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2874
9월5일 [연중 제23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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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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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youtu.be/98iW5373_u4
**유튜브 미사**
1. https://youtu.be/Uqp0uYBdt1E
성 이시돌 관광객 미사
주례 : 현요안 요한 신부
찬양 : 박우곤 알렉시우스
윤순 로사리아
2. http://naver.me/GhEOaM0C
**서울주보**
http://pf.kakao.com/_xhGxjBxb/858576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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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한 인간을 변화시키고 구원합니다!>
공평하고 관대하신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고루 다 사랑하시만, 또 다른 한편으로 각 사람에게
개별적으로 접근하십니다. 내게 다가오시는 모습이 얼마나 다정다감하신지, 나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대하시는지, 마치 이 세상에서 나만 사랑하시는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모습은 오늘 복음에 등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통해서 잘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한 사람을 치유하시는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치유하십니다.
이는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환자의 치유에만 전념하겠다는 예수님의 적극적인 의지의 표현입니다. 비록 지나가다 만난 한 사람이지만, 지금은 오직 이 사람과만 개별적으로 만나겠다, 이 사람에게만 정성을 기울이겠다는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환자를 위한 참으로 각별한 배려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일련의 치유과정도 동일한 맥락에서 생각하면 될 것입니다. 말씀 한 마디면 모든 것이 치유되는 능력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몇 가지 단계를 거치십니다. 당신 손가락을 환자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 숨까지 내쉬십니다. 이윽고 “에파타!”하고 외치십니다.
비록 간단한 접촉이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너무나 과분한 은총입니다. 비참한 한 인생길을 불쌍히 여겨주시는 것만도 감사한 일인데, 그 크신 하느님께서 직접 당신 손을 펼치시어 부당한 한 인간의 신체에 접촉하십니다.
어떻게 해서든 우리 가까이 다가오시려는 하느님, 어떻게 해서든 우리와 접촉하시려는 하느님의 애틋한 사랑이 참으로 은혜롭습니다. 결국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이 환자를 치유시킵니다. 결국 하느님의 부드럽고 따뜻한 손길이 한 인간을 변화시킵니다. 결국 하느님의 다정다감한 마음이 우리를 구원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치유과정은 우리가 봉헌하는 매일 미사 때 마다 다시금 반복됩니다. 말씀의 전례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친히 당신 손가락을 우리 귀에 넣으시어, 말씀 안에서 당신을 알아 뵙게 하십니다. 성찬의 전례 가운데 예수님의 몸과 피는 친히 우리의 오장육부 깊숙한 곳까지 찾아오십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는 치유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미사는 기적의 성사입니다. 우리가 매일 거행하는 미사는 사랑의 성사입니다. 이 미사를 통해 우리 역시 치유의 기적을 계속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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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복음묵상 동영상)
https://youtu.be/hvusbYk9SY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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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로 얻는 세 가지: 손가락, 숨, 혀>
우리는 무엇을 얻기 위해 기도할까요? 오늘 복음에서는 기도를 통해 주님께서 주시고자 하시는 세 가지가 나옵니다.
오늘 예수님은 귀먹고 말 더듬는 사람의 귀와 혀를 치유하십니다. 그런데 이 치유 사화는 단순한 육체적 장애의 치유를 넘어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그를 치유하기 위해 하시는 모든 행위가 상징적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그를 ‘군중 밖으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이는 ‘세상 밖으로’와 같은 의미입니다. 세상의 소리가 우리 귀를 먹게 만듭니다. 옛날에 경찰이 허위 진술을 하도록 유도할 때 잠을 며칠 동안 재우지 않아 정신이 몽롱한 상태에서 자신들이 말하는 것을 그대로 진술하도록 했습니다. 그리스도와 머묾은 그런 세상에서의 탈출을 의미합니다. 이를 ‘광야’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광야에서 만날 수 있습니다.
그 다음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십니다. 손가락으로 본인의 귀를 막고 잠시 있어 보십시오. 무슨 소리가 들릴까요?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세상과 단절되고 자신 안으로 들어가는 느낌이 들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남은 바깥세상에서가 아니라 ‘자기 내면’에서 이뤄집니다. 자기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는 것은 바깥세상만이 아니라 ‘자기 생각’입니다. 나와의 대화에서도 귀를 막고 내면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주님은 내 가장 깊은 곳에 계십니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한숨을 내쉬십니다.’ 왜 그를 향해 숨을 내쉬지 않고 하늘을 향해 내쉴까요? 온 공기 안에 당신의 숨이 머물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동양에서는 이를 ‘기’(氣)라 표현하고 호흡을 통해 이 기를 자신 안에 모으는 명상이 발달했습니다. 물론 ‘숨’은 그리스도교에서 ‘성령’에 해당하는 단어와 일치합니다. 세상을 끊고 생각을 끊고 자기 내면 안으로 들어온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말씀하십니다.
귀를 막았을 때 결국 나에게 들리게 되는 것은 ‘본인의 호흡 소리’입니다. 모든 명상에서 호흡을 가장 중요하게 여깁니다. 여러 호흡법이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호흡을 마치 성령을 통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목소리처럼 듣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에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그에게 “에파타!”(열려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제 그 사람은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예수님의 ‘침’은 또한 ‘성령’을 의미합니다. ‘숨’이 성령의 진리 말씀을 나에게 전하는 역할이라면, ‘침’은 그 말씀이 입 밖으로 나오게 만드는 힘입니다. 성령 강림 때 제자들이 불 혀와 같은 형상의 성령을 받고 복음을 전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이렇듯 ‘세상과 자기 자신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도록 귀를 막으심’ - ‘당신의 목소리를 듣게 하심’ - '들은 말씀을 세상에 전하게 하심’. 이렇게 세 단계로 우리를 변화시키십니다.
이 과정을 적용해 볼까요? 한 자매님이 귀를 막고 그리스도의 목소리를 듣고 그 말씀을 전하는 기도의 체험을 말씀하신 것을 옮겨봅니다. “그때 제 나이가 47세이고 3남 2녀 중고등학생의 엄마였습니다. 남편은 대학병원 의사로 근무하다가 막 개업해서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게 되어 집을 이탈리아 가구들로 장식하고 남들에게 자랑하고 싶어 혈안이 되어 살았습니다. 손님들을 초대하여 그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줄도 모르고 교만과 자만심으로 살았습니다.
하느님께서 노하셨는지 병원에 의료 사고가 생겼습니다. 환자가 주사를 맞다 다리 신경이 마비되었습니다. 그 환자는 준재벌에 속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 사람이 자기 다리를 제대로 해 놓지 않으면 병원을 망하게 만들겠다고 협박했습니다.
그때 제가 가장 두려웠던 것은 망하게 되었을 때 친구들에게 창피당하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세례는 받았지만, 하느님을 찾기보단 유명한 점쟁이를 찾아다니고 부적이란 부적은 다 써서 붙였습니다. 심지어 점쟁이 말대로 보따리를 싸서 피신까지 했었습니다.
2~3개월 후에 정신을 차리고 하느님께 매달렸습니다. 성지로 매일 미사를 다니고 심혈을 다해 기도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할 때는 두 시간 넘게 걸렸습니다. ‘하늘의 계신 우리 아버지’ 하면 아버지가 진정 내 아버지로 여겨질 때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하면 아버지의 영광만을 위하는 마음이 들 때까지 다음으로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주님을 만났습니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 이 말씀이었습니다. 이 말씀이 저의 본성을 완전히 바꿔놓았습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된 것 같았습니다.
가장 큰 변화는 이제 의료 사고가 해결되게 해달라는 기도는 완전히 사라지고 그 큰 두려움도 사라져 우리 집이 거지가 된다 해도 주님만 있으면 된다는 마음으로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를 두렵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참 평화와 행복, 참 자유가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주님께 보답하기 위해 성당에서 갖은 봉사를 다 했습니다. 남들이 꺼리는 일들부터 땀 흘리며 했습니다.
