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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읽는 단편 교리] 대영광송(Gloria)
주일과 축일 또는 대축일 미사에서는 자비송(Kyrie) 다음 대영광송을 바칩니다. 때로는 두 기도가 순차적으로 별다른 구별 없이 바쳐지는 탓에 마치 비슷한 기도인 것처럼 생각되기도 하지만, 실은 성격이 완전히 다른 기도입니다. 자비송이 자신의 부족함을 뉘우치며 자비를 간청하는 기도라면, 대영광송은 하느님 아버지와 그리스도께 영광을 드리는 찬미가입니다.
대영광송은 성경에 나오는 찬가를 제외하고 교회가 만들어 바친 가장 오래된 찬미가 중 하나입니다. 밀라노 칙령(313년)으로 그리스도교에 자유가 주어진 이후, 교회 안에는 수많은 찬미가와 기도문들이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들 중 많은 것은 정통 교리를 담고 있지 않아 교부들과 공의회로부터 견책을 받았습니다. 심지어 제4차 톨레도 교회 회의(633년)에서는 “단순히 인간의 노력으로” 만든 찬미가들을 폐기하였는데, 그때도 대영광송은 여전히 높은 평가를 받으며 보존되었습니다.
대(大)영광송이라는 이름은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라고 바치는 ‘영광송’과 구별하기 위한 것입니다. ‘천사의 찬미가’(hymnus angelicus) ‘천사들의 찬미’(laus angelorum) ‘노래하는 천사의 찬미’(laus angeli cum carmine)라고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대영광송의 첫 구절이 예수님 탄생 때 목자들이 들은 천사들의 노래(루카 2,14)와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대영광송은 여러 전통의 찬가들이 시간을 거듭하며 하나로 모여져 완성된 찬미가입니다. 하지만 그 가락(멜로디)은 각 지방에 따라 다르게 발전하였습니다. 가장 오래된 건 형태가 단순한 밀라노 대영광송으로 보입니다. 로마 교회에서 가장 오래된 것은 「로마 성가집」 (Graduale Romanum)에 실려 있는 열다섯 번째 대영광송인데, 이는 시편을 읊듯이 바치는 모자라빅(Mozarabic) 전례의 ‘주님의 기도’ 곡조와 유사합니다.
「미사경본 총지침」에선 대영광송이 “성령 안에 모인 교회가 하느님 아버지와 어린양께 찬양과 간청을 드리는 매우 오래된 고귀한 찬미가”(53항)로서 그 문구는 변경될 수 없다고 규정합니다. 일반적으로 시작은 사제 또는 필요에 따라 선창자나 성가대가 노래하고, 그다음은 모두 함께 또는 백성과 성가대가 교대로 노래합니다(성가대 홀로 노래할 수도 있습니다). 노래로 바치지 않을 경우, 모두 함께 또는 양편으로 나누어 교대로 낭송하지만, 그 성격상 기쁨과 찬양의 성격이 드러나도록 노래로 바치는 게 더 적절합니다.
매주 바치는 대영광송의 의미를 기억하며 한 주 동안 주님께 받은 은총에 감사드리는 마음으로 찬미의 노래를 힘차게 부르도록 합시다.
[가톨릭 신학] 희망과 애착, 그 사이에서
어떤 인디언 부족의 성년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부족에서 성년식을 치를 나이가 된 아이들은 옥수수밭을 가로질러 가는 시험을 받게 됩니다. 규칙은 간단합니다. 옥수수밭으로 들어가 반대편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다만 몇 가지 조건이 붙는데, 가장 좋은 옥수수를 하나 가져와야 한다는 것, 옥수수는 단 한 번, 하나만 딸 수 있으므로 신중을 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한 밭을 가로지를 때는 한 번 지나온 길로 다시 돌아가지 못합니다. 시험 결과, 대부분의 아이들은 작고 볼품 없는 옥수수를 가져옵니다. 밭을 가로지르는 동안 좋은 옥수수들을 많이 발견하지만 ‘더 좋은 게 있겠지, 조금 더 큰 게 있겠지.’ 하면서 지나치다 보면 어느새 출구에 다다르기 때문입니다. 결국 어쩔 수 없이 출구 근처에서 그럴듯한 것을 가져오게 되는데, 보통보다도 못한 옥수수지만 정신없이 가져오느라 이제 살필 시간도 없습니다.
