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1 병문안과 기도
어제 저녁 때부터 병원에서는 식사가 제공되었고, 저녁을 먹고 나자 팔에 혈관 주사 놓을장치를 설치해 놓고 링거와 또 한 병의 주사약을 투여하는 등 수술 준비를 시작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언제 입원을 하고 언제 수술을 할 것인가’하고 노심초사 기다리던 때와는 달리 막상 병실에 들어오니까 한결 마음이 편하고 기분이 밝아져서 어제 저녁에는 일찍 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어나서 혈관 주사병을 매달은 폴대를 밀고 가서 불편하게 세수를 한 다음 자리에 돌아와 아침기도를 마치고 쉬고 있는데 선생님들이 회진 다니는 소리가 시끄럽게 들려왔다. 나한데는 노선생님이 직접 오시지 않고 노선생님 밑에 있는 키다리 김선생님이 오셔서 앞으로의 스케줄과 함께 수술은 14일에 할 계획이라고 일러주었다. 또한 내가 노선생님한데 보낸 편지도 같이 보았다고 하면서 수술만 잘 되면 크리스마스 전에 퇴원할 수도 있다고 하였다. 아침을 먹고 난 후 나는 ‘나를 수술하실 노선생님은 어떤 분인가’ 가 궁금하여 어제 큰 놈이 “아버지, 어차피 하루 이틀도 아니고 오래 병원에 계셔야 할터인데 바둑이라도 두세요.” 하면서 새로 사다 준 노트북을 꺼내어 인터넷을 검색하고 있었는데 아내가 “여보, 저 텔레비전 좀 봐요. 저기 저분 당신 주치의 노선생님 맞지?” 하길래 쳐다보니, 손범수와 이금희가 진행하는 아침마당에 정말로 아내 말대로 노선생님이 나와서 위암에 대한 특강을 이제 막 시작하는 것이었다. 아침마당에서는 기획프로그램으로 전국 최고 명의들을 화요일 마다 초청하여 특강을 들을 계획을 세웠는데 오늘 그 첫 시간에 노선생님을 모신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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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암의 명의 노성훈 교수 |
노선생님은 젊은 시절에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이 따라다닐 정도로 수술 실력이 뛰어난 위암 수술 전문의였는데, 치료 방법과 수술 방법을 끊임없이 연구, 개발하여 세계적인 학술지에 발표하는 등 지금은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의사 중 한사람이라고 소개하였다. 연이어 위암의 발병 원인과 초기 증상, 조기 발견과 대책, 초기 위암 환자의 내시경을 이용한 로봇수술 방법 등을 소개하고 개복하여 위를 절제하는 수술에 대하여 집중 설명하였는데 특히 노선생님이 주축이 되어 연구 개발한 소위 삼무삼다(三無三多) 수술법을 안내하였다. 이 수술 방법은 수술 칼 대신 전기소작기를 사용하고 콧줄을 달지 않으며 고름배출을 위한 심지도 없다고 하였다. 또한 명치 끝에서 배꼽까지 15cm 정도의 최소 개복과 출혈과 수혈을 최소로 하며 전이율 감소, 완치율 증가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룩했다고 설명하면서 선생님께서 비지땀을 흘리며 열심히 수술하는 장면을 끝으로 프로그램을 마무리하였다.
아내는 나를 쳐다보며 말을 붙였다. “여보, 일년에 630명 씩이나 개복 수술을 하려면 하루에 몇 명씩을 하는 거야? 일년은 365일이고 약 52주인데 한 주에 이틀 정도 수술한다고 보면 한 번에 6명이라는 계산이 대충 나오네요. 그렇게 10여년을 계속하면 어쩌면 눈 감고도 할 수 있을 것 같지 요?” 좀 전에 텔레비전에서 미국의 죤스홉킨스 의과대학병원에서 일년에 수술하는 위암 환자 수가 모두 합쳐서 대략 100여 명이라고 소개한 것과 비교하면 선생님 개인이 연간 630여 명씩이라는 숫자는 놀랍기만 하였고, 이런 분한데 수술을 받게 된 나는 참 행운아라고 생각되었다. 그리고, 내 몸 속에 들어 있는 그것이 좀 크기 하지만 ‘어쩌면 나도 살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가 자욱한 안개 속에서 희망이라는 단어가 다가오는 것 같아 기분 좋았다.
