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력
경남 밀양 출생
울산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1996년 《시조와 비평》 (봄) 신인상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및
《월간문학》 신인작품상
2025년 예술창작활동 지원금 수혜 외
울산시조문학상, 한국동서문학 작품상,
성파시조문 학상, 울산문학상,
한국문협작가상, 나래시조문학상,
김상옥백자예술상 수상 외
울산시조시인협회 & 울산문인협회 회장 역임 외
시조집 『낯선 세상 속으로』,
『아름다운 공구를 위하여』, 『풀꽃 마을』,
『길은 추억이다』, 『풀꽃은 또 저리피어』 외
E-mail · changhochoo@hanmail.net
시인의 말
절망이 온 지구를 들쑤셔도
희망이 남아있는 동안 세상은 살만한 것.
사람과 사람이 만나 일궈갈
가락 가락마다
너와 나의 노래가 되었으면 좋겠다.
2025년 6월
추창호
청소를 하다가
발 디딜 틈도 없이 부려놓은 삶의 편린
빛깔은 낡았지만 그래도 고운 무늬
저마다 간직한 얘기 도란도란 풀어낸다
이것은 이것대로 저것은 저것대로
정감 도는 막사발 같아 차마 내치지 못한 것들
경중을 따지지 못한 애잔한 눈빛이다
일도양단 내려치면 온전히 비워지는 거
고뇌의 사슬을 끊은 그 어느 고승처럼
온몸이 가뿐해진다 산다는 건 비워내는 일
선택, 그 회오를 넘어서
겨울로 접어드는 생의 언덕 올라서서
순간의 선택이 일생을 좌우한다는
좌우명 삼아도 좋을 그 말 문득 생각한다
건져낸 통발 속엔 잔챙이 한두 마리
풀빛 가락으로 오는 놓쳐버린 황금 어장
선택이 선택한 길이 어깃장을 놓는다
내 평생 자박자박 쉼 없이 걸어온 길
가만히 들여다보면 이 길도 길이었음을
알겠다 길섶의 풀꽃 꽃대 환한 이유를
터미널에서
손 흔들며 떠나야 할 작별의 순간이다
오늘을 잡아보는 먼발치 연인의 모습
시간은 냉정하게도 흘러만 가고 있었다
내게도 가슴 치는 그런 순간 있었다
슬픔을 애써 숨긴 하얀 눈발 사이로
첫사랑 단발머리도 점점점 묻혀갔었지
마지막 열차가 속절없이 떠나가고
나목의 침묵 속에 엉겨든 그 눈빛도
그렇게 스쳐 지나간 과거가 되었다
그 방이 그립습니다
흙냄새 폴폴 나는 방이 있습니다
선머슴애 여섯의 땀 냄새도 먹어 치우고
남몰래 꾸는 꿈들도 야금야금 먹어 치웁니다
공부하라는 아버님 말씀도 먹어 치우고
어머님 말간 웃음도 사정없이 먹어 치웁니다
배 깔고 읽던 만화책도 맛나게 먹어 치웁니다
그 시절 뻗대고 싶은 반항도 먹어 치우고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행복도 먹어 치웁니다
식탐이 많은 그 방이 문득 그립습니다
풀꽃 좀 봐
샘 많은 꽃샘추위 목련 가지 흔드는 동안
어, 저 돌 틈 사이 앙증스런 풀꽃 좀 봐
파란 손 상큼 내밀며 환하게 웃고 있잖아
짓궂은 친구 같은 서릿발도 맞았을 테고
너처럼 외톨이로 혼자된 날도 있었을 텐데
무얼까 당당한 모습으로 일어서는 저 힘은
돌개바람에 휩쓸려 이리저리 비틀댈 때도
외떡잎 가슴 속의 꿈 하난 놓지 않았다며
돌 틈새 터 잡은 이야기 향긋하게 풀어내네
해설
반성적 성찰을 통한 욕망과의 화해
민 병 도 시조인
시조의 현주소는 어디인가. 과거의 주류문학 자리에서 밀려나 소수문학으로 자리매김하였음에도 주눅 들지 않고 오히려 그 참여자가 늘어나는 원인은 또 무엇인가. 왕조시대와 함께 사라진 문학 장르라고 치부하거나 국수주의적 애착일 뿐이라는 폄하를 극복해 낸 그 힘은 어디에 있는가. 현대문학사에서 시조와 자유시의 병립은 과연 어떤 의미인가. 시조를 둘러싼 차고 넘치는 물음들 앞에서도 그러나, 시조가 갖는 오늘의 현주소는 여전히 주거 부정인 상태이다.
