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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입문] (12) 정경 ① 믿음의 토대
성경을 지칭하는 흔하지 않은 이름 중에는 ‘정경(正經)’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올바른 경전’이라고 풀어 쓸수 있는 이 개념은 라틴어 카논(canon)과 그 어원인 그리스어 카논(κανῶν)을 번역한 말입니다.
그리스어 카논은 본래 ‘갈대’라는 말입니다. 곧게 자라고 마디가 있는 갈대가 길이를 재는 측량 도구로도 활용되었기 때문에, 카논은 ‘표준’이라는 확장된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사물의 길이와 부피, 무게를 뜻하는 도량형(度量衡)의 기준인 원기(原器)를 정하듯 신앙의 토대인 계시 진리를 담은 글들 가운데 신앙 진리에 부합하는 글들을 가려 모은 것을 정경이라 합니다.
믿음의 공동체인 교회는 그 믿음의 내용을 온전히 담고 있는 글과 그렇지 않은 글들을 구분합니다. 이로써 참된 신앙을 증진하고 그릇된 이단의 위험으로부터 공동체를 보호합니다. 교회가 공인한 글들 만이 그 거룩함을 인정받아 ‘성경’이라는 지위를 얻습니다. 계시헌장 11항은 ‘정경’과 관련된 중요한 사실들을 잘 정리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계시는 성령의 감도로 성경에 글로 담기고 표현되어 보존된 것이다. 그러므로 거룩한 어머니인 교회는 사도의 신앙에 따라 구약과 신약의 모든 책을 그 각 부분과 함께 전체를 거룩한 것으로, 또 정경으로 여긴다. 그 이유는 이 책들이 성령의 감도로 기록된 것이고(요한 20,31; 2티모 3,16; 2베드 1,19-21; 3,15-16 참조), 하느님께서 저자이시며, 또 그렇게 교회에 전달되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저술하는 데에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선택하시고, 자기의 능력과 역량을 이용하는 사람들을 활용하신다.
하느님께서 몸소 그들 안에 또 그들을 통하여 활동하시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모든 것을, 또 원하시는 것만을 그들이 참저자로서 기록하여 전달하도록 하셨다.(계시헌장, 11항)
하느님께서 세상에 전달하고자 하는 당신의 뜻, 곧 계시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사람들을 통해서 글로 기록되고 전달됩니다. 그런데 간혹 성경을 읽다 보면 “정말 그런가?”라는 의심을 하게 만드는 글들도 있습니다. “이것이 정말 하느님의 뜻이 담긴 글이 맞긴 한 건가?”라는 의혹이 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성경과 같은 시대에 쓰이고 전해지는 글들 가운데에는 “왜 이 책은 성경에 포함되지 않은걸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손색이 없어 보이는 글들도 있습니다. 도대체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가장 중요한 개념이 ‘성령의 감도’, 곧 영감(靈感, inspiratio)입니다. “성령(Spiritus) 안에서(In)”라는 뜻을 지닌 이 용어는 정경을 확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기준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글이 성령의 감도로 쓰인 것인지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요? 역사 속에서 체험하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 그리고 그 믿음의 뿌리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사도전승의 전통성(사도성)은 정경 확정에 있어 결정적 기준입니다. 더구나 이 결정은 어느 한순간에 특정한 몇몇 사람들에 의한 결정이 아닙니다. 정경 확정의 역사는 다양한 공동체가 체험한 하느님께 대한 숱한 대화와 논쟁 끝에 서서히 합의하고 결정한 역사입니다.
교회는 사도전승에 따라서 어떤 문서들이 성경 목록에 포함되어야 할지를 판단하였다. 이렇게 결집된 목록을 성경의 ‘정경’(正經)이라고 부른다. 이 목록에는 구약 성경 46권과 신약 성경 27권이 들어 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120항)
그러나 이천 년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다양한 분열과 반목을 막을 수 없었던 탓에 교회마다 정경의 범위는 미소한 차이를 지니게 됩니다. 동서방 교회의 정경 목록에 차이가 있고, 서방교회의 경우 구교(로마 가톨릭)와 신교(프로테스탄트, 개신교) 사이에도 구약 정경의 범위에 대한 다른 판단이 존재합니다. 개신교의 경우 유다교가 정경으로 확정한 39권 만을 구약성경으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성경 입문] (13) 정경 ②
신앙 공동체가 경전을 확정한다는 것, 곧 ‘정경목록’을 정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내적으로는 신앙 공동체의 공동 고백 근거를 마련하는 것이며, 외적으로는 이러한 기준을 척도로 삼아 이질적이거나 변질된 신조들(이단)을 구별하고 경계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정경의 확정은 공동체의 신앙 고백문, 곧 신경의 형성과 매우 닮은 면이 있습니다.
