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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묵상글 들 ( 연중 제3주간 목요일. - 주는 사람에게 주신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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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주는 사람에게 주신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주님의 이 말씀을 저는 이렇게 바꿔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의 됫박만큼 주신다.
하느님께서는 주는 사람에게 주지 주지 않는 사람에게는 주지 않으신다.
비가 오고 그 물을 양동이에 받는 사람은 양동이만큼밖에 받을 수 없다.
작은 양동이로 많은 비를 받을 수 없다.
더 많이 비를 받으려면 큰 양동이를 갖다놔야만 한다.
그리고 주는 것과 받는 것 두 개가 있지 않고 양동이는 하나뿐이다.
부모가 맏이에게 재산을 준 것은 동생들에게 나눠주라고 준 것이다.
그런데 준 재산을 몽땅 자기만 가지면 부모는 더 이상 주지 않는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은 나누라고 주신 것이고,
그래서 주는 사람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시고 또 주신다.
이상이 오늘 주님 말씀을 듣고 묵상한 바인데
요즘 여기 밥상에 대해서도 나눔을 할까 합니다.
저희가 <여기선교협동조합>을 시작했지만
생각만 많았지 한동안 제대로 되는 것이 없었고,
코로나로 인해 거의 개점휴업 상태였습니다.
그러다가 몇 달 전부터 <여기콩나물국밥> 집을 중심으로
지역 사회와 나누는 일을 하기 시작하니 많은 분이 관심을 보여주셨고,
아나바다를 위해서 정말로 많은 물품이 전국에서 보내져왔고
식당의 운영을 위해 많은 분이 성금을 보내주셨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서 모든 분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런데 참으로 감동적인 얘기를 하나 소개하려고 합니다.
한 한달 전쯤 봉사자 한분이 5만 원을 주시는 거였습니다.
뭐냐고 하니 앞집 할머니가 전해달라고 하며 주셨다는 겁니다.
그 할머니는 조선족 할머니로 앞집 지하 셋방에 사는 분이고,
겨울철이나 아프실 때를 빼고 늘 햇빛을 쬐러 집앞에 계시던 분입니다.
그래서 예약 식당이 끝나고 음식이 남으면 주변 분들과 함께 모셔서
남은 음식을 나누곤 하였고 또 과일 같은 것도 나눠드리곤 했었지요.
그런데 한동안 보이지 않아 아들한테 물으니 편찮으시다는 겁니다.
그래서 같이 걱정하고 화살 기도도 해드렸는데
편찮은 것이 좀 나아지시자 다시 밖에 나오셨고
유모차를 끌고 경로당에도 가신다는 거였습니다.
마침 재속프란치스코회 국가선교회를 비롯하여 여러분이
귤을 한꺼번에 여러 상자 보내주셔서 그중 하나를 그 할머니를 통해
경로당에 보내드렸더니 그 마음씀이 고마우셨던지 그 돈을 보내오신 겁니다.
과부의 작은 헌금이 부자의 많은 헌금보다 더 많이 봉헌한 것이라는
주님의 말씀대로 할머니의 성금이 크기에 그 감동이 컸을 뿐 아니라
우리가 목표한 지역사회 복음화 차원에서 반응이 온 것이기에 감동이 더 컸지요.
나누지 않으면 여러분 중 아무도 저희에게 나눠주시지 않을 것이고,
나누니 여러분도 콩나물 국밥 집 봉사를 위해 시간을 나눠주시고
운영에 보태라고 가진 것도 나눠주시는 것이지요.
저희를 도와주시는 김에 저희가 겸손과 사랑으로
나눔을 끝까지 잘 실천할 수 있도록 기도도 해주시기를 또 부탁드리는 오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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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입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여기에서, ‘등불’은 하느님 말씀을 비유하고 있습니다. 곧 ‘말씀’이 세상을 비추는 등불이요 빛이라는 말씀입니다. 오리게네스는 ‘함지’는 영혼의 능력을, ‘침상’은 몸을, ‘등경’은 거룩한 교회를 표현한다고 해설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이 선포되면 그것은 세상 만민을 비추고, 진리의 빛으로 집 안에 있는 이들을 밝히며,
모든 사람의 마음을 거룩한 지식으로 채우게 된다.”
말씀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아두지 말라는 말씀은 “함지”(루카; 그릇)인 우리의 능력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덮거나, “침상”인 우리의 몸으로 말씀을 가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곧 말씀을 자신의 능력이나 몸으로 가두지 말고, 오히려 드높이라는 말씀입니다.
‘산상설교’에서, 주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의 사명을 ‘세상의 빛’과 ‘산위의 마을’(5,14)에 비유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말씀’은 ‘세상의 빛’이 되고 ‘산 위의 마을’이 되어 비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물론, 빛 아래서는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나게 되므로 거짓은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말씀’은 빛이 되어 우리를 비추고 하늘나라의 신비는 드러날 것입니다. 세상을 환히 비추고, 빛과 진리로 이끌어 줄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사실을 깊이 새겨듣도록 촉구하십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3)
이 말씀은 중요한 말이니, 그 의미를 깊이 새겨들으라는 각성의 촉구와 경고입니다(마태 11,15;13,9;루카14,35). 또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 4,25)
사실, 우리는 그릇만큼 받는 것이 아니라, 그릇이 비워진 만큼 받게 됩니다. 사실은 나누는 만큼 비워지는 것이니, 결국은 나누는 만큼 받게 됩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나누어주면 나누는 것보다 더 보태어 주신다고 하십니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입니다.”(마르 4,25)
이는 나누는 것이 더 많이 소유하는 것이라는 역설적인 표현입니다. 결국 베푸는 사람은 베풀수록 더 많이 받고 덤까지 받지만, 베풀지 않는 사람은 있는 것마저 잃게 될 것입니다(마태 13,12;25,29;루카 19,26). 그처럼, 말씀을 가진 자가 더 가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하여, 말씀의 등불은 거룩한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진정, 말씀의 비추임을 받은 영혼은 더욱 더 많은 열매를 맺고, 더 밝게 빛날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21)
주님!
말씀을 제 안에 가두어 두거나 제 발 아래에 두지 않게 하소서.
제 한량한 능력으로 당신 말씀의 권능을 덮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보다 아무 것도 낫게 여기지 않게 하소서.
당신 말씀의 빛으로 살고, 빛에 속한 이로 살게 하소서.
제 삶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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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어둠을 탓하기보다 등불이 되어라
등불은 등경 위에 놓아야 제대로 비출 수 있습니다. 누구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는 사실을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이 있고 그렇게 하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믿음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우리의 삶이 빛나야 합니다. 세상의 어둠이 깊을수록 우리의 소명은 더 커집니다. 그러나 어둠을 탓하며 절망하는 이도 있습니다. 세상의 어둠을 탓하기보다 하나의 등불이 될 수 있도록 주님의 말씀으로 준비하는 이가 참 신앙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4.16). 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가슴에 담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증거 해야 하겠습니다. 우리가 선을 행하면 그 기운이 이웃에게 전해지게 되어 있습니다. 좋은 기운이 감싸면 악한 기운은 서서히 떠나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히브10,22).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빛’이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령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4,25)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곧 말씀을 믿고 행하는 사람은 풍요로워지고 행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믿음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간수 하지 않는 것은 곧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자신의 삶을 비관하고 우울해하며 남을 비판하고 불평불만 하면서 아무런 생산적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은 결국 모든 것을 잃고 맙니다. 움켜쥐면 빼앗기게 마련입니다. 그러나 먼저 주면 빼앗길 것이 없습니다. “쌓아 놓으면 쌓아 놓을수록 줄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깁니다.” 무엇이든 먼저 줄 수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은 부유한 사람이고, 주지 않는 사람은 가지지 못한 사람입니다.
아무리 많은 것을 쌓아 놓았다 할지라도 이웃과 나누지 못하면 그것은 있으면서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부유한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의 부자가 되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차고 넘치도록 받으시고 이웃과도 잘 나눌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무엇이라도 좋으니 남에게 도움이 되는 것 하나를 장만하시기 바랍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간과 공간이 될 수 있고, 물질이 될 수 있으며 재능기부가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우리의 삶이 바뀌게 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추기경으로 서임 받을 때의 일입니다. 로마에서 있었던 서임식에 참석하여 축하하기 위해 로마로 가려고 한 지인에게 “비싼 돈 들여 나를 보러 오지 말고, 그 돈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기부해 주세요.”하였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서로 자극을 주어 사랑과 선행을 하도록 주의를 기울입시다”(히브10,24). 마무리하겠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마르4,24).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마음을 다하여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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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이기우 사도요한 신부님.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시나이까?
