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에 뜨는 별/
낙망이라는 중력보다 .
갈망이라는 부력이 더 크면
얼마든지 우리는 고해와 같은
세상에서 승리할수 있게 된다.
우리가 아무리 신령해진다 해도
연약함은 연약함으로 남아 있다
. 뿐만아니라, 하루 아침에
산이 바다가 되거나 죄인이
천사가 되는 것도 아니다.
여전히 사방이 우리를 가로 막을
것이며 여전히 우리는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야 한다.
문제는, 우리가 문제와 슬픔으로
가라 앉으려 할때 더 이상
견딜수 없는 어려움으로
체념의 바다에 빠져 갈 때
차라리 죽는 것이 사는것 보다
부러워 조금씩 사망의 그늘에 잠길 때
갈망이라는 부력을 높이는 것이다.
깊은 바다 한가운데 쇠붙이를
떨어뜨리면 쇠붙이는 금방 가라앉고 만다.
그러나 쇠붙이에 스치로플을 묶어 바다에
빠뜨리면 쇠붙이는 가라 앉지 않는다.
그 이유는 가라 앉고자 하는 쇠붙이의
중력보다 뜨고자 하는 스치로플의
부력이 더 크기 때문이다.
우리의 하루는 쇠붙이와 같다.
이런 저런 이유로 가라 앉으려 한다.
기분도 그렇고, 건강도 그렇고,
물질로도 그렇고, 심적으로도 그렇다.
되는 일이 없어 그렇고,
가능성이 안보여 그렇고,
미래의 문에 닫혀 그렇다.
그뿐인가? 열등감으로
가라 앉으려 하고,
상처로 가라 앉으려 하고
"비교가난"으로 가라 앉으려 한다.
하나님 마져 움직여 주지 않으심에 그렇고,
망망대해에 홀로 버려진 듯한 생각으로
슬픔과 거절감의 바다에 빠져든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있던 희망
끈마져도 하루 지나고 나면
한올 한올 풀어져 있다.
간신히 숨을 고르지만 더 이상
내게는 희망과 가능성마져도
비껴가고 보통 사람들에게는
실개천같은 일상인 일들이
내게는 건널수 없는 크고
깊은 강으로 다가온다.
그럴때는 정신마져도
혼미해지기 일쑤다.
그와 같을 때엔 다른 길이 없다.
갈망이라는 부력을 의지 하는 것이다.
낙망이 절망이라면 갈망은 희망이다.
낙망의 중력이 우리를 날마다
바다 깊은 곳으로 끌고 갈지라도
갈망이라는 부력으로
다시 떠올라야 한다.
문제를 없앨 수는 없다.
바다를 하루 아침에
땅으로 만들 수도 없다.
우리의 할일은, 문제의 바다과
고난의 바다에 빠져 들지 않기 위하여
날마다 갈망이라는 부력을 키우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기대하시듯이 우리도 나 자신을 향하여
포기하거나 체념하지 말고 갈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신실하시듯이,
우리도 그분을 향하여 신실하게
갈망을 표현해야 한다.
믿음은 망망대해에 떠있는
스치로플 조각과 같은 것이다.
그것을 붙잡으면 살수 있다.
구조대를 만날수 있다.
생명을 연장할수도 있다.
스치로플 속에는 부력이라는
비밀 자원을 숨겨 놓으셨다.
우리의 할일은 중력으로 인하여
포기 하지 말고 우리의 부력
되시는 주님을 붙잡는 것이다.
어떤 바다에서도 떠오르게 하시는
주님의 부력을 갈망하는 것이다.
주님도 우리의 낙망의
중력을 아실 것이다.
그럼에도 또 다시 갈망이라
는 부력으로 일어서기
를 기대하고 계신다.
사단은 우리가 가라앉기를 원한다.
그러나 주님은 어떤 경우에서도
우리가 떠오르기를 원하신다.
절망의 바다, 낙심의 바다,
상처의 바다, 고난의 바다,
체념의 바다에서 뜨기
를 원하고 계신다.
중력이 땅의 힘이라면
부력은 하늘의 힘이다.
땅의 힘이 아무리 우리를 끌어
당길지라도 하늘의 힘이 오늘도
우리를 끌어 올리시며 떠오르게 하신다.
아무리 망망대해와 같은 현실일지라도
정신을 추스리고 자세히 살펴보라 .
어딘가는 한조각의 스치로플이
있을 것이다. 스치로플은 말씀이다.
말씀만 붙잡을수 있다면,우리는
가라 앉지 않고 떠오를 수 있다.
내 힘이 아니라 그분의 부력으로 말이다.
임마누엘 칸트는 "아무리 깜깜한 밤이라
도 자세히 보면 별하나는 떠있다"고 했다.
그 별이,"바다에 뜨는 별" 주님이시다.
카페 게시글
서정호 목사님방
바다에 뜨는 별
서정호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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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02.28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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