몇 달 후에 그 환자가 스스로 연락을 줘서 조건 없이 합의서에 도장을 찍어주었습니다. 그 분의 완고하던 마음을 주님께서 돌려주셨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 이후에도 힘든 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그 목소리만 생각하면 지금도 모든 것에 감사하고 행복할 뿐입니다.”
하느님은 이렇게 한 사람의 귀를 막으시고, 그 사람에게 당신 목소리를 들려주시며, 그 사람을 통해 당신 사랑이 드러나게 하십니다. 이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내가 세상과 나 자신에게 죽고 그리스도를 받아들여 그분의 사랑이 나를 통해 드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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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르 7,31-37: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예수님께서 귀먹은 반벙어리를 고쳐주셨을 때, 군중들은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 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7)라고 경탄한다. 소경이 눈을 뜨고 귀머거리가 다시 듣게 된다는 사실들은 진짜 기적적인 사실들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이 마침내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놀란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진짜 기적이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구원하셔서 해방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자들이 예언했던 그 메시아로 알아듣고자 했다. 이것은 적어도 마르코가 자신의 복음을 쓰면서 가졌던 의도라고 할 수 있다.
귀먹은 반벙어리 치유의 의미는 누구든지 하느님의 말씀을 이해하고 경청하려고 한다면 결코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33-34절) 예수님의 이 행위들은 마술사들이 행하는 그런 행위가 아니다. 이것은 당신의 구원 능력이 당신 인성을 통해 병든 이의 인성에 전달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모든 인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여기 나오는 한숨은 희랍어 원문으로 신음을 낸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하고 계심을 뜻하며, 하늘을 우러러라는 말은 당신의 기적의 힘이 바로 하늘에서 온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 오늘의 귀먹은 반벙어리의 모습은 이것이다. 유다인이든 이방인이든 모든 사람이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막고 있으면 신앙을 통해 자신들 안에 이루어지는 구원의 놀라운 사실을 말할 수도, 선포할 수도 없음을 의미한다. 귀먹은 반벙어리가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35절)는 사실이 이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세례를 받을 때에 집전자가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세례자의 귀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만지며 “귀머거리를 듣게 하시고 벙어리를 말하게 하신 주 예수님, 이 자녀가 오래지 아니하여 귀로 주의 말씀을 듣고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여 하느님 아버지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한다.
이렇게 신앙생활의 모든 의미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말씀 “열려라!” 하는 그 행동과 말씀 속에 내포되어 있다. 그러므로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귀를 열어 놓고, 주님의 말씀을 자신을 변화되도록 주님께 자신을 맡기고, 우리의 생활로 다른 사람들에게 신앙을 전하는 것이 우리가 받은 세례에 충실한 것이다. 귀먹은 반벙어리의 사건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수없이 반복되는 사실이다. 귀먹은 것이 치유되어도 또다시 귀먹을 수 있고, 그래서 계속 언어장애인이 될 수 있다. 언어장애인은 귀가 먹었기 때문에 언어장애인이 되지 않는가? 즉 주님의 말씀을 깨어 들을 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선포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같이 오늘 복음의 반벙어리 이야기는 영적인 면에서 볼 때, 복음에 대해 병들어있는 사람의 이중적인 불행의 상징적 의미가 있다. 먼저 복음을 순종하는 마음으로 듣지 않는 신자는 그 복음을 말로 전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게다가 생활로 전한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울 것이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이렇게 말하였다. “오늘날에는 비록 육체적인 눈이 주님의 기적을 통해서 뜨이는 일은 없을지라도 마음의 눈이 주님의 말씀을 통해 뜨이고 있다. 그리고 시체는 다시 살아나지 않으나 살아있는 시체의 죽어있는 영혼은 다시 살아난다. 또한 귀먹은 육체의 귀는 소리를 듣지 못하나 닫힌 마음의 귀는 하느님의 말씀에 활짝 열린다. 그래서 믿지 않던 사람들이 믿고 악하게 살던 사람들이 착하게 살고 순종하지 않던 사람들이 순종하게 된다.”(훈화 88)
어떤 환경에서든 주님의 말씀에 귀를 열어 놓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야고보서의 공동체는 귀먹은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신자들이 부자들은 환대하고 아부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업신여겼던 행동을 하기 때문이다.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모두 형제들이다.”(마태 23,8)라고 하셨다.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러니 그러한 신자들은 복음을 배반하는 것이다. 그러한 신앙은 거짓된 신앙이다.
마지막 구절을 보자.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에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보 2,5) 주님의 말씀을 잘 듣는다면, 잘 따른다면 그 말씀은 반그리스도적인 것을 분별하게 해주며 공동체 안에서 차별대우가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게 해줄 것이다.
하느님 앞에 참된 부자는 믿음을 갖고 온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난한 이들이다. 그들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참된 상속자들이다. 하느님께서는 바로 그러한 가난한 이들을 선택해 주실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은 하느님을 닮고자 하는 노력의 길이기 때문에 가야 할 길이 끝이 없다. 그래서 하느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야 하며 우리의 귀먹음을 주님의 강하고도 부드러운 손길에 맡겨 항상 새롭게 치유되도록 해야 한다. 말씀을 삶으로써 이제는 그 말씀을 이웃에게 전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귀머거리가 되어도 다시 주님께 치유를 받고 다시 일어나는 우리가 되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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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원주교구 신우식 토마스 신부님]
믿음은 어디에서 오는가? 바오로 사도는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로마 10,17)라고 우리에게 알려 줍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인간의 열정은 우리가 희미하게나마 하느님을 알 수 있게 합니다. 당신을 계시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으로 믿음을 키워 가며, 하느님께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가 말하듯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길이 곧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의탁하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는 유한한 존재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시며 그의 귀를 열어 주시고 묶인 혀를 풀어 주십니다. 인간의 유한함을 넘어 세상 것에 마음이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막는 길은, 주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고 믿음을 키워 올바른 말을 하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 말씀을 가로막는 것들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을 귀여겨들음으로써 믿음을 키워 하느님께 나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게 하여 귀로는 하느님의 말씀을 잘 듣고, 입으로는 긍정적이고 좋은 말로 그리스도인의 삶의 방식을 드러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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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에파타!>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 7,32-37)
여기서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를 원문대로 번역하면, “저분은 모든 것을 좋게 하시는구나!”입니다. 이 말은, 창세기 1장에 반복해서 나오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다.”에서 온 말로서, “예수님은 고장 난 세상을 고쳐서 ‘하느님께서 보시니 좋았던 천지창조 때의 세상’으로 복구하시는 분”이라는 증언입니다. (이 말에는 “예수님은 새로운 창조자”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이야기에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듣지 못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를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께서 장애자를 고쳐 주신 ‘평범한 이야기’인데, 상징적인 이야기로 생각하면,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는 사람들을 예수님께서 깨우쳐 주심으로써 사람들이 ‘말씀’과 ‘복음’을 알아듣게 되고, 또 믿게 되고, 그 다음에는 다시 다른 사람들에게 ‘말씀’과 ‘복음’을 전하게 되는 것을 상징하는 이야기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듣지 못하다가 예수님 덕분에 듣게 되고 말하게 된 사람들 가운데에서 대표적인 인물은 바오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박해자 사울이) 박해했던 스테파노 순교자는 순교 직전에 박해자들과 논쟁을 벌였고(사도 6,9) 최고의회에서 긴 설교를 했습니다.(사도 7장) 그 논쟁과 설교는 사실상 ‘복음 선포’인데, 박해자 사울도 그 복음을 들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는 복음을 알아듣지 못했고, 그래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귀먹어서 듣지 못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는 상태였습니다.) 그랬다가 어느 날 갑자기 예수님을 체험하고서(사도 9,3-6), ‘박해자 사울’에서 ‘사도 바오로’로 변화되었습니다. 복음을 알아듣지도 못했던 그가 예수님을 체험한 뒤에는 “예수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라고 여러 회당에서 선포하기 시작한 것입니다.(사도 9,20) ‘박해자 사울’이 ‘사도 바오로’로 변화된 일은, 예수님께서 그의 귀와 입을 고쳐 주셔서 그가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게 된 일입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회심’은 저절로 된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다 해 주신 일이 아닙니다.) 바오로 사도 자신의 능동적인 응답과 노력이 있었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울은 예수님을 만난 뒤에 “사흘 동안 앞을 보지 못했고”, 그동안 그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사도 9,9) 아마도 사울은 그 사흘 동안 깊은 침묵 속에서 기도와 묵상을 했을 것입니다. 