시조인들은 상대적으로 현대시로서의 미학을 추구하는 기본적인 과제와 함께 수구 보수라는 낡은 기득권의 힘에 기대려는 보신주의적 자세마저 불식시켜야 하는 이중고를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외세의 급류 앞에서 그들의 선택이 갖는 우리말이 지닌 우월적 질서 안으로 시대의 미의식을 안치하는 효과라든지 한글이 지닌 다변적이고 섬세한 구조미의 극대화 같은 포기할 수 없는 장점들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쇄 문화와 함께 유입된 독서용 자유시의 외모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던 시조의 변화는 먼저 가창歌唱이라는 주된 기능 하나를 버리면서 대응하게 된다. 말하자면 시조의 가장 핵심적인 기능을 포기한 채 자유시와 맞섰던 것이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시조의 효용가치를 상실했다고 판단하고 시조 종말론의 기치를 드높이는 것도 일견 무리가 아니라는 이해의 측면이 있다. 오랜 전통의 익숙함이 낡고 삭아서 버리지 않을 수 없는 구실을 찾았던 것이니까 말이다. 자연히 시조를 선택한 사람들은 새로움을 따라가지 못하는 구시대적 수구세력으로 몰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추창호 시인의 경우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일선 학교에서 급변하는 시대의 의식과 가치 변화에 따라 선점이 누려온 이익에 학습된 시류를 체감한 교육자의 일생이 아니었던가. 교단에서 온고지신이며 법고창신의 가치를 강조해 온 스승의 판단으로 선택한 시조의 터무니없는 부침을 어찌 마음 편하게 받아들이었으랴.
1996년 《시조와 비평> 신인상과 2000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으로 등단한 추창호의 입문시기를 보면 이미 40대 후반이었다. 오랜 교직생활 가운데서 우리 문학의 흐름과 장르의 차별성이 지닌 특징을 충분히 파악한 이후라는 지점이다. 의당 그가 선택한 시조는 분명 주류를 이루었던 자유시와의 차별성에 대해 올바르게 판단한 뒤라는 점에서 또 다른 진정성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를 갖게 한다.
이번 추창호 시조집에서 우선 두드러지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신이 겪은 심리적, 육체적, 시간적 체험을 바탕으로 독백이나 고해성사처럼 상황 개선에 진심을 보이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자각에 의한 자가진단은 진단 그 자체만으로도 효용가치가 있지만 미래의 시간을 대비하는 중요한 출발이라는 의미에서 수요와 관계없이 미덕이고 성과이다.
다음으로 들 수 있는 특징은 정형시인 시조의 형식과 정체성에 대한 신뢰와 이해가 매우 깊다는 점이다. 우리말, 한글 문학의 독창적 장르로 자리매김해온 양식의 특징 안에 오늘날의 복잡 미묘하고 섬세한 시대의식과 철학을 담아냄으로써 시조의 품격을 돋보이게 살려주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오늘날의 시대가 무관심하거나 오히려 폄하의 대상인 전통적 가치를 지향하거나 계승 의지에 있어서도 탐구를 소홀히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 가독성을 높여주고 있다. 복잡하고 이질적인 가치들의 상충 지점에서 선택하는 새로운 미의식은 시조의 지평을 넓게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장점이 되고 있다.
왕성한 창작활동과 문학 행정의 일선에서 항상 열정적인 모습으로 일관해 온 추창호 시인에게도 건강상의 적신호가 있었던 모양이다. 어쩌면 그런 정황이 이번 시조집을 마무리하는 데 감성적으로 작용하지 않았을까 유추해 보면서 새로운 자아실현과 문학적 성과를 향한 전환점이 되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