다윗이 왕이 되리라고 예언한 사무엘이 기름을 부어 주었지만(1사무 16,13), 그 후에도 사울이 임금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다스리던 40년 동안 다윗은 사울의 부하로서 충성을 다 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전공을 세워 백성들의 민심을 얻은 가운데, 사울이 전쟁통에 요나탄과 함께 전사하자 백성 지도자들의 추대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궁정 예언자 나탄은 다윗이 시작한 유다 지파의 왕조는 사울의 벤야민 지파와 달리 하느님의 축복을 받으리라는, 이른바 ‘시온의 계약’ 말씀을 들려주었습니다(2사무 7,5-16). 그러자 다윗은 하느님께 찬송의 노래를 읊어 올렸습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 당신 종에게 복을 내리셨으니,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2사무 7,18.29). 그리고 이런 다윗의 기도를 전해들은 후대의 유다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모두가 하느님을 찬송할 수 있도록 시편 8장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
하늘 위에 당신의 엄위를 세우셨습니다.
당신의 적들을 물리치시고 대항하는 자와 항거하는 자를 멸하시려
아기와 젖먹이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으로 당신께서는 요새를 지으셨습니다.
우러러 당신의 하늘을 바라봅니다,
당신 손가락의 작품들을 당신께서 굳건히 세우신 달과 별들을.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들하며
하늘의 새들과 바다의 물고기들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입니다.
주 저희의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존엄하십니까!“(시편 8,2-10).
시편에는 이처럼 다윗이 하느님을 찬송한 기도뿐만 아니라 이름없는 백성들이 억압과 착취를 견디다 못해 탄원한 기도도 들어와 있고, 하느님께서 하늘을 쪼개시고 직접 내려와서 거짓 목자들 대신 당신 백성을 이끌어 달라는 청원 기도도 들어와 있습니다. 후대에 ‘시편’이라는 이름으로 형성된 과정만 해도 무려 천여 년입니다. 후대 유다인들은 이 150 꼭지에 이르는 아나빔들의 기도를 수집하고 편집하여 ‘시편’이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시편은 아나빔들의 정체성을 대표하는 그의 이름을 따서 ‘다윗의 노래’라는 별칭으로 불렀습니다. 이는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했고 또 실제로 지혜로 백성들을 다스린 치적을 기억해서, 후대의 잠언과 지혜를 수집하고 편집하면서 ‘솔로몬의 지혜’라고 별명을 붙인 유래와 비슷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마르 4,21) 하고 등불의 향도 내지 기수 기능을 강조하셨습니다. 다윗이 하느님께 기도드리고, 솔로몬이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지혜로 살아간 역사의 등불은 오늘날 시편과 잠언 지혜서로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시편 기도는 거의 암송하실 만큼 친숙하셨습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시편이 인용된 사례만 해도 백 군데가 넘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의 신앙생활에서도 시편 기도가 깊숙이 들어와 있었음을 반영하는 사례입니다. 그들은 모두 언제 어디서나 하느님을 믿고 섬기는 역사의 아나빔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의 이 아름다운 전통을 계승하기 위하여 교회는 시편 기도 150장을 기본으로 하되 후대의 역사에서 실현된 기도들을 주로 편집하고, 신구약성경의 찬미가를 삽입하여 전례력에 따라 성무일도서를 편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성직수도자들에게는 의무로까지 규정했으며, 평신도들에게는 적극 권장해 왔습니다. 이는 신자들이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역사와 하느님께로부터 계시받은 신앙 진리를 간직한 이 역사와 진리의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지 말고 등경 위에 놓으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 등불을 믿는 이들 앞에서와 세상에서 비추면,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입니다. 등불에 담긴 지향이 그렇게 실현되리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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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국의 작가이자 소설가인 오 헨리는 사람들에게 늘 친절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친구와 함께 가게에서 간식거리를 샀습니다. 그런데 계산해주는 점원이 너무나 불친절한 것입니다. 계산하는 물건을 함부로 대하고, 계산하면서도 계속 구시렁구시렁하고, 무엇보다 남은 잔돈을 던지듯이 주는 것입니다. 친구는 이 점원을 보면서 무척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그러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항상 친절한 헨리지만, 이 점원에게는 화를 낼 수밖에 없을 거야.’
이런 그의 예상과 달리, 오 헨리는 밝게 웃으면서 “고맙습니다.”라고 말하며 가게를 나서는 것입니다. 친구는 물었습니다.
“자네는 그 직원이 그렇게 불친절한데도 왜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나?”
오 헨리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합니다.
“그 사람 기분에 나까지 휘둘릴 필요는 없지.”
우리는 상대방의 기분이 휘둘리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상대방이 화를 내면 나도 화를 내고, 상대방이 웃으면 나 역시 웃습니다. 그런데 좋은 감정이야 전달되면 좋지만, 나쁜 감정까지 굳이 전달받을 필요가 있을까요? 그래서 주님께서 어떻게든 사랑하라고 말씀해주셨던 이유를 깨닫게 됩니다. 남의 감정에 흔들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좋은 감정 안에 늘 머무르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등불의 비유를 보면 조금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여기서 등불은 비유적으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그러니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이 오신 것을 함지로 가리거나 침상 밑에 놓아 숨겨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라고 하십니다. 심판 날에 모든 비밀이 명명백백히 드러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신비가 모두 알려지기에는 시기가 아직 이르고 적절치 않아서 많은 사람에게 가려져 있지만 결국 모든 사람에게 알려지고야 만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의 역할은 분명합니다.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데 최선을 다해 노력해야 하며, 동시에 생활 속에서 주님의 뜻인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사랑의 실천은 남에게만 좋은 일이 아닙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시지요. 주님께서 알아주시기에 더 많은 것을 받게 됩니다.
하느님께 마음을 여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은 주님을 세상에 알리는 것, 그리고 주님의 사랑을 세상에 실천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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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을 움직이려 하는 이는 작은 돌을 들어내는 일로 시작하느니라(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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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것에 충실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신학교 입학하고 얼마 안 되었을 때, 아침 미사 후 선배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고서 자기 방에 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선배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엄청나게 혼났습니다. 그 이유는 구두가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입니다. 사실 저만 그 선배의 지적을 받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다른 후배들도 그 선배에게 지적받고 눈물이 날 정도로 혼났습니다.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 선배는 미사에 온전하게 참석도 하지 않고 후배들의 구두만 보고 있나 싶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그 선배의 뜻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일상의 작은 것에 소홀히 하지 않아야 크고 중요한 일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일상을 소홀하게 여기는 사람은 특별한 상황 역시 소홀하게 여기면서 제대로 일할 수 없습니다.
이런 깨달음을 얻은 뒤에 작은 일에도 소홀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주변에서도 작은 일에 소홀하지 않은 사람에게 더 큰 믿음을 갖고 함께 할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도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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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대화중에 2022년 새해에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물어보았습니다. 어떤 분은 그림을 시작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학생 때 그림을 좋아했고, 그림을 전공하고 싶었는데 사정이 여의치 못해서 포기했다고 합니다. 이제 붓을 잡고 다시 그림을 그려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어떤 분은 조용한 곳에 가서 피정을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분주하게 살다 보니 자신을 돌아볼 기회가 적었다고 합니다. 피정을 하면서 ‘어디에서 왔는지, 어디까지 왔는지, 어디로 갈 것인지’를 돌아보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학생은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였습니다. 성당에서 복사를 하는 성실한 친구입니다. 원하는 대학에서 원하는 공부를 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어느덧 60이 되었습니다. 지난 시간들 돌아보면 감사할 일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 건강을 주셨습니다. 뉴욕에서도 마음을 열고 대화 할 수 있는 동료 사제들이 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도 열심히 신문을 만드는 직원들이 있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글이 생각납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용기를 바랍니다. 할 수 없는 일은 기꺼이 포기할 수 있는 겸손을 바랍니다.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식별할 수 있는 지혜를 구하고 싶습니다. 2022년 새해 1월도 며칠 남지 않았습니다.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 독서는 ‘다윗의 기도’입니다. 다윗은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다윗은 하느님의 축복을 마음에 새겼습니다. 다윗의 바람은, 다윗의 꿈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비록 죄를 지었지만 하느님의 자비하심에 맡기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뉘우치는 이의 눈물을 받아주시고, 용서해 주심을 믿는 것입니다. 사무엘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축복한 것도,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승리한 것도, 이스라엘을 통일하여 왕이 된 것도 다윗에게는 큰 영광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하느님의 뜻이 이스라엘에게 내리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보살피시는 것이 영광입니다. 그 영광은 먼 훗날 베들레헴 구유에서 탄생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으로 다윗 가문에서 인류를 구원하실 예수 그리스도가 탄생하셨습니다. 이보다 큰 영광은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2022년 하느님의 영광이 나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드러나면 좋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등잔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등불을 켜놓고 그것을 가리지 말하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켰으면 환하게 비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등불은 무엇일까요?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 재능, 기회라고 생각합니다. 사제인 저는 제게 주어진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강론을 통해서 말씀을 전하고, 삶을 통해서 말씀을 실천하고, 저의 말과 행동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나야 합니다. 신문사를 운영하는 저는 홍보를 열심히 다니고, 좋은 지면으로 구독자들과 만나야 합니다. 미 동북부 엠이 대표 사제인 저는 엠이 모임이 잘 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 2년 째 부르클린 한인 공동체와 함께하는 저는 한인 공동체가 친교와 나눔, 기도와 봉사의 공동체가 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분명 저의 능력에 비해 과도한 직분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청하며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등불을 켜보려고 합니다.
