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초롱초롱 박철홍의 고대사도 흐른다. 71
ㅡ 고구려 쇠퇴기 1 ㅡ
( 장수왕 이후 왕들)
고구려 최고전성기를 구가한 20대 장수왕(재위 413~491년) 이후 고구려는 더 이상 발전하지 못 하고 정체되어있다가 쇠퇴하기 시작한다.
중국본토에서도 수, 당이라는 한족중심 통일국가가 출현하여 고구려를 침략해왔다. 수,당 침략은 '을지문덕'과 '양만춘'에 의해 어떻게 잘 막아내긴 했지만 고구려 국력은 이 두 전쟁으로 크게 약화되고 만다
또한 남부에서는 백제와 신라가 '나제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 왔다. 특히 신라가 6세기부터 강성해져 한강유역을 차지하고 고구려 땅도 함경도 부근까지 차지하게 된다.
고구려 장수왕이후 그런 과정을 살펴보자.
1. 21대 문자명왕
(재위 491~519년)
문자명왕은 장수왕 아들인 '고조다'(高助多)의 아들이었다.
장수왕이 너무 오래 살다보니 문자명왕 아버지인 고조다가 당시 70세라는 적지않은 나이였지만 아버지인 장수왕보다 먼저 죽어 버렸다. 그래서 손자였던 '고나운' (문자명왕)이 장수왕의 뒤를 잇게 되었다. 조선시대 영조와 정조 처럼 태손이 왕위에 오른 것이다. 그러나 정조와 다른 점은 문자명왕은 태손이었지만 즉위할 때 나이가 60세 정도였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장수왕이 진짜 너무 오래산 것이다(97세 사망)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어원이 있는데 <한심하다>는 뜻을 가진 비속어인 '쪼다'라는 말이
'고조다'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즉 왕도 한 번 못 해보고 죽은 쪼다라는 것이다. 이를 정설로 여기는 사람들도 있으나 왕족, 그것도 그냥 왕족이 아니라 국본인 왕태자 이름을 백성들이 마음대로 내뱉는다는 건 어렵기 때문에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 이 높다. 무엇보다 현대음에서는 '조다' 이지만, 당장 17-19세기 때만 해도 현대와 발음이 전혀 달라지는데 5세기 북방발음과 같다고 할 순 없다. 지금처럼 '조다'라고 발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뜻도 달랐을 것이다.
'고조다'가 70세 넘을 때까지 살았는데도 왕위에도 못 오르고 죽어 억울할 것인데 본인 이름이 지금까지 놀림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걸 알면 더 억울할 것 같아 자세히 밝혀둔다.^^
또한 기록에 보면 장수왕 말년에 일어난 사건들은 거의 태자였던 '고조다'에 의해 이루어 진 일이라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90세가 넘은 장수왕 말년은 신체적 정신적으로 분명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태자로서 '고조다' 활약은 <충주 중원 고구려비>에서 확인 되기도 한다.
'충주 중원고구려비'는 국내에서 발견된 유일의 '고구려비' 로서 역사적 가치가 매우 크다. (광개토대왕비는 만주에서 발견)
'중원고구려비'는 충주지역에 세워진 5세기 경 '고구려기념비' 로, 고구려 장수왕이 남하 정책을 통해 한반도 중부지역까지 영토를 확장했음을 나타낸다.
비석에는 고구려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주변 백제 및 신라와의 관계를 기록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이는 당시 고구려가 한강 유역을 포함한 중부 지역까지 강력한 세력을 미쳤다는 것을 보여주며, 고구려와 백제, 신라 관계가 매우 역동적이었음을 나타낸다.
또한 5세기 고구려·신라 관계, 고구려 관등조직, 인명표기방식 등 문헌에 없는 내용이 담겨 있는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하지만 비석이 마모가 너무 심해 내용을 정확히 다 알 수는 없다.
위 내용 중 고구려 태자 '고조다'가 충주지역을 포함한 한반도 중부 지역에서 고구려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요한 임무를 수행했음을 암시한 기록이 있다. 이러한 태자 고조다 활동은 고구려가 한강유역으로까지 세력을 확장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고조다는 장수왕 후계자로서 군사 및 정치적으로 많은 경험을 쌓으며 직접 수행한 것으로 보인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시 70세 가까이 된 태자가 90세 넘은 아버지를 대신 해서 모든 일을 해냈을 거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다.
