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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자 : ‘2024년 10월 26일(토요일)
■ 행선지 : ▶내설악 (백담사~영시암~오세암) 단풍산행
■ 출발장소 : 따뚜 공연장 주차장
■ 출발시간 : 07:00
☞ 서원관광(녹색) 강원 70 다 4944(010-5362-8814)
■ 트레킹 코스
☞ 백담사주차장 셔틀버스 편도 산악회 일괄구입이동,
☞ 하산 버스비 본인부담 개별이동
▶A코스 : 탐방지원센터 주차장 (버스)→ 백담사주차장→ 영시암→ 오세암→ 영시암→ 백담사
→ 백담사주차장 (버스)→ 탐방지원센터 주차장(12Km,7:00H)
▶B코스 : 탐방지원센터 주차장(버스)→ 백담사주차장→ 영시암→ 백담사→ 탐방지원센터 주차장(13Km,7:00H)
■ 일정
▶07:00따뚜출발⟶ 09:00탐방지원센터주차장⟶ 09:30백담사트레킹출발⟶ 16:30탐방지원센터 주차장
⟶ 16:30 뒷풀이⟶ 17:00 저녁식사⟶ 18:00 원주출발 ⟶ 20:00따뚜주차장
※ 일정은 상황에 따라 변동될수 있습니다
■ 트레킹지 소개
▶백담사
690년(신문왕 10)에 실화(失火)로 소실되어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때의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狼川縣)에는 비금사(琵琴寺)가 있었으며, 주위의 산은 짐승들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곳의 산수가 매우 더러워졌지만,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그와 같은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의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 터로 옮겼다. 그 사실을 모르는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양옆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은 이전과 달랐다. 사람들이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觀音靑鳥)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로 옮겼노라.”라고 하여 사람들에게 그 신이함을 알렸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고 있다. 그리고 이 지방 사람들 사이에는 춘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 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렸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하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이 전설을 통하여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그 뒤 백담사는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종연(宗演) · 광학(廣學) · 각동(覺洞) · 영희(靈熙) · 법찰(法察) · 설흡(雪洽) 등이 중건을 서둘러 790년에 한계사 터 아래 30리 지점에 이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雲興寺)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백담사에 또 다시 불이 나 승려 동훈(洞薰) · 준희(俊熙) 등이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에 심원사(深源寺)라고 개명하였다.
『심원사사적기』에는 이때 법당 · 극락전 · 벽운루(碧雲樓) · 선승당(禪僧堂) · 동상실(東上室) 등의 건물을 중수하였으며, 부속 암자로는 동암(東庵) · 원명암(元明庵) · 백련암(白蓮庵) · 오세암(五歲庵) · 봉정암(鳳頂庵) 등이 있었으며, 동훈 · 준희 등의 뛰어난 고승들이 거주하고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뒤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약 450년 동안은 별다른 변화 없이 전승되다가 1432년(세종 14)에 네 번째의 화재로 절이 전소되었다. 그 뒤 2년 만에 동하(洞下) 30리쯤 되는 곳에 선구사(旋龜寺)라고 개칭하고, 의준(儀俊) · 해섬(海暹) · 취웅(翠雄) 등이 법당과 극락전, 요사채 2동을 세웠다.
그러나 14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고, 1447년에 옛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우고 영축사(靈鷲寺)라 하였다.
그러나 김시습(金時習)이 부속 암자인 관음암(觀音庵)에 와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던 1455년(세조 1)에 화재로 소실되어 재익(載益) · 재화(載和) · 신열(愼悅) 등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에 중건하고 백담사라고 개칭하였다.
1775년(영조 51) 겨울에 다시 불에 타서 승려들은 흩어졌지만, 최붕(最鵬)이 태현(太賢) · 태수(太守) 등과 인법당(因法堂)을 짓고 심원사(尋源寺)라 개칭한 뒤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香閣)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다.
심원사를 다시 백담사로 개칭한 것은 최붕과 설담(雪潭)이 절을 중건한 1783년(정조 7)이었고, 이때의 백담사라는 이름이 지금까지 불리고 있다. 백담사라는 이름은 골이 깊고 흐르는 물의 연원이 먼 내설악에 자리한 절이라는 뜻이나, 거듭되는 화재를 피해 보고자 하는 뜻이 담겨진 이름이라는 설을 다음의 전설로 알 수 있다. 거듭되는 화재로 절 이름을 고쳐 보려고 하던 어느 날 밤, 주지의 꿈에 백발 노인이 나타나 대청봉에서 절까지 웅덩이[潭]를 세어 보라고 하여 이튿날 세어 보니 꼭 100개에 달하였다. 그래서 담자를 넣어 백담사라 이름을 고치는 동시에 지금의 장소로 옮겼는데, ‘담’자가 들었기 때문에 그 뒤부터 화재가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에 의하면, 화재가 있을 때마다 주지 스님의 꿈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분이 나타나 변을 알려 주었다고 하는데 기이하게도 지금도 이 근처에 도포를 입고 말을 탄 듯한 암석이 솟아 있다.