정경, 곧 공인된 성경은 원래부터 지금의 형태로 뚝딱 생겨난 것이 아닙니다. 한 권의 책이 아니라 여러 권의 책들이 오랜 기간 동안 신앙인 공동체에서 읽혀오던 책들 가운데 몇몇 책들은 다른 책들과는 구별되는 지위를 획득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특별한 책들은 각각의 신앙 공동체마다 그 선집(選集)의 구성도 달랐습니다. 곧, 어느 곳에서는 거룩한 책, 하느님의 말씀으로 자주 읽히고 설명되던 책들이 어느 곳에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채 시간이 흘러간 기간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공동체마다 서로 다른 선집들, ‘권위 있는 책들의 목록’은 점차 공동체들의 대화와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통일된 방향으로 간추려집니다. 우선은 같은 신앙의 기준을 통일시키기 위함도 있지만, 반대로 과장되거나 왜곡된 신앙을 바로잡기 위해서 경계해야 할 ‘가짜’들, 곧 신앙의 본질에서 벗어난 책들은 시급히 그 목록에서 제외해야 할 사정도 생기게 됩니다. 큰 줄기에서 지금의 정경의 대부분은 보편적으로 어느 지역에서나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은 책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몇 책들의 경우 그 정경으로서의 가치가 의심받거나 거부된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앙 공동체들은 통일된 하나의 경전 목록을 마련해 나가며 자신들의 신앙의 내용을 확인, 공포하게 됩니다. 이토록 성경은 오랜 역사의 터전에서 자라나고 꼴을 갖추게 된 역사를 지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공동체의 신앙의 흐름 속에서 읽고 해석해야 합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게시헌장」 12항은 성경을 읽는 올바른 방식을 두 가지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하나는 “인간을 통하여 인간의 방식”으로 기록된 것이므로 각각의 성경 저자들의 진술 의도를 알아내기 위해 “성경 저자가 제한된 상황에서 그 시대와 문화에 따라 당시의 일반적인 문학 유형들을 이용하여 표현하려 하였고 또 표현한 그 뜻을 연구해야함”을 강조합니다. 이렇게 세상 속에서 세상의 언어와 문화적 배경 속에서 성장하고 전달된 ‘신앙의 유산’으로서의 성경을 대할 때 고려할 점 중의 하나는 도대체 왜 신앙 공동체는 이 책들에 특별한 권위를 부여했는가? 이 책들을 단순한 인간의 창작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책으로 선별된 이유는 무엇일까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때로, 독자들의 문화와 제도, 관습과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나 내용이 어리둥절하게 하더라도, 문자 너머에서 울려오는 역사의 메아리를, 옛 신앙 선조들이 물려주려 했던 원초적 신앙 체험과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함께 들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헌장은 그 역사의 주인이신 하느님의 섭리로 쓰인 이 책을 “성령의 도우심으로” 읽고 해석할 것을 강조합니다. 성경은 인간의 언어로 쓰인 기록이지만 동시에 하느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성령 안에서 성경을 읽는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다시 ‘전체교회의 살아 있는 전통’과 ‘신앙의 유비’, ‘성경 전체 내용과 일체성에 대한 고려’라는 세 가지 기준으로 세분해서 설명합니다
[성지에서 만나는 성경 말씀]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
구약성경에서 나무는 왕국과 수장의 상징으로 자주 등장합니다(이사 11,1; 예레 23,5 등). 시편 104,16-17에서는 ‘주님의 나무에 새들이 깃들인다.’는 표현으로 온 세상에 미치는 하느님의 은혜를 찬양합니다: “주님의 나무들, ··· 한껏 물을 마시니 거기에 새들이 깃들이고···.” 다니 4,7-9에서는 바빌론 임금을 큰 나무에 비유한 뒤 ‘새와 짐승이 찾아든다.’라는 말로 그가 지닌 권력의 강력함을 암시합니다. 이런 비유가 신약성경에도 이어져,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를 겨자 나무에 견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백성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나무도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포도나무입니다. 이 나무는 대홍수(창세 6—8장) 뒤 노아가 처음 경작한 작물이라(9,20) 세상 만민 가운데 하느님의 맏아들이 된 이스라엘을 상징하기에 적합합니다. 시편 80,9에서는 포도나무 비유를 통해 이집트 탈출 사건을 노래합니다: “당신께서는 이집트에서 포도나무 하나를 뽑아 오시어 민족들을 쫓아내시고 그것을 심으셨습니다.”