따라서 고조다는 단순히 왕위 계승자로 있다 죽은 것이 아닌, 고구려 대외전략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중요한 인물로 볼 수 있다.
단지 왕으로 즉위만 못 했을 뿐이다.
고조다는 영국 '찰스황태자'와 비슷한 경우이지만 찰스는 그래도 70세 넘어서 왕위에 올랐으니 고조다에 비해 운이 좋다고 해야 할까?
문자명왕 시절 고구려 영토가 가장 넓었다는 설도 있다.
문자명왕 시절에는 고구려에 역사에 기록될만한 큰 사건이나 전쟁도 없었고 상당히 평화로운 시기였지 않나 한다.
문자명왕은 60세 가까이 되어서야 왕위에 올라 고대국가 정신적 기반 확립에 노력했다. 대외관계에 있어서도 전대 외교정책에 이어 국제질서 속에서 안정된 위치를 유지했다.
494년에 부여 왕과 일족 투항을 받아들이고, 남쪽으로는 '나제연합군'과 여러차례 영토 쟁탈전을 벌였다.
그래도 문자명왕 때 까지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을 거쳐 세력이 강해지기 시작한 고구려 판도를 더욱 넓히고 강성하게 만들었다.
2. 22대 안장왕
(재위498~519)
'안장왕'은 '문자명왕' 아들이다. 선대조상(광개토대왕, 장수왕, 문자명왕)들 치적에 가려져서 과소평가받는 측면이 있지만 실제로는 고구려 전성기 마지막
명군이라 부를만한 왕이다 .
부왕 문자명왕 때 백제에게 몇 번이나 쓰라린 패배를 겪으며 전세가 미묘해진 것을 그대로 되돌려주며 다시 백제에 우세를 회복했다.
그러나 안장왕 사후 즉위한 동생 '안원왕' 시기부터 왕위계승 두고 내분이 벌어져 고구려 국력이 약해지고 중앙정부 혼란이 가속화되었다.
3. 23대 안원왕 (재위531~545년)
'안원왕'은 문자명왕 차남이자 안장왕 동생이다. 안장왕이 후손없이 죽어 동생이 왕위를 이어 받았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형인 안장왕 이 시해를 당했다는 기록이 나오는데 이를 근거로 고구려 내부 혼란이 가속되어 폭발한 것으로 보기도 하며 혹자는 안원왕이 형 안장왕을 시해했다는 설을 제기하기도 하는데 기록 부재로 근거는 빈약하다.
안원왕은 체격이 매우 장대하여 키가 7척 5촌(당시 측량으로는 2미터가 훨씬 넘으나 현재 측량 추측으로는 175 정도로 본다) 이나 되었다고 하며 도량도 넓었다고 한다.
본격적인 쇠퇴기 시작으로 알려져 있지만 의외로 안원왕의 재위기간 에는 큰 사건 없이 조용한 치세가 이어졌다.
중국과 관계에서도 균형잡힌 외교 정책으로 북위와 양나라 사이에서 안정을 꾀했다. 남쪽으로는 백제와 신라사이에서 간헐적인 충돌이 있었으나 대체로 소강상태 로 지냈다.
다만 안원왕 시절은 계속되는 자연재해로 어려움을 겪었고, 말년에 후계문제로 지배층 간에 권력투쟁이 일어나면서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했다.
4. 24대 양원왕
(재위545~559)
'양원왕'은 안장왕 아들이다. 기록에 따르면 총명하고 지혜로웠으며, 장성 해서는 남달리 호방했다고 한다.
양원왕 치세 고구려는 대내외적으로 악재가 연달아 터지면서 고전을 면치 못했고, 끝내 고구려가 차지했던 한반도 중부영토 대부분을 백제와 신라에 빼앗기면서 광개토대왕 때부터 100여 년간 이어졌던 고구려최고
전성기가 끝났다. 6세기 급부상한
신라'진흥왕'(540~576)에게 한반도 정세 주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5. 25대 평원왕 (재위559~590년)
'평원왕'은 다른 고구려 왕들에 비해 주목도 가 좀 덜하고, 일반 대중들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지는 않다.
