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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IAN SUMMER 2
64. 포장마차. 밤
포장을 열고 들어오는 사무장과 준하.
아주머니와 인사 나누며 자리를 잡는 사무장.
사무장: 사장님 여기 꽁치 고등어만 한 놈으로 한 마리 굽고, 소주 한 병 줘요.
준하의 잔을 채우는 사무장.
준하, 거침없이 들이붓는다.
사무장: (마시고는) 이제야 술맛이 나네.
준하: 그러게요.
사무장: (다시 채우며) 오늘 힘들었죠?
준하: 아니요. (또 마시고) 좋은데요. (취한 듯) 참, 제가 아까 병원 기록 부탁했나요?
한 잔을 더 마시고는 그대로 불판으로 푹 쓰러지는 준하.
놀란 사무장, 준하를 얼른 일으키고 손님들과 아줌마 의식하며,
사무장: (어색하게 웃으며) 자기가 꽁친줄 아나, 불판으로 왜 겨올라가 겨올라가긴.
허허, 웃는 사무장.
준하, 다소 비틀대며 큰 소리로 웃는다.
사무장, 바닥에 떨어진 숟가락 등을 줍는 동안, 등받이 없는 원의자에 앉아있는 준하.
웃다가 어두워지는.
65. 준하원룸. 밤
입은 채로 침대에 누워 한쪽 귀퉁이가 떨어진 포스터를 보고 있는 준하.
66. 교도소. 거실. 밤
어두운 거실에 웅크리고 앉아 화집을 넘겨보는 신영.
문득 자신에게 화가 나는지 몇 장을 거칠게 넘기다가 탁 덮어 버린다.
67. 준하원룸. 밤. 꿈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준하.
여자의 그림자가 준하 곁을 맴돈다.
다가와 빠른 동작으로 준하의 심장에 칼을 꽂는다.
눈을 뜨는 준하.
눈앞에 있는 건……. 신영.
68. 준하원룸. 밤
그대로 누운 채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몰아쉬고 있는 준하.
이내 진정하고 다시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다.
머리맡에 놓인 신영의 화집을 보게 되는 준하.
몇 장 넘기는데 정사각형 종이가 준하 가슴위로 떨어지고 책 귀퉁이에 <또 울고 있다. 바보같이…….>라고 적힌 것이 눈에 들어온다.
69. 농구구조물. 새벽
멀리 보이는 혼자 농구하고 있는 준하.
70. 신영아파트. 몽타주. 아침
열리는 현관문.
혈흔이 군데군데 희미하게 말라 있는 바닥을 훑는 시선.
(인서트)
들것에 실려 나오는 성종훈의 시신.
시선은 거실을 지나 침실로 들어간다.
침대……. 신영과 성종훈의 결혼사진……. 화장대를 보는 시선.
(인서트)
화장대에 앉아있다 체포되는 신영.
다시 거실을 지나 욕실로 들어가는 시선.
욕조와 타일 바닥에 남은 혈흔들…….
(인서트)
피를 흘리며 욕실을 오가는 남자의 나신.
돌아보는 남자.
(F. O)
E: 준하의 휴대폰 멜로디.
(F. I)
지친 얼굴의 준하.
준하: 여보세요. 네.
71. 산부인과. 낮
벽에 붙은 태아의 초음파 사진을 보고 있는 사무장.
사무장: 기록들은 다 찾았는데, 살해 동기만 더 강해진 거 아닌가 모르겠어요. 그나저나 지금 어디예요?
72. 욕실. 낮
준하: 화장실이요. 볼 일 보는 게 아니고 갇혔어요. 참……. 회사 들어가시면 저 연수 다음 기회에 가겠다고 전해주세요. 황변호사님한테요. 그렇게 됐어요.
열리는 문.
지친 얼굴로 변기에 걸터앉아 핸드폰을 받고 있는 준하.
73. 신영아파트. 엘리베이터. 낮
엘리베이터 안의 준하와 열쇠수리공.
준하를 위 아래로 훑으면 준하: 역시 같이 훑는다.
다시 앞을 보는 둘.
열쇠 밤새 아르바이트하느라 잠도 못 잤는데 뭐 이깟 일에 전문 인력을 부르고 그러세요?
준하: 간단한 거였나 보죠.
74. 신영의 아파트. 거실. 낮
안으로 들어와 문손잡이 커버를 벗겨보는 준하.
뭔가 감 잡은 얼굴로 거실에 서 있는.
거실에 드리운 방범 창 그림자에 갇힌 듯 보이는 준하.
가만히 창밖을 내다보는 준하의 얼굴.
E: 소란한 법정의 소음.
75. 법원, 로비, 낮
걸어오는 준하, 금속 탐지기를 통과해 계단을 올라간다.
76. 법정. 낮
증인석의 이모, 피고인석의 신영을 보며 글썽인다.
이모를 보는 신영.
준하: 피고인은 증인과 왕래가 잦았습니까?
이모: 띄엄띄엄 오곤 했어요. 지 남편한테 붙잡혀 끌려간 이후론 한 번도 못 봤고요.
준하: 그게 언제죠?
이모: 3년 전 언니 기일 부근이니까……. 97년 4월 15일쯤이요.
증인석의 산부인과 의사.
산부의: 97년 4월 16일입니다.
(인서트)
만신창이가 된 채 침상에 실려 빠르게 응급실로 들어가는 신영.
산부의 (E): 외부 충격에 의해 아이가 자연유산 됐고, 환자 상태가 너무 심해 외과로 트랜스퍼 시켰습니다.
준하: 낙태 시술하신 걸로 아는데 그 이유가 뭐였죠?
산부의: 산모가 임신 중인걸 모르고 ‘신경안정제’를 복용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준하: 어떤 성분의 신경안정제였죠?
산부의: 다이어드팜입니다.
박검: 약을 복용한 사실을 확인하셨습니까?
산부의: 환자에게 들었습니다.
박검: 확인도 않고 시술했단 말입니까?
산부의: 이신영씨는 3년 전부터 제가 권유해서 그 약을 복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따로 확인하는 절차는 필요 없었습니다.
증인석의 남자 의사.
남의 독방에 수감됐을 때 폐소공포 증세로 저희 병원으로 옮겨온 적이 있습니다.
준하: 폐소공포증은 어떻게 나타나는 증상이죠?
남자의사: 남의 쉽게 말하면 갇혀 있는 것에 대한 공포죠. 문이 닫혀 있는 것만으로 산소가 없어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겁니다. 처음엔 잘 모르다가 한 두 시간이 지나면 괴로워지기 시작하고 일반적으로 서너 시간이면 의식을 잃기도 합니다.
준하: 그런 증상이 생기는 이유를 설명해 주시겠습니까?
남의 유전적인 것일 수도 있고, 후천적으로 생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유괴나 감금 등 심한 정신적 충격이 요인이 되죠.
증인석의 이모.
준하: 폐소공포증에 대해 들으셨죠?
이모: 네.
준하: 피고인에게 이전에도 그런 증세가 있었습니까?
이모: 아니요. 오히려 혼자 방에 틀어박혀 뭔가 하는 걸 좋아했어요. 7년을 같이 살았지만 한 번도 쓰러지거나 그런 적 없었네요.
준하: 피고인의 어머님이나 증인한테도 그런 증상은 없죠.
이모: 그럼요. 그런 게 있단 말을 여기서 처음 들었으니까요.
준하: 그럼 유전적인 이유의 증세는 아니란 얘기네요.
준하, 사진과 서류를 서기에게 넘긴다.
준하: 사건 현장이자 피고인과 죽은 남편이 6년간 거주했던 아파트 사진입니다.
여느 아파트와 비슷해 보이지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서기에게 사진들을 받아보는 판사.
준하: 문손잡이를 봐주십시오.
복잡한 감정이 얽히는 신영, 신영의 얼굴.
(인서트. 신영의 아파트)
욕실 문으로 내던져지는 신영,
공포에 떨며 들어가지 않으려고 버둥댄다.
버티는 신영을 가격해서 욕실 안으로 쳐 넣는 성종훈.
거칠게 닫히는 욕실 문. 잠기는 문고리.
준하(E): 모든 방의 문손잡이가 반대로……. 그러니까 밖에서 잠그고 안에선 열쇠가 있어야만 열 수 있는 상태로 되어있습니다.
미친 듯이 욕실 문을 두드리는 눈물범벅의 신영.
벌컥 열리는 문. 벗은 몸의 성종훈.
흠칫 물러서는 신영.
욕실 바닥에 팽개쳐진 신영의 옷.
빈 욕조 안에 벗겨진 채 멍한 얼굴로 앉아있는 신영.
반쯤 열린 욕실 문으로 보이는 종훈의 하반신.
떨리는 손으로 눈물과 이마의 피를 닦는 신영.
준하(E): 피고인은 결혼 후부터 사건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자신의 아파트에 감금당한 채 남편으로부터 상습적인 폭행을 당해왔습니다.