그 사흘은 회개와 보속을 하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에파타!’ 라는 단어의 뜻은 ‘열려라!’이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열어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고장 난 귀와 입을 고치는 일은 예수님께서 해 주시는 일이지만, 말씀을 듣고 복음을 전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능동적으로 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께 비유로 말씀하시는 이유를 물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마태 13,13) 또 요한복음 9장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보지 못하는 이들은 보고, 보는 이들은 눈먼 자가 되게 하려는 것이다."(요한 9,39) “너희가 눈먼 사람이었으면 오히려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너희가 ‘우리는 잘 본다.’ 하고 있으니, 너희 죄는 그대로 남아 있다."(요한 9,41) 자기 탓이 아닌 이유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것은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눈이 있는데도 ‘예수님의 일’을 보지 않고, 귀가 있는데도 ‘말씀’을 듣지 않고, 입이 있는데도 ‘복음’을 말하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이나 말한 일은(마르 14,66-71), 입이 있는데도 ‘진실’을 말하지 않은 ‘죄’입니다. (그 일에 대해서, “너무 겁에 질려서 엉겁결에 그렇게 되었을 뿐이다.”라고 변호해 줄 수도 있겠지만, 그때 베드로 사도가 “나는 예수님의 제자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은 것은, 말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입니다.) 박해 받는 것이 무서워서 자기의 신앙을 감추는 것은, 입이 있는데도 ‘복음’을 전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도 신앙을 부인하는 것보다는 덜 나쁜 일이다.”라고 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는데, 신앙을 감추는 일이나 부인하는 일이나 다 같은 일입니다. 등불을 켜서 함지 속에 감추는 것은(마태 5,15) 사실상 등불을 끄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말’에 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권고합니다. “거짓을 벗어 버리고 ‘저마다 이웃에게 진실을 말하십시오.’ 우리는 서로 지체입니다."(에페 4,25) (요즘 세상을 보면, ‘가짜 뉴스, 유언비어’ 등을 의도적으로 퍼뜨리는 자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계명 제8계명을 거스르는 ‘대죄’가 될 뿐만 아니라, 거짓말로 사람들을 이간질하는 ‘사탄의 일’을 하는 것이기 때문에 ‘대죄’가 됩니다.) “여러분의 입에서는 어떠한 나쁜 말도 나와서는 안 됩니다. 필요할 때에 다른 이의 성장에 좋은 말을 하여, 그 말이 듣는 이들에게 은총을 가져다줄 수 있도록 하십시오."(에페 4,29) “성도들에게 걸맞게, 여러분 사이에서는 불륜이나 온갖 더러움이나 탐욕은 입에 올리는 일조차 없어야 합니다. 추잡한 말이나 어리석은 말이나 상스러운 농담처럼 온당치 못한 것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감사의 말만 해야 합니다."(에페 5,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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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태풍 아이다의 영향으로 뉴욕에 엄청난 비가 내렸습니다. 제가 있는 신문사도 지하에 물이 들어왔습니다. 아침에 미사에 가니 퀸즈 성당도 지하에 물이 들어왔다고 합니다. 마치 하느님께서 제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같았습니다. “너무 낙담하지 말아라, 내가 머무는 집도 이렇게 물이 들어왔단다.” 아무쪼록 피해를 입은 모든 분들이 이런 어려움을 이겨내면 좋겠습니다. 비가 온 뒤에 밝은 태양이 비추듯이,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이 함께 하시리라 믿습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이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갔는데 좋은 일이 생기는 경우입니다. 친구의 결혼식에 축하해주러 갔다가 거기서 신랑 측 친구와 인연이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친구 따라 갔다가 평생의 배우자를 만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저도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허리가 아프다는 신부님을 차로 물리치료 받는 곳까지 함께 갔습니다. 기다리면서 저도 같이 치료를 받으면 좋겠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의사 선생님은 친절하게 엑스레이까지 찍어 주셨습니다. 처음으로 저의 허리와 목의 사진을 보았습니다. 아직은 큰 이상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스트레칭을 자주하라는 말을 들었고, 덤으로 목과 허리에 물리치료를 받았습니다. 친구 따라 우연히 갔는데도 정성껏 치료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가게는 몫이 좋아야 하고, 집도 학군이 좋아야 하듯이 좋은 친구가 있으면 덤으로 주어지는 것도 많습니다.
돌아보니 저의 사제성소도 친구의 영향이 컸습니다. 할아버지의 유언으로 형제 중에 한명은 사제가 되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제가 사제가 돼야 한다는 생각은 별로 없었습니다. 저는 집안 형편상 공고를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려고 했습니다. 다른 직업을 갖는다면 교사나 군인이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1978년 성당 주일학교에서 3박4일 여름 산간학교를 열었습니다. 저는 어머니의 권유로 산간학교에 참석하였습니다. 거기서 운명처럼 성당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친구 중에 몇 명은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당시 본당 주임신부님도 학생들을 무척 아껴 주셨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신학교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머니에게 말씀드렸더니 어머니는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때 만난 친구 중에 저를 포함해서 3명이 사제가 되었습니다. 한 친구는 서울에 저는 뉴욕에 그리고 또 한 친구는 시애틀에서 지내고 있습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힘이 되어주는 친구입니다.
요한복음에 보면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아는 예수님을 찾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묻습니다. ‘선생님이 메시아입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와서 보시오.’ 안드레아는 예수님과 함께 있으면서 예수님께서 메시아임을 알아보았습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형 시몬에게 가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그리고 시몬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시몬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너는 앞으로 게파라고 불릴 것이다.’ 게파는 베드로라는 뜻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동생 안드레아를 따라갔다가 반석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필립보도 친구 나타나엘에게 메시아를 만났다고 이야기하였습니다. 그리고 나타나엘을 예수님께 데리고 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나타나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선생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나타나엘은 친구 덕분에 하느님의 아드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부터는 내가 너희를 종이라고 부르지 않겠다. 종은 그의 주인이 무엇을 하는지를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를 친구라고 불렀다. 내가 아버지에게서 들은 모든 것을 너희에게 알려 주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에게서 들은 것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느님 나라를 전해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입니까? 오늘 제1독서는 하느님 나라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오늘 제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신앙인의 길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예전에 읽은 글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눈 쌓인 길을 걸어갈 때는 발걸음을 함부로 하지 마시오. 그 길은 뒷사람이 따라오는 이정표가 되기 때문이랍니다.” 신앙인은 친구가 되어주신 예수님 따라서 하느님 나라로 가는 사람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이웃에게 하느님 나라로 가는 이정표가 되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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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도회(부산 분도명상의 집) 박재찬 안셀모 신부님]
예수님께서 다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 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32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 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33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 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 에 손을 대셨다. 34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35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36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 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37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 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따뜻히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치유>
마음의 귀가 먹어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우리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가 잘 들리지 않고 말을 더듬는 이를 치유해주십니다. 사실 태어나면서부터 귀가 들리지 않는 이는 말을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큽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우리의 내면에서도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게서 말이나 행동으로 상처를 받으면 이내 마음의 문을 닫아거는 우리입니다. 그래서 상처 준 사람의 말을 들으려고도 않고 온갖 상상을 하며 억울함과 분을 삭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마음의 귀가 먹으니 정상적인 말을 할 수도 없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우리가 예수님 안에서 치유를 받고 마음의 문을 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오늘 복음 속 예수님의 치유 과정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손가락을 환자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귀가 먹고 말을 더듬던 이가 듣게 되고 또 말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환자의 귀와 혀를 만져주셨듯이, 먼저 따뜻한 어루만짐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을 우러러 숨을 내쉬신 것처럼 성령의 기운이 필요합니다.