하지만 열매가 딱딱하고 시큼하게 변하면 포도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게 됩니다(예레 2,21; 에제 15장 등). 그런 들포도는 이스라엘을 꾸짖는 신탁에 자주 등장하는데, 이사 5,1-2에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좋은 나무로 심으셨지만 백성이 들포도를 맺었다고 질책합니다. 포도주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부터 포도는 건포도로 만들거나 즙을 끓여 꿀처럼 먹기도 하였는데, 그중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포도주입니다. 성경에서는 포도주를 곡식, 기름과 함께 하느님께서 내리시는 복으로 여겼습니다(신명 7,13; 호세 2,24 등). 그런데 이런 포도주가 백성이 죄를 지을 때는 독주로 바뀌게 됩니다. 곧 술이 제공하는 즐거움 대신 음주의 부작용인 취기만 남는다는 것입니다(에제 23,29-34 등). 사실 이런 독주가 이후 예수님께서 받아 마시게 된 독배입니다. 말하자면, 백성이 마셔야 할 독주를 예수님께서 대신 마시고 죗값을 치르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징벌 예고에 들포도와 독주가 비유로 쓰이듯이, 백성이 죄를 용서받는 시대에도 같은 모티프를 통해 회복이 선포됩니다. 사마리아에서 포도가 다시 자라나리라는 말로 이스라엘의 구원을 예고한 예레 31,4-5이 대표적입니다. 기원전 6세기 후반 바빌론 유배가 끝난 뒤에는 제2 이사야(이사 40장 이후를 전달한 무명 예언자)가 ‘집을 짓고 포도원을 가꾸게 되리라.’(이사 65,21)는 신탁으로 이스라엘의 재건을 예고하였습니다. 이는 한곳에 뿌리내리고 사는 안정감을 예고하는 신탁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무는 모두 그 열매를 보면 안다.”(루카 6,44)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도 주님께 불충하여 죄를 지으면 들포도밖에 안 되겠지만, 회개하여 주님 안에서 다시 합당한 열매를 맺으면 요한 15,6.8의 가르침처럼 그 나무를 가꾸신 하느님께서 영광스럽게 되실 것입니다.
묵시록으로 읽는 믿음과 삶] (8)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묵시 2,8-11)
기원전 600년경 스미르나는 완전히 무너진 도시였다. 그러나 기원후 1세기에 이르러 스미르나는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도시에 사람의 아들은 “죽었다가 살아난 이”(묵시 2,8)로 자신을 소개한다. 한 도시의 흥망성쇠를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사건으로 해석하는 문학적 상상력이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의 서두를 장식한다.