법정
준하: 피고인이 발견된 침실 역시 마찬가집니다. 피고인은 사건 당시 경비에 의해 발견되기 직전까지 폐소공포증으로 인한 심신미약 상태로 침실 안에 갇혀있었던 것입니다.
박검: 피고인이 범인이 아니라면 왜 외부로 도움을 청하지 못했죠? 또 살해흉기인 메스엔 왜 이신영의 지문만 남아있습니까?
준하: 메스 세트는 외과의였던 성종훈의 서재에 있었고, 서재는 가정주부인 이신영의 손길이 자연스럽게 닿을 수 있는 곳입니다.
서기에게 서류를 건네는 준하.
준하: 피고인과 죽은 성종훈이 사용한 전화요금 영수증입니다.
97년 4월 이후부터 3년간 발신정지 상태에서 기본요금만 부과되었습니다.
피고인이 외부로 도움을 청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리고 집안 어느 곳에서도 피고인이 갈아입었다는 성종훈의 혈흔이 남은 옷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이상입니다.
앉는 준하.
보는 박검.
판사: 의견 말씀하시죠.
박검: 피고인 자신이 무죄를 주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과학적 입증이 안 된 무죄 정황은 변호인의 심증에 의한 억측일 뿐 판결의 기준이 될 수 없습니다. 피고인 역시 재판기간 내내 일체의 진술을 거부하는 등 반성의 기미가 전혀 없고, 치밀한 계획에 의한 살인이란 점, 또 그 행위가 극히 잔인했던 점등을 비추어 일심과 마찬가지로 피고인을 사형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
판사: 변호인 최후변론 하세요.
준하: 피고인의 묵비권과 재판을 거부하는 행동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피고인은 체포라는 방법을 통해서 밖에 그 집을 나올 수 없었던 그 순간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삶을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보호받아야 할 가정에 감금된 채 스스로는 아무 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살아있는 모든 날들이 피고인에겐 죽음이었습니다. 그런 피고인에게 침묵은 최선의 선택이었습니다.
잠시 신영을 보는 준하.
신영, 미동도 않고 앉아 있다.
준하: 그 동안 재판을 통해 밝혀진 무죄의 증거들은 물론 심증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유죄의 증거 역시 심증에 의한 것입니다. 따라서 본 사건의 판결에 가장 중요한 기준은 형사법의 대헌장에 명시된 무죄추정의 원리라 할 것입니다. 유, 무죄의 확증이 없는 이 사건의 판결에 과연 확실한 무죄의 증거가 없기에 유죄를 선고할 것인가, 아니면 확실한 유죄의 증거가 없기에 무죄를 선고할 것인가 본 재판부에 묻고 싶습니다.
피고인석의 신영을 보는 준하.
준하: 그 동안 본의 아니게 피고인을 힘들게 했던 것……. 사과합니다. 미안해요.
보지 않는 신영.
준하: 이상입니다.
판사: 피고인, 일어나세요.
일어서는 신영.
판사: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어떤 기대감으로 신영을 보는 준하.
담담하게 서있는,
신영:……. 없습니다.
뭔지 실망스러운 기분이 드는 준하, 괜히 서류를 챙기는.
77. 법정. 복도. 낮
계단을 내려오는 준하.
준하 뒤에서 내려오고 있는 박검,
박검: 서변호사님.
돌아보는 준하.
나란히 걷게 되는 두 사람.
박검: 수고 많으셨습니다. 그런데…….이신영이 서변호사님한테는 자기 결백을 주장하던가요?
준하, 박검을 빤히 본다.
박검: (웃으며) 다른 뜻이 아니라, 거의 모든 피고인들은 자기결백을 주장하거든요. 근데 이번 경우는 들은 기억이 없어서……. 혹시 변호사님한테는 얘길 했나 해서요.
준하:…….
기다리고 있는 사무장을 보고는,
박검: 실례 많았습니다.
준하와 사무장에게 각각 목례하고 한쪽으로 사라지는 박검.
준하, 복도 안쪽으로 사라지는 박검을 본다.
78. 법정
빈 법정.
판사E: 본 사건의 검찰 측 주장인 흉기의 지문, 알리바이 등
79. 농구구조물. 아침
아이들이 농구하는 모습을 보면서 운전석에 앉아있는 준하.
농구를 보고는 있지만 마음은 신영의 선고 법정에 가있다.
판사E: 피고인 이신영의 성종훈에 대한 살인 혐의에 의심이 가는 바는 있으나 범죄의 결정적인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사료되는바 형사소송법 제325조에 의거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80. 법정. 낮
판사: 주문 원심을 파기한다. 피고인 이 신영 무죄.
눈을 감는 신영.
81. 교도소 앞 . 낮
들어오는 준하의 차.
교도소 정문 맞은편에 차를 세우는 준하.
이모E: 전 괜찮은데 애들하고 바깥양반이 어찌나 꺼리는지……. 신영이한텐 면목 없어 못 가볼 거 같네요.
준하, CD를 뒤적여 골라 플레이 버튼을 누른다.
교도소 앞에 서 있는 신영.
더운지 소매를 걷고 손수건을 꺼내 머리를 올려 묶는다.
그런 신영을 보고 있는 준하, 망설이지만 내리지 못한다.
여전히 보고 있는 준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는 신영.
그녀 곁으로 호송버스도 지나가고……. 자동차. 교도관들도 지나간다.
어둑해지는 교도소 앞.
결국은 차에서 내리려는 준하.
그대로 섰던 신영, 걷기 시작한다.
조심스럽게 신영을 따라가는 준하.
신영, 교도소를 돌아나가는 택시에 몸을 싣는다.
택시를 따라가려다 포기하는 준하.
82. 택시안.
따라오려다 오지 못하는 준하의 차를 보는 신영.
83. 신영의 아파트. 저녁
열리는 현관문.
잠시 그대로 선 신영, 들어간다.
불을 켜보지만 켜지지 않는.
싱크대에 물도 나오지 않는다.
거실에 말라붙은 혈흔을 내려다보는 신영.
발코니 창으로 노을이 드는 거실.
거실 한곳에 앉아 마른 걸레로 잘 닦이지도 않는 혈흔을 닦아내는 신영.
닦다가는 멈추고, 멍하니 발코니 밖을 보며 힘없이 벽에 기댄다.
창살이 갈라진 창을 보다 문득 벌떡 일어서는 신영.
침실로 들어가는 신영.
결혼사진을 들고 나와 현관문을 열고 버린다.
가지런히 놓여진 부부찻잔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신영.
집안의 모든 문들을 활짝 열어 놓기 시작한다.
모든 문이 열려진 아파트 가운데 서 있는 신영.
84. 준하원룸. 밤
책상에 앉아있는 준하.
신영의 서류들을 보다가 스탠드를 꺼버린다.
TV를 켜서 진행 중인 티비 드라마를 물끄러미 보다가 그것도 꺼버리는 준하.
85. 신영아파트. 밤
열린 침실 문으로 보이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운 신영.
초점 없는 눈. 흐르는 눈물.
그대로 아침이 되는 침실.
86. 로펌. 아침
마주 오는 사람들을 유연하게 피하거나 목례를 하며, 서류를 한 짐씩 안고 걷는 준하와 사무장.
준하: 최민기씨 교통사고 목격자 어떻게 돼가죠?
사무장: 사고현장에서 행상하던 상인들 쪽으로 수배 중입니다. (게시판에 연수 공고를 지나치며) 이 신영한테는 연락 없죠.
준하: (보는)
사무장: 아무리 변소 들어갈 때 나올 때 다르다지만 연수까지 포기하고 한 재판인데…….
대꾸 없이 빠른 걸음으로 앞서 가는 준하.
따라가다 속이 불편한지 한곳에 서류를 내려놓고 노선을 바꾸는 사무장.
87. 로펌. 화장실. 아침
급하게 들어와 무심결에 제일 앞에 있는 화장실의 문을 여는 사무장.
키스하고 있는 김변과 최변.
화들짝 떨어지며 서로를 보는 세 사람.
정적 속의 셋.
사무장, 멍한 얼굴로 문을 닫는다.
잠시 섰다 돌아서는데 역시 멍한 얼굴로 서 있는 황변호.
흠칫 놀라는 사무장.
88. 로펌. 황변방. 저녁
책상에 놓여지는 사표.
황변 보면, 최변과 김변이 서 있는.
아닌 것 같으면서도 어쩔 수 없는 표정의 황변.
89. 로펌, 저녁
방에서 나와 퇴근하는 준하와 사무장.
유리창으로 황변방의 상황을 보게 되는.
90. 포장마차. 밤
불판에서 피어오르는 연기.
술잔을 앞에 놓고 앉은 준하와 사무장, 김변, 최변.
준하: 어떻게 나한테까지 말 안할 수가 있냐?
