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인간이 가장 처음 시작한 학문의 길은 무엇일까? 내 생각엔 예체능이다. 태어날 때부터 인간은 몸을 쓰는 법을 터득하려 애쓴다. 체육을 스스로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후에는 예술이라 불리는 그림의 형태로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이와 비슷한 지경에서 언어학, 곧 말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예술의 형태로든 언어학의 형태로든 인간은 대화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수학이 나왔을 것이다. 내가 오늘 잡은 사슴의 계수, 너가 잡은 사슴의 계수. 이 둘을 세어 비교하고 우위를 가르며 질서 체계를 잡았을 것이다. 더 힘이 강한 놈이 한 무리를 이끄는 게 자연의 이치이니 말이다.
자연스럽다. 이 뜻은 말그대로 어떤 것이 내가 사는 자연과 유사하다는 뜻이다. 자연과 유사하다는 게 뭘까? 장황하고 아름답다는 것일까? 아니다, 자연스럽다의 사전적 정의는 “억지로 꾸미지 않다 이상함이 없다.”이다. 즉, 어색하지 않다는 뜻이다. 유사어로는 당연하다가 있다. 자연스러운게 왜 어색하지 않다는 뜻일까? 사자들과 늑대들이 영역 다툼을 하며 이긴 놈이 진 놈을 복종시키고, 힘 좋은 놈이 약한 놈을 지휘한다. 이것이 자연이다. 이런 자연과 유사한 형태는 2마리의 사슴을 잡은 남자가 4마리의 사슴을 잡은 보다 힘 좋은 남자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정말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무리에서 힘이 태생적으로 부족한 암컷은 수컷에게 굴복해야 하고, 힘 없는 새끼나 불구들은 전혀 취급을 못 받는다. 아주 자연스럽다.
체육으로 근육을 익히고, 예술과 언어학의 형태로 대화를 하며, 수학의 숫자를 이용하여 급을 나누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때 철학은 갑자기 튀어나와 “왜?”라는 굉장히 인간적인 사유를 만든다. 책, [여하튼 철학을 팝니다]에서는 철학의 시작을 자연의 대한 생각, 질문에서 시작 되었다 말한다. 자연이란 무엇인가? 태어날 때부터 너무 익숙해져 버리고 만 스스로 존재하는 것 같은 자연이란 무엇인가? 왜 나는 나보다 사슴 몇 마리 더 잡은 녀석한테 복종해야 되나? 왜 사슴 따위가 우리의 삶을 좌지우지하는가? 애초에 삶이란 무엇인가? 왜 살아야 하나? 아마 철학은 시작되면서부터 고대부터 현대철학의 중요한 명제들을 전부 건드렸을 것이다. 수학은 숫자를 발견하고, 더하기와 빼기를, 곱하기와 나누기를, 도형과 기울기를, 방정식과 제곱근을 찾아가는 과정이 굉장히 오래, 어려운 시간을 가졌지만 철학은 아닐 것이다.