그러나 1915년 겨울밤에 화재가 또 다시 일어났다. 이 화재는 불상과 탱화 20여 위(位)를 제외한 건물 70여 칸과 경전 · 범종까지도 모두 태워 버렸다. 당시의 주지 인공(印空)은 사무(寺務)를 오세암에서 행하면서 백담사의 중건에 착수하였고, 기호(基鎬)와 인순(仁淳) 등이 그를 도왔다. 강원도 일대를 다니면서 시주받은 1,786원 30전으로 1919년 4월에 법당 20칸과 화엄실(華嚴室) 20칸을 건립하였으며, 1921년 봄에는 응향각(凝香閣) 및 사무실 30칸 등을 이룩하고, 종과 북을 새로이 주조하여 낙성법회(落成法會)를 열었다.
한용운이 『백담사사적』을 편찬한 1928년 당시의 백담사는 복구가 끝나고 정리가 되어 있을 때였다. 근대에 이르러 백담사는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佛敎維新論)』과 『십현담주해(十玄談註解)』 · 『님의 침묵』을 집필하는 장소가 되었고 만해 사상의 고향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절은 6 · 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영시암
1709년 조선 후기의 유학자 김창흡이 심원사 남쪽의 조원봉 아래에 정사를 창건했다. 그는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부친 김수항(金壽恒)이 사사(賜死)된 뒤로는 세상에 진출할 뜻이 없었는데 1705년(숙종 31) 모친상을 마치고 설악산으로 들어가 백담사에서 3년을 지내다가 1707년(숙종 33) 조원봉 남쪽 벽운사 옆에 벽운정사(碧雲精舍)를 지었다. 이후 건물에 불이 나자 서쪽으로 몇 리 더 깊숙한 곳에 정사를 다시 지어 머물렀다. 방을 연묵실(淵黙室), 당을 산립당(山立堂), 다락을 연백루(延白樓) 혹은 지백루(知白樓)라고 하였다.
「삼연 김선생 영시암 유허지비(三淵金先生永矢庵遺墟之碑)」에 의하면 “기축( 1709)년 10월에 다시 절에 돌아왔다가 동쪽 수리(數里)에 있는 조원봉 아래 북쪽에 판잣집 8칸을 짓고 영시암(永矢庵)이라고 이름했다”고 한다. 영시암이란 이름은 김창흡이 이 절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세상에 나가지 않겠다는 맹세의 뜻을 담고 있다. 그가 이곳에 머문 지 6년이 되던 해인 1714년(숙종 40) 11월에 공역(供役)을 하던 찬모(饌母)가 호랑이에게 물려 변을 당하자 춘천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사찰은 그 뒤 폐허가 되었다.
1749년(영조 25) 인제현감 이광구(李廣矩)가 「김삼연유허비(金三淵遺墟碑)」를 세웠으며 그 후로 김창흡의 후손과 문인들이 기록으로 남기는 등 주목을 받았다. 1691년에 오세암의 주지였던 설정(雪淨)이 조원봉 북쪽에 승당 24칸과 비각 1칸을 중건하고 자비성상(慈悲聖像)을 봉안했다. 관동 관찰사에게 절의 지난 내력을 알리고 의논한 뒤 유불(儒佛)을 사모하는 공덕자(公德者)들로부터 재물을 모아 절을 중건하고 낙성하였다. 절의 규모가 높고 크며 견고함이 천궁(天宮) 같았다고 한다.
풍악과인(楓嶽過人)이 지은 「영시암 개금 불사기(永矢庵 改金 佛事記)」에 의하면 옛 암자는 조운봉 아래 있었으나 이곳으로 옮겨지었다. 1760년 11월 7일에는 절에서 제일 오래되고 큰 석존불에 개금을 하였다고 한다. 일제강점기에는 31 본산 건봉사의 말사였으며 1925년 이기호가 영시암 주지로 부임하면서 절을 중수하였다. 그 후 윤기중(尹基重, 1931~1934)과 김재호(金在浩, 1934~1940)가 주지에 재임하였다.