오후가 되자 어떻게 알았는지 삼성산성당 성가대 단원들 10여명이 맨 먼저 병문안을 왔다. 마침 2인실인 내 병실 옆자리에 오늘 저녁에야 환자가 들어오기로 되어 있어서 비어 있기 때문에 찾아온 삼성산 자매님들은 주모경과 환자를 위한 기도를 하고 걱정을 하며 돌아가면서, 어제부터 새로 9일 기도(교우들이 모여서 54일 동안 연이어 하는 묵주기도)를 시작했는데 내 이름도 올려놓고 하겠다고 하여 고맙다고 하였다. 나는 내 평생에는 도저히 못 갚을 기도 빚을 지기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오후 4시경이 되자 학교에서 교장선생님을 모시고 평소에 가깝던 몇 몇 선생님들이 병문안을 오셨다. 선생님들은 “아, 병실 전망이 너무 좋네요. 여기 사흘만 입원하면 병이 저절로 났겠는데요. 여기서 보니 연대가 다 보이는구먼, 저어기가 북한산인가요?”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와 위로의 인사를 한 다음 병실이 답답하다고 간호사실 앞에 있는 넓은 베란다로 나가서 말씀들을 나누었다. 그리고 다른 선생님들은 아마 내일 많이 올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학생들 가르치는 것도 힘들고 학교 일도 바쁜데 일부러 오실 것 없다고 전해달라고 하였다. 저녁을 먹고 나자 이번에는 노선생님이 직접 회진을 오셨다. 선생님은 “송선생님 편지 잘 받아보았습니다. 크리스마스 전에 퇴원하실 수 있도록 노력해보겠습니 다.” 라고 하면서, 침대에 반드시 누워 무릎을 세우라고 하더니 다시 한 번 배를 요리 조리 만져보시고, 또 앉은 자세에서 귀 뒤를 만지작거리며 “지금 기분 괘찮으시죠? 내일은 점심에는 죽을 드시고 저녁부터는 금식입니다. 모레 수술을 해야하니까 준비하는 거지요. 그리고 자세한 것은 김선생님과 송간호사가 안 내해 줄겁니다. 좋습니다. 조금도 걱정하지 마세요. 지금 있는 위치가 입구여서 100% 모두 잘라내야 하겠지만 수술하면 완치될 겁니다.” 하고 말하는 목소리에 정말로 자신감이 넘치고 있었다. 저녁 6시 경이 되자 비어있던 옆자리에 청년이 입원을 하였는데 그 사람은 골수암 환자로 벌써 여러 병원을 전전하며 수술을 해도 자꾸 재발하여 이번에는 세브란스에서 한 번 더 해보자고 입원했다고 하였다. 그리고 여기는 내과 병동인데 외과 병동에 자리가 없어 임시로 여기 있다가 그 쪽에 자리가 나면 옮길 것이라고 하였다. 나는 우리 아들 같은 나이의 그 청년을 보며 ‘나는 참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저녁 늦게 큰 놈이 왔길래 “우리도 6인실에 자리가 나면 옮겨야겠다. 괜히 비싼 2인실에 있을 필요가 없잖아?” 하였더니 내 예상과는 달리 용해는 정색을 하고 반대하였다. “아빠, 아빠가 평생 살다가 처음 입원하셨는데 병실이 좀 비싸면 어때? 아버지가 그 정도도 안 된단 말이예요? 그냥 주욱 여기 계세요. 돈 걱정 하시지 말고요. 여기 한 달 계셔도 괜찮아요. 어제 대해하고 다 이야기 했어요.” 하며 역정을 내었다. 나는 ‘저놈들이 정말 많이 컷구나’라고 생각하며 내심 뿌듯해 하였다. “그럼 우리 아드님 믿고 그렇게 할까? 여보 당신 잘 난 아들 덕에 내가 호강하네” 하고 아내를 쳐다보자 “참 좋기도 하겠어요.” 하면서 싱긋 웃었다. 그래서 자식이 있어야 하는 건가? 누가 말했던가 ‘무자식이 상팔자’라고. 그건 자식 없는 사람들을 위로하는 말이지 아들, 딸이 어릴 때 방실방실 웃으며 젖을 빨 때에나 좀 더 커서 재롱을 부리면서 준 행복감만 하더라도 절대로 진리가 아니었다. 그런데 그런데 실은, 나와 아내는 오늘 서로 말을 해야 하는데 하지 않은 말이 있었다. 그것은 결코 잊어버려서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닐진데 잠 들때까지 끝까지 서로가 입을 다물고 있었다. 12월 12일, 오늘은 우리의 결혼기념일이었다.