등불의 비유를 묵상하면서 예전의 읽었던 시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나는 지금 그대를 사랑합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더욱 깨끗해지고
아름다워졌습니다.”
나의 능력과 재능 주어진 기회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환하게 밝힐 수 있는 2022년이 되면 좋겠습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밝히는 빛이옵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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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선택의 은총과 훈련
- 정주 예찬 -
오늘 복음은 등불의 비유로 하느님의 나라 비유 넷 중 하나입니다. 나머지는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입니다. 등불의 비유가 참 깊고 유익합니다. 참으로 우리 믿는 이들은 세상의 빛이라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등경위에 놓아 주변을 환히 밝히는 말씀과 하나된 등불같은 존재가 믿는 이들이요 바로 이런 현실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오늘 복음 환호송의 말씀 같은 존재가 참된 정주의 사람입니다.
“주님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을 비추는 빛이옵니다.”
참으로 우리가 정주의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 때 우리는 주변을 환히 밝히는 하느님 나라의 실현이 됩니다. 정주의 은총에 정주를 선택하여 사는 우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입니다. 타고난 것도 많지만 하루하루 선택할 일도 무궁무진합니다. 선택의 은총이요 정주의 선택, 빛의 선택은 참 좋은 축복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좌우명 자작시 첫연은 정주의 빛나는 하느님 나라 삶의 묘사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하늘 향한 나무처럼
비가 오든, 눈이 오든, 덥든 춥든,
봄, 여름, 가을, 겨울
늘 하느님 불러 주신 이 자리에서
하느님만 찾고 바라보며
정주의 나무가 되어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살다보니
작은 나무가 이제는 울창한 아름드리
하느님의 나무가 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2009년에 심었던 작은 묘목들이 13년만에 거목들 된 수도원 하늘길 메타세콰이어 가로수들을 바라볼 때 마다 실감하는 내용의 시입니다. 그대로 우리의 내적성장을 상징하는 거목의 나무들입니다. 과연 내적으로, 영적으로 나날이 성장하는 하느님 나라의 나무같은 정주의 삶인지 묻게 됩니다. 어제 읽은 의미심장한 예화를 소개합니다.
“부인 유여사가 정성들여 차린 식탁 앞에는 당시 겨우 초등학교를 다니던 두 자녀도 자리를 같이했다. 그때 장로 이한빈 대사는 ‘일상다반사’인 것처럼 ”오늘은 원식이가 기도하렴.” 하자, 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어린이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물흐르듯 거침없이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다.
나는 거기서 살아 있는 ‘초월’의 일상적인 실천을 목격했다. 여느 어린아이 같으면 식탁 위의 맛있는 음식 접시에 먼저 눈이 가고 금세 손이 가는 것이 당연했겠지만, 어린 원식이는 눈을 감고 그날 밤 식탁의 회식이 갖는 뜻을 새기고 그러한 만남과 모임을 마련해 준 은혜를 하느님께 감사드리고 있었다.
기도드리는 아이는 밥상 위의 어느 한 부분을 보지 않고 밥상이 놓인 방 전체를 그리고 그 의미를 부감하는 것만 같았다. ‘그리스도는 세계를 세계에서 해방시켰다(Christus mundum de mundo liveravit)’고 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은 읽기에 따라 난삽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웬지 금방 실감이 가는 말처럼 울리게 된 것은 베른의 이 대사 댁 식탁에서 ‘원식이 현상’을 체험한 이후부터이다.”(인물의 그림자를 그리다;최정호 328-329쪽)
이 책 첫째로 소개된 인물은 가톨릭의 거목이셨던 ‘권력을 초월한 권위’라는 제목의 김수환 추기경에 관한 글입니다. 참 빛나는 정주를 보여 주는 상징적 장면입니다. 참된 정주는 “그리스도는 세계를 세계에서 해방시켰다”는 진리가 실현된 하느님 나라임을 깨닫습니다. 어떻게 오늘 지금 여기에서 빛나는 초월의 정주를 살 수 있을까요.
첫째, 경청입니다. 경청의 정주, 정주의 경청입니다. 정주의 선택에 이어 경청의 선택이요 경청의 훈련입니다. 결국은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겸손한 경청의 열매가 지혜와 순종입니다. 참으로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傾聽이요 공경하는 마음으로 듣는 경청敬聽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마음의 귀를 기울여 듣는 경청입니다. 베네딕도 규칙 맨 처음 말마디도 “들어라, 아들아!”입니다. 오늘 등불의 비유 역시 들음을 강조합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너희는 새겨 들어라.”
둘째, “숨겨진 것도 드러나게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마련이다.”
참 귀한 잠언성 속담입니다. 이런 믿음이 있어야 참된 정주영성을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정주의 충만이요 행복입니다.
그러니 누가 보아주든 말든, 알아주는 말든, 일희일비하지 않고 한결같이 투명한 하느님 앞에서, 하느님 안에서 환히 드러난 정주의 삶을 삽니다. 모두를 알고 모두를 보시는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자유롭고 부요하고 만족한 정주의 삶입니다.
셋째,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여 받을 것이다.”
역시 잠언성 속담입니다. 참으로 참된 정주의 삶을 사는 이들은 즉시 깨닫는 진리입니다. 피동적, 소극적, 정체적 정주가 아닌 그 반대로 수동적, 적극적, 동태적 정중동靜中動의 하느님 나라의 정주입니다.
밖으로는 산같은 정주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는 강같은 정주입니다. 밖으로는 고요한 천국의 정주처럼 보여도 안에서는 영적 전투 치열한 최전방 수도원의 정주입니다. 줄 때 받고 섬길 때 섬김을 받습니다. 나눔과 섬김 역시 영성훈련입니다. 끊임없이 나눔과 섬김 중에 더욱 내적으로 풍요로워지는 정주의 삶입니다. 그리하여 정주의 수도공동체를 주님을 섬기는 배움터, 훈련장이라 정의합니다.
넷째,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져 빼앗길 것이다.”
역시 잠언성 속담으로 참된 정주의 삶을 사는 이들이 실감하는 진리입니다. 영적현실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부익부 빈익빈의 진리입니다. 죽는 그날까지 내적으로 욕심을 비워가면서 날로 하느님 은총을 축적해가는 참으로 역설적인 내적 부요의 정주의 삶입니다. 말그대로 텅 빈 충만의 기쁨이, 행복이 참된 정주 의 삶이요 그대로 하느님 나라의 실현입니다.
다섯째, 감사입니다.
정주의 감사입니다. 감사의 축복입니다. 감사 역시 겸손처럼 참된 영성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눈만 열리면 온통 감사로 가득한 세상일 때 비로소 행복한 정주입니다. 이런 감사 역시 정주생활의 은총입니다. 한결같은 정주의 삶의 빛나는 열매가 감사입니다.
새삼 감사도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자꾸 감사해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 사무엘 하권의 주인공 다윗 임금은 감사의 사람임을 깨닫습니다. 다윗의 긴 감사기도(2사무7,18-29)가 심금을 울리는 감동입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이제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다윗의 감사기도중 일부만 인용했습니다만, 다윗이하느님 사랑을 왜 그토록 독점적으로 받았는지 알겠습니다. 끊임없이 하느님께 감사했기에 끊임없이 하느님의 사랑을 받았고, 하느님을 사랑할수록 더욱 하느님께 감사하게 됨을 깨닫습니다. 감사의 대가요 달인이 바오로 사도의 말씀입니다.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여러분에게 바라시는 하느님의 뜻입니다.”(1테살5,18).