지금 나 자신이 부부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그리고 이웃들과의 관계 안에서 마음의 문이 닫혀 제대로 말하지도 듣지도 못하고 있다 느끼신다면 먼저 예수님께서 우리를 어루만져주실 수 있도록 그분께 나를 내어놓고 그분의 말씀을 듣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묵상 질문: 주님께서 나의 상처, 분노, 옹졸한 마음을 어루만져 치유하실 수 있도록 그분께 내 마음을 맡겨드릴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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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김동환 마티아 신부님]
오늘 복음은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을 구원하시는 예수님을 선포합니다. 이번 강론에서 저는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 신앙 안에서 어떤 상징을 가진 것인가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을 사제인 저에게 적용 해보고 싶습니다. 왜냐구요? 전 자주 아니 더 빈번하게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벌써 눈치채신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날마다 하느님 말씀을 봉독하고 기억해야 하고 마음에 모셔 되새김질하여서 그 뜻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런 의미조차도 느끼지 못했을 때, 동시에 무슨 말을 신자들 앞에서 해야 하는지 도통 알지 못할 때, 저는 귀먹고 말 못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정말 할 말이 없고 도무지 의미를 파악하지 못한 채로 강론대에 서 있었던 적도 있었습니다. 동시에 그 자리에 참석한 신자분들은 귀먹고 말못하는 사람의 행동을 잠시 동안 보게 되었습니다. 이 사실은 제가 사제가 되어서 체험한 것이 아니라 신자일 때부터 체험했던 것이었습니다.
오해를 할 수 있기에 잠시 설명드리자면 사제가 강론 준비를 아무리 잘해서 강론을 하더라도 듣는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면 무용지물이죠. 특히 강론을 전달할 때에 원고를 읽어버리면 -잘 알아듣지 못하게- 집중이 안 돼서 전혀 기억에 남지 않습니다.
그리고 목소리에 자신감이 없으면 전혀 주의를 끌지 못하므로 아무 소용없는 경우죠. 그래서 본의 아니게 그날 말씀에 대해서 귀먹고 벙어리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도 강론대에서 저 자신이 복음에 자신이 없어서 강론을 읽어버리면서 저도, 신자들도 알아듣지 못하게 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다시 돌아가서 성경을 해설하고 논하기 위해서는 일차적으로 사제 본인에게 말씀이 열려야 합니다. 그리고 사제 안에서 숙성되고 난 후 비로소 신자들에게 말씀을 쏟아부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사제인 저에게 ‘에파타’라는 이 한 말씀은 법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장 먼저 저(사제)에게 적용되어야 합니다. 매일 매일 에파타가 적용이 되고 그 기적이 날마다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기적으로 인해 비로소 귀먹고 벙어리인 제(사제)가 신자들 앞에서 저를 구원하였음을 증거하게 합니다. 신앙을 고백하게 합니다.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는 오늘 저의 귀와 입을 열어주시고 저를 구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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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재혁 안드레아 아벨리니 신부님]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숨이 차오릅니다. 땀이 맺혀 흘러내립니다. 어느새 1년이 훌쩍 넘은 시간 동안 마스크를 얼굴 삼아 지내며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입니다. 예측하지 못한 전염병의 무서움이 우리의 숨을 막아버렸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면, 우리를 숨 막히게 하는 것은 비단 전염병의 무서움뿐만이 아닙니다. 각자의 삶에서 오는 여러 어려움과 고난이 우리 숨길을 짓누릅니다. 더 나아가 가늠할 수 없는 크나큰 고난에 숨이 막혀 숨져가는 이들이 우리 눈을 스칩니다.
고난에 짓눌려 숨 막히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희망의 복음이 주어집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를 통하여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씀하십니다.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이사야 예언서 35장 4절)
하느님께서는 눈먼 이들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의 귀가 열리는 치유의 시간을 약속하십니다. 광야에서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는 모습을 통해 생명의 회복을 미리 알려주십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치유와 회복이 실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시기 위해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마르코 복음 7장 34절) 내쉬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보시는 예수님의 모습은 구원하시는 하느님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마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한숨’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간절히 내뱉고 싶었던 깊은 탄식과 절규를 대신하십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서 하느님의 구원과 인간의 고난이 만나는 길이 되십니다. 그 길은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열린 길이 됩니다. “에파타!” 곧 “열려라!”(마르코 복음 7장 34절)
우리는 여러 고난 가운데서도 주님이신 예수님을 닮아 ‘하늘을 우러러’ 봅니다. 하늘을 향해 눈길을 돌리는 우리에게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의 ‘한숨’을 통해 새로운 숨길을 열어 주십니다. 생명의 숨이신 성령이십니다.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로마서 8장 26절) 성령의 탄식이 우리의 새로운 숨길이 됩니다. 한숨만이 가득 찬 우리 삶, 한숨마저 막혀버린 고된 삶에서 성령께서는 깊은 탄식으로 우리의 숨결이 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성령으로 당신의 숨을 우리에게 새로이 불어 넣어 주시어 우리를 살리십니다. 우리가 예수님과 한숨을 쉬며, 함께 호흡하는 그리스도의 지체로 살아갈 수 있도록 생명의 길을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제 성령의 숨결이 머무는 곳, 주님의 눈길이 향하는 바로 그곳에 그리스도의 지체인 우리의 손길도 열리게 될 것입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며 고통을 겪는 우리 형제들에게 우리 자신을 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는 하늘을 우러러 터져 나오는 한숨으로 고난으로 막혔던 우리의 숨길을 여시고, 가려졌던 우리의 눈길을 열게 하시며, 우리의 움켜쥔 손길이 열리도록 이끄시어 우리 모두의 살 길 - 살아갈 길, 살아야 할 길이 열리도록 인도하십니다.
하늘 우러러 나오는 예수님의 한숨은 이제 우리를 향해 묻습니다. “그대는 지금 어디를 향해 열려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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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대교구 홍창익 비오 신부님]
<에파타>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마르코 복음 7장 32절-35절)
오늘 복음은 정말 속이 시원하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습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게는 예수님의 “에파타”라는 말씀은 정말 기쁜 소식인 복음일 것입니다.
그는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의 말씀대로 말이 열리고 귀가 열려서 제대로 사람들과 공동체를 이루어 살게 되었을 것입니다. 말을 하지 못하고 듣지를 못한다면 세상과 단절된 삶을 살았을 것이고, 하루하루가 얼마나 힘들고 답답한 일상이었겠습니까? 그에게 예수님의 “에파타”라는 말씀은 모든 것을 원상태로 돌려주었고, 새 삶을 주었습니다.
우리에게도 “에파타”라는 기쁜 소식이 빨리 왔으면 좋겠습니다. 2년여 동안 코로나19라는 감염병으로 많은 일상이 묶이고 답답함의 연속인 삶을 살고 있습니다. 미사도 기도도 만남도 모두가 원활하지 않습니다. 마스크 쓰기가 생활화되면서 정상적으로 대화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사람들과의 거리 두기와 단절이 일상화되면서 스스로가 자꾸 위축되고, 공동체성은 사라지는 듯합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말 못하고 듣지 못하는 사람의 삶을 사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에파타”가 우리에게 빨리 들리고, 세상 모든 곳에서 하루빨리 열리는 삶이 이루어지면 좋겠습니다.