어렸을 적 형과 소꿉놀이를 하던 것이 기억난다. 조금은 폭력적인 놀이였다. 우리의 놀이는 평범한 일상에서 시작된다, 그러다가 덜컥 큰 재앙이 우리의 상상의 나라를 집어 삼킨다. 그때는 표현할 수 있는 최대한의 폭발음과 붕괴하는 물체들의 소리를 내며 방의 사방팔방을 뛰어 다녀 준다. 그러다가 형이 침대에 덜컥 눕고는 나에게 손짓을 하면 나는 그 손짓을 따라 이불로 들어가 흥분된 마음과 뜨거워진 몸을 진정시키며 재앙에 덮쳐진 후 남은 도시의 부스러기들 속에 깔려 있는 이미지를 그려낸다. 그 후에 우리 형재는 이불을 마치 무거운 철근이라도 되는 양 힘겹게 들어 올리고 정신을 차린다. 그때 나는 정상인이다, 그런데 나의 형은 항상 기억상실증에 걸리는 역할을 맡았다. 그렇게 모든 기억을 잊고 만 형은 모든 사태에 대해 질문하기 시작한다. “이게 무슨 일이야?” “난 여기 왜 있는 거지?” 옆에 있던 이불을 붙잡으며, “이건 뭐지?” 갑자기 자기 몸을 만지며, “이건 뭐야?” 몰입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넌 누구지?” “도대체 나에게 무슨일이..!” “나에게 무슨 일..? 그게 뭐야?” 머리를 감싸쥐며, “내가 뭐지?” 머리를 박박 긁으며, “아니, 뭐지? 뭐지라는 게 뭐지? 엥? 뭐지가 뭐지, 뭐지가 뭐지!” 그 지경까지 이르면 나는 그만 좀 하라고 한다. 만약 그날 형의 몰입도가 좋다면 우리의 놀이는 거기서 끝난다. “뭐지가 뭐지?” 이런 질문을 털고 다음 챕터로 우리의 이야기가 전개되지 않는다면 이야기는 곧 끝난다. 갑자기 깨어나니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보는 시각을 잃은 기억상실자의 질문은 절대 끝나지 않고, 매듭지어지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자연스러움에 물음표를 더한 이상 철학은 끝나지 않는 꼬리의 꼬리를 물고 질문을 던지며 학문적으로는 끊임 없는 발전을 만들어 냄과 동시에 앞으로 인류 역사에 평생을 반복될 여러 명제들을 찍어낸다. “자연은 무엇인가?” “자연을 사는 나는 무엇인가?” “사는 것은 무엇일까?” “왜 살아야 할까?” 철학의 시작은 획기적인 발전과 동시에 더 이상 발전 가능성이 없는 학문으로 낙인 찍히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
철학의 모든 사람들의 시각은 아이러니 그 자체이다. 뭔가 있어 보이는 학문으로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싶어한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서점들의 매인 코너에 니체의 어록이 써져 있는 책들이 자리를 꿰차고 있었다. 헌데 얼마전 장원영이라는 연예인이 [마흔에 읽는 쇼펜하우어]라는 책을 소개 하고서는 그 자리를 쇼펜하우어의 어록이 대체하고 있다. 인간 진리를 파헤치려 하는 당대 철학의 흐름이 그저 유행에 따라, 연예인의 말 한마디에 따라 달라지는 것은 얼마나 사람들이 철학을 가벼우면서도, 유명해지니 읽고는 싶은 무언가 패션 아이템 적인 시선으로 보는지 알 수 있다. 유행에 흔들리는 철학, 사실 이것이 철학의 전부일수도 있지만 말이다.
하지만 동시에 철학을 향한 무시가 만연하다. 대학의 철학과, 철학도를 향한 무시와 약간의 비웃음기도 있지만 철학 자체를 무의미하다 보기도 한다. 철학 없이도 잘만 산다, 혹은 철학은 어차피 제자리 걸음이다, 말장난에 불과하다. 책에서 소개 되는 알바루스 펠라기우스는 이런 글을 썼다.
-요즘 대학생들은 선생들 위에 서고 싶어하고, 선생들의 가르침에 논리가 아닌 그릇된 생각으로 도전한다. 강의에는 출석하지만 배우고자 하는 의지가 없다. 만약 성당에 가게 되면, 하느님에 대한 공경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여자애들을 만나러 또는 잡담이나 나누러 간다-
1311년의 글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지나고, 철학적인 새로운 여러 질문과 답들과 수많은 발전을 이루었지만 너무나 공감되는 일이다. 기원전 소크라테스가 일생을 바쳐 개념들을 확립하려 했던 단어들의 본질적인 뜻은 아직도 논의되고 있고, 플라톤의 위대한 이성주의적 철학은 데카르트로 완성될 듯싶다가 곧바로 파괴되었다. 허무로 빠지려던 유럽을 어떻게든 실존주의를 통해 붙잡으려 하다가도 허무로 돌아가려는 시도도 동시에 발생한다. 그러다가 옳고 그름보다는 개인의 감상에 주목하자는 니체와 여타 현대 사상가의 결론은 어쩌면 도피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철학에 대한 반박 또한 철학이다.