감사의 눈이 열릴 때, 삶은 온통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제 행복기도중 한연을 소개합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죽음도 선물이겠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하느님 나라, 천국이옵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당신 안에서 정주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마음의 귀를, 마음의 눈을 활짝 열어주시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느님 나라를 체험하며 살게 하십니다.
“주님께 나아가면 빛을 받으리라. 너희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없으리라.”(시편34,6).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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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주교회의 홍보국.
오늘의 묵상
마르코 복음 4장은 네 개의 비유, 곧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
‘등불의 비유’, ‘저절로 자라는 씨앗의 비유’, ‘겨자씨의 비유’를 전합니다.
그 주제는 모두 “하느님 나라의 신비”(마르 4,11)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 가운데 ‘등불의 비유’입니다.
등불은 하느님 나라를 가리킵니다. 예수님의 인격과 활동 안에서
이미 경험할 수 있는 하느님 나라는 “함지 속이나 침상 밑”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아야 하는 등불처럼, 숨겨지거나 감추어질 수 없습니다.
등불이 공간을 밝히듯이 하느님 나라는
온 세상에 드러나야 합니다(마르 13,10 참조).
그러려면 우리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등불보다 훨씬 밝고 강한 빛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고, 그분을 선포해야 합니다. “말씀을 선포하십시오.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꾸준히 계속하십시오”(2티모 4,2).
“너희는 새겨들어라.” 올바른 경청에 관한 절박한 호소는
‘되다’와 ‘받다’의 비유를 통하여 설명됩니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되다’는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자세를, ‘받다’는
선물로 주어지는 하느님 나라의 신비를 뜻합니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을 깨닫고, 그분 말씀을
실천하고 선포할 때 더 풍성한 은총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이 우리 삶에서 싹을 틔우고
하느님 나라의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노력합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이는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여러분 가운데에 풍성히 머무르게 하십시오”(콜로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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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등불은 등경 위에 둔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21절) 지혜의 등불은 감춰두지 않고, 사용하여 보게 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아무리 좋은 우물이라도 물을 퍼주어야 맑은 물이 솟아나지만, 아무도 물을 긷지 않으면 우물은 더러워진다. 쇠도 사용하면 빛이 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슨다. 마찬가지로 우리도 훈련을 통해 거룩한 옷을 입게 된다고 하겠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세상의 빛이라고 부르셨다. 그리고 산 위의 마을이라고 하셨다(마태 5,14 참조). 우리는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추고, 구렁텅이에 빠진 이들을 위하여 우뚝 서도록 부름을 받았다. 등불을 함지 속에 숨겨 둔다면 우리는 어둠 속에 있게 되고 사람들이 와서 부딪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등불의 구실을 제대로 못 하게 된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은 바로 선행이다. 선은 참되고 충만한 것으로 어둠을 사랑하지는 않는다(요한 3,21 참조). 선은 드러나는 것을 즐거워하고 눈에 띄는 것을 기뻐한다.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나서지 않는 것을 좋아하지만, 있는 그대로 드러나야 한다. 왜냐하면, 선은 그 자체로 확산성이 있기 때문이다. 선은 그냥 퍼져 나간다.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24절) 내가 하느님께 받은 만큼 청하는 이에게 자비를 되돌려 주는 것만큼 정당한 일은 없다. 가난한 형제에게 베풀어야 한다. 그 형제는 그리스도이시다. 형제에게 주는 것은 그리스도께 드리는 것이며, 영원히 찬미 받으시는 하느님께 드리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필요로 하신다는데 그분의 뜻을 따르지 않겠는가?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주신 것을 우리가 베풀기를 바라신다. 우리가 베푼다고 하는 것 가운데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지닌 것 가운데 하느님께 받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무엇인가를 줄 때, 그것이 우리의 것인가? 우리는 우리에게 주라고 명령하시는 분의 것을 주는 것이다. 우리는 착취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베푸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25절) 우리가 들은 말씀을 온갖 노력을 다하여 기억하고 연구하고 실천하도록 하여야 한다. 말씀을 사랑하고 실천하는 사람에게는 자기가 사랑하는 대상을 이해할 수 있는 지력이 주어지겠지만, 말씀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비록 타고난 재능이나 학문을 통하여 그 뜻을 이해하는 것 같이 보이더라도, 참된 지혜에는 도달하지 못할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지 않는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가졌는지도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빼앗겨도 무엇을 빼앗겼는지 알지를 못한다. 어떻게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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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마르 4, 21)
등불은
주위를 비추며
등불의 길을 묵묵히
걸어갑니다.
마음의 어둠을
비추는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의 등불이
십자가처럼
들어올려집니다.
등불과
멀어질 수 없는
우리의 삶입니다.
사람의 마음에
필요한 것은
예수님이라는
등불입니다.
어둠 한가운데서
기쁘게 만나게되는
고마운 등불입니다.
등불은 우리마음
중심에 걸어야 할
기쁜 빛입니다.
우리또한
작은 등불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등불의 삶은
가까이 있습니다.
등불은 사랑의
실천입니다.
가장 낮은 곳까지
실천으로 다가갑니다.
성 요한 보스코 사제는
마음의 문턱을 낮추어
청소년들에게
환한 등불이 되었습니다.
희망의 등불은
오늘도 우리의 눈물과
우리의 지친 마음을
어루만지며 우리의
자리를 비추어줍니다.
복음의 등불을
켜고 걸어두는
사람의 시간
되시길 기도드립니다.
서로를 비추어
빛나게 하는
기쁜 날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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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마르 4,21-23).”
여기서 ‘등불’은,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복음’을
상징하기도 하고, 우리의 ‘신앙’을 상징하기도 합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라는 말씀은,
“복음을(신앙을) 감추지 마라.” 라는 뜻입니다.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라는 말씀은, “적극적으로, 또 능동적으로
복음을 선포하여라.(신앙을 증언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복음과 신앙을 일부러 감추는 것이 아니더라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하지 않고,
또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사실상 감추는 것과 같습니다.
등불을 감추는 것은, 그 등불을 끄는 것과 같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일과 신앙을 증언하는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신이 받은 복음과 자신의 신앙을 부정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심각하게 종교박해를 받고 있는 상황이라면, 적극적으로 신앙을 드러내기가
어렵지 않은가? 박해를 피해서 잠시 숨어 있을 수도 있지 않은가?” 라고
물을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스테파노 순교 후에 큰 박해를 받았던
초대 교회 신자들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날부터 예루살렘 교회는 큰 박해를 받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사도들 말고는
모두 유다와 사마리아 지방으로 흩어졌다(사도 8,1ㄴㄷ).”
“한편 흩어진 사람들은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말씀을 전하였다(사도 8,4).”
그 당시에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사람들은 숨어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이곳저곳 돌아다니면서 말씀을(복음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이 박해를 피해서 흩어진 것은, 죽는 것이 무서워서 신앙을 감추고
달아난 일이 아니라, 자유롭게 복음을 선포할 수 있는 곳으로,
또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곳으로 옮겨 간 일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등불에 관한 예수님 말씀은, 마태오복음에 있는 다음 말씀과 함께 읽어야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4-16).”
여기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세상의 빛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피난처’를 뜻하는데, 여기서는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래서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라는 말씀은,
“교회가 사람들의 피난처이며 안식처라는 것을 감추지 마라.”(“교회는 피난처와
안식처 구실을 제대로 해야 한다.”) 라는 뜻이고,
이 말씀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선포하고 신앙을 증언하라는 명령입니다.
“모든 사람을 비춘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모든 사람을 비추어라.(인도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라는 말씀은,
세상 사람들을 하느님에게로 인도하라는 명령입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은 이 세상에서 ‘등대’ 같은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어두운 세상을 밝혀 주고,
사람들을 구원과 행복과 안식이 있는 곳으로 인도하는 등대.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복음을 선포하지 않아도 언젠가는 온 세상에 복음이 전해질
때가 온다. 그때가 되면 아무것도 안 한 사람은 받을 몫이 없다.” 라는
경고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 단순하게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
감추지 말고 알려라.” 라는 명령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어두운 데에서 말하는 것을 너희는 밝은 데에서 말하여라.
너희가 귓속말로 들은 것을 지붕 위에서 선포하여라(마태 10,27).”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라는 말씀은,
“잘 새겨듣고 그대로 실천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마르 4,24-25).”
이 말씀은,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과 거의 비슷한 말씀입니다.
‘되어서 주다.’ 라는 말은,
지금 우리가 실천하는 선행과 사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받다.’ 라는 말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상을
우리가 받는 것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뿌린 대로 거둔다.” 라는 속담과 달리,
“주는 만큼 받는다.” 라고 말씀하시지 않고,
“준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뿌린 것보다 더 많이 거둔다.”)