또한 그 “에파타”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가야 하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함께 외쳐 봅시다. “에 파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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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수도회 양주분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은 연중 23주일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에서는 하느님께서는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계획은 언제나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밝혀주십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께서는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는 것을 말하고, “그때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이사 35,5)고 말합니다.
<제2독서>에서 야고보 사도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진 구원이 계속하여 그리스도를 믿는 이들 안에서 이루어져야 함을 말해줍니다.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야고 2,1)고 말하면서,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신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하고 일깨웁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제1독서>의 예언 말씀이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짐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마르 7,31)
그런데 귀먹은 이는 어떤 이인가? 귀가 없는 이가 아니라,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 곧 귀가 막혀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입니다. 또 말 더듬는 이는 어떤 이인가? 입이 없는 이가 아니라, 입이 있어도 맛보지 못하는 이, 곧 혀가 굳어져 ‘말씀’을 받아 삼키지 않는 이입니다. 그러니, ‘귀먹고 말 더듬는다’는 것, 그것은 ‘말씀’과 단절되어 소통하지 않고, 통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합니다. 곧 친교를 나누지 않음이요, 단절과 분리요, 자신을 내어주지 않고 사랑하기를 거부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실, 우리가 믿는 그리스도교는 혼자 깨달음에 이르는 종교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여 그 말씀에 따라 사는 말씀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는 먼저 말씀을 들려주시고 맛들이게 하십니다. 그러니 ‘귀’와 ‘입’은 신앙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이며, 귀로 들은 말씀은 입으로 먹어야 하는 음식이 됩니다.
그러니 귀와 입이 닫혀있으면, 말씀이 드나들지 못하게 됩니다. 사실, 이는 우리들의 자화상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느님께 감사드리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듣고 싶은 말만 듣고 듣기 싫은 말은 듣지 않을 때 우리는 귀머거리요, 하고 싶은 말만하고 하고 싶지 않은 말은 하지 않을 때 우리는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가 바로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가 바로 벙어리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귀먹고 말 더듬는’ 우리를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마치 이스라엘 백성을 따로 광야로 불러내듯, 여인을 광야로 불러내어 사랑을 속삭여주듯(호세 2,16-25 참조),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시어, 당신 손가락을 그(우리)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마르 7,33). 그리고 빵 다섯 개로 5천 명을 먹이셨을 때처럼,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의 뜻에 의탁하여 ‘숨을 내쉬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시며 말씀하십니다. “에파타!”(마르 7,34)
바로 그 순간, 저희는 그분 손가락을 통하여 만질 수 없는 신성을 만지게 하십니다. 곧바로 저희의 묶였던 혀가 풀리고 닫혔던 귀의 문이 열린 까닭입니다. 마치, 아담이 말을 배우지 않고도 곧바로 말을 하게 해 주셨던 것처럼(창세 1, 27-28; 2, 20 참조), 힘들게 배워야 하는 말을 배우지도 않고도 말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 당신 말씀을 듣도록 ‘듣는 귀’를 열어 당신 말씀을 심으십니다. 당신 손가락으로 혀를 도유하여 영을 불어넣으십니다. 그리하여, “귀머거리는 귀가 얼리리라. ~벙어리도 혀가 풀려 노래하리라.”(이사 35,5-6)는 이사야 예언을 저희에게서 이루시고, 당신이 구세주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영혼을 도유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께서 약속하신 구원을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서 이루고 계십니다. 저희 귀를 열어주시어 당신 말씀을 담아주시고, 혀로 그 아름다운 향기를 맛보게 하십니다. 이토록, ‘하느님께서는 오시어 우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는 이사야를 통하여 하신 당신의 약속을 계속 이루고 계십니다. 지금도 주님께서는 귀먹은 우리를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우리를 말하게 하십니다.
하오니, 주님!
지금도 신실하시고 충실하심으로 약속을 이루고 계시는 아버지를 찬양합니다.
오늘 저희가 당신 말씀의 향기를 뿜게 하소서!
당신 영으로 도유된 진리의 말씀을 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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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에파타!(열려라)”(마르 7,34)
주님!
저는 귀 막고 입 막고 사는 귀머거리요, 벙어리입니다.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감사드리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타인의 충고를 받아들이지 않을 때 귀머거리요, 타인을 칭찬하지 않을 때 벙어리입니다.
오늘, 당신 손가락을 제 귀에 넣으시어 당신 말씀을 담으소서.
당신 침을 발라 제 혀를 도유하시어 당신의 영을 불어넣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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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마르7,37)
예수님께서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십니다.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시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시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오늘 제1독서(이사35,4-7)는 메시아의 출현 예고에 대한 말씀인데, 오늘 복음은 오시기로 되어 있는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이사35,5-7)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하실 일과 예수님과 온전하게 함께 할 때 일어나는 기적에 대해 이사야 예언자가 전하는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시어, 이 예언을 그대로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을 끝까지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
그들이 율법으로 사람들을 차별하면서 갈라놓았던, 가난한 사람들과 많은 병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다가가셨고, 그들을 모두 고쳐주셨습니다.
나의 마음이, 얼마나 메시아이신 예수님께로 향해 있는가?
제대로 듣지 못하고,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말하지 못하고, 그래서 일어나는 크고 작은 갈등이나 문제들은 나의 마음이 예수님께로 온전하게 향해 있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생각합니다.
9월 순교자 성월입니다. 모진 박해를 이겨내고 소중한 목숨을 바쳐 신앙을 지켜내고 전해준 장한 순교자들을 기억하면서, 우리도 장한 순교자들처럼, 나의 마음이 온전하게 예수님께로 향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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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마르코 7,31-37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치시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티로 지역을 떠나 시돈을 거쳐, 데카폴리스 지역 한가운데를 가로질러 갈릴래아 호수로 돌아오셨다. 그러자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셨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일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그들에게 분부하셨다. 그러나 그렇게 분부하실수록 그들은 더욱더 널리 알렸다. 사람들은 더할 나위 없이 놀라서 말하였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구나.”
<살림>
닫힌 것을
여는 것이
살림입니다
묶인 것을
푸는 것이
살림입니다
끊긴 것을
잇는 것이
살림입니다
막힌 것을
뚫는 것이
살림입니다
쓰러진 것을
일으키는 것이
살림입니다
흩어진 것을
모으는 것이
살림입니다
고인 것을
흐르게 하는 것이
살림입니다
멈춘 것을
움직이게 하는 것이
살림입니다
참으로
살림꾼이고 싶습니다
살림꾼 예수님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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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어떤 사람이 식당에서 식사하고 있는데 종업원이 물을 자신에게 쏟았습니다. 날벼락 맞은 기분이었고,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화를 전혀 내지 않습니다. 오히려 환하게 웃으면서 물을 쏟은 종업원을 향해 “괜찮아요. 놀라지 않았어요?”라며 오히려 배려하는 모습까지 보이는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이런 경우 일반적으로 화부터 내지 않나요?
이분은 성당에 열심히 다니는 신앙인도 아니었습니다. 평소에 남을 배려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는 분도 아니었습니다. 그렇다면 왜 이런 행동을 했을까요?