김변: 그냥 기회가 없었잖아요. 차라리 잘됐어요. 그 동안 눈치 보는 것도 힘들었는데.
준하: 앞으로 뭐 먹고살려고 나도 아직 못 던진 사표를 던져?
최변: 개업해야죠. 태어나서 지금껏 배운 기술이라고는 이것뿐인데.
씁쓸하게 웃는 두 변.
옆에서 조용히 술만 마시던 사무장.
사무장: (술잔을 꺾고) 일 년 차 때 벌써 뚜마담들 수첩에 올라서는 열쇠 몇 개씩 챙겨들고
장가드는 치들 보다 만 배는 폼 납니다. 두 분
그저 사랑한다. 그러면 그 사람이 누구건, 어떤 처지건 중요한 게 아니어야죠. 안 그렇습니까?
사무장을 빠끔히 보는 두 변.
사무장: 제가 너무 나섰습니까?
웃지만, 그럼에도 씁쓸하게 술잔을 들어야 하는 두 사람.
둘을 보다가 같이 술잔을 드는 사무장.
그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준하.
91. 준하 원룸.
신영의 서류와 비디오테이프를 박스에 정리하는 준하.
책상 서랍에서 신영의 교복 입은 사진이 나온다.
의자에 앉아 사진을 보는 준하.
스탠드 불빛 아래 환하게 웃고 있는 신영.
(F. O)
92. 신영아파트. 아침
햇살이 들어오는 침실.
침대에 웅크려 간신히 잠들어 있는 신영.
그때, 들리는 초인종 소리
번쩍 눈을 뜨는 신영, 놀란 사람처럼 몸을 벌떡 일으킨다.
침구를 반듯하게 정리하고 급히 화장대로 가 옷매무새를 다듬는다.
립스틱을 꺼내 빠르게 바르는 신영, 바르다가……. 멈춘다.
화장대 거울로 보이는 결혼사진이 걸렸던 빈 공간.
허한 표정으로 섰다가 티슈를 뽑아 입술을 닦는다.
다시 들리는 초인종 소리.
93. 신영의 아파트. 복도. 아침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는 신영, 주위를 살피지만 아무도 없다.
들어가려는 신영의 시선에 보이는 난간 위에 떨어져 있는 노란 은행잎.
신영, 나와 가만히 은행잎을 집어 든다.
올려다보는 하늘.
94. 신영의 아파트. 침실. 아침
화장대에 앉아 준하의 명함을 보다가 그냥 서랍에 넣어버리는 신영.
자신을 보다가 문득 일어서 옷장을 연다.
95. 버스. 아침
‘이상 기후’에 관한 라디오 뉴스가 들리는 버스 안.
좌석에 앉아 밖을 내다보는 신영.
창밖으로 전시회 등의 플래카드가 즐비한 인사동 풍경이 지나간다.
보는 신영.
96. 준하원룸. 아침
막 샤워를 마친 듯 한 준하 침대에 걸터앉아 통화를 하고 있다.
준하: 사무실 개업 선물이면 뭘 사야 되죠? 사무장님은 의견 없으세요?
문득 침대 맡에 신영의 화집을 발견하는 준하.
97. 인사동. 상점. 낮
상점유리로 보이는 거리.
공기돌이나 딱지 등 예전 물건들이 가득한 상점.
천천히 걷는 신영, 신기한 듯 상점 안을 들여다본다.
98. 인사동. 유료주차장. 낮
주차장에 차를 세우는 준하.
99. 인사동. 길. 낮
종이로 싼 커다란 액자를 안고 화랑에서 나오는 준하, 울리는 핸드폰.
멀리서 농악, 또는 퍼포먼스 팀의 퍼레이드 소리가 들리는.
액자를 안고 통화하며 멀리 오는 퍼레이드를 피해 얼른 길을 건너는 준하.
퍼레이드를 보기위해 길 가로 몰려든 사람들.
길 가운데로 지나가는 긴 행렬.
준하: (지르듯) 인사동이요……. 그림으로 샀어요. 풍경이 좋아서요.
준하, 무심히 퍼레이드 쪽을 돌아보는.
길 건너편에서 이쪽을 보고 있는 신영.
통화하던 수화기를 내리는 준하.
두 사람 사이로 한 무리의 행렬이 지나간다.
신영을 찾으려 한 방향으로 움직이는 준하.
신영 역시 같은 방향으로 천천히 움직인다.
행렬 너머에 신영이 보이지 않자 빠르게 걷기 시작하는 준하.
잠시 엇갈려 다른 곳을 보다가 정면을 보면, 그곳에 두 사람이 서있다.
행렬이 빠지고, 길 가에 서서 구경하던 사람들 길로 섞여 들어오기 시작해도.
그 자리에 그대로 멈춰서있는 두 사람.
100. 인사동. 카페. 낮
가만히 커피를 마시는 신영,
탁자 옆에 세워둔 준하의 액자를 본다.
준하: 같이 일하던 동료 둘이 사무실을 새로 개업했어요.
말없이 각자 차를 마시는 둘.
준하: 어떻게……. 지냈어요?
신영:…….
준하: 잘 지냈어요?
신영:…….
준하: 대답 없는 건 여전하네요.
신영: 미안했어요……. 그때…….
준하: (쑥스럽게 웃으며) 뭐……. 그런 걸 다 사과하고 그래요……. 어쨌든 목소리 들으니까 좋네요.
신영: 오늘……. 처음 나왔어요. 바깥에
유리너머의 거리로 시선을 돌리는 신영.
101. 인사동 데이트. 낮
거리행사. 난장. 자선 공연. 사람들.
인사동 속 두 사람의 여러 모습들.
길에서 큰 개를 만나는 두 사람.
무서워 가지 못하는 준하와는 달리 다가가 목을 쓰다듬는 신영.
만져보라고 권하지만 고개만 흔드는 준하.
신영, 웃는다.
준하: 여기 좋아하나 봐요?
신영: 네?
준하: 인사동 좋아해요?
신영: 좋아해요. 오늘 처음 와 봤지만.
준하: 배 안 고파요?
신영: (보면)
준하: 생선 좋아해요?
신영:……. (고개 끄덕이는)
준하:……. 갈비는요?
신영:……. 좋아해요.
준하: 쌀도 좋아하죠? 쌀…….
보는 신영.
102. 인사동, 작은 주점, 저녁
낮은 천장아래 오밀조밀 흩어진 탁자들.
탁자마다 그득그득 사람들이 들어 차 있다.
한쪽의 신영, 의자가 기우뚱거려 다소 불편한 모습.
부옇게 된 안경을 벗어 닦다가 그런 신영을 보고,
준하: (혼잣말 비슷하게) 연기가 왜 다 이리로만 오지…….
신영:…….
준하: 자리 좀 바꿔요.
신영: (보는)
차려진 고갈비와 꼭지 떨어진 술주전자.
주전자를 드는 준하.
보면, 어느새 바꿔 앉은 둘.
신영의 잔에 술을 반만 채우는 준하.
자신의 잔을 채우는데 의자가 기우뚱한다.
준하: 이래 보여도 여기 되게 유명한 집이에요.
신영: 자주 오나 봐요.
준하: 물론……. 첨이죠.(웃는)
신영: (싱거워서 같이 웃는)
준하: 근데 다시 오게 될 거 같은데요.
신영:…….
준하: (능청스럽게) 이신영씨가 마음에 들어 하는 거 같아서요.
신영: (어색하면서……. 좋은 면서……. 그런 웃음)
준하: 사람 맘이 참 이상해요. 일부러 이런 구질한데로 뭘 먹으러 모여든다는 게. (하며 이면수를 떼어 입으로 던져 넣는) 먹어봐요.
신영: (먹다가 천진한 얼굴이 되며) 우리 집이 그랬거든요. 어릴 때…….
준하: 어릴 때면……. 춘천집이요?
신영: (웃으며 고개 젓는) 더 어릴 때요. 어딘지도 잘 기억 안 나는데……. 엄마아빠랑 살던 우리 집 지금 생각해보면……. 이랬던 거 같아요.
준하: (의자를 양쪽으로 절룩이며) 여기요?
신영: 단칸방이었는데……. 쓰레기통 옆에 밥통이 있었고요. 밥통 옆에 걸레 놓고, 그 옆에……. 요강 있고, 요강 옆에……. 내 책상이 있었어요.
준하: (웃으며) 요강 옆에서 숙제 베끼고 그랬겠네요.
신영: (끄덕이고) 그런데도……. 학교만 끝나면 친구들하고 놀지도 않고 숨이 머리끝까지 차게 뛰어갔어요. 집으로……. 책가방만 던져놓고 또 금방 나올 거면서…….
준하: (웃으며 보는)
신영: 마지막 법정에서……. 우리 집 생각이 났어요. ‘만약에……. 여기서 나가게 되면……. 우리 집으로 뛰어갈 수 있으면 좋겠다…….’
