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쓴이 : 김용순 | 날짜 : 12-01-28 19:09 조회 : 1825 |
| | | 밥상머리의 눈물
저녁 밥상머리에서 아내가 울먹인다. 나도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져 말을 잇지 못하고, 허허로운 웃음만 흘린다. 뒤이어 볼을 타고내리는 눈물을 훔쳐야 했다. 23살과 24살의 풋풋한 만남이 엊그제 같은데,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세월은 우리를 60대 후반으로 밀쳐 내었다. 언제 벌써, 우리가 이런 이야기를 해야 할 때가 되었냐며, 먹먹해진 가슴은 한참동안 뚫리지를 않는다. 몇 년 후에는 다시 이사를 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하였다. 내가 먼저 죽을 확률이 높으니, 당신 혼자서는 전원생활이 곤란하다. 대문 밖이 칠흑인, 이 집에서 혼자 어떻게 살겠는가. 지금도 해떨어지면 무섭다하여, 나 혼자서 바깥잠은 물론 늦은 외출도 자제하고 있다. 이곳에서 성공적인 정착을 하였다 해도, 심중을 뒤집어 보여 줄 사람 없는 객지일 뿐이다. 봄부터 잔디 깎기, 텃밭 가꾸기, 여름 장마철 등, 집안 밖의 크고 작은 관리는 누가 할 것인가.
최근 수명이 많이 늘어났다 해도 친구들은 이미 50대부터 가고 있다. 오늘도 친구가 죽었다는 연락을 받지 않았느냐. 내가 70이 넘어서면 당신 혼자서도 지낼 수 있는, 부산에 아파트를 준비하여 내려가야 할 것 같다. 두 아들 모두 외국에 있어, 뒷일을 처리하여 줄 사람도 없으니, 내손으로 모든 준비를 해 놓고 가겠다. 말하는 나도, 듣는 아내도 부정할 수 없는 우리의 앞날이기에, 목이 메기는 마찬가지다. 3년 전, 고라니가 한 번씩 뜰 안을 기웃거리는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봄 개구리 울음소리와 금빛 들녁에는 메뚜기가 뛰논다. 따스해진 햇살에 봄나물이 지천이고 가을볕에 노란 은행잎이 내려앉는다. 텃밭의 싱싱한 야채는 지인들과 나눌 수도 있을 만큼 잘 자란다. 객지로 떠돌아 이루지 못한 꿈을 위해, 창밖으로 초록이 시원한 작은 작업실도 마련하여 글쓰기와 그림으로 시간을 쪼갠다. 아내도 지역 도서관, 복지회관, 등의 문화센터 강사로 일주일이 모자란다. 그간, 굽이굽이 전설같은 이야기들을 뒤로 하고, 이제 생업에서 해방된 싱그러운 전원의 일상들이, 우리에게 얼마만큼 주어 졌을까? 과거보다 더 빠르게 질주하는 세월은 남아있는 작은 젊음마저 망가뜨리고 죽음으로 우리를 가를 것이다. 혼자 남은 아내도 외롭게 버티다, 결국 사회 요양시설에 둘렀다 가야 하지 않겠는가. 자식들이 먼곳에 있어 찾아 줄 누구도 없는 시설에서, 나보다도 더 쓸쓸하게 가게 될 것이다. 요즈음에는 길어진 수명과 간병때문에 대부분 요양시설을 거치게 된다. 평균수명이 80을 넘겼다 하나, 건강하게 살 수 있는 건강나이는 70정도라 한다. 죽을 때까지 10여 년 동안은 각종 병마에 시달려야 한다. 따라서 간병(看病)때문에 문제가 되지 않는 가정이 없다. ‘긴 병에 효자 날 때 없다’하였다. 노환중인 부모가 계시면 가족 모두의 삶이 황폐해진다. 농경사회와 달리 핵가족 시대에 다양한 직업으로 사회의 구성원인 현대인이 장기간 생업을 희생 할 수 없다. 현대인들에게 효(孝)를 대행하여 줄 전문 시설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자식이 다섯인 어머니도, 누구하나 곁에서 모시지 못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15년 동안 혼자 외롭게 사시다 이제 요양원으로 가셔야겠다고한다. 장모님도 이미 2년 전, 치매로 요양원에 맡겨졌다. 요양원에 누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스스로 대소변을 해결하지 못하고, 약으로 생명을 연장 시키며 죽음을 기다리는 삶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나, 삶의 끝은 신(神)만이 결정 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가까운 가족들을 보면서 병들고, 죽는 것은 누구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게 된다. 죽음은 체험 할 수 없고, 다른 죽음을 통하여 깨달을 수밖에 없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죽음은 우리에게 가장 큰 두려움이다. 