글쎄, 그 종업원이 자신의 이상형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다 보니 좋은 인상을 주기 위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입니다. 즉, ‘이만한 일에 격분하지 않고 신사적으로 행동할 줄 아는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한 목적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호감 가는 사람에게는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소위 갑질하는 사람의 모습이 종종 인터넷에 나옵니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인상을 줄 수 없습니다. 그와 반대로 상대방에게 잘 보이기 위한 모습은 그 마음이 어떤지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외적으로는 보기에 분명히 좋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에서 중요한 질문 하나, 주님께 우리는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있습니까? 주님께 잘 보이기 위해서는 우선 주님에 대해서 잘 알고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우리를 향한 사랑을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절대로 대충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사랑은 오늘 복음에서 잘 드러납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오자, 여러 과정을 걸친 행동을 하십니다.
우선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십니다. 그리고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고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그리고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에파타!”라고 하십니다.
당신의 전지전능한 힘으로 그냥 치료해주실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러나 그에게는 이런 방법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스스로 느껴야 했기 때문입니다.
어린이를 보면 얼마나 예쁜지 모릅니다. 그래서 계속 대화를 나누고 싶고, 깨물어 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런 좋아하는 마음을 아이도 느낍니다. 어떻게 보면 귀찮게 하는 것인데 싫어하지 않습니다.
주님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병을 통해 주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그에게 이렇게 사랑한다는 것을 보여줌으로 인해 용기를 내어 힘차게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일상 삶 안에서 느껴보십시오. 함부로 살 수 없습니다. 주님께 잘 보여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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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영향을 미치는 말 한마디>
어떤 분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져 관상동맥 우회술을 받았습니다. 주치의는 이 방법이 완벽한 치료 방법이 아니라면서 10년 후쯤에는 재수술해야 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10년이 넘었지만, 그는 재수술을 받지 않았습니다. 상태가 지금까지 괜찮아서 굳이 수술하지 않아도 된다는 이야기를 주치의에게서 들었기 때문입니다. 이 말에 크게 기뻤지만, 사실 이분은 이제까지 늘 불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10년 후’라는 의사의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아 있던 것입니다. ‘재발할까? 재발하지 않을까? 만약 재발한다면 언제가 될까?’ 등의 생각으로 늘 불안했던 것이지요.
말 한마디가 이렇게 영향을 미칩니다. 말에 신경 쓰지 않으면 되겠다 싶지만, 자신의 생명과 관계되는 것인데 어떻게 이 말을 무시하며 살 수 있겠습니까?
지금 하는 나의 말도 또 나의 행동도 누군가의 삶 전체를 흔들 수도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생각해서 하는 나의 말과 행동이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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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제대로 듣고 말할 수 있는 은혜>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의 사랑에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도록 몸소 우리의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주십니다. 이 시간 ‘귀먹고 말 더듬는 이’에 관해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삶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제대로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은혜’가 주어지길 희망합니다.
창세기에 보면, 인간은 하느님의 말씀으로 창조되었습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닮은 인간으로, 당신의 숨을 우리에게 불어넣어서 생명을 주셨습니다.(창세1,27.2,7) 따라서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하느님으로부터 말씀을 듣고 제대로 말할 수 있도록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것에 익숙해야 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하면 제대로 말할 수 없고 말씀대로 살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듣기를 간절히 원하시기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은 어떻게 들을 수 있습니까?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성경을 통해서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입니다”(성 예로니모). 기록된 하느님의 말씀이기에 우리가 눈을 통해서 마음으로 읽어야 하지만 그분은 말씀하시고 나는 듣는 것입니다.
말씀과 함께하려는 정성이 있을 때 어느 순간 살아있고 힘이 있는 능력의 하느님(히브4,12)을 체험케 됩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해온 만큼 하느님의 말씀을 잘 알아듣고 또 하느님의 말씀으로 말을 할 줄 아는가? 신자들이 세속적인 이야기는 많이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귀먹고 말을 더듬는 이가 많습니다. 사실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며 살아가겠다고 나선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의 말을 알아들어야 하고 그리스도의 언어로 말을 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이들이 그리스도의 복음을 알아듣지 못하고 또 복음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살지 않습니다. “성경대로 생각하고 성경대로 살자!”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하면 좋겠습니다.
반 모임이나 어떤 그룹모임에 가보면 자유기도를 잘하지 못합니다. 설사 한다 해도 내 바람만 얘기하지 말씀을 가지고 기도하지 못합니다. 말씀나누기에도 입을 꼭 다물고 계십니다. 사회적으로는 공부도 많이 했고 높은 지위에 있으면서도 하느님의 말씀 앞에서는 침묵하고 계신 분들이 있습니다.
왜 그럴까? 밖에서는 그렇게 말씀을 잘하시는 분이 꿀 먹은 벙어리가 되는가?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노력하지 않은 채 그냥 세상에 묻혀 살기 때문입니다. 아무런 변화도 시도하지 않는 게으름 때문입니다. 입술로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마음과 행동은 전혀 말씀과 함께하지 못하고 있으니 그가 귀먹고 말을 더듬는 반벙어리입니다. 세상 것을 즐기는 시간과 하느님 말씀에 귀 기울이는 시간을 비교해 보십시오. 부끄럽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펴십시오!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리게 될 것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비판 정신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단순한 마음으로 읽으십시오. 마치 자녀가 아버지의 편지를 읽을 때에 문법을 따지지 않듯이,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에 영양가를 분석하지 않고 먹듯이
성경을 읽으시기 바랍니다.”(알베리오네 신부)
일반 소설책은 밤을 새워 읽지만 성경이나 신심서적은 그렇게 읽지 않습니다. 그러면서도 주님의 은총을 기대하고 있으니 한심합니다.
귀먹었다는 것은 들을 귀가 없다는 뜻입니다. 귀가 있어도 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사람은 귀먹은 사람입니다. 입이 있어도 하느님에 대해 한마디 말하지 못하는 사람은 말 더듬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빵의 기적에 관한 가르침을 듣고도 마음이 완고해서 알아듣지 못했고, 호숫가에서 자기들을 구하러 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유령인줄 알고 비명을 지르면서 제대로 말을 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모습입니다. 그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오늘 복음의 치유과정을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1). 예수님께서 환자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셨습니다. 따로 불러낸다는 것은 사랑의 표현이고 배려입니다. 무엇보다 안정시킬 수 있는 곳이요, 당신의 말씀에 온전히 귀 기울일 수 있는 곳입니다. 주님은 기도하시러 자주 한적한 곳에 머무셨고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쉬도록 하셨습니다.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과 따로 한적한 곳에서 만나는 시간을 갖지 못한다면 우리의 영적성장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2).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습니다. 손가락은 창조하는 도구입니다. 내가 너를 치료해 주겠다.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표현입니다. 말 못하는 이들은 자기의 의사 표현을 손을 통해 전달합니다.
3).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습니다. 유다교에 있어서 침은 안질에 특효가 있는 치유로 여겼습니다. 당시 관습적인 치유행위 입니다. 우리도 벌레에 물렸을 때 침을 바릅니다. 엄마가 자식에게 먹을 것을 꼭꼭 씹어서 주는 것과 같은 사랑의 표현입니다.
4).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5천명을 먹인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도 하늘을 우러러 보셨습니다.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것입니다. 빵을 보고 기도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느님의 도움을 청하셨습니다.
오늘도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바라본 것이 아니라 하늘을 우러러 보았습니다. 불쌍한 사람을 보고 기도하면 연민의 정과 측은한 생각으로 기도하겠지만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하면 전능하신 아버지의 능력을 바라보면서 희망과 신뢰를 갖고 기도하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이더라도 상황만을 바라보지 말고 반드시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기도해야 합니다. 베드로가 물위를 걸었는데 거센 파도를 보자 물에 빠졌습니다. 주님을 바라볼 때는 걸었지만 파도를 볼 때는 걸을 수 없었습니다.
5). 한숨을 내쉬셨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영, 숨을 얘기합니다. 영으로 가득 차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는 것입니다.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마르15,34) 절규하며 기도하는 그 아픔으로 함께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기서의 한숨은 절망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희망입니다.