준하: (보는)
신영: (혼자 피식 웃는) 아마……. 가방만 던져놓고 또 금방 나왔겠죠?
준하: (씁쓸하게……. 같이 웃는)
와글와글한 개미집안에 마주앉은 두 사람.
103. 달리는 차안. 밤
말없이 앉아있는 준하와 신영.
조수석, 창밖을 보고 있는 얼굴이 어두워진 신영.
준하, CD를 바꿔 넣는다.
104. 신영의아파트입구. 준하의 차. 밤
아파트 입구에 도착하는 차.
잠시……. 그대로 앉은 두 사람.
준하: (어색한지) 다 온 거죠?
짧게 목례하고 내리는 신영.
준하: 다시 봐요.
신영: (보는) 항상 그렇게 말하는 거 알아요? ‘다시 봐요’라고.
준하: 내가 그런가?
신영:……. 조심해서 가세요. (문 닫으려는데)
준하: 신영 씨.
신영: (멈추는)
준하:……. 들어가요.
잠시 보다가, 문을 닫고 아파트로 들어가는 신영.
준하, 신영이 들어가고 나면 한숨을 폭 쉰다.
105. 신영의 아파트. 복도. 밤
문 앞에 서서 들어가지 못하고 울 것 같은 얼굴로 서 있는 신영.
106. 아파트 입구. 준하의 차. 밤
차에 기대 담배를 피우는 준하,
아파트를 올려다보고는 담배를 비벼 끄고 심호흡을 크게 한번 한다.
차에 오르려는 준하의 시선에 보이는 신영, 일정한 속도로 준하에게 걸어오는.
신영: (글썽이는) 나……. 이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신영을 보는 준하.
시선 피하지 않고 준하를 보는 신영.
신영:……. 돌아가고 싶지 않아요.
준하……. 신영의 손목을 잡아 차에 태운다.
107. 준하의 차
도시의 밤거리를 달리는 차.
경춘가도를 가로지르는 청평대교를 달리는 차.
터널을 빠져 나와 달리는 차.
떠오르는 해를 뒤로하고 해안도로를 질주한다.
서울에서 멀어질수록 편안해 지는 신영의 표정.
낙엽이 뒹구는 곧게 뻗은 플라타너스 길.
끝없이 뻗은 길을 시원하게 달리는 준하의 차.
108. 작은 읍. 아침
안에 철길이 놓인 작은 읍내.
적당한 곳에 차를 세우는 준하,
핸드폰이 울리자 수화기의 배터리를 빼 뒷좌석에 던져 놓는다.
준하: (환하게) 뭐부터 할까요? 다른 사람들은 데이트 할 때 뭐 하지?
보는 신영.
109. 동시상영관. 낮
철지난 코미디 두 편이 나란히 걸린 상영관 간판.
매표구에 서는 준하.
준하: 두 장 주세요. 앞자리 말고 가운데로 주세요.
매표원: (심드렁하게) 여긴 그런 거 없어요. 먼저 궁둥이 디미는 사람이 임자지.
머쓱하게 돌아보는 준하.
웃는 신영.
110. 동시상영관안
드문드문 사람이 앉은 상영관, 가운데 나란히 앉은 준하와 신영.
영화에 빠져서 제법 큰 소리로 웃는 신영.
오징어를 씹다가 웃음소리에 신영을 보는 준하. 관계없이 또 한 번 웃는 신영.
다른 영화가 상영 중인 스크린.
신영에게 기댔다가는 다시 제자리로 가고, 졸고 있는 준하.
신영, 망설이다 준하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다.
스크린으로 시선 돌렸다가, 준하의 머리를 좀 더 편하게 놓아주고, 가만히……. 얼굴을 들여다보는 신영.
스크린 색깔에 비춰지는 준하의 잠든 모습.
111. 길, 낮
햇볕이 쨍쨍한 은행나무 길을 걸어가는 준하와 신영.
한 무리의 아이들이 하드 포장을 벗기며 올라오는.
아이들을 보는 신영……. 신영을 보는,
준하: 저거 먹고 싶어요?
신영: (웃는) 아니에요.
그대로 아이들에게 가는 준하.
조금 떨어진 곳에서 웃으며 그 모습을 보는 신영.
준하, 아이들과 몇 마디 나누고는 손에 있던 하드를 받아 들고 온다.
다시 길 아래로 뛰어 내려가는 아이들.
신영, 그 모습을 의아하게 보는.
히죽 웃으며 다가오는 준하.
준하: (한 개를 건네며) 받아요.
신영: (받아는 드는) 애들이 그냥 준 거에요?
준하: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요.
112. 언덕 위 초등학교. 낮
여러 명의 조무래기 아이들과 농구하는 준하.
한쪽에서 구경하는 신영.
준하, 구경하는 신영을 본다.
어느새 운동화로 바꿔 신고 아이들과 뛰어 다니는 신영, 한 아이의 패스를 받아서 슛한 게 정확하게 골인된다.
웃으며 좋아하는 신영.
준하, 아이들 사이를 뚫고 레이업슛을 시도하면 노골 된다.
농구하며 즐거운 한때.
봉지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아이들에게 나눠주고 마지막으로 농구공을 던져 주는 준하.
준하: 하드 값 엄청 비싸죠?
서로 보며 웃는 신영과 준하.
운동장 벤치에 아이스콘을 들고 앉은 두 사람.
준하: 친구 놈이 자기 하드를 맡겨 놓고 화장실엘 갔어요.
뜨거운 운동장 한가운데였는데 그게 그렇게 먹고 싶은 거예요.
옛날 애들은 (배고픈 얼굴로) 한입만 주라~ 해도 안 주잖아요.
하드는 녹아서 줄줄 흘러내리지……. 손에 흘러내린 걸 핥아 먹다가
그만 하드 하나를 다 먹어 버렸어요. 정말로 흘러내린 것만 먹었거든요.
친구 놈이 나와서는 막대기만 들고 있는 걸 보더니 막 우는 거예요.
내가 다 먹어치웠다고요.
신영: (웃는)
준하: 어쨌든 그날 밤에 엄마한테 죽도록 맞고 억울해서 밤새 울었어요. 그때 다짐했죠. 아, 나는 커서 꼭 변호사가 돼야지. 그래서 나같이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줘야지. 그래서 변호사가 됐죠.
문득 신영을 돌아보는 준하.
웃으며 아이스콘을 먹는 신영.
준하: 신영 씨는 뭐 되고 싶은 거 없었어요?
신영: 그림 잘 그리는 농부가 되고 싶었어요.
(준하 보며) 농부의 아내나…….
준하: (보다가) 잘 어울렸을 것 같아요. (부러 밝게) 머리에 수건 같은 거 쓰고 애들한테 꽥꽥 소리 지르면서 미술 숙제 같은 거 대신 해주는 아줌마…….
웃는 신영.
따라 웃는 준하.
웃는데……. 웃는 눈 위로 눈물이 맺히는 신영.
웃으며 보다가 신영의 눈물을 보는 준하.
신영: 아침에 일어나서 밖에 나오고 또 여기……. 내가 살아있다는 거……. 마음속에 아무 걱정 없이……. 내가 웃고 있다는 거……. 불안할 정도로……. 편해요. 이게 나라는 걸 믿을 수가 없어요. 오늘 하루가 모두……. 기적 같아요.
신영을 보는 준하
두 사람이 앉아있는 벤치로 바람에 떨어지는 은행잎들.
하늘을 올려다보는 신영.
운동장 가득 노란 은행잎이 눈처럼 날리고 있다.
그 가운데 벤치에 앉아 있는 두 사람.
113. 국도. 준하의 차. 밤
조수석에 잠들어 있는 신영.
준하, CD를 끄고 속도를 줄인다.
차가 흔들릴 때마다 몸을 뒤척이는 신영.
차 밖을 살피는 준하.
114. 다락방. 밤
작지만 넓은 창, 바닥엔 카펫이 곱게 깔려 있는 작은 다락방.
삐꺽 이는 문을 열고 올라오는 준하와 신영.
국도를 달리는 자동차 불빛이 방을 한 번 훑고 지나간다.
준하: 불편하지 않겠어요?
끄덕이는 신영.
나가려다 돌아와 창을 열어주는 준하.
준하: 밖에 있을게요. 쉬어요.
나가는 준하를 보는 신영,
가만히 바닥에 앉아 카펫을 손으로 쓸어본다.
115. 다락방입구. 밤
문 앞에 서 있는 준하.
잠시 문고리를 보며 망설이다가 픽 웃고는 계단을 내려간다.
삐꺽 이는 나무소리. 서는 준하.
116. 다락방. 밤
소리에 돌아보는 신영.
117. 다락방입구. 밤
준하, 다시 살살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열리는 문.
준하, 돌아보지 못하고 선다.
마저 내려가려고 발을 떼는 준하.
신영: 여기……. 같이 있어요.