우리가 가장 확실하게 알고 있는 사실은 ‘죽는다’는 것이고 가장 모르는 것 또한 ‘죽음’이다. 죽음이란 무엇이며 두려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사전에서는 ‘생물의 생명이 없어지는 현상’이라 하였다. 죽음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지 못하는 불안함과 영원히 버려져 자신이 소멸되어 무(無)가 된다는 사실 때문이 아닐까? 장자(壯子)는 죽음을 소멸이 아닌, 원래의 상태로 돌아감이라 하였다. 죽음은 삶의 다른 형태일 뿐, 계절이 바뀌듯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는 것이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삶에 집착하는 생각 때문이라 했다. 베이컨도 ‘태어남도 죽음도 모두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였으며 옛 선사(禪師)들도 생사일여(生死一如)라 하였다. 기독교는 죽음은 영생으로 가는 관문으로 육체는 소멸되어도 영혼은 불멸하며 천국과 지옥이 있다 하였고, 불교에서도 극락이나 여러 생명체로 다시 태어나는 윤회(輪廻)가 있다했다. 그 누구도 체험해 보지 못한, 죽음에 대한 정의를 내릴 수는 없다. 확실한 것은 선각자들이 아무리 죽음을 자연스러운 일이라 해도, 범인들은 두려울 뿐이라는 것이다.
의사의 가운 자락을 붙들고 살려달라고 애원하시다 돌아가신 삼촌과 예정된 죽음에 스스로 다가가신 아버지는 죽음을 대하는 자세가 달랐다. 발병한지 보름 만에 의료사고로 돌아가신 삼촌은 갑자기 다가 온 자신의 죽음을 느끼고 당황하셨던 것이다. 숙모님과 사별 후 재혼한 젊은 아내를 두고 떠나기도 안타까웠을 것이다. 반면 아버지는 회복 불가능한 병이 발병한 후 3개월 동안, 삶을 체념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셨다. 그리고 기독교인인 아버지와 종교가 없었던 삼촌은 죽음에 대한 이해가 달랐을 것이다. 사람마다 자신의 삶의 과정과 철학에 따라 죽음을 맞이하는 방법도 다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작업실 창밖으로 노란 은행잎이 화려한 죽음을 준비하고 있다. 내려다보이는 마을길에 어리고 귀여운 초등학생 소녀 대여섯 명이 재잘거리며 지나간다. 이 앳된 소녀들도 허망한 세월에 떠밀려 결혼과 출산, 중년기, 노년기를 거쳐 요양원의 노인들처럼 늙고 병들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끔찍하기만 하다. 살아있는 생명이라면 반드시 마주쳐야 하는 늙음과 병마(病魔)와 죽음은, 나에게도 깊은 상념이 되어 이 가을 떨어지는 낙엽처럼 스산하게 다가온다. |
| 임재문 | 12-01-28 22:09 | | 김용순 선생님의 글이 아니어도 저 역시 아내와 단 둘이 살아가면서 이제는 혼자 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앞섭니다. 저도 아내도 마찬가지 입니다. 단 둘이 이렇게 살다가 어느 누가 먼저 가면 혼자 남은 사람의 그 마음을 어떻게 해야하는가? 지금은 우리나라도 사형이 존치하면서도 집행을 하지 않기 때문에 폐지된 것이나 다름없지만, 제가 교도관 생활을 하면서 사형 집행하는 것을 여러번 목격했는데, 역시 종교를 가진 사람들이 죽음을 맞이 하는 태도가 더 당당하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답니다. 회갑이 지나고 나면 이제 남은 과제는 죽을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한다는 생각 뿐입니다. 오십대에도 쓰러져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더욱 더 그러합니다. 그렇다고 안죽을 수도 없는 것이고 보면 마음 단단히 먹고 항상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글 감사합니다. 저는 그런데 죽을 때까지 전원생활을 한 번 해보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김용순 선생님 ! | |
| | 김용순 | 12-01-29 18:52 | | 임선생님, 대단히 죄송합니다. 누구나 알고 있느면서 내놓고 말하기 어려운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에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울하게 하여서 죄송합니다. 건강하십시요. | |