선행 실천과 사랑 실천을 포함해서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은,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에 비하면 아주 작은 것입니다.
반대로 말하면, 나중에 하느님 나라에서 누리게 될 행복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신앙생활에 비하면 엄청나게 큰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그분과 함께 일으키시고
그분과 함께 하늘에 앉히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에게 베푸신 호의로, 당신의 은총이 얼마나 엄청나게 풍성한지를
앞으로 올 모든 시대에 보여 주려고 하셨습니다(에페 2,6-7).”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라는
말씀은, 신앙생활을 충실하게 한 사람은 ‘큰 은총’을 받겠지만,
안 한 사람은 받은 은총마저 잃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하느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에,
나중에 취소할 일을 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우리에게 한 번 주신 은총을 빼앗아 가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래서 여기서 ‘빼앗길 것이다.’는 ‘잃을 것이다.’로 해석됩니다.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지 않아서 하느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은,
그 나라에 들어간다면 얻게 될 크고 많은 은총을 얻지 못하는 일이고,
그것은 결국 모든 것을 잃어버리는 일과 같고,
전에 받은 은총들을 자기 스스로 버리는 일과 같습니다.
(하느님께서 빼앗아 가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 쪽에서 버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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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
마음 열어 사랑의 빛이 되라 ♣
“숨겨진 것도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 4,22)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4,21)고 하시면서,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4,22)고 말씀하신다. 성경에서 등불은 모세와 엘리야, 엘리야 예언자의 말, 세례자 요한을 가리키는 상징이다. 예수님께서도 자신을 빛을 비추는 등불로 여기셨던 것 같다. 요한복음사가는 예수님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 빛”(요한 1,9), “세상의 빛”(8,12)이라 한다. 우리도 하느님을 말과 행동으로 드러내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살아낼 때에 우리 또한 하느님을 반사하는 참 빛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하여 병자를 치유하고 죄인들과 함께 식사하고 정치가와 종교지도자들의 반대와 박해에도 불구하고 빛을 비추는 등불처럼 자신을 드러내시려는 결의를 보이신 것이다. 아울러 예수님께서는 아직은 제자들에게만 계시된 메시아 비밀이 숨겨진 채로 있는 것이 아니라 공적으로 드러나야 함을 보여주신다. ‘세상의 빛’이신 예수님께서 어떤 박해에도 불구하고 빛이신 하느님의 뜻을 수행하고자 하셨다. 예수님의 소명 의식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신 ‘애절한 사랑의 마음’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건강할 때나 아플 때에도, 고통 중에나 슬픔 중에도, 박해와 시련이 닥쳐도 빛이신 예수님을 반사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빛으로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도 하느님께 얼굴을 돌려야 한다. 그분께 얼굴을 돌린다는 것은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쪽으로 향한다는 뜻이고, 그분과의 인격적 관계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빛을 반사하려면 빛을 바라보아야 하고, 빛 앞에 자신을 두어야 하며, 빛이 잘 반사되도록 방향을 그분께로 돌려야만 한다.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는 것이야말로 하느님 앞에서의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삶의 태도라 할 것이다. 하느님께로 얼굴을 돌리고 그분과 깊은 친교를 갖게 되면 모든 것에 열리게 된다. 곧 하느님의 본성대로 모두에게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자세를 지니게 된다.
빛과 사랑은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비친다. 영적 성숙도도 얼마만큼 개방적이며 수용적이 되느냐에 달려 있다. 폐쇄적인 사람은 만나고 모이기를 싫어하며 형제자매들과 함께 있는 것을 피한다. 혼자 있는 것이 일단은 편하고 자기 세계를 만끽할 수 있다고 여긴다. 그러나 이처럼 잘못된 생각은 없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갇혀 계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이다. 폐쇄적인 사고와 배타적인 삶의 태도야말로 등불을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는 것과 같다.
세상의 빛이 되도록 부름 받은 우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피조물에게, 세상의 사건들에 열려 있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앞에서의 개방성이며 열린 영성이다. 개방적인 삶은 일상의 삶에서 두 가지가 중요한 일이 된다.하나는 하느님의 말씀 앞에 자신을 폭로시키는 것, 다른 하나는 형제들과 함께 있는 것 곧 삶의 공감대 함께 있는 시간을 계속 넓혀가는 것이다. 이는 단지 물리적 공간적 시간적인 함께 있음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누구에게든 먼저 다가가고, 누군가 다가올 때 거절하지 않으며 기다려주고 누군가의 필요를 위해 빈자리를 항상 마련해 두는 것이야말로 등불이 되는 삶의 방향이다. 그 안에 서로의 잘못과 허물조차도 모두 받아들여 사랑으로 녹여 하느님께 되돌려드려야 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인 것이다. 말씀을 새겨듣고(4,24) ‘관계’이신 하느님 앞에 마음의 문을 열고 모두를 받아들이는 이는 “더 받을 것이다.”(4,25) 이제 내 마음의 빗장을 치우고 함지 속의 등불을 꺼내 두려움 없이 빛으로 걸어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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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의 영혼과 육신도 훈련을 통하여 거룩한 옷을 입게 됩니다!
이토록 어려운 혼돈의 시대 우리 교회의 역할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봅니다. 우리 교회가 갖은 고통과 절망 속에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 자체로 위로와 기쁨이 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다가도, 고개를 쳐들어 등경 위에 놓인 등불 같은 성당의 첨탑을 보고 힘과 용기를 내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우리나라의 지난 역사 안에서 언제나 그러했듯이 거대 악이 반드시 존재합니다. 이젠 그 어떤 대상도 두려워하지 않는 무소불위의 거대 권력으로 자리 잡은 이른바 ‘레거시 미디어’(TV, 라디오, 신문 등 전통 미디어)들이 양산하는 거짓 뉴스들이 선량한 국민의 눈과 판단력을 흐리게 만듭니다.
입으로는 국민 국민 하지만, 국민은 거지발싸개 취급도 하지 않을 게 뻔한, 정신 나간 정치인들이 판을 칩니다. 과연 저 머릿속에 무엇이 들었을까, 궁금할 정도로 함량 미달인 사람이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그 나물에 그 밥인 사람들과 어울려 우르르 몰려 다니는 꼴을 보는 것이 참으로 불편한 요즘입니다.
예수님이 권고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고, 작은 것 하나라도 구체적인 삶 속에서 실행해나가야 하겠습니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마르코 복음 4장 21~22절)
우리 교회, 그리고 우리 개별 그리스도인 각자는 등경 위에 놓인 등불인 동시에 세상의 빛으로 살아가야 마땅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각자가 진리와 사랑의 빛으로 밝혀져야, 어둠 속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빛을 밝혀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앞에 우뚝 서지 않고 어두운 지하로 내려가면 우리가 지니고 있는 빛이 대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를 세상의 빛, 등경 위의 등불이 되게 하는 것이 있으니,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우리의 선행과 거룩함입니다. 이웃을 주님께로 인도하는 우리의 굳건한 믿음입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겸손입니다.
이 어려운 시국, 갈팡질팡하는 백성들에게 어느 길이 살길인지? 어느 길이 멸망의 길인지 이정표를 제시해줄 역할이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 각자에게 부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간절한 기도 안에서 주님만이 주실 수 있는 식별력과 지혜를 청해야겠습니다.
“꾸준히 퍼내는 샘에서는 더 맑은 물이 솟아나지만, 아무도 물을 긷지 않는 샘은 더러워집니다. 쇠도 사용하면 더 빛나지만, 사용하지 않으면 녹이 습니다. 우리의 영혼과 육신도 훈련을 통하여 거룩한 옷을 입게 됩니다.”(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 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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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전삼용 요셉 신부님.
<더 가지는 사람이 되면 얻게 되는 것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마련이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이야기의 흐름을 알아야 합니다. 지금 예수님께서 무슨 말씀 중이셨느냐면, ‘씨뿌리는 농부의 비유’를 말씀하는 중이셨습니다.
