니다.
☞ 사람의 비웃음은 죄가 되고, 하나님의 비웃음은 심판으로 이어집니다!
〈 하나님의 비웃음에 서린 비통함 〉
사람의 비웃음에는 교만이 깔려있습니다. 상대를 향한 질시가 담겨 있습니다.
같은 비웃음이라도 사람의 비웃음과 하나님의 비웃음에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웃음에는 상대를 향한 너무도 깊고 애절한 사랑으로 점철되어있습니다.
(3절) “우리가 그들의 맨 것을 끊고 그의 결박을 벗어 버리자 하는도다”
“하나님이 나를 붙들어 맨 고삐를 끊자, 하나님의 나를 향한 결박에서 벗어나자!”
3절은 이 뜻입니다.
하나님은 마치 기차가 레일에서 탈선하지 않도록 매워주십니다.
하나님은 마치 금붕어가 어항 밖으로 뛰쳐나가지 못하도록 덮어두십니다.
그런데, 기차가 레일이 싫다고 벗어납니다. 금붕어가 어항 밖으로 펄떡 뛰쳐나갑니다.
하나님은 다시 붙들어 매 주십니다. 풀어진 결박을 다시 견고히 해 주십니다.
그럼에도 다시 싫다고 하나님의 손길을 거부합니다.
하나님도 하실 수 없는 일 몇 가지가 있다는 우스게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과식하는 이의 위장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과로하는 이의 목숨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과음하는 자의 건강을 책임지지 못합니다.
이때 하나님은 이들을 비웃으십니다.
사람의 비웃음과 하나님의 비웃음은 그 품격을 달리합니다.
하나님의 비웃음 속에는 짙은 사랑, 그 사랑을 뿌리치는 자를 향한 허탈함이 베어있습니다.
그들을 향한 포기할 수 없는 사랑의 매임과 사랑의 결박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웃음과 사람의 비웃음간 차이점입니다.
하나님이 매 주신 고삐는 벗어버리면 안 됩니다.
하나님이 결박하신 것을 벗어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매임과 하나님의 결박 안에서 우리는 자유함을 누려야 합니다.
어항 밖에 금붕어의 행복이 있지 않습니다.
달리는 열차는 두 가닥 레일에 매여 있을 때, 자유함도 있고 행복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비웃음을 우리의 비웃음과 견주면 안 됩니다.
☞ 하나님의 비웃음에는 하나님 사랑의 비통함이 있습니다.
〈 우리의 비웃음을 웃음으로 〉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을 비웃으면 하나님은 어떻게 하실까요?
하나님도, “괘씸한지고~” 하면서 비웃음으로 맞섭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매임과 결박에서 끝내 탈선하여 구제불능의 순간에 하나님은 비웃으십니다.
하나님은 비웃으신 다음, 분노를 발하고, 진노하사, 심판을 하십니다.
앨버트 아인시타인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는 자신의 창조물을 심판한다는(비웃는다는) 신을 상상할 수가 없다!”
아무리 빼어난 석학이라도, 진리를 모르면, 하나님의 비웃음을 알지 못하면 이렇게 됩니다.
아인시타인은 한 걸음 더 내디뎠어야 합니다. “죽음에서 생명으로!”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우주 삼라만상, 하나님의 피조물 아닌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끝내 하나님의 사랑을 속박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거부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돌아오기를 오래오래 기다리십니다.
그러나 끝내 거부하는 이들, 그들을 향해 허탈한 웃음, 깊은 회한의 웃음을 지으십니다.
하나님의 비웃음은 우리의 비웃음과 다릅니다.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향해 비웃는 것과 하나님의 결박과 매임을 거부하는 것은 매우 다릅니다.
사라가 비웃었을 때 하나님의 사라의 비웃음을 행복에 겨운 웃음으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창 21:6 “사라가 이르되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
하나님은 나의 비웃음을 행복한 웃음으로, 생명의 웃음으로 바꾸어주십니다.
우리가 평생 비웃은 그 숱한 비웃음들, 하나님은 다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로 말끔히 씻어주십니다.
단지 우리가 하나님의 매임에서 벗어나지 않고, 하나님의 결박을 즐거워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생명의 웃음을 주실 줄 믿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