| | 최복희 | 12-01-28 22:10 | | 인생을 회고하며 갈 날을 위해 마음의 준비를 하시는 독백에 깊은 공감을 느낍니다. 어쩌면 나의 일 우리의 일이지요. 저희도 선생님 댁과 비슷한 처지입니다. 남편과 자주 대화를 나눠보지만 저 혼자 떠들다 맙니다. 말이 없는 그는 저보다 생각이 더 깊으니까요. 인생 회고록을 참 잘 쓰셨네요. 온돌처럼 그 마음이 전이되는 느낌을 받으며 읽었습니다. | |
| | 김용순 | 12-01-29 18:57 | | 최선생님, 어쩌겠습니까. 닥치는대로 해야지요. 친구가 죽었다는 소식에, 허망한 기분에 사로잡혀 한 번 꺼집어 내어 보았습니다. 말하기 힘든 금기를 깨뜨린 것 같아 죄송합니다. 그래서 더욱 건강하셔야 합니다. | |
| | 이진화 | 12-01-28 22:58 | | 김용순 선생님의 글을 읽으며 깊이 공감합니다. 요즈음 남편과 자주 나누는 대화가, 아이들이 모두 결혼을 해서 집을 떠나면 집과 살림을 줄이고 보다 단순하고 간편하게 살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팔순이 넘은 친정어머니를 앞으로 어떻게 모셔야 할까도 큰 과제이고요. 아버님과 숙부님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봅니다. 일상생활 속에서 깊은 사유를 통해 써낸 작품을 새겨 읽고 함께 나누며 다가올 현실을 직시하게 됩니다. 고맙습니다. | |
| | 김용순 | 12-01-29 19:03 | | 이선생님, 이글을 올리고 괜히 죄송하였습니다. 누구나 생각하고 있는 이야기를 꼭 집어 내어 모두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싶어서요. 그날 친하던 대학 동창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삶이 허망하여 넋두리를 해 보았습니다. 건강하셔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사시면 되겠지요. 건강하십시요. | |
| | 임병문 | 12-01-29 11:49 | | 글을 읽고 무어라 댓글을 달아야할지 잠시 망설였습니다. 인명은 재천이고, 때가되면 가야하는 것을 누누이 알면서도 모르는 채, 아닌 채, 그리 세월을 보낸 것이 허구한 날입니다. 남들이 갈때 나 또한 따라 가리라마음 먹었던 그 일이지만, 가기 전 숙제가 무엇인지 헛헛한 그 일이지만 잠시 접어둡시다. 그 얘기, 그리고 봄이 오면 마음을 다잡고 다시 합시다. 그 얘기, 참으로 허망한 그 얘기. | |
| | 김용순 | 12-01-29 19:07 | | 내가 괜히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였습니다. 우리 세대에 그것 모르는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친구가 죽었다고 하기에, 우울하여 시작하여 보았습니다. 따지면 틀린 말도 아닌데, 아무튼 죽을 때 죽더라도 잊고 살아야지요. 운동 많이 하시고 건강하세요. | |
| | 강승택 | 12-01-29 12:06 | | 많은 생각을 불러오는 글, 잘 읽었습니다. 누구나 피할수 없는 죽음과 가족과의 이별, 그중에도 홀로 남겨질 배우자에 대한 애틋한 연민~ 생각을 키워나갈 수록 가슴만 답답한 우리 모두의 피할 수 없는 이야기입니다. 김선생님의 고뇌가 깊었던만큼 글의 내용도 한결 중량감을 가지고 다가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 | |
| | 김용순 | 12-01-29 19:12 | | 허망한 이야기이니 너무 깊이 생각하지 마십시요. 결국 인생이 그런 것인데, 어떻게 하겠습니까. 운동 열심히 하시고, 가는 날까지 즐기다가 갑시다. 글도 많이 써고, 막걸도 많이 마시고, 사랑도 많이하고, 남은 생을 후회없이 채워 갑시다. 우울한 이야기 죄송합니다. | |
| | 김영월 | 12-01-31 15:52 | | 인생의 후반부를 전원에서 가장 멋지게 살아내고 있는 김 용순 선생님이 무척 부럽게 여겨지던데 죽음을 생각하는 우울한 상념에 공감하지 않을 수 없네요. 누구나 죽음 앞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미처 충분한 준비도 하지 못한 채 허둥지둥하는 것 같아요. 저 같은 경우는 기독교적 인생관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죽음도 두렵다기보다 기도를 합니다. 잠자듯이 편안한 죽음을 허락 하소서... 하고 복 있는 죽음을 바랄 뿐입니다. 오늘 주어진 하루를 선물로 여기고 그냥 즐겁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 |