사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에 대해 우리는 속속들이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는 아직 살아있고 살아 있으되 죽을 것 같은 고통과 궁핍을 겪을 때가 많다. 어쩌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는 죽을 만큼 힘든 일들 앞에 크나큰 희망으로, 그리하여 갈망의 대상으로 남아있을 것이다. 어떻게 하면 살 것인지, 또 죽을 만큼, 아니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어떻게 하면 다시 살아날 수 있을 것인지 우리는 아파하며 간절히 묻게 된다. 그 질문의 답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이, 예수님 그분이 주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스미르나에 보내는 편지는 시험, 환난, 충실 등등의 단어로 독자들을 단단히 준비시킨다. 그도 그럴 것이, 스미르나에는 유다인들의 공동체가 다른 어떤 곳보다 굳건히 자리 잡고 있어서다. 그리스도인들을 향한 유다인들의 비난과 괴롭힘이 끊이지 않은 곳이 스미르나였다. 디아스포라의 유다인들은 이방 문화와 종교에 친화적이었다. 그런 이유로 소아시아 지역의 유다인들은 곳곳에 자리 잡아 자신들의 신앙과 문화를 지켜낼 수 있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리스도인들에게만은 적대적이었다. 다른 문화에 호응하면서 같은 하느님을 믿고 유다 문화에 뿌리를 둔 그리스도인들에겐 혹독했다. 사도행전은 그런 유다인들의 태도가 시기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그다음 안식일에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도시 사람들이 거의 다 모여들었다. 그 군중을 보고 유다인들은 시기심으로 가득 차 모독하는 말을 하며 바오로의 말을 반박하였다.”(사도 13,44-45)
비난과 모독, 박해를 살아가는 스미르나 공동체는 궁핍했으나 부유했다.(묵시 2,9 참조) 궁핍을 가리키는 그리스말 ‘프토케이아’(πτωχεία)는 그야말로 물질적 가난을 의미한다. 초대교회는 현실적 가난을 영성적 풍요로움을 이해하는 인식의 자리로 규정하곤 했다.(2코린 6,10; 야고 2,5 참조) 현실의 어려움이 더없이 클지라도 예수님을 향한 믿음은 더욱 단단해진다는 것이 ‘가난함’이 품고 있는 의미라는 것. 고통의 자리가 기쁨의 자리가 되고, 슬퍼하는 일들이 행복의 기회가 된다는 ‘자기 계발서’ 형태의 정신적 위로나 격려 따위의 충고가 아니다. ‘가난’은 가난한 것이고, 그로 인한 힘겨움은 폐부를 꿰뚫는 아픔을 동반한다.
야고보서의 말씀을 되새겨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런데 여러분은 가난한 사람을 업신여겼습니다.”(야고 2,5-6) 믿음의 부자가 된 것은 가난을 탈피하고, 가난으로 인한 고통을 걷어낸 결과론적 선물이 아니다. 믿음이 풍요로워 부자가 되는 것은 가난한 형제를 업신여기지 않는 형제애적 실천의 다른 말이다. ‘가난’은 그리하여 공동체가 함께하는 친교의 ‘원형’을 가리키는 상징체가 된다.
없는 사람이 더 없는 사람을 생각해준다는 일상의 경험칙을 우리는 알고 있다. 가진 것이 많음에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는 사람은 경쟁이나 노력을 당연시 여기는 경향이 있으나, 나누고 함께하려는 사람은 무한 경쟁과 숨 막히는 노력이 벌어지는 삶의 자리 뒤켠에 지쳐 쓰러지는 이들을 염려하는 마음을 지닌다. 믿음의 부자는 이렇게 사람을 챙기는 일을 하느님을 향한 믿음으로 알고 실천하는 사람이다. 형제적 친교를 사는 일이 믿음이 걸어가는 풍요로운 길이다. 스미르나 공동체는 가난했으나 그 가난으로 부유한 친교를 살아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서로를 비난하고 시기하고 심지어 괴롭히는 이들은 참된 하느님의 백성이 될 수 없다.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라고 자부하면서 타민족이나 다른 사상을 단죄하고 멸시한 유다인들은 실은 ‘유다인’이 아니라는 것. 흔히들 요한묵시록, 나아가 요한계 문헌이 90년 유다의 얌니아 종교회의(그리스도인들을 유다 사회에서 배척하고 저주하는 결정적 자리) 이후에 적혀진 글이라 반유다인 정서를 배경으로 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과 유다인의 대립 구도를 적고자 한 게 요한계 문헌은 아니다. 참된 하느님 백성, 유다인은 혈통이나 육욕의 관점에서 이해될 것이 아니라(요한 1,13 참조)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신 육화 사건의 수용 여부에 달려 있다고 초대교회는 생각했다. 예수님이 하느님의 결정적 계시의 자리임을 선언하는 것이 참된 유다인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자리가 하느님의 자리가 되어, 사람을 하느님처럼 배려하고 사랑하는 일이 참된 유다인의 일이어야 했다. 저들끼리 모여 회당에서 하느님을 칭송하지만 사상과 신념, 문화의 차이를 절대적 선악의 기준으로 삼아 이 땅 위에 함께 살아가는 이들에게 횡포를 저지르는 이들은 ‘유다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이고 ‘사탄의 시나고가’(우리말 번역에는 ‘무리’라고 되어있다)라고 스미르나에 보내진 편지는 단언한다.(묵시 2,9)
스미르나의 그리스도인들은 아직 ‘열흘’의 환난을 겪을 것이다.(묵시 2,10) ‘열흘’을 두고 구약의 다니엘이 겪는 고초를 떠올리기도 한다.(다니 1,12 참조) 바빌론 임금 네부카드네자르가 제공하는 음식을 거부하고 열흘 동안 채소와 물만 먹어도 용모가 뛰어나는 기적 같은 이야기는 ‘열흘’의 시간을 하느님에 대한 충실성의 시간 개념으로 바꿔놓는다. 열흘 동안의 환난은, 그러므로 하느님을 향한 믿음을 시험할 기회다. 충실히 믿음을 지키면 승리하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생명의 화관’을 얻게 될 것이다.