단지 <평강공주아버지이자 온달장인> 정도 이미지로만 남아있다.
그러나 '안원왕' 말기이후 부터 귀족 간 내전으로 인해 무너져 가던 고구려를 중흥시킨 숨겨진 명군이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담력이 있으며 말을 잘 타고 활쏘기를 잘했다고 한다
그러나 외교적으로는 신라와 백제 연합(나제동맹)에 고구려가 밀려 고난을 겪었다. 이 시기에 고구려는 <한강유역>을 신라 '진흥왕'에 빼앗겼으며, 이후 신라와 관계가 긴장되었다.
평원왕은 특별히 사서에 '어질다' 라고 나와있을 정도로 성군이기도 했는데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스스로가 먹는 음식을 줄여 농상을 장려했으며 선대 왕부터 축성해온 '장안성' 축성을 일시 중단하는 등 민심수습을 위해 노력했다.
평원왕 28년(586년)에는 평양성에서 장안성으로 천도를 했다.
하지만 북주의 뒤를이어 581년에 세워진 수나라가 589년 남조 진을 멸망시킨다.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한데다가 고구려에 속해있었던 거란 일부가 수나라에 투항해버리는 등 서북방 에 어두운 정세가 드리워졌다. 이로인해 장수왕 때부터 이어져 온 중국 양팔외교(중국의 강대국 사이에서 자주적 생존을 위해 벌인 고구려 특유 중립외교정책) 는 수나라가 중국 전역을 통일 시킴으로서 끝나고 만다.
이 때문에 평원왕은 남쪽 신라와 대치는 일단락시키고 서북방 안정에 주력하기 시작한다.
6세기 경 이 시기 신라는 백제 성왕을 전사시킨 진흥왕 위세가 절정에 달한 시기로 568년에 세워진 황초령비와 마운령비를 보면 고구려는 신라에게 한반도 중부는 물론 함경도 지방까지 먹힌 상태였다.
고구려 역사상 함흥지역까지 신라에 먹힌 것은 이 시기가 유일하다. 그럼에도 황초령비 내용에 따르면 더이상 신라와 추가로 싸우지는 않고 고구려가 신라 영토획득을 순순히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는데 그 이유는 상술한 북방전선 안정화에 주력하기 위함으로 보인다.
평원왕 재위 말년에 이미 중국을 통일한 수나라 황제 '문제'로 부터 위협적인 국서가 왔고, 이로인해 고구려 영양왕 대에 이르러서는 그 유명한 고구려-수나라 전쟁이 일어난다.
고구려는 평원왕 대 부터 수나라 침략에 대한 대비로 고구려를 중흥시켜 나갔다. 만약 평원왕의 이런 조치가 없었다면 '살수대첩' 같은 수나라와 대대적인 싸움은 시도조차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역사상 3대대첩 중 하나인 '살수대첩'은 평원왕 시절 때 부터 준비된 것이다.
아마 평원왕 때 <평강공주와 온달이야기>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은 모르지만 우리 초딩시절에는 동화이야기 처럼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왔기 때문이다.
'온달'은 고구려의 뛰어난 장수로 봉성온씨 시조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는 <바보 대명사>
처럼 되어버린 인물이다.
평원왕 딸인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왕 사위가 되었고 전공을 세워 벼슬길에 오른다
그리고 영양왕 대까지 큰 활약을 했다.
그런데 전래동화로도 유명한 <바보 온달장군> 이야기는 설화가 아니라 정사인 '삼국사기' 에 전해지고 있다. <바보 온달 이야기>는 정사 삼국사기에 나올 정도로 실제 인물에 관한 이야기 이다.
그러나 우리가 교과서에서 배웠던 동화같은 내용이 사실 그대로 인지는 알 수 없다. 지금도 여러가지 설과 추론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설화내용이 참 흥미롭고 문학적 소재로도 뛰어나다. 당시 고구려인들 생활이나 생각들, 그리고 지금 현실상황으로 봐도 유추할 점이 많다.
다음 편에서 <바보 온달> 편만
한 편 으로 조금 더 깊이있게 다루어 보려 한다.
그리고 이어서 수나라와 고구려 전쟁과 살수대첩에 대해 자세히 정리해 나가겠다.
ㅡ 초롱박철홍 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