6). 열려라! 에페타! 이 말은 부활입니다.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열려라’는 말씀은 기쁜소식, 복음입니다. 귀먹은 반벙어리에게 이보다 더 기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런 치유를 받기 위해서는 말씀에 대해 열려있어야 합니다. 능력의 말씀은 믿는 대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내가 열려 있는 만큼 빛이 들어오고 은총이 열매 맺게 됩니다. 시편에서는 “ 너 한껏 입을 벌려보라, 나는 곧 그 입을 채워주리라”(시편80,11)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바로 우리 귀를 열어주시고 입을 열어 주시려 ‘열려라’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아무리 크다 하여라 인간이 협력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주님의 말씀에 힘입어 나의 영적감각이 열리고 건강한 영혼을 지켜나갈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제는 예수님의 치유결과를 봅니다. 귀먹고 말 더듬는 이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 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고 하느님을 찬미 하였습니다. 말을 제대로 한다는 것은 단순히 발음을 똑똑히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을 찬미하고 감사드리는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지닌 귀와 입을 제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제대로’라는 말은 ‘올바르게’, ‘정확하게’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을 찬미해야 하는 입이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불평하고 원망하는 데 사용한다면 그것은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주신 모든 것은 하느님 마음에 들게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때때로 조용한 곳을 찾아 침묵 속에 하느님의 소리를 들어야 하고 하느님의 말씀에 항상 열려 있어야 합니다. 에파타! 열린 사람은 감사와 찬미로 제대로 말을 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해 주신 다음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 그러셨을까? 사람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고 반벙어리 고쳐주셨다는 얘기만 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엉뚱한 소리만 퍼질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는 것은 ‘보시니 참 좋더라’는 창세기의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보기에 좋지 않은 것이 있다면 다시 회복시키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
말씀을 듣고 그 말씀 안에서 새로워지기를 기도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을 주님의 말씀으로 정화하여 들어야할 것을 제대로 듣고 말해야 할 것을 확실히 말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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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이 미사 참례를 잘 하지 않으면 신앙이 없기 때문이고, 내가 그러는 경우는 하느님은 어디에나 계시다는 성숙한 신앙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이 기도하면서 “주시옵소서” 하면 기복 신앙이고, 내가 “주시옵소서” 하는 것은 성경의 약속을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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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핑계대지 말고 성경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 또 제대로 말할 수 있는 은혜를 입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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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참 좋으시고 아름다운 주님>
-“에파타! 열려라!”-
어제 3시경의 성경소구와 응송 및 본기도가 참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좋으신 하느님을 닮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의 모든 근원적 불행은 하느님 망각忘却에서 기인합니다. 평생 화두로 삼아 끊임없이 찾고 배우고 닮아야 할 하느님입니다. 사막교부들도 하느님이 계신 곳을 찾지 말고 하느님을 찾으라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만물보다 더 교활하여 치유될 가망이 없으니 누가 그 마음을 알리오?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길에 따라, 제 행실의 결과에 따라 갚는다.”(예레17,9-10)
“주님, 제 모르는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시고, 교만에서 이 종을 지켜 주소서,”
“영원한 사랑에 불타는 빛이신 주님, 저희도 당신 사랑으로 불타게 하시어, 모든 것 위에 당신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하여 같은 사랑으로 형제들을 사랑하게 하소서.”-
사람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사람이 어둠이라면 하느님은 빛입니다. 사람이 병病이라면 하느님은 약藥입니다. 그래서 말씀과 성체聖體는 영혼의 약藥이 됩니다. 하느님을 모르면 아무리 물어도 사람이 누구인지 답이 나오지 않습니다. 하느님이 계시기에 회개와 겸손이요 참 사람입니다. 하느님 모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기에 참 나를 알기 위해서 믿는 이들에게 평생 하느님 닮기 공부는 필수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어떻게 하느님을 배워 닮아갈 수 있을까요?
첫째. “힘내라!”
‘힘내라!’ 부단히 격려 하시는 하느님입니다. 어제 어느 자매님의 말에 전적으로 공감했습니다. 동료 교사가 있는데 늘 ‘힘들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는 것입니다. 자매님은 가능한 한 힘들다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합니다. 사실 힘들기로 하면 요즘 사람들 나름대로 다 힘듭니다. 저 또한 가능한 ‘힘들다’ ‘어렵다’라는 말은 거의 하지 않으려 노력합니다. 자신은 물로 타인에게도 이런 부정적 말마디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그러니 긍정적인 자세로 긍정적인 말마디를 사용하며 심기일전 힘을 내어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사야를 통해 우리를 격려하십니다.
“마음이 불안한 이들에게 말하여라.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하느님을 찾는 사람만 아니라 반대로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우리를 찾아 오시는 하느님입니다. '임마누엘' 늘 우리와 함께 계신 하느님입니다. 성 아우구스 티노의 언급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모든 순례자를 처음 불러내 침묵 속에서 샘솟는 기쁨으로 이끈다.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 있다면, 우리는 왜 우리와 함께 집에 계신 하느님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는가?”
가까이 계신 하느님을 집에 놔두고 외출하여 밖에서 하느님을 찾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라 질타한 마이스터 엑카르트 신비가의 말도 생각납니다. 하느님의 세 특징중 하나가 ‘임재(closeness)’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늘 가까이 함께 계시며 우리를 위로하시고 격려하시는 하느님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공평하라!”
더 구체적으로 말해 “차별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모두에게 공평무사한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구별이나 분별은 때로 필요하지만 이유여하를 막론하고 사람 차별은 단호히 반대해야 합니다. 얼마나 마음 다치게 하는 차별, 무시, 편애의 죄인지요! 참으로 마음 아프게 하는 평생 가는 상처가 차별과 무시일 것입니다.
거창한 사랑이 아니라 차별하지 않는 사랑, 편애하지 않는 사랑으로 충분합니다. 의인이나 죄인이나, 선인이나 악인이나 똑같이 햇빛과 비를 내려 주시는 대자대비, 공평무사한 하느님을 닮으라는 것입니다. 사랑은 못해도 인간에 대한 기본적 존중과 연민의 마음을 지니자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충고는 직설적이며 구체적입니다.
“나의 형제 여러분, 영광스러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됩니다.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걸친 사람을 쳐다보고서는 ‘선생님은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십시오.’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저기 서 있으시오.’하거나 ‘내 발판 밑에 앉으시오.’한다면, 여러분은 차별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각별히 사랑하는 이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차별함이 없이 모두를 특히 가난한 이들을 더 배려합니다. 이어지는 사도의 말씀이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들으십시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습니까?”
친히 가난한 이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시는 하느님이시니 이런 하느님을 믿는 가난한 이들은 진짜 부자인 믿음 부자로 살 수 있습니다. 그러니 대자대비 하신 연민의 하느님을 배우는 것입니다. ‘연민(compassion)’은 하느님의 두 번째 특징에 속합니다.
셋째, “열려라!”
대부분 심신의 병은 불통의 닫힘에서 시작됩니다. 몸의 이치도 똑같습니다. 소화기, 순환기, 호흡기 모두 불통으로 닫힐 때 문제의 병이 생깁니다. 열려야 개방해야 삽니다. 영육의 건강입니다. 마음이, 입이, 귀가, 눈이, 닫혀 무지로 인한 병입니다. 사랑은 열림의 개방입니다. 우리의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우리를 부단히 열어 주시고 치유해 주시는 친절하고 온유한 하느님이십니다. ‘온유(tenderness)’는 역시 하느님의 세 특징중 하나에 속합니다.