6·25전쟁 시 전각들이 불에 타버린 것을 백담사 주지 설봉도윤이 1992년부터 1994년까지 김창흡의 후손인 서예가 형제 김충현(金忠顯)과 김응현(金膺顯)의 후원을 받아 법당과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문인의 주목을 받았던 설악산의 유명사찰로 조선 후기 유 · 불문화를 간직하고 있다.
▶오세암
643년(선덕여왕 12)에 창건하여 관음암(觀音庵)이라 하였으며, 1548년(명종 3)에 보우(普雨)가 중건하였다. 이 암자를 오세암이라고 한 것은 1643년(인조 21)에 설정(雪淨)이 중건한 다음부터이며, 유명한 관음영험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설정은 고아가 된 형님의 아들을 이 절에 데려다 키우고 있었는데, 하루는 월동 준비 관계로 양양의 물치 장터로 떠나게 되었다. 이틀 동안 혼자 있을 네 살짜리 조카를 위해서 며칠 먹을 밥을 지어 놓고는, “이 밥을 먹고 저 어머니(법당 안의 관세음보살상)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고 부르면 잘 보살펴 주실 것이다.”고 하는 말을 남기고 절을 떠났다.
장을 본 뒤 신흥사까지 왔는데 밤새 폭설이 내려 키가 넘도록 눈이 쌓였으므로 혼자 속을 태우다가 이듬해 3월에 겨우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런데 법당 안에서 목탁소리가 은은히 들려 달려가 보니, 죽은 줄만 알았던 아이가 목탁을 치면서 가늘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고 있었고, 방 안은 훈훈한 기운과 함께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아이는 관세음보살이 밥을 주고 같이 자고 놀아 주었다고 하였다. 다섯 살의 동자가 관세음보살의 신력으로 살아난 것을 후세에 길이 전하기 위하여 관음암을 오세암으로 고쳐 불렀다고 한다.
그 뒤 1888년(고종 25) 백하화상(白下和尙)이 중건하였다. 당시 법당을 2층으로 짓고 박달나무로 기둥을 세웠는데, 매끄럽기가 부드러운 명주옷으로 문질러도 결이 일어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한다.
■ 신청인원: 44 명
■ 찬 조 금: 40.000 원
▶송금계좌 : 농협 302-10-7461-6221 김광일
▶아침 : 떡 / 생수
- 저녁식사 : 이른 저녁식사 예정
■ 준 비 물
▶ 가을 트레킹 준비물(등산스틱.모자,장갑,자외선 차단제,썬그라스,등)
▶ 간단한 점심 / 행동식 / 간식
▶ 트레킹 중 이나 후에 갈아입을 여벌 옷 / 양말
▶ 차량 이동중 쉬면서 이동하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필요하신분 이어폰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산악기후는 변화가 심하므로 철저한
준비와 안전을 최우선으로!
■ 보험가입
▶개별가입 : 산행중 만약의 사고 발생시 개인의 책임을 공지 합니다...
■ 문의 / 비상연락
▶회 장 : 멋 쟁 이 010-6631-0907
▶부회장 : 꽃길따라 010-6740-0352
■ 유의사항
▶44인 만차시 대기신청 받습니다.
취소 시에는 취소 댓글을 달아 주시기 바랍니다.
▶출발 당일 집결시간은 꼭!! 지켜 주세요. 정시에 출발합니다.
※ 본 산악회는 비영리 단체 이므로 산행 중 본인 부주의와 지병으로 인한 사고는
본인 책임이며 산악회 에서는 일절 민,형사상의 책임이 없음을 알려 드립니다.
※ 차량 탑승 후 안전벨트를 필히 착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 차량 이동중 차량 내 음주/가무는 불가 합니다.
※ 상기 내용에 동의 하신분만 산행 신청해 주시기 바랍니다.
■ 미리보는 산행지
감사합니다.37번으로 모십니다.
조선희님,조규옥님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38~39번으로 모십니다.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 .40번으로 모십니다.
전병선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41번으로 모십니다.
꽃향기님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42번으로 모십니다.
김태욱님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43번으로 모십니다.
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44번으로 모십니다.
지인3명 신청합니다~^^
17~20~28번으로 모십니다.
신청 취소합니다.
다음 기회에 참가하겠습니다
네
지인 한분 신청 취소합니다
네
김진웅부부신청합니다~
감사합니다.17번~28번으로 모십니다
지인 한분 산행 취소합니다
네
주연숙님 코로나로인해 취소합니다
죄송합니다
네
산행 신청합니다 ~~
감사합니다 .25번으로 모십니다
지안한분 대기1번으로 신청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