어느 날 교회의 한 학생이 나에게 와 고민?을 털어 놓았다. “공부를 왜 해야 될까? 안 하면 안 되나? 공부 안 하고는 못사나?” 학교에서 1등급으로 성적표를 장식해 놓고서는 나에게 그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뭘까? ‘공부 안 하고 못사나?’ 이 뒤에 ‘너처럼?’이 감춰져 있는 느낌이었다. 기만적인 이유로 나에게 접근 한 것일수도 있지만 그 친구의 공부에 대한 회의는 생각보다 깊은 듯싶다. 1를 위하여 희생될 수많은 시간과 의지, 기쁨의 누락을 상상해 보면 이해가 안 될 수 없다. “이 정도로 해서 될 게 뭐야?” “공부 해서 좋은 게 없는 것 같아.” 이 말을 1등급으로 줄을 세우려 노력하는 한 학생이 아니라, 펑펑 놀고 있는 초3 자퇴생의 입에서 나온다 해봐라. 애초에 초3 자퇴생이 이런 통찰을 진심으로 할 수 있을까? 자격 있는 자의 회의이다. 자격 없는 자가 회의를 논하면 진심 없는 말장난에 불과하다.
아는 것이 힘이다. 조금이라도 더 아는 것이 힘이지 않을까? 우리가 생각하는 기본 전제에 대하여, 내가 생각하는 세상에 대하여 먼저 나아갔던 이들의 결론을 듣는 것을 좋지 않을까? 세상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진리에 조금이라도 접근할 수 있지 않을까? 이에 어떤 이가 말한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 애초에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이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헌데 어떤 사실에 대해 알지 못하면 그것을 모르는 게 약인지, 아는 것이 약인지 모른다.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안다는 겁니까?” 당연하다. 적어도 가까이 다가가 냄새라도 맡아야 하지 않겠는가?
진심으로 회의에 빠진 노인과 바다의 노인은 누구보다 처절하고도 열심인 사흘을 보냈다. 철학을 진심으로(있는 척이 아니라) 비판하는 사람은, 혹은 회의를 말하는 사람은 사실 그 누구보다 철학적인 사람이다. 철학은 철학적이지 않으면 옹호할 수도 비판할 수도 없다. 철학은 의미 없다며 비판하는 순간 철학을 배움으로 적어도 앞으로 철학 같은 똥을 먹지 않아도 된다는 지혜를 얻는다. 역설적으로 철학은 어디로 가던 쓸모가 있다.
전에 배워 왔던 가치관에 대해 이런 선생의 핑계를 들었다. “가치관을 가지지 않고 사는 사람 없다.” 그러니 모두가 마음 속 내면에 가지고 있는 가치관을 파악하는 작업은 유익하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며 잠시 이렇게 생각해 보았다, ‘어떤 형태로든 철학은 쓸모가 있다.’ 더 나아가 ‘철학이 없는 것은 없지 않나? 모든 것은 철학적이고, 모든 사람은 철학적이지 않나? 그럴 때 내가 철학을 배운다면 그것 참 유용하겠다!’
고민해보니 철학에게 미안하지만 모든 것은 철학적이지 않다. 물론 이런 통찰은 철학적인 사고로만 얻을 수 있는 것일지 모른다. 사물과 동물은 일단 제외하고 모든 사람의 굴레 안에서 철학은 모두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아무런 철학도 없이, 철학적인 시선 없이, 아무런 관심 없이 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이 철학적 신념을 마주했을 때 그저 밭의 씨앗을 뿌릴 뿐이다. 비판으로도 회의도로 가지 않을 체 그저 자기 밭을 가꿀 뿐인 사람들이다. 혹시 이런 생각을 해본다. 이런 이들 덕에 철학은 아무것도 이룰 수 없던 것이 아닌지. 이런 이들 덕에 개인의 큰 목소리에 불과하던 철학들이 사회의 옳음이 된 것일지도 모른다.
여튼 저튼 쨋튼 철학은 존재한다. 인지하지 않건, 비판하건, 신뢰하건. 난 대부분 인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다. 그렇게 사람들은 돼지와 진흙탕에서 씨름하려는 시도하지 않는다. 더럽고 어려운 싸움에 참여하기 싫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그 돼지가 북쪽의 돼지이건, 남쪽의 돼지이건 그들의 힘이 별볼일 없을지도 모르지만 애초에 지고 모든 “왜?”라는 질문의 답들의 통치권을 넘겨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