저는 이것이 인간적인 차원의 희망이 보이는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희망하지만 좀처럼 만족하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채워지지 않는 욕망으로 정작 소중한 것을 놓치고 또 다른 것을 찾아 헤맵니다. 지금의 시간이 영원하리라는 착각 속에서,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하지만 대부분 결국 마주하게 되는 것은 허전함, 혹은 또 다른 욕망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가져야 할 희망은 무엇일까요? 희망은 그리스도교에서 가장 주요하게 여기는 세 가지 덕(믿음, 희망, 사랑) 중 하나로, ‘우리 자신의 힘이 아닌 성령의 은총이 주는 도움에 힘입어 하늘 나라와 영원한 생명을 갈망하게 하는 덕’입니다. 즉 희망의 덕은 세속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을 희망하게 합니다. 바로 여기서 ‘인간의 희망’과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의 차이가 드러납니다. ‘인간의 희망’은 일시적이며 변화하는 특성을 지니고, 또 다른 욕망을 불러옵니다. 그래서 이 희망은 사실상 ‘애착(좋아하여 집착함)’에 가깝습니다. 반면 ‘그리스도교인의 희망’은 영원하며 변하지 않고 그 자체로 충만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산상설교를 통해 참 행복의 의미를 전하심으로써(마태 5,1-12 참조) 세상의 시련과 유혹을 이겨내고 하느님께 희망을 둘 것을 선언하십니다. 이 희망은 세상의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줌으로써 우리를 영원한 삶으로 인도합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광활한 옥수수밭과 같은 이 세상에서 여러분이 찾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인기, 재물, 승진, 학벌, 외모, 건강, 자녀의 성공 등 다양할 것입니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것들이지만 이것이 최종 목적이 될 경우 우리의 삶은 불행해집니다. 성취하지 못할 경우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무의미한 것으로 여기게 되며, 성취할 경우에는 또 다른 욕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들은 어디까지나 참된 희망의 목적이 되어야 할 하느님께 다가가는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미 여러분께는 가장 좋은 희망의 열매가 있습니다. 우리를 사랑과 자비로 이끌어주시는 하느님입니다. 그러니 바로 그분을 주저함 없이 붙잡으시고 이 세상을 통과하시길 바랍니다.
[박모란 교리교사의 교리, 궁금한 건 못 참지] (11) 자비송과 대영광송
삼위일체 하느님께 모든 영광 드리는 대영광송
주일학교 전례 교육을 마치고 나온 학생이 제게 다가오더니 “선생님, 미사 때마다 ‘자비송’과 ‘대영광송’은 왜 하는 건가요?”라는 질문을 합니다. 정말 우리는 왜 자비송과 대영광송을 바칠까요. 미사 때마다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그 의미를 알고 미사 참여하면 주님께 한 발짝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자비송과 대영광송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자비송(Kyrie : 기리에)
자비송은 성부·성자·성령 삼위(三位)께 바칩니다. 주님을 부르며 그분의 자비를 간청하는 노래로, 첫째는 미사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께 대한 고백(마태 18,20)입니다. 곧 자비송은 “예수님은 구세주·메시아·그리스도·주님이시다”라는 고백입니다.
둘째는 성경에 나오는 눈먼 사람처럼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 “자비를 베풀어 주시라”는 외침(마르 10,48)입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성부께 간청함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그리스도님, 자비를 베푸소서. → 성자께 간청함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 성령께 간청함
3번 자비를 구하는 이유는 성부·성자·성령, 삼위께 간청하기 때문입니다.