돌아보는 준하.
118. 다락방. 밤
한 보쯤 떨어진 위치에 누운 신영과 준하.
잠들어 있는 신영.
준하는 신영을 보고 있다.
국도로 차가 지나가면서 헤드라이트가 두 사람을 훑는다.
어두워지는 방.
다시 라이트가 지나가는데 이번엔 신영이 준하를 보고 있다.
가만히 팔을 뻗어 신영을 당기는 준하.
닿을 듯 가까이 누운 두 사람.
키스하기 시작하는 두 사람.
라이트가 지나가는 방에 두 사람의 정사.
119. 검찰청. 새벽
시보와 함께 빠르게 걷는 박검.
시보: 사건 당일 새벽에 이신영이 짐가방을 들고 나가는 걸 봤답니다.
박검: 누군데?
시보: 아파트 상가 편의점에서 배달하는 아인데 지금 와 있습니다.
문을 여는 시보.
19살쯤 보이는 소년이 앉아 있다가 돌아본다.
눈이 마주치는 박검.
(시간경과)
박검: 주소지 중심으로 짐 가방 신고된 거 있나 수배해. 도주 위험 있으니까 내일부터 감시 붙이고. 확실한 증거 잡을 때까지 새어나가지 않도록 조심해.
시보: 알겠습니다.
뭔가 시작되어 간다고 생각하는 박검.
120. 준하의 원룸. 아침
현관에 쓰러져있는 우산꽂이.
준하, 들고 들어온 운동화를 현관에 던져놓고 서둘러 물건들을 치우기 시작한다.
침대 위에 있는 빨래와 쓰레기들을 냉장고에 던져 넣는 준하.
방을 휘 둘러보고 바닥에 책들을 발로 차서 침대 밑에 넣으며,
준하: 들어와요.
들어오는 신영.
분주한 동작으로 웃옷을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푸는 준하.
준하: 고개 좀 돌려줄래요?
고개를 돌리는 신영.
셔츠를 벗어 옷장에 넣고 새 셔츠로 갈아입는 준하.
준하: 됐어요.
웃옷을 입고 침대 위에 널린 서류들을 서둘러 챙기는 준하.
물끄러미 보는 신영.
준하: (보며) 미안해요. 회의가 있어서……. 늦었네. (벌써 현관 앞에 가서는 열쇠를 신발장 위에 놓으며) 먹을 만 한 건 없을 거예요. 앞에 슈퍼 있으니까 우선은 대충 먹고 있어요. 장 봐 가지고 올게요. 저녁에.
나갔다 다시 들어와 우산을 집어 들고 웃으며 나가는 준하.
작게 한숨을 내쉬는 신영.
121. 비 오는 도로. 아침
빗길에 멀리 언덕길로부터 보이는 꽉 막힌 차량행렬.
신경질적으로 울려대는 클락션들.
좀처럼 움직이지 않는 차안의 준하, 빙긋이 웃는다.
122. 로펌. 준하의 방. 아침
웃옷을 벗고 자리에 앉는 준하.
우편물을 들고 따라 들어오는 사무장이 준하를 살핀다.
사무장: 오늘 저녁 개업식에 가실 거죠?
준하: 아……. 깜박 잊고 저녁에 약속을 했는데……. 어쩌죠? 선물은 차에 있거든요.
사무장: (살피다가) 뭐 좋은 일 있으세요?
준하: 무슨 좋은 일이요?
여전히 실실 웃는 준하.
갸우뚱하며 우편물을 놓고 나가려다,
사무장: 참, 이신영이 어디 있는지 모르시죠?
준하: (웃음을 멈춘다.)…….왜요?
사무장: 검찰에서 상고가 들어갔다는데 거주지 확인이 안돼서 연락이 왔네요. 좀 전에.
준하: (표정 어두워지는) 상고 이유가 뭔데요?
사무장: 누가 봐도 뻔 한 재판인데 물먹었으니 열 받았겠죠. 아님 확실한 증거라도 잡았든지……. 뭐 둘 다 아니겠어요? (다른 톤으로) 이번엔 누구한테 떨어질지 골치께나 아프겠네.
준하: 진짜 상고 이유가 뭔지 좀 알아봐 주시겠어요.
사무장: 이 걸 또 하시게요?
다시 옷을 입고 나가는 준하.
사무장: 오자마자 어딜 가요. 회의 안 들어가요?
벌써 나가버린 준하.
사무장, 짧은 한숨을 뱉으며 나간 문을 본다.
123. 고속터미널. 유실물센터. 아침
문을 열고 들어오는 박검과 시보.
경찰들, 경례를 하며 비켜선다.
책상 위에 놓인 커다란 하드케이스를 보는 박검.
124. 준하원룸. 아침
침대에 앉아있는 신영, 방안을 둘러본다.
침구를 반듯하게 펴는 신영.
옷장을 열면, 벗어둔 셔츠가 옷장 아래 구겨져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릇이 수북한 씽크대를 지나
스탠드 아래 놓인 자신의 사진을 발견한다.
침대 끝에 앉아 사진을 보는 신영.
뭔가 결심한 듯 그대로 일어서 현관으로 나간다.
신영, 나가다가 현관 구석에 놓인 준하의 운동화 두 켤레를 본다.
125. 준하원룸. 낮
발코니에 하얗게 빨아서 세워둔 물이 똑똑 떨어지는 운동화를 보는 준하.
울리는 핸드폰 멜로디.
준하: (급하게 받는) 여보세요? (다소 실망하는) 사무장님……. 네……. 알아 보셨어요? (얼굴 어두워지는)
126. 신영아파트. 복도. 저녁
<401>호 벨을 누르는 준하.
안에서 반응 없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는.
준하: 문 열어요. 안에 있는 거 알아요. 열어요. 애기 좀 하자고요. 우리.
두드리는 준하.
127. 신영아파트, 거실, 저녁
현관을 등진 거실 벽에 쪼그리고 기대앉은 신영.
문을 두드리는 소리.
준하E: 문 열어요. 신영 씨!
128. 아파트단지입구, 저녁
단지 구석에 세워진 검은 승용차.
문을 두드리다 복도를 돌아 나오는 준하를 보고 있다.
129. 신영아파트. 거실, 저녁
베란다에서 단지 밖으로 준하의 차가 빠져나가는 모습을 보는 신영.
130. 판사 실. 낮
나이 지긋한 서너 명의 판사들에게 서류를 놓고 무언가 얘기를 하고 있는 박검.
131. 대법원. 법정. 낮
경위 (E): 일어서주십시요.
들어와 판사석에 앉는 4명의 판사들.
경위 (E): 앉아주십시요.
판결을 시작하는 판사1.
판사1: 도1632 폭행치사 피고인 이순일 상고인 이순일 주문 상고를 기각한다. 도3451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위반 피고인 박철규 상고인 박철규 주문 상고를 기각한다. 도2863 강간…….
방청객들 속의 준하. 그 조금 뒤로 보이는 박검.
판결을 마치는 판사1, 판결을 시작하는 판사2.
판사2: 도1238 살인 피고인 이 신영 상고인 검사 주문 원심판결을 파기한다. 본 건을 서울 고등법원에 환송한다. 도2359 강간치상…….
132. 대법원. 복도. 낮
법정 문을 열고 나오는 어두운 준하.
시보와 얘기를 나누며 복도를 빠져나가는 박검.
눈이 마주치는 두 사람.
준하에게 와 악수를 청하는 박검.
박검: 오랜만입니다.
133. 대법원. 로비. 낮
자판기에서 종이컵을 꺼내 준하에게 주는 박검.
박검: 빤한 사건에 지고 출세에 지장 있을까봐 그랬다고 생각들 하기 쉽죠. 우리 검사들 솔직히 그렇죠. 무능하단 소리 듣기 싫으니까. 그런데 그때보다 더 사건에 달겨들 때가 있어요. 그 사람이 범인일 때, 그 증거가 하나씩 드러나기 시작할 때. 그땐 누구보다 무식해지는 게 우리죠. 서변호사님은 아직도 이신영이 무죄라고 확신하십니까?
준하:…….
박검: 저는 유죄란 걸 확신합니다.
서로 보는 두 사람.
134. 로펌. 준하방. 밤
법전을 뒤지고 있는 준하.
소파에 앉아 테이블에 가득 쌓인 서류들을 하나씩 뒤적이는 사무장.
사무장: 여기도 대법원 판결 뒤집었다는 판례는 없어요.
준하:…….
사무장: 무죄추정원리라는 게 유죄든 무죄든 확실한 증거가 없을 때 가능한 거니까 어느 쪽이든 확실한 증거가 튀어나오게 되면 언제든 뒤집히게 돼 있는 거죠 원래. 그래도 그렇지 사람 목숨 놓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살렸다 다시 죽으랬다. (준하 표정 살피는) 그래도 아직 명확한 살해 동기가 없으니까 길이 있을 겁니다.