씨는 곧 말씀입니다. 그 말씀이 성령의 물과 햇빛의 따듯함으로 우리 안에서 자라나면 ‘사랑’의 열매를 맺습니다. 물론 이를 위해서 교만의 딱딱함과 육체의 돌멩이와 탐욕의 가시를 뽑는 일도 해야합니다. 이렇게 맺힌 사랑을 가진 이가 진정 가진 사람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에 하느님을 가진 이는 정녕 가진 자이고 그 사람은 이 세상에서 더 받게 됩니다.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머슴의 아들로 태어나 가난에 찌들었던 두메산골 소년이 덴마크 국왕과 이스라엘 대통령의 도움으로 유학을 떠나 박사가 되고 대학 총장이 된 사례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머슴인 데다가 8남매가 부대끼며 살아야 했던 가난의 비참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습니다. 집안에서 유일하게 초등학교를 보내준 덕택에 읍내에 나가 어렵게나마 중학교까지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갖은 고생 끝에 야간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까지 마칠 수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그는 농업기술이 발달한 나라에 가서 농촌을 잘살게 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습니다. 어느 날 『새 역사를 위하여』란 책을 읽고 덴마크의 황폐했던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로 탈바꿈한 기록을 읽은 후 무작정 덴마크 유학을 결심합니다.
1960년대 돈도 없는 학생이 유학을 외국으로 간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무모한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는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13년 동안 이 꿈을 버리지 않고 기도하던 중에 덴마크 국왕에게 편지를 쓰라는 주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내가 오직 바라는 건 한국 농촌이 잘 사는 것입니다. 당신네 나라처럼 훌륭한 나라에서 배워 우리 농촌을 잘 살게 하는데 내 인생을 바치겠으니 생활비와 전액 장학금을 좀 줄 수 없겠습니까?”
당시는 대사관도 없어서 백과사전을 뒤져 왕궁 주소로 보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40일 후에 답장이 왔습니다.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겠다.”
아이가 집에서 마음대로 물건을 가지고 놀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집이 부모님 것이고 부모님이 자신을 사랑한다는 믿음 때문입니다. 남의 집에서는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 부모님이 온 우주를 창조하신 분이라면 어떨까요? 두려움이 없어집니다. 이렇게 하느님을 가진 자는 더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고작 80달러를 가지고 덴마크 유학길에 오릅니다. 그곳에서 다른 나라들의 농촌개발 사례들과 그 이론적 배경에 집중하여 연구했지만, 덴마크와 우리나라와의 격차가 너무 커서 바로 적용할 수 없다는 한계를 느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와 상황이 비슷하다고 여긴 이스라엘 대통령에게 편지를 씁니다. 이스라엘 대통령도 그의 청을 들어주어 그는 이스라엘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가진 것이 없다고 믿을 수도 있었지만, 하느님을 가졌기에 다 가졌다고 여기니 다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진 자의 특징입니다. 없다고 믿으면 있다고 여기는 것까지 잃게 됩니다.
돌아온 그는 건국대학교 교수가 되었고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 농촌운동을 하고 이후 건국대학교 부총장을 지내고 2002년에 ‘농촌 청소년 미래재단’을 설립하여 어려운 환경의 청소년들을 위한 장학사업과 청소년 건전육성 사업을 하고 있습니다.
류태영 박사는 그의 책 『언제까지나 나는 꿈꾸는 청년이고 싶다』에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한번은 신문을 넣고 돌아가려는데 쓰레기통에 밥 덩어리가 버려져 있는 것이 보였다. 나는 너무 배가 고파 참지 못하고 주위를 살펴보다가 얼른 그것을 집어 들었다. 묻은 연탄재와 모래를 떼어내고 그 밥을 다 먹어치웠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래도 나는 쓰레기통의 밥이나마 먹을 수 있게 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렸다.”
또 그의 책 『꿈과 믿음이 미래를 결정한다』에는 이런 내용도 있습니다.
“나는 초등학교 6학년부터 매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기를 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감사하다’는 말이 가득하여 있다는 점이다.”
감사한 사람이 다 가진 사람입니다. 감사하지 못하면 그 자리에서 무너집니다. 그런데 그 감사는 하느님을 가졌을 때 옵니다. 연탄재 묻은 밥을 먹을 때도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감사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가진 사람이 결국 다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바로 세상 모든 것이, 곧 나의 생명, 공기, 환경, 만나는 모든 사람까지 하느님께서 주신 선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넷플릭스 영화 ‘돈 룩 업’(2021)은 말 그대로 ‘위를 보지 마!’란 내용입니다. 대학원생 ‘케이트’와 ‘랜달’ 교수는 우연히 지구로 돌진하는 혜성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6개월 뒤 지구에 충돌하게 되고 지구의 생명체는 멸종하게 될 것을 확신합니다. 숫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여러 단계를 거쳐 그들은 미국의 대통령을 만납니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 중요한 일은 재선에 성공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말을 무시합니다.
케이트와 랜달은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여 유명 생방송 TV 프로그램에 나가 모든 사실을 폭로합니다. 그러나 언론은 시청률을 끌어올려 돈을 더 버는 게 목적입니다. 그래서 이 모든 것을 웃음거리로 만듭니다.
그런데 대통령이 지지율이 떨어지자 혜성 충돌 상황을 일부러 대대적으로 언론에 뿌리고 안정을 추구하겠다는 약속으로 재선에 성공합니다. 우주로켓을 발사해 혜성의 방향을 바꾸겠다는 계획입니다.
하지만 대통령의 거대 스폰서인 대기업 회장이 혜성이 엄청난 가치의 천연자원이라는 것을 알아내고 그것을 폭파해 잘게 쪼개서 지구에 떨어뜨리자는 제안을 합니다. 대통령도 이를 허락합니다. 대통령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위는 쳐다보지 말고 그냥 살라고(돈 룩 업) 말합니다.
다른 국가들에서 혜성의 방향을 바꾸는 로켓들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자 어쩔 수 없이 혜성을 쪼개는 방법밖에 남지 않게 됩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수포가 됩니다. 이제 죽는 일만 남았습니다.
함께 고군분투했던 케이트와 랜달은 랜달의 집에 모여 최후의 만찬을 벌입니다. 랜달은 아내와 가족들에게 그동안 잘못한 것들에 대한 용서를 청하고 포도주를 마시며 마지막을 맞습니다.
결국, 우리가 챙겨야 하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입니다. 돈과 명예와 즐거움. 그런 것들을 추구하는 것은 그것들의 주인이신 하느님을 갖지 못했다는 증거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의 주인이십니다. 하느님을 가진 이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을 전하며 얻어지는 전우애. 그리고 그 전우애 안에서 느끼는 편안함과 행복입니다.
관계가 행복입니다. 그리고 그 관계가 지속되면 천국이 됩니다.
우리는 자아를 가지고 탐욕과 쾌락과 교만을 추구할 것인지, 하느님을 가지고 사랑의 소명을 추구할 것인지 결정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은 우리 것이 되시기 위해 십자가에 돌아가시고 양식이 되셨습니다. 내가 맺는 열매로 내가 무엇을 가졌는지가 드러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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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연중 제 3 주간 목요일-묵상과 기도
사무엘기에서 다윗은 이스라엘 영도자가 되고 나서, 나탄 예언자로부터 주님께서 그의 집안과 나라가 그 앞에서 굳건해지고 왕좌가 튼튼해진다. 고 예언하자 그가 고백합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하였습니다.
마르코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나 침상 속에 놓지 않는다. 등경 위에 놓는다. 숨겨진 것은 드러나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난다. 고 하였습니다. 주님의 말씀, 그 말씀의 행업은 드러나고 찬미를 받습니다. 우리가 받은 말씀도 모두에게 진리와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회상과 성찰
지난 시간을 되돌아봅니다. 지난 시간 동안 걸어온 길. 자리, 만남을 회상합니다. 나의 모습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지난 시간과 현장을 더 깊이 바라봅니다. 나와 이웃과의 만남, 대화, 일, 사건 등 그 경과와 결과를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내 안에 살아계신 주님, 자비하신 그분의 현존을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분의 말씀을 듣습니다.
-. 선과 진리, 사랑과 자비 기준으로 나의 허약함과 허물, 그릇됨과 악습 등을 바라 봅니다. 회개와 개선, 결심 등 복음적 실행을 묵상합니다.
-. 감사의 마음으로 다짐과 실천을 기도로 바칩니다.
말씀 묵상
나탄이 다윗에게 말씀을 전한 뒤 다윗 임금이 주님 앞에 나아가 앉아 아뢰었다. “주 하느님, 제가 누구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주 하느님, 당신 눈에는 이것도 부족하게 보이셨는지, 당신 종의 집안에 일어날 먼 장래의 일까지도 일러 주셨습니다. 주 하느님, 이 또한 사람들을 위한 가르침이 되기를 바랍니다.
또한 당신을 위하여 당신 백성 이스라엘을 영원히 당신의 백성으로 튼튼하게 하시고, 주님, 당신 친히 그들의 하느님이 되셨습니다. 그러니 이제 주 하느님, 당신 종과 그 집안을 두고 하신 말씀을 영원히 변치 않게 하시고, 친히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 주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이름이 영원히 위대하게 되고, 사람들이 ‘만군의 주님께서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시다.’ 하고 말할 것입니다. 또한 당신 종 다윗의 집안도 당신 앞에서 튼튼해질 것입니다.