사는 게 힘들고 무너질 때, 행복과 성공을 갈망하다 제 삶의 참된 가치를 타협하게 되는 순간, 우리는 몸이 죽는 것보다 더 끔찍한 제 신념의 죽음(두 번째 죽음)에 괴로워할 때가 있다. ‘고작 이렇게 살려고 내가 그렇게 행동했나’라는 스스로에 대한 자책에 죽지 않는 것, 스스로에게 ‘왜 사는가’를 묻는 것, 믿음의 충실성을 되짚어보는 이런 질문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육신은 죽여도 영혼은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오히려 영혼도 육신도 지옥에서 멸망시키실 수 있는 분을 두려워하여라.”(마태 10,28)
[허영엽 신부의 성경 속 인물] (60) 주님에 대한 사랑이 바위처럼 단단했던 베드로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은 중요한 가톨릭 성지 가운데 하나이며, 로마 여행의 랜드마크가 된 곳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종교와 예술, 역사가 어우러진 세계적인 순례 장소요 박물관이다. 교회에 따르면, 기원후 67년에 순교한 로마의 초대 주교인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대성당이 건립됐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4세기이래 같은 장소에 있었는데 현재의 대성당 건설은 1506년 4월 18일 시작되어 한 세기 넘는 공사 끝에 1626년 완료되었다.
베드로라는 이름은 그리스어로 ‘돌’ 또는 ‘바위’를 뜻하는 ‘페트라’(petra)에서 유래했다.(마태 16,18 참조) 성 베드로는 순교 때 스승과 같을 수 없으므로 머리를 아래로 두고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그의 유해는 바티카누스 언덕 위의 이교도와 그리스도인의 공동묘지 장소에 매장되었다. 1950년 12월 23일 비오 12세 교황은 전 세계에 성 베드로의 무덤을 발굴했다는 소식을 알렸다.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실 아래 구역을 조사하며 10여 년을 탐구하여 이룬 기적과 같은 성과였다.
서슬 시퍼런 군인들이 주님을 잡아가자, 제자들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도생의 길을 찾았다. 그마나 수석 제자였던 베드로는 멀찍이 서서 잡히신 예수님의 동태를 살폈다. 그마저도 자신을 알아본 한 여종이 소리를 치자 무슨 소리를 하느냐며 시치미를 뗐다. 죄의식에 못 이겨 베드로는 혼자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누구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그렇다! 내가 저기 잡힌 예수의 제자이다. 나도 잡아 죽여라!’라고 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우리는 심신이 약한 인간이다.
그런데 죽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소문이 왕성한 가운데 갈릴래아에서 물질을 하던 베드로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셨다. 주님은 베드로에게 섭섭한 마음이나 질책을 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주님을 만난 베드로는 더욱 몸 둘 바를 몰라 어쩔 줄을 몰랐다. 주님이 하신 첫마디는 “너는 나를 사랑하느냐?”였다. 베드로는 “예”라고 대답했지만 세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자 베드로는 세 번 배반한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베드로는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라고 대답했다.
사실 베드로는 결점도 많고 우유부단했지만, 바위처럼 우직한 사람이었다. 주님은 능력이 출중한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를 대표로 세우셨다. 주님에 대한 베드로의 사랑이 순수하고 컸던 이유이다. 예전에 일상처럼 호숫가에서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그물을 손질하고 있을 때 주님은 그들 곁으로 다가오셔서 부르셨다. “나를 따라오시오. 그러면 저 큰 세상에 나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해주겠소.”
이후 베드로는 오순절 날 성령을 받은 후(사도 2장 참조) 그의 삶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졌다. 베드로는 정말 주님이 원하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지금도 많은 이들을 구원의 낚싯대로 끌어올리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