심각해지는 준하.
135. 법정. 낮
증인석의 편의점 소년.
(인서트)
배달봉지를 들고 아파트 입구로 들어서는 소년.
소년 (E): 새벽 3시 좀 못 됐을 거예요.
비어 있는 경비실을 지나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는 소년,
비상구를 통해 급히 내려오는 신영을 본다.
소년 (E:) 가방을 들고 있었어요. 여행갈 때 쓰는 큰 가방이요.
계단을 내려와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가는 신영.
소년, 고장인가 싶어 층수 표시기를 올려다보는데, 신호음과 함께 문이 열린다.
열린 문과 신영이 간 자리를 번갈아 보다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소년.
박검: 그때 본 사람이 이 법정 안에 있죠?
소년: (신영을 본다.) 네.
박검: 이상입니다.
판사: 반대 심문하세요.
준하: 증인이 피고인과 스친 시간이 얼마나 됩니까?
소년: 잠깐이었는데요.
준하: 잠깐이요? 잠깐이 어느 정도죠? 1분입니까? 30초? 10초?
소년:…….한 10초 정도요.
준하: 사건이 일어난 건 지난 2월 5일입니다.
8개월 전에, 그것도 단 10초 동안 본 사람을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기억할 수 있죠?
소년: (머뭇거린다.)…….
박검: 이의 있습니다.
준하: 이상입니다.
박검: 피고인은 사건 직후 범행을 은폐하기 위해 혈흔이 묻은 옷을 가방에 넣어 유동인구가 많은 터미널에 유기 하였고, 다시 아파트에 잠입해 알리바이를 조작했습니다.
준하: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려고 했던 피고인의 행동을 통해 피고인의 결혼생활을 돌아보아야만 합니다. 설령 피고인이 살인이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선택하였다 해도 그 살인의 원인이 어디인지를 묻고 싶습니다. 지금 피고인에게 필요한 것은 그녀가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는 오해나 그 오해에 따른 단죄가 아니라 따뜻한 이해와 연민입니다.
박검: 현재 피고인의 재산은 성종훈의 죽음으로 자동 상속된 아파트가 전부입니다.
모를 얼굴로 박검을 보는 준하.
박검: 하지만 불과 6월 후면 피고인은 10억이란 재산을 소유할 수 있게 됩니다. 방금 제출한 보상금 약관에 의하면 지난 가을 미국에서 사고로 돌아가신 성종훈의 양친에 대한 모든 보상금은 성종훈의 것이었습니다.
신영, 놀란 얼굴로 박검을 본다.
박검: 그러나 성종훈은 피고인의 치밀하게 계획된 범행에 잔인하게 희생을 당했습니다. 모든 보상금이 피고인의 차지가 된 것입니다.
피고인, 이 사실을 몰랐다고는 하지 않겠죠?
서류 한부를 서기에게 건네며,
박검: 보상금에 대한 약정서를 증거물로 채택해 줄 것을 요청합니다.
아니라는 듯 준하를 보는 신영.
준하, 빠져 나갈 곳이 없이 몰렸다는 것을 느낀다.
136. 로펌. 저녁
지친 채로 들어오는 준하, 대형 TV앞에 모여 있는 직원들.
태진 최 회장의 무죄와 그 일로 농성하는 시위대의 모습이 보이는 화면.
모인 사람들 속에서 웃으며 축하 받고 답하는 황변호.
물끄러미 그 광경을 보는 준하.
137. 바, 밤
바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는 준하.
벌써 맥주를 몇 병째 비우고 있다.
138. 택시, 밤
뒷좌석에 구겨져 있는 준하.
백미러를 흘금 이는 기사.
기사: 술이 과하셨나 봐요.
준하: (히죽 웃으며) 네. 제가 원래 그런 놈이거든요.
기사: (웃는) 재밌는 분이시네.
한강대교를 지나는 택시.
멀리 철교위로 전동차가 지나가는 모습이 보이면 가만히 그 모습을 보는 준하.
준하: (표정 어두워지는) 진짜 재밌는 얘기 하나 해 드릴까요?
기사: 좋죠.
준하: 들은 얘긴데요. 어떤 남자가 어떤 여자를 자꾸 생각하게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 여자예요.
기사: (씩 웃고) 대충 알겠네요.
준하:…….
기사: 유부녀죠?
준하: 아니요 그런 게 아니라……. 뭐 비슷할 수도 있겠네요. 생각해 보니까.
기사: 비슷한 게 아니고 유부녀예요. 유부녀.
준하: 어쨌든 같이 있고 싶고 자고 싶고 뭐 그런 마음은 없는데 그냥……. 그 여자가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니……. 잘 살게 됐으면 좋겠어요.
기사: (백미러로 보며) 손님 얘기구만요…….
준하: (보면)
기사: 그렇게 해주세요. 잘 살게. 그래야 나중에 서로 후회를 안 한 법이거든요. (다른 톤으로) 여기서 좌회전 맞죠?
창밖으로 스치는 거리를 보는 준하.
그 안의 자신을 보는.
139. 농구구조물. 밤
그물을 출렁이며 골인되는 공.
땀에 흠뻑 젖은 준하.
멀리 보이는 농구하는 준하.
사무장E: 미쳤어요?
140. 로펌. 준하의 방. 아침
캐비닛을 열어 서류들을 각종 재판 기록 봉투들을 뒤진다.
사무장: 여권 위조가 애들 판박이 베끼는 건 줄 아십니까?
봉투를 꺼내는 준하, 서류들을 헤쳐 종이 한 장을 찾아낸다.
뺏어 드는 사무장.
사무장: 안돼요. 변호사 생활 땡 치기로 작정했습니까?
준하: 도와주세요. 사무장님은 도와줄 수 있잖아요. 안 도와 주시면 혼자서라도 해요.
서로 보는 둘.
사무장: 때려눕히고 뺏어가요.
보다가, 답답한 듯 한숨을 깊게 쉬는 준하, 그냥 나가버린다.
깊게 쉬는 사무장.
141. 거래, 저녁
후미진 건물 뒷골목으로 들어와 차를 세우는 준하.
초조한 얼굴로 시간을 확인하는 준하.
골목으로 들어오는 사내 몇 명. 준하, 차에서 내린다.
사내: 전화 한 사람이에요?
준하: 네.
사내: 어디다 쓰실려구?
준하: 그냥 좀…….
빠르게 준하의 팔을 꺾으며 지갑을 뒤지는 사내들.
사내2: 변호산데. 이거 짭새 아냐?
사내: 뭐?
준하: 잠깐만요. 그게 아니고…….
사내: 이 새끼가 어디서 되지도 않는 그물을 쳐.
준하를 가격하는.
준하: 그런 게 아니에요. 정말 필요해서.
다시 맞고 쓰러지는 준하.
준하: 아냐! 아니라고! 아니랬잖아!
피하고 치고받고 뒤엉키는 싸움.
142. 경찰서. 유치장. 새벽
몇몇 잡범들 속에 상처 난 얼굴로 앉아 있는 준하.
사내2도 같이 앉아 있다.
열리는 유치장 문.
돌아보면, 사무장.
143. 경찰서 입구. 새벽
사무장 걸어 나오고, 따라 나오는 준하와 사내2.
한쪽으로 가 담배를 피워 무는 준하.
사무장: (사내2에게) 어디 가서 나발 불고 다니면 너도 그날이 입학식이니까 조심해. 어여 가!
쭈삣쭈삣 사라지는 사내2.
144. 포장마차. 새벽
탁자에 놓이는 두부 한 모.
사무장: 사무장 생활 20년에 여자증인한테 생리대 사다 바친 적은 있어도 모시는 변호사님한테 두부진상은 첨이네요.
씁쓸하게 웃는 준하의 빈 잔을 채워주고 자신도 마시는 사무장.
한동안 말없이 술만 마시는 두 사람.
사무장, 문득 품에서 여권을 꺼내 준하 앞으로 밀어놓는다.
보는 준하.
사무장: 금요일 새벽 4 시예요. 배에 타면 안내해 주는 사람이 있을 거예요. 여자 한 명 부탁해 놨으니까 잘 일러 주세요.
준하:…….
사무장: 감시 따돌리는 거 까지만 도와드리고 그 담엔 혼자서 하셔야 돼요. 잘 할 수 있죠? 먼저 일어납니다.
홀짝 마시고 일어서 나가는 사무장.
놓여진 여권을 보는 준하.
사무장: (휘장을 빠끔히 열고는) 잊을 뻔 했네. 걸려도 내 이름은 불면 안돼요. (피식 웃고) 처자식이 있는 몸이잖아요.
사무장을 보는 준하.
준하 잠시 보다가 나가는 사무장.
145. 신영아파트. 저녁
열리는 문.
경비가 문 앞에 서있다.
현관으로 나오는 신영.