바로 오늘 복음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는 우리 모든 인간을 상징합니다. 깊이 들여다 보면 정도의 차이일뿐 누구나 불안과 두려움에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영적 귀머거리, 입은 있어도 말 못하는 영적 자폐아가 대부분일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귀먹고 말더듬는 이는 예수님을 만나 완전 치유 구원되어 온전해 집니다. 그대로 이사야 예언의 실현입니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는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그때는 바로 이때의 지금입니다. 지금 하느님을 만날 때 이런 놀라운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언제 어디에나 계신 똑같은 하느님입니다. 이런 하느님을 지금 만나야 합니다.
바로 이런 하느님을 그대로 닮은 예수님을 통해 귀가 열리고 입이 열린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장애인 치유과정을 통해 하느님의 세특성, 임재(closeness), 연민(compassion), 온유(tenderness)’가 그대로 들어납니다.
‘그러고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
시공을 초월하여 우리 모두 예수님의 치유과정을 보고 놀란 군중들의 말에 저절로 호응 공감하는 마음이 됩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 귀먹은 이들은 듣게 하시고, 말못하는 이들은 말하게 하시는 구나.”
그대로 주님을 만나는 이 은혜로운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아람어 “에파타!”, ‘열려라!’는 말마디와 더불어 아람어 “탈리타 쿰!” ‘소녀야, 일어나라!’(마르 5,41)는 말마디도 생각납니다. 답답할 때 에파타와 더불어 탈리타 쿰 하며 일어나 마음의 귀를 열고 다시 새롭게 시작하기 바랍니다.
참 좋으시고 아름다운 주님이십니다. 임재와 온유와 연민의 주님이십니다. 한마디로 사랑의 주님이십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마음의 귀를, 마음의 눈을, 마음의 입을 열어 주시어 온전한 삶을 살게 하십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저희가 하느님을 닮아 임재, 온유, 연민의 사람이 되게 하시고, 결코 주변 어디도 아닌 언제나 사람들을 섬기는 자리에 있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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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님]
♡알타반의 말씀 사랑♡
오늘 미사의 말씀에서는 모두에게 쏟아지는 주님의 축복을 봅니다.
"사람들이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 그에게 손을 얹어 주십사고 청하였다."(마르 7,32)
사람들이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이를 예수님 앞으로 데려 옵니다. 몸이 건강한 이웃들이 그를 위해 수고해 준 것입니다. 듣지 못하니 스스로 예수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없었겠지요. 그는 누군가의 도움이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를 군중에게서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당신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대셨다."(마르 7,33)
말씀 한 마디로도 충분히 그를 고쳐 주실 수 있으신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치유 행위를 하십니다. 먼저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신 것은 지금 당신이 온전히 그에게 집중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시는 것 같아 보입니다.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가난에 약함까지 겹친 상황에서 타인의 이목을 견디어야 하는 게 마냥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으니까요.
예수님은 손가락을 그의 두 귀에 넣었다가 침을 발라 그의 혀에 손을 대십니다. 마치 고대 주술사가 치료 행위를하는 느낌이지요. 만일 그가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단호한 목소리의 한 말씀으로도 당신의 사랑과 의지를 충분히 전달하셨을 겁니다. 예수님은 지금 귀와 입이 불편한 이에게 딱 알맞는 맞춤형 치유 행위를 해 주시는 겁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자기 앞에서 움직이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통해, 그리고 귀와 혀끝으로 느껴지는 예수님의 손길을 통해 아주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마음과 정성과 힘을 느낍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숨을 내쉬신 다음,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34)
예수님은 이 치유를 홀로가 아니라 성삼위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행하십니다. 하늘을 우러러 성부 하느님과 통하시고, 한숨으로 성령의 숨과 생명의 기운을 불어넣으시지요. 이어서 말씀으로 치유 행위를 완성하십니다. "에파타!" 그리고 열립니다.
제1독서에서는 가난한 이들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울려 퍼집니다.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이사 35,4)
마음이 불안한 이들, 눈멀고 귀먹고 말못하고 움직임이 불편한 이들, 결핍과 갈망으로 마음이 헤집어진 모든 이들을 위해 주님께서 오십니다. 주님은 그들이 겪어온 고통과 설움을 아시고 각자에 맞는 치유와 힘을 불어넣어 주실 겁니다.
제2독서의 저자는 재력이나 겉모습만 보고 가난한 이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히 이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야고 2,5)
부자들이 이 세상에서 누린 복을 가난한 이들은 하느님 나라에서 상속받습니다. 부자들이 무얼 잘못해서라기보다 이미 이 세상에서 재물과 명예, 안락과 향락 등으로 "받을 상"을 다 받은 까닭이 아닐까 합니다. 반면 가난한 이들에게는 아직 열리지 않은 선물이 천상의 축복으로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공정하시고 정의를 사랑하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겸손의 축복은 부자들보다 가난한 사람들이 더 쉽게 얻을 수 있다는 점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궁핍 가운데서 온유함과 친숙해지고 부유한 사람들은 풍요 가운데서 교만과 친숙해집니다."(성 대 레오 교황의 [참된 행복에 대한 강론]에서)
이 가르침은 물질적으로 가난한 이는 무조건 구원되고 부자들 무조건 멸망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오히려 교만의 위험에 쉽게 노출되기 마련인 어떤 부자가 오만과 이기심을 버리고 관대하게 나눔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들도 차별없이 존중한다면 그가 쌓은 겸손의 덕이 주님께 얼마나 큰 공로이고 기쁨이 되겠습니까! 반면 가난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 불평불만으로 온유와 겸손의 덕을 획득하지 못하면 그 고통이 또한 얼마나 크겠습니까!
"저분이 하신 일은 모두 훌륭하다."(마르 7,37)
오늘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치유하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경탄하며 말합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이의 결핍을 채워 주시면서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에게 부여하신 온전함을 회복시켜 주시니, "모두 훌륭할" 수밖에요!
이처럼 주님은 모든 이가 온전해지기를 바라십니다. 가난한 이들은 빈 곳이 채워져 더욱 신명나게 겸손해지기를, 그리고 부유한 이들은 과욕과 오만으로 넘치기 전에 행복하게 겸손을 배우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분이 하시는 일은 모두의 구원을 향하기에 모두 훌륨합니다.
사랑하는 벗님! 현재 물질적으로 부유하건 가난하건 구원의 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답니다. 분명한 건 하느님과 일치하여 누리는 영원한 행복이 온유하고 겸손한 영혼에게 허용된다는 점이지요. 그래야 온유하고 겸손하신 그분과 이질감 없이 하나가 될 수 있으니까요. 우리 각자가 지닌 부유함과 가난함을 성찰하고, 모든 부분이 구원의 자리가 되길 희망하며,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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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youtu.be/WEk1aJTYS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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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그에게 "에파타!" 곧 "열려라!" 하고 말씀하셨다.(마르 7, 34)
청명한
가을이
열린다.
닫혀있는
아픔을 통해
우리를
치유로
초대하시는
주님이시다.
치유를 통해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된다.
사랑받는
주님의
자녀들이다.
다시
예수님을
향하는
치유의
시간이다.
예수님의
치유는
지극히
인격적이고
과감하게
친밀하다.
닫혀있는
귀와 입을
열어주신다.
우리의
아픔을
주님께
숨기지 않는
것이다.
이것이
치유의
시작이다.
주님께서는
치유를 통해
행복을
전달하신다.
주님께서는
자녀들의
행복을
원하신다.
행복은
병든 마음이
치유되는 것이다.
그래야
자신이
가야 할 길을
자유롭게
갈 수 있다.
정말이지
우리와
함께하시는
주님이시다.
진정한 치유는
주님과의
소통이다.
건강한
삶은
건강한
소통이다.
소통은
다시금
존재의 가치를
일깨운다.
사람의 삶이란
관계가
회복되는
귀가 열리고
혀가 풀리는
사랑의 소통이다.
건강한 소통을
성찰하는
은총의 주일이다.
소통의 여정이
치유의 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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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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