대영광송(Gloria)
하느님의 전지전능을 그대로 인정하고 높이 받든다는 뜻이며, 삼위일체(三位一體)이신 하느님께 모든 영광을 드리는 찬미의 노래이며 기도문입니다. 교회가 성령 안에 모여 성부와 어린양에게 영광을 드리며 간구하는, 가장 오래된 기쁨에 넘친 기도입니다.
감사와 함께 초대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부르던 성경에서 영감을 받은 시입니다. 성탄날 밤 천사들의 노래로 시작하여 삼위일체 찬양으로 끝을 맺습니다. 그래서 참회와 속죄·기다림의 준비 시기인 대림과 사순 시기에는 하지 않습니다.
모든 주일과 대축일·축일 또는 지역의 성대한 축제에는 모두 함께 서서 대영광송을 하거나, 또는 번갈아서 노래하거나 낭송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대영광송을 바치면서 미사 때만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나의 영광’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해야 합니다.
✞ 하늘 높은 데서는 하느님께 영광
○ 땅에서는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 → 구세주 탄생을 기뻐하며 외친 것
● 주 하느님, 하늘의 임금님,
○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
● 주님을 기리나이다, 찬미하나이다.
○ 주님을 흠숭하나이다, 찬양하나이다.
● 주님 영광 크시오니 감사하나이다. → 성부께 영광을 드림
○ 외아들 주 예수 그리스도님,
● 주 하느님, 성부의 아드님,
○ 하느님의 어린양,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주님, 저희의 기도를 들어주소서.
● 성부 오른편에 앉아 계신 주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소서.
○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 → 성자 그리스도에게 영광을 드리며 간구함
◎ 성령과 함께 아버지 하느님의 영광 안에 계시나이다. 아멘.
가톨릭 교회 교리서와 함께 “교리 문해력” 높이기 (16) 전능하신 하느님
사도신경은 “전능하신 천주 성부, 천지의 창조주를 저는 믿나이다”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하느님께서 전능하신 분이시라고 고백하며 우리의 신앙고백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흔히 모든 것을 아는 것과 더불어 전지전능함으로 표현되는 하느님의 능력과 관련된 이 신앙은 하느님이시기에 너무도 당연하게 갖게 되는 믿음이면서 또 다른 한편으론 우리 세상 안에 존재하는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 너무도 많은 의문을 가져오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온 세상을 창조하신 분, 모든 것을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전능이 우주적이라 믿습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68항). 과거의 사람들은 하늘 위 저 어딘가, 우리가 알지 못하는 어딘가 피안에 머물며 우리를 다스리시며 모든 것을 하실 수 있는 분으로 하느님을 파악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하느님의 전능함은 우리가 세상 안에서 마주하게 되는 수많은 악과 고통의 문제 앞에서 끝없는 의문을 가져오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지금 무엇을 하고 계신가? 우리의 이 고통을 알고 계신 것이 맞는가? 우리의 고통을 없애시고 악을 물리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분이 맞는가? 그러다 보면 결국 정말 전지전능한 신이 존재하긴 하는 걸까? 라는 물음으로까지 이어집니다.