그때, 문 뒤에서 준하가 나와 신영의 손목을 챈다.
신영: 왜 이래요? 무슨 일이에요?
146. 아파트. 단지입구. 저녁
경비실을 지나 차로 가는 준하와 신영.
차된 검은 승용차의 시야로 신영을 급히 차에 태우는 준하가 보인다.
준하의 차 출발하면, 시동을 거는 검은 승용차.
147. 준하의 차. 저녁
달리는 준하의 차안.
뒤쪽을 의식하는 신영과 아랑곳없는 준하.
준하: 벨트 매요.
갑자기 속도를 올리는 준하.
148. 두 대의 차. 저녁
앞선 차들을 제치며 간선도로를 빠르게 달리는 준하의 차.
경광등과 사이렌을 울리며 따라붙는 검은 승용차.
굳은 얼굴로 가속페달을 밟는 준하.
신영, 준하를 보다가 포기한다.
속도를 내는 준하의 차.
검은 승용차가 차선을 바꿔 준하의 차 옆으로 다가와 서려는데 막아서는 오토바이들.
헬멧을 쓴 오토바이들은 폭주들이다.
속도를 늦추고 유리창을 내리는 형사.
형사: 뭐야? 너희들.
폭주족: 아저씨. 여기 길을 잘 몰라서 그러는데요. 여기서 여의도 갈려면 어떻게 가야돼요?
형사: 모르니까 다른 데 가서 물어봐.
폭주족: 아저씨. 그럼 을지로는요?
형사: 몰라! 저리 안 비켜?
폭주족: 거기 아줌마 같이 생긴 아저씨한테도 한 번 물어봐 주세요.
형사: 이런 미친놈들……. 안 꺼져?
그 사이 무섭게 멀어지는 준하의 차.
폭주족: (멀어진 차를 확인하고) 아저씨, 나 보고 지금 미친놈이라고 그랬어요? (씩 웃으며) 어떻게 알았지?
하고는 다른 곳으로 바람같이 가버리는 폭주들.
검은 차, 쫓기를 포기하고 무전기를 꺼낸다.
준하의 차 백미러로 보이는 멀어진 검은 차.
149. 국도. 밤
빠른 속도로 비껴가는 도로 커브 표시판들.
헤드라이트 불빛과 함께 반대편 차선에서 경적을 울리며 스치는 컨테이너 트럭.
150. 국도변. 준하의 차. 밤
굳은 얼굴로 운전하는 준하,
신영: 왜 이래요? 도망치는 사람처럼.
준하: 도망치는 거예요. 지금.
품에서 두툼한 봉투 하나를 꺼내 신영에게 준다.
신영이 그대로 있자 신영의 무릎 위에 올려놓는 준하.
무릎 위의 봉투를 열어보는 신영.
상당액의 돈과 위조된 여권.
놀라서 준하 보는 신영.
준하: 신영씨도 알겠지만 난 법 말고 딴 건 잘하는 것도 없고 알지도 못해요. 그런데 내 능력으로 신영 씨를 살릴 수 있는 건 이 방법밖엔 없어요. 지금쯤 이차 수배 됐을 테니까 여기 조금 있다가 택시로 혼자 움직여요. 따로 움직이면 괜찮을 거예요.
신영:……. 세워요.
준하: (대답 없이 운전만)
신영: 세워요! 미쳤어요?
준하의 차 곁으로 굉음을 내며 지나가는 트럭.
위험한 상황이 연출되고……. 상황이 지나 조용해지는 차 안.
준하: 그런 거 같아요.
신영:……. 내가 정말 죽인 거면 어쩌려고 이래요.
준하: (보다가 담담하게) 당신이 죽였든 아니든 상관없어요. 이제. 대답이 됐어요?
신영: 내가 죽였어요.
준하:…….
신영: 내가 죽였다고요!
준하: (버럭) 살고 싶어서 죽였을 거 죽였을 거 아닙니까!
신영:…….
준하: 그냥……. 어디든 가서……. 살아만 있어요. 그럼……. 만족할게요.
신영: 정말…….내가 도망치길 바라요?
준하:…….그렇게 될 거예요. 내 부탁이니까…….
한동안 말없이 앞만 보고 가는 두 사람.
준하의 차 곁으로 위태롭게 지나가는 대형 버스.
신영: (그대로) 떠나기 전까지……. 같이 있어요.
준하:……. (보는)
신영: (준하 보지 않은 그대로) 부탁이에요…….
앞만 보며 운전하는 준하.
역시 앞만 보고 있는 신영.
반대 차선에서 라이트를 번득이며 지나가는 차들.
151. 다락방. 밤
조금 떨어져 천장을 향해 누운 준하
창문 쪽에 기대앉은 신영.
준하: 종이배요. 띄워 본적 있어요?
신영:…….
준하: 그게 띄워 놓으면 꼭 물살 험한 곳으로만 간데요. 이렇게 누워있는데 왜 그 생각이 나죠?
신영:…….
일어나 앉는 준하.
준하: 이런 말……. 오해하지 말고 들었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갑자기 궁금해져서요.……. 왜……. 그 사람하고 그 집에 계속 살았는지…….
신영: (준하 보는)
준하: (그대로) 정말……. 도망칠 수도 없을 만큼……. 무서웠어요?
신영:……. 갈 데가……. 없었어요.
준하: (보는)
신영: 아니……. 그랬던 거 같아요.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다시 창으로)
준하:…….
신영: 떠나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다 그럴 수 있는 건 아닌 거 같아요. 돌아갈 곳이 자기밖에 없는 사람은 떠난다는 것도 사치죠.
준하: (보는)
신영: (잠시……. 분위기 바꾸는)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대답해 줄래요?
준하: (희미하게 웃으며) 들어보고요.
신영: 모든 의뢰인한테 다 이렇게 잘해요?
준하: (피식 웃는) 그렇다고 해두죠. 그냥…….
신영: 마지막으로……. 할 말 없어요?
준하:……. 마지막이 아니니까……. 할 말 없어요. 신영 씨는요…….
그때 다시 두 사람을 스치는 불빛.
준하를 보고 있는 신영.
신영:……. 죽은 그 사람……. 전에 자살 기도한 적이 있었어요. 세 번.
준하: (보는)
신영: 한 번은 수련의 시절이었고. 한번은 자기 때문에 첫 번째 아이가 유산 됐을 때였죠.
마지막은……. 죽던 그 날이었어요.
(인서트)
피범벅이 된 손목을 감싸 쥐고 있는 종훈.
견한 신영, 종훈에게로 가 서로 부둥켜안고 운다.
신영E: 다시 아이 가진 거 알았을 때 이번이 어쩌면 기횔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 사람한테서 벗어 날 수 있는 기회요.
(인서트)
거울 장에 메스를 넣는 손.
거울 장이 닫히고 보면……. 신영이다.
신영E: 그래서 중절 수술 받고 그 사람한테 얘기했죠. 모든 게 의도대로 돼주길 바라면서…….
(인서트)
마시던 와인 잔을 집어 던지는 종훈.
신영의 머리채를 잡아 욕실로 끌어넣는다.
신영, 종훈이 흥분한 사이를 틈타 종훈을 욕실에 가둔다.
(인서트)
열리는 욕실 문.
열려있는 거울 장.
피범벅이 된 채 욕실에 쓰러져 있는 종훈 곁으로 던져져있는 메스.
신영E: 그리곤 생각보다 쉽게 그대로 이루어 졌죠.
(인서트)
피범벅이 된 채 욕실에 쓰러져 있는 성종훈.
신영, 보다가 밖으로 나오려는데
종훈, 벌떡 일어서 머리채를 잡아 욕조 바닥에 쳐 박는다.
종훈: 넌…….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가…….
울면서 뿌리치는 신영.
신영E: 또 다른 그 사람을 만드는 일보다 또 다른 나를 만드는 일이 더 두려웠어요.
(인서트)
짐가방을 들고 터미널 창구에 서있는 신영.
재촉하는 창구 직원.
신영을 밀어내고 표를 사는 다른 손님.
멍하니 시간표만 올려다보고 있는 신영.
신영E: 그때 알았죠. 그게 무슨 말인지……. 정말 한 발짝도 갈 곳이 없었어요.
(인서트)
아파트 현관문 앞에 도로 서서 울먹이고 있는 신영.
신영E: 지독하게 길들여져 있다는 걸 알았어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보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어요. 난 사람이 아니었어요.
지나가는 불빛에 보이는 신영.
신영: 직접 죽인 건 아니지만 정말 그 사람이 죽어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뭔가 말하려다 울고 있는 것을 보고 그만 두는 준하.
신영: 그런데……. 이제……. 나……. 살고 싶어요.
준하:…….
신영: 뻔뻔하게도 살고 싶어요.
준하:…….
신영: (울컥 하는) 처음부터 다시 아주 잘 살고 싶어요.
준하: 그렇게 할 수 있어요.