만군의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이신 당신께서는 당신 종의 귀를 열어 주시며, ‘내가 너에게서 한 집안을 세워 주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당신 종은 이런 기도를 당신께 드릴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이제 주 하느님, 당신은 하느님이시며 당신의 말씀은 참되십니다. 당신 종에게 이 좋은 일을 일러 주셨으니,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2사무 7,18-19.24-2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르 4,21-25
실천
다윗은 양치기, 쫓기던 사람, 도망자, 다른 민족을 위해서 부역하던 사람, 작은 무리를 데리고 다니던 사람. 그 사람이 이스라엘의 영도자가 됩니다. 나탄 예언자가 그의 집안과 나라가 그 앞에서 영원히 굳건해지고, 왕좌가 튼튼하게 된다고 하자 그는 주님 앞에서 겸손 자세로 고백합니다. 주 하느님, 제가 무엇이기에 또 제 집안이 무엇이기에 당신께서 저를 여기까지 데려오셨습니까? 주님께서 당신 종을 아십니다. 당신 종에게 알려 주신 것은, 당신 때문이며 또 그것이 당신의 뜻이었습니다. 다윗은 지나온 세월의 자신의 험난했던 그의 여정에서 지금 그가 된 것을 자신의 영광으로 돌리지 않고 하느님의 이시며 주님이신 그분께서 그 뜻에서 이루어졌음을 고백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길을 걷는 것은 그분께서 자신을 보여주셨으며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시고 다가오셔서 그 뜻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말씀, 그 등불을 받을 때 함지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올려 놓아 모두를 모든 것을 비추는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모든 것이 그분 것이지 나의 것이 아닙니다.
마침 기도
주님의 기도, 성모송, 영광송을 바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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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0127. 연중 제3주간 목요일. 김 로마노 형제님.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제1독서 (2사무7,18-19.24-29)
"당신 종에게 이 좋은 일을 일러 주셨으니, 이제 당신 종의 집안에 기꺼이 복을 내리시어, 당신 앞에서 영원히 있게 해 주십시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28ㄴ-29)
여기서 다윗이 말하고 있는 '좋은 일'은 앞 문장과 연관 지으면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임을 알 수 있다.
즉 다윗은 하느님의 약속이 진리라는 사실 안에서 그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확신하였으며, 더 나아가 그 약속의 말씀이 자기 세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원한 나라에까지 미치는 영원한 약속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처럼 다윗은 그 말씀이 선하신 하느님께로부터 나오는 약속으로서 반드시 이루어질 것을 믿었기 때문에 좋은 일이라는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로 번역딘 '웨앗타'(weatha; now)는 사무엘서 하권 7장 18절 이후부터 계속되어온 기도의 결론적인 내용을 시작하기 위해서 사용되었다.
한편 '기꺼이 ~ 해주십시오'로 번역된 '호엘'(hoel)은 사역형으로만 쓰이는 동사이며 명령형으로 사용되어 '~하기를 기꺼이하는 마음을 보이소서', '~하기를 기뻐하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복을 내리시어'로 번역된 '우바레크'(ubarek; to bless)는 '호엘'(hoel)과 직접 연결된 말로서, 따로 번역하기 보다는 같이 번역하는 것이 좋다. 따라서 '호엘 우바레크'(hoel ubarek)를 번역하면 '축복하기를 기꺼이하소서', '축복하기를 기뻐하소서' 라고 할 수 있다.
다윗은 자신의 간구의 근거를 철저히 하느님의 말씀에 두었기 때문에, 간구하면서도 대담하게 하느님을 향해 '기뻐하소서'라는 명령형의 문장을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다윗은 하느님께서 말씀을 따라 행하시는 것을 절대적으로 기뻐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대담한 간구를 드린 것이다.
'주 하느님, 당신께서 말씀하셨으니,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본문은 '왜냐하면'이라는 뜻의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하지만, 문맥으로 볼 때 이 부분은 앞 문장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앞문장에서 다윗이 주님께 '축복하기를 기꺼워하소서'라고 대담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말하자면, '복을 주시기를 기꺼워하소서. 왜냐하면 주 하느님 당신께서 약속하셨기 때문입니다'라는 뜻이다.
여기서 다윗은 간구의 근거를 철저하게 약속의 말씀에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원문에는 여기 '당신 종의 집안은 영원히 당신의 복을 받을 것입니다' 앞에 '주님의 축복으로', '주님의 은혜로'로 번역될 수 있는 '우밉비르카테카'(umibbirkatheka; and with your blessing)가 있는데, 새 성경은 이 번역을 뒷 부분에 있는 '당신의 복을'에서 '당신의'로만 번역하고 말았다.
'밉비르카테카'(mibbirkatheka)는 '~로부터'라는 뜻의 전치사 '민'(min)과 '축복'이라는 뜻의 '뻬라카'(beraka)와 2인칭 어미가 결합된 형태이다.
따라서 이것은 '복을 받을 것입니다', '복을 받게 하옵소서'라는 뜻의 '예보라크'(yeborak)와 함께 번역하면, '당신의 축복으로 복을 받을 것입니다', '당신의 축복으로부터 복을 받게 하옵소서'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을 통해 다윗은 다른 곳에서 축복을 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축복의 근원이 되시는 하느님께로부터 축복을 구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계약을 이어가는 간구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창세기 12장 2절, 3절에서도 아브라함에게 내리는 축복의 근원이 주 하느님께로부터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을 볼 때 다윗은 자신에게만 어떤 새로운 축복이 내리기를 간구한 것이 아니라 구세사를 이끌어가시는 하느님의 신실한 계약의 줄기에서 다윗 계약을 통하여 주신 하느님의 축복이 다윗의 왕조를 통해 이어져 가기를 간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대담한 간구는 하느님께서 이미 그에게 다윗의 왕조를 영원한 왕조로 세우시겠다는 하느님 나라의 놀라운 계획을 다윗 계약으로써 보여주셨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2사무7,12).
이러한 다윗 계약과 다윗의 기도는 왕국 분열 이후 북부 이스라엘 왕조는 계속 바뀌었으나 남부 유다 왕조는 다윗의 자손으로 이어지는 축복으로 성취되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윗의 자손으로서 이 땅에 오심으로 완전하게 성취되었다.
[연중 제3주간 목요일]
오늘은 예수님의 피로 씻겨 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주신다.
(마르4,21-25)
21ㄱ 예수님께서 또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 앞 씨 비유에서 이어지는 오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씨- 하느님의 말씀을 인간의 길로 받으면 믿음이 없는 돌밭이, 그리고 사람의 욕심이 들어가 구원을 받지 못하는 가시밭이 됨을 보았다. 하느님의 길로 받으면 그리스도의 피로 얻는 구원, 그 진리의 새 계약으로 받으면 좋은 땅이 됨을 배웠다. 그것을 염두에 두고 봅시다.
21ㄴ“누가 등불을 가져다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놓겠느냐? 등경 위에 놓지 않느냐?
= 등불, 어둠을 밝히는 빛을 감추지 말라는 말씀이신데~
(이사9,1) 1 어둠 속을 걷던 백성이 큰 빛을 봅니다. 암흑의 땅에 사는 이들에게 빛이 비칩니다.
그 하늘의 빛을 등경(교회)위에 놓아 들어오는 이들이 보게 하라고 하신다. 사람의 함지 속이나 침상 밑, 곧 인간들이 만들어낸 열심, 노력, 그 빛에 하늘의 구원의 빛이 가려지지 않도록 하라는 경고의 말씀이시다. 곧 십자가의 대속, 그 예수님의 죽음 그 하늘의 의로움보다 율법(제사와 윤리), 그 사람의 의로움을 내세우지 말라는 말씀이다.
등불- 하늘의 빛이다.
(탈출25,37) 37 등잔 일곱 개를 만들어 *앞쪽을 밝게 비추도록 등잔대 위에 올려놓아라.
= 앞쪽, 앞날, 앞으로 받게 될 구원의 빛이라는 것이다.
(레위24,2-3) 2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올리브를 찧어서 짠 순수한 등잔 기름을 가져오도록 명령하여, 늘 등불이 타오르게 하여라. 3 아론에게 말하여, 그것을 만남의 천막 안 증언 궤의 휘장 밖에 차려 놓아, 저녁부터 아침까지 주님 앞에 늘 켜 두게 하여라. 이는 너희가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다.