우리는 먼저 하느님의 전능함은 인간이 일반적으로 생각하게 되는 전능의 모습과는 다른 방식으로 나타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힘을 가진 인간은 그 힘을 활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취하곤 합니다. 다른 이들을 지배하고 자신의 뜻대로 그들을 움직이게 합니다. 자신의 뜻에 반대되는 것을 그냥 놓아두지 않습니다. 충분한 힘이 있다면 말입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애초부터 자신의 것을 내어 주는 전능이었습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안에서 이루어진 성부, 성자, 성령 사이의 관계는 자신을 온전히 내어 주고 이에 응답하는 사랑의 관계이며, 세상 창조는 이와 같은 내어 주는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전능은 아버지로서 ‘사랑으로 충만한 전능’(가톨릭 교회 교리서 268항)이며 오히려 ‘약한 자 안에서 완전히 드러날’(2코린 12,9) 전능입니다. 모든 것을 하실 수 있기에 오히려 창조주께서 피조물에게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시는 사랑을 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를 자녀로도 삼아 주시고, 자비로이 죄인들을 용서하여 주셨습니다. 인간이 자유로이 당신 사랑에 응답하기를 바라시기에 인간의 불순종과 온갖 죄악을 참고 기다리시며 그 모든 것을 덮는 사랑으로 함께하시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전능입니다. 우리와 똑같이 고통을 받을 수 있는 전능함, 인간의 모든 나약함에 함께 할 수 있는 전능함입니다. 때론 무능해 보이고,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하느님은 오히려 그런 나약한 모습, 곧 십자가에 못 박혀 아무 힘 없이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은 그리스도의 모습을 통해서 당신의 전능을 신비롭게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가톨릭 교회 교리서 272항 참조).
[매주 읽는 단편 교리] ‘사도들의 사도’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 누구에게 처음으로 나타나셨을까요? 성 암브로시오, 성 에프렘, 성 대 알베르토 그리고 많은 저술가와 교부들은 ‘전승’을 바탕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가장 먼저 당신을 드러내신 분은 성모님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에서 말하는 첫 번째 인물은 마리아 막달레나입니다(요한 20,11-18). 그는 예수님을 따랐던 여인 가운데 하나로서, 주님께서 일곱 마귀를 쫓아내 주신 뒤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체험한 증인입니다. 그에 관해 전하는 복음 구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 예수님으로부터 치유의 은총을 입은 뒤, 몇몇 여인들과 함께 예수님 일행을 시중듦(루카 8,1-3).
- 갈릴래아 부인들과 함께 예수님의 죽음과 장례를 지켜봄(마태 27,55-56.61; 요한 19,25).
- 빈 무덤을 확인한 뒤, 발현하신 예수님을 만남(마태 28,1-10; 마르 16,1-11; 요한 20,1-18).
한편, 성 대 그레고리오 교황(590-604년 재위)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다른 복음 구절에 나오는 여인들과 동일 인물로 간주하였습니다.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요한 7,53-8,11), 눈물로 예수님의 발을 씻은 여인(루카 7,36-50), 마르타의 동생 마리아(루카 10,38-42), 라자로의 누이 마리아(요한 12,1-8)가 그들입니다. 이런 영향 아래 마리아 막달레나의 초상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연결은 성경 연구를 통해 근거 없는 걸로 밝혀졌고, 1969년엔 특히 ‘간음하다 붙잡힌 여인’과의 연관성은 오해였다고 공식 선언하였습니다.
그리고 2016년 6월 3일, 교황청 경신성사성(현 경신성사부)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기념일’을 ‘축일’로 격상하는 교령 「사도들의 사도」(Apostolorum Apostola)」를 발표하였습니다. “사도들의 사도”라는 말은 ‘제자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전한 첫 번째 복음 선포자’라는 의미로 성 토마스 아퀴나스(1224/1225~1274년)가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부여한 호칭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당신의 부활을 전하라는 예수님의 명에 따라 주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요한 20,17-18). 교령 「사도들의 사도」는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가 진정한 복음화의 일꾼, 곧 부활의 핵심적인 기쁜 메시지를 알리는 복음 선포자의 모범”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러한 성녀의 역할과 지위는 축일 감사송에 명확히 드러납니다:
“살아 계신 주님을 사랑하였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주님을 뵈었으며 무덤에 묻히신 주님을 찾던 마리아 막달레나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경배하였나이다. 주님께서는 동산에서 마리아 막달레나에게 나타나시어 사도들 앞에서 사도 직무의 영예를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전하게 하셨나이다.”
주님을 열렬히 사랑했던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의 마음을 우리 모두 닮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7월 22일은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축일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