신영: (눈물이 흐르는) 이제 와서 이런 얘기하는 게 어떻게 보일지 모르지만……. 왠지 얘기해야 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준하:…….
신영: 이젠……. 어떻게 된 다해도 후련해요.
준하: 됐어요. 후련하면 그걸로 됐어요. 더 안 물을게요.
지나가는 불빛.
불빛이 사라질 때까지 서로를 보고 있는 두 사람.
신영, 준하를 향해 가만히 팔을 뻗는다.
잠시 신영의 눈을 보는 준하,
순간적으로 뻗은 팔을 당겨 품에 안는다.
준하 품에서 우는 신영.
초췌한 모습으로 잠든 준하를 본다.
신영, 준하의 얼굴로 내려온 머리칼을 살짝 넘겨주는.
152. 부두가. 새벽
모터소리와 함께 부두를 벗어나는 배.
153. 다락방, 새벽
빈 다락방에 홀로 누워 있는 준하.
154. 로펌. 황변호의 방. 아침
황변호 앞에 사표를 밀어 놓는 준하.
사표를 보고 준하를 올려보는 황변호.
황변호: 뭐야? 갑자기. 사표 쓰는 게 유행이야?
155. 로펌. 준하의 방. 아침
박스에 물건들을 정리하는 준하.
준하를 보는 사무장.
준하, 몇 걸음 움직이다가 그대로 앞으로 쓰러지는.
깜짝 놀라 다가서는 사무장.
체온계를 꺼내 보는 사무장.
소파에 누워있는 준하, 부스스 눈을 뜨는.
사무장: 39도에요.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실래요?
준하: (되려 일어서려는)
사무장: 누워있어요. 재판 시작하려면 아직 시간 좀 있어요.
몸을 눕히고 천정을 보다가 팔로 얼굴을 가리는.
156. 법정. 낮
개정시간이 안된, 방청객 몇 명만의 법정.
들어오는 준하, 이미 검사석에 앉은 박검과 짧게 목례한다.
정리된, 무표정한 얼굴로 변호인 대기석에 앉는 준하.
준하보다 먼저 와 앉아 있는 변호사1.
경위: 일어서 주십시오.
들어와 앉는 판사들.
변호1: (변호인 석으로 오르며) 2317홉니다.
멈칫하는 준하.
판사: 2317호 불구속 피고인 이 신영.
영문 모르는 준하, 당황스럽게 일어선다.
준하: 재판장님.
그때 문이 열리며 법정으로 들어와 피고인석으로 가는 신영,
준하 쪽은 외면한 채 피고인석에 선다.
판사: (준하 보며) 통고 못 받았나요? 이 건은 피고인으로부터 변호인 교체신청이 있었습니다. 자, 그럼 10월17일 오전법정 개정합니다.
준하, 신영을 보면.
준하의 시선을 외면하는 신영.
판사: 검찰 측 심문사항 있습니까?
박검: 네 (일어선다.) 피고인은 그 동안 모든 재판 과정을 묵비권으로 일관했습니다.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남편을 계획 살인한 사실을 인정합니까?
신영:…….네.
준하: 재판장님!
박검: 죽은 남편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있습니까?
신영:……. 아니요. 없습니다.
준하: 재판장님!
판사: (마이크에서 떨어져) 서변호사, 남은 재판 없으면 나가던지 방청석으로 옮겨요. 검찰 측 계속하세요.
박검: 피고인은 남편 성종훈의 경동맥을 포함한 네 군데를 메스로 찔러 숨지게 한 사실이 있습니까.
신영: 네.
준하: 아닙니다! 사실과 달라요. 이신영씨!
판사: 서변호사! 서변호사는 지금 피고인의 변호인이 아니에요. 한 번 더 재판 중에 끼어들면 퇴장시키겠어요.
준하: 재판장님, 지금 피고인의 진술은 사실과 다릅니다. 사실대로 말해요. 신영 씨.
준하쪽 보지 않고 같은 자세로 있는 신영.
판사석 쪽으로 가서 판사와 귀엣말을 나누는 박검.
판사: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검찰 측 변호인 측 안으로 들어오세요.
피고인도 안으로 들어와요.
신영을 보다가 더는 어쩌지 못하고 눈을 감아버리는 준하.
안으로 들어가는 판사, 박검, 변호인, 신영.
비어있는 판사석.
판사E: 의견 말씀하세요.
(시간 경과)
박검: 치밀한 계획 하에 벌어진 목적이 불순한 살인이고 특히 둘의 관계가 부부인 것을 더 할 때, 일심과 마찬가지로 피고인에게 사형을 구형합니다.
담담히 앉은 신영.
방청석에서 신영을 보는 준하
판사: 변호인. 변론하세요.
변호1: 변론요지서로 대신하겠습니다. 관대한 처분 바랍니다.
판사: 피고인 일어나세요.
일어서는 신영.
판사: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하세요.
신영:…….…….
판사: 없습니까?
신영: (울먹이지만 담담한) 언젠가……. 나를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그런 기회가 온다면, 내 안에 남아있는 모든 기억을 하나도 남김없이 깨끗이 지워버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사람들이……. 행복한 어느 한 부분 때문에 모든 기억을 다 떠안고 살아간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신영을 보지 못하는 준하.
준하를 보는 신영.
신영: 오늘 때문에……. 우리가 지금보다 더 불행해지고, 오랫동안 오늘을 후회하게 되더라도 나도 한 번쯤은……. 누군가를 사랑해 보고 싶었습니다. 나한테 그럴 자격이 있다면……. 오늘이 나한테 주어진 마지막 기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방청석에서 그대로 눈을 감는 준하.
준하를 향해 희미하게 웃어 보이는 신영.
157. 신영아파트. 복도. 밤
문을 두드리는 준하.
준하: 문 열어요! 제발 한 번만이라도 말 좀 들어요. 문 좀 열라고요!……. 인사라도 해야 될 거 아닙니까. (시간 경과)
문에 기대 앉아있는 준하.
여러 가지 감정이 뒤섞인 혼잣말.
준하: 나 따돌리고 혼자 안에 들어가 있으니까 좋아요? 내 말 들어요? 나도 이제 신영 씨 찾아오지 않을 거예요. 이제. 신영씨 원하는 대로 안 만났던 사람처럼 모른 척 살게요. 그러니까……. 마지막까지만 같이 있자고요.……. 거기 있으면 대답이라도 좀 해봐요. 제발
혼자 울지 말고……. 만나서 같이 울어요.
준하가 기댄 자리 건너편에 이미 기대 앉아있는 신영. 입을 틀어막은 채로 소리없이 울고 있다. 마치 서로 등을 기댄 것 같은 모습으로 있는 두 사람.
E: 소란스러운 법정의 소음들.
158. 선고법정
피고인석의 신영.
변호인 대기석에 앉은 준하.
서로 보지 않는 두 사람.
판사: 피고인 이신영의 살인사건을 다음과 같이 판결한다.
주문:
피고인 이 신영. 사형.
고개를 떨어뜨리는 준하.
아무 표정이 없는 신영, 호송경찰에 의해 피고인 대기실로 들어간다.
차마 보지 못하는 준하.
159. 법정과 피고인 대기실
피고인 대기실의 신영.
변호인 대기석의 준하.
다음 피고인이 나오며 열리는 문.
신영, 시선을 돌려 준하를 본다.
상체를 푹 숙인 채 고개를 들지 못하는 준하.
(DIS)
다시 문이 열리고. 같은 자세로 준하를 보는 신영, 눈물이 맺힌다.
고개 숙인 준하, 흔들린다.
닫히는 문.
(DIS)
다시 호송경찰에 의해 법정으로 불려 나가는 피고인.
열리는 문.
문을 가렸던 호송경찰과 피고인이 옆으로 빠지면, 준하가 눈물을 흘리고 있다.
두 사람 사이로 천천히 닫히는 문.
신영 눈물 흘리는 준하를 향해 같이 눈물 흘리며 웃어주는. 준하, 무너질 듯 신영을 보다가 희미하게 미소를 보인다. 울면서 미소를 짓는 두 사람 사이로 닫히는 문. (F. O)
준하e: 가을 끝에 찾아오는 여름같이 뜨거운 계절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다.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누구나 기억하지는 못하는 시간……. 인디안 썸머에 대해서…….
160. 초등학교
은행잎이 눈처럼 떨어지고 있는 벤치.
둘이 앉았던 자리에 혼자 앉은 준하.
준하e: 다만 겨울 앞에서 다시 한 번 뜨거운 여름이 찾아와 주길 소망하는 사람만이 신이 선물한 짧은 기적, 인디언의 태양을 기억한다고…….
내가 그 늦가을의 기적을 기억하는 것처럼.
161. 신영의 사진
환하게 웃고 있는 신영의 교복 입은 사진.
준하: 기억하는 동안……. 사랑은 멈추지 않는다.
THE E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