= 빛을 '증언 궤'의 휘장 밖에 차려 놓는다? - '증언 궤'는 하느님의 현존을 뜻한다. 그 밖에서, 하느님 나라로 이끄는 빛이라는 것이다. 곧 세상에서 하늘로 이끄는 빛이다. 그 빛은 올리브를 찧어서 짠 순수하고 깨끗한 기름이 태워져 밝혀진다.
올리브는 하느님을 의미합니다 - 하느님의 죽음으로 나오는 기름인 것이고 그분의 죽음으로 나타나는 생명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빛을 저녁부터 아침까지 늘 켜 있게 대대로 지켜야 하는 영원한 규칙이라 하신 것이다. 그 빛은, 영원히 빛나야 할, 곧 영원한 생명의 빛임을 선포하시는 것이다.
(요한8,12)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시편119,105) 105 당신 말씀은 제 발에 *등불, 저의 길에 *빛입니다.
= 하느님의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사람들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어둠인 우리의 영원한 생명, 구원의 빛이시다.
22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 하느님의 뜻은 인간들에게 숨겨져 있다. 인간의 지혜로는 깨달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자신의 뜻, 속셈을 감추고 있다)
(예레33,2-3) 2 땅을 만드신 주님, 그것을 빚어 든든히 세우신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분의 이름은 주님이시다. 3 “나를 불러라. 그러면 내가 너에게 대답해 주고, 네가 몰랐던 *큰일과 숨겨진 일들을 너에게 알려 주겠다.
(에페3,9-10) 9 과거의 모든 시대에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 안에 감추어져 있던 그 *신비의 계획이 어떠한 것인지 모든 사람에게 밝혀 주게 하셨습니다. 10 그리하여 이제는 하늘에 있는 권세와 권력들에게도 교회를 통하여 하느님의 매우 다양한 지혜가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하늘의 숨겨진 큰 일, 그 신비의 계획은 하느님의 지혜다.
(에페1,4) 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십자가 사랑으로
= 죄인들의 구원을 위한 하늘의 대속, 그 큰 일, 신비의 계획이다. 그래서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속죄 제물로 보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아드님은 십자가에서 당신의 죽음으로 구원의 큰 일, 신비의 그 계획을 다 이루셨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죄를 용서 받아 하늘의 영원한 생명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그 예수님으로 생명을 얻으려 하지 않고, 그 예수님으로 자신들의 뜻, 욕망을 채우려는 그 속셈으로 헛된 열성을 부린다는 것이다.(필리비3,17참조)
그래서 그 속셈, 하느님께서 드러내신다.
(히브4,12-13) 12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13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이러한 하느님께 우리는 셈을 해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 사도는 우리의 속셈, 그 잘못을 구원의 진리이신 십자가의 예수님께 돌아와 셈을, 곧 그분의 죽음이 자신의 죄의 대속임을 깨닫고 그 무조건적인 사랑에 감사드리며 또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며 용서를 청하는, 그 셈을 하여 구원을 받으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속셈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뜻이다.(이사43,7참조)
23 누구든지 들을 귀가 있거든 들어라.” 24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새겨들어라. 너희가 되어서 주는 만큼 되어서 받고 거기에 더 보태어 받을 것이다.
= 하느님의 말씀을, 하늘의 대속 그 구원의 진리로 주면 죄의 용서로 구원, 생명을 보태어 받는다. 율법과 인간들의 계명으로 주면, 심판으로 죄와 죽음을 보태어 받는다(로마3,20참조)
어떤 인간도 율법을 계명을 온전히 다 지킬 수 없기 때문이다. 90%, 99%, 안 된다. 100%라야 한다. 하느님의 나라는 조금의 어둠도 존재할 수 없는 빛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어느 사제의 묵상글 중에서~ <예수님은 모든 사람을 *공평하게 대하시지 않습니다. 하늘나라에도 큰 사람, 작은 사람이 있듯이 이 세상에서도 당신과 가까운 사람과 먼 사람을 대하여 구별하여 대하십니다.> 하셨는데 - 예수님이 공평하지 않으시다? -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실 수 있는지~
(예제33,20) 20 그런데도 너희는 ‘주님의 길은 공평하지 않다.’고 말한다. 이스라엘 집안아, 나는 저마다 걸어온 길에 따라 너희를 심판하겠다.”
= 그리고 하느님 나라는 그리스도(하늘)의 피로 씻겨 더러운 양심까지 깨끗해진 이들이 가는 곳인데 무슨 차별, 구별이 있겠는가 말이다. 하느님의 말씀, 그분의 뜻을 모르기에 나오는 묵상 이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에 작은 사람이라 하신 것은, 자신을 否認한(낮춘) 사람을 의미하며 그가 곧 큰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다.
25 정녕 가진 자는 더 받고 가진 것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 새로운 길, 새로운 삶, 하늘의 생명을 보태어 받는다.
(히브10,19-20.22) 19 그러므로 형제 여러분, 우리는 예수님의 피 덕분에 성소(하늘)에 들어간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습니다. 20 그분께서는 그 휘장을 관통하는 *새롭고도 *살아 있는 길을 우리에게 열어 주셨습니다. 곧 당신의 몸을 통하여 그리해 주셨습니다. 22 그러니 진실한 마음과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 우리의 마음은 *그리스도의 피가 뿌려져 악에 물든 양심을 벗고 끗해졌으며, 우리의 몸은 맑은 물로* 말끔히 씻겨졌습니다. (아멘)
☨ 천주의 성령님! 늘 보호하시어 구원의 말씀을 잃지 않고 지키게 하시니 감사합니다.~아멘!!!
연중 제3주간 목요일 복음(마르4,21~25)
"숨겨진 것도 드러나기 마련이고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22)
마르코 복음 4장 22절은 선문답처럼 금방 이해가 안되는 내용이다. 한글 새 성경이 원문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르'(gar; for)를 번역하지 않아 마르코 복음 4장 22절이 앞 절인 4장 21절과 별개의 문장처럼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가르'(gar; for)를 '왜냐하면'으로 번역하면, 4장 22절은 4장 21절의 종속절로 보아야 한다. 그리고 4장 22절의 본문 자체도 부정어 '우'(ou; nothing)와 '메'(me; not)를 두 번 사용하여 강한 긍정을 나타내기 때문에 자구적 의미를 살려 직역하면, '왜냐하면 숨겨진 것은 드러나기 위해서가 아닌 것이 없기 때문이다'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숨겨진 것은 반드시 드러나기 마련이다'라는 유대인의 속담을 나타내는 것으로 봐야 한다(루카8.17참조). 그래서 본문의 의미를 정리하면, 첫째로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사실이 비유로 설명되는 것은 언젠가 드러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마르코 복음 4장 21절에서 등불을 가져 오는 이유가 함지 속이나 침상 밑에 두지 않고, 등경 위에 놓아 빛을 밝히기 위한 것처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사실이 비유로 선포되는 이유도 온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서이므로, 지금은 미약해 보여도 이 복음은 머지 않아 온 세상에 전파될 것이라는 말이다 (마르16,15).
두번째로 이것은 메시야 비밀 사상과도 관련되는데,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이 메시야라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는(마르1,43.44) 이유 역시 메시야가 아니시기 때문이거나 그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께서 계획하신 때에 드러내시기 위해서 그 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마르15,2).
세번째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에 대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을 격려하는 의미가 있다.
일반 무리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도 천국은 감추어져 있는데 (마르4,10,13), 여기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에게 이미 천국의 씨는 뿌려졌고(마르4,27), 그 씨가 아직은 미약한 단계이지만 곧 자라나(마르4,28) 크게 성장하면, 온 세상에 천국의 비밀은 공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마르4,32; 사도1,8; 5,12~16).
'감추어진 것도 드러나게 되어 있다'
이 구절은 마르코 복음 4장 22절 전반절의 '~아니기 때문이다'에 해당하는 '우 가르'(ou gar; for nothing)에 이어지는 후반절이다.
'감추어진 것은 반드시 빛으로 드러난다'는 뜻으로서 전반절과 동의적 대구를 이루며, 앞의 내용과 같은 의미를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진술이다.
일반적으로 비밀의 강조와 유지는 그것을 영원히 덮어 두는 데에 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도 있는데, 그것이 드러날 때 나타날 폭발력과 감동, 충격과 사람들의 반응을 위해 잠정적인 기간동안 비밀을 덮어 두는 경우도 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후자에 속하는 것으로서, 예수님께서 세상에 알리시고자 하는 모든 비밀은 당신의 십자가상 죽음과 부활 사건 뒤로 미루어지고 있는 것이다(마르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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