| | 김용순 | 12-02-01 09:52 | | 김영월선생님, 괜히 우울하게 하여서 미안합니다. 우리 나이이면 누구나 생각은 하지만 차마 말하지 못하는 말을 한 번 해 보았습니다. 엄연한 현실인, 누구도 비껴 갈 수도 없는 일 아니 겠습니까. 미리 준비해 놓아야 겠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선생님처럼 신앙이 있으시면 마음 편히 받아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죄송합니다. | |
| | 김자인 | 12-02-04 19:51 | | 김용순 선생님 글을 읽으며 많이 공감합니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죽음, 그러나 때가 아닌데도 가려고 하는 지인을 보면 마음이 너무 아픕니다. 올 때는 순서가 있어도 갈 때는 순서가 없다는 말을 많이 공감하는 요즘입니다. | |
| | 김용순 | 12-02-05 17:58 | | 김자인 선생님, 지난 번에 만나 뵈어서 반가웠습니다. 이번에 저가 괜히 여러분을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죄송합니다. 한쪽으로 흘려 버리시고 열심히 사시면, 백수 하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 |
| | 임병식 | 12-02-07 18:30 | | 하루하루를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 속에서 살다보니 저는 좀 덤덤함니다만 김생님의 작품을 읽고보니 느껴지는 것이 많군요. 인생은 어차피 동행하다가 누군가는 혼자남게 되니 숙명으로 받아들여야겠지요. 사는 동안 사모님과 노후를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 |
| | 김용순 | 12-02-08 09:08 | | 임병식 선생님, 반갑습니다. 삶과 죽음은 인생의 정해진 코스이겠지만, 한 번씩 옛날을 돌이키며, 허무 할 때가 있군요. 죽을 때까지 더 보람있게 보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감사드립니다. | |
| | 김창식 | 12-02-08 15:45 | | 그렇습니다. 인간은 시간 속에서 죽음을 향해 가는 '현존재( Dasein)' 입니다. 그러다보면 그 현존재가 죽음을 선취(先取)하기도 하죠. 하이데거가 말햇듯. | |
| | 김용순 | 12-02-09 07:54 | | 김선생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인간은 한정된 시간을 깍아 먹으며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지요. 틀림 없는 사실이지만, 누구나 내놓고 말하기 싫어하지요. 감사합니다. | |
| | 일만성철용 | 12-02-10 00:57 | | 주신 글을 읽고 보니 이런 생각납니다. '늙어서 가는 양로원은 산 좋고 물 좋고 정자 좋다는 곳'으로 대개 가게 되는데 그게 잘못이라는 것입니다.자식들도 처음에는 자주 오다가 몇 해 지나면 소홀해 지고요. 거기 있는 노인들은 다 죽음을 앞둔 사람이어서 정신 위생상 아주 나쁘며, 친한 자식들 멀리하고 생소한 남들 속에 사는 것은 귀양 온 것 이상이라는 이야기입니다. 그저 자식들이 찾아오기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사는 것이 상책이라는 이야기지요. | |
| | 김용순 | 12-02-10 09:24 | | 일만선생님, 우울한 글을 올려서 죄송스럽습니다. 선생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가 아는 사람이 울진 평해에서 병원을 하고 있는데, 그 부근에 요양원이 많다고 합니다. 그분이 틈나는데로 요양원 봉사를 하시는데, 서울 사람들이 부모를 그곳에 모셔 놓고는, 돈만 송금하고 거의 면회 오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정말 귀양살이, 현대판 고려장입니다. 감사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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