■ 1-12 수술실에서의 기도
다음날 12월 13일은 오전에는 미림학교 교사들이 여러 명 다녀갔는데, 나이가 50을 넘은 선생님들은 꼭 내시경을 해보라고 당부하는 내 말을 듣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돌아갔다. 실제로 그 후 여러 분이 내시경을 하였는데 두 분이나 조기 발견이 되어 간단한 수술로 치료를 하였다고 들었다. 점심에는 어제 일러준 대로 죽이 나왔다. 나는 나온 음식을 반찬까지 조금도 남기지 않고 싹 비웠다. 내일 수술을 하려면 이것이라도 먹고 기운을 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조금 있으니까 서초성당의 견진대부님 내외가 오셔서 길고 간절한 기도를 해주셨는데 내 손을 잡고 있는 대부님의 손에 땀이 배어 있었다. 참으로 우리 친형님보다도 더 나를 생각하고 아껴주시는 분이었다. 대부님은 수술을 하는 내일도 오셔서 종일 같이 계시겠다고 하시곤 성당에 볼일이 있다고 하시면서 곧 가셨다. 조금 있으니까 오창 사는 막내 동생이 제수씨와 같이 왔는데, 오면서 형수님이 좋아한다고 흰 색과 붉은 색 시크라멘을 잘 조화시킨 화분을 들고 들어오면서 “어제가 형님 결혼기념일인데 병실에서 좀 그러셨겠네요. 오면서 민수한데 몇 가지 물어보았는데 위암은 웬만하면 다 완치가 된대요.
그리고 형님 주치의 노선생님은 정말 유명한 분이시더라구요. 병원도 중요하지만 암은 의사를 잘 만나야 한다는데 형님 발바닥 사이즈로는 안될 것 같 고 형수님이 줄을 좀 대셨나봐요. 어쨋던 하루 지나갔지만 결혼 축하드립니다.” 라고 병실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이 평소와는 달리 이야기를 하였고 제수씨도 같이 맞장구를 쳤다. 나는 “우리 동생 아니었더라면 정말 까마득하게 잊고 지나갈 뻔 했잖아. 어제가 우리 결혼기념일이었구먼, 어제는 난 왜 그걸 몰랐지?” 하고 아내를 쳐다보자 아내는 내 등짝을 힘껏 후려쳤다. “아이구, 수술도 하기 전에 마누라한데 맞아죽겠네.” 하면서 엄살을 떨자 병실 분위기가 밝아졌는데 옆 환자한데 미안하여 밖으로 나왔다. 저녁은 나오지 않아 굶었는데, 간호사가 오더니 저녁 식사 대신 흰죽 같은 주머니를 폴대에 더 달고 혈관 주사를 통해 투여하면서 말했다. “선생님은 이제부터 이것이 식사예요. 수술하고 다시 죽을 드실 때까지 일용할 양식이지 요.” 저녁 10시 쯤인가 친구 하나가 조용히 찾아왔다. 나는 지치고 힘이 들어 그냥 잠이 들었는데 그는 내 침대 머리맡에서 오래 기도를 하다가 12시나 다 되어서야 갔다고 하였다. 또하나의 내 분신 같은 동무였다.
14일에는 아침을 먹자마자 키다리 김선생님과 송간호사가 와서 수술을 위한 여러 가지사전 점검과 행정 절차 등을 안내하였다. 먼저, 김선생님은 수술 개요를 간단히 설명해 주었다. ‘수술은 배를 갈라서 하는 개복 수술이고, 종전처럼 옆으로 가르지 않고 명치 끝에서 배 꼽까지 10~15cm 가량 개복할 것이며, 위를 100% 모두 제거하고 식도와 작은 창자를 직접 연결한다고 하였다. 수술 칼을 사용하는 대신 전기소작기를 사용하므로 출혈도 거의 없고 수술 시간도 한 시간 반 정도로 아주 작게 걸릴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위와 다른 장기와 연결되는 곳의 조직을 모두 추출하고 세포를 배양하여 다른 장 기로의 전이 여부를 확인한다고 하였다.’ 김선생님의 설명이 끝나자 송간호사가 두어 가지의 서류를 가지고 와서 읽어보고 사인을 하라고 하였다. 내용인 즉, 하나는 수술에 대한 설명을 잘 듣고 이해했는가에 대한 것이고,다른 하나는 수술의 위험율 등을 제시하고 혹시 발생할 수도 모를 의료사고에 대하여 환자 본인이 책임을 진다는 것이었다. 나는 얼른 사인을 하면서 수술이 잘 되기를 기도하였다. 조금 쉬고 있는데 환자 도우미 아저씨가 이동식 침대를 가지고 와서 나를 옮겨타고 하더니 엘리베이트를 거쳐 4층에 있는 수술준비실로 데리고 갔고, 아내와 자식들, 대부님도 뒤 따라왔다. 입구에서 잠간 기다리는데 앞 벽에 있는 상황 안내 모니터에는 누구는 수술실에 있고 어떤 환자는 수술이 끝나 회복실로 이동 중이라는 등 수술 환자에 대한 정보를 실시간으로 화면에 뿌려주고 있었다. 이윽고 “송건수 환자 들어오세요.‘ 하는 방송 멘트와 함께 화면에도 수술준비실로 들어오라는 메시지가 나왔다. 나는 식구들과 손을 잡고 “걱정 하지마, 수술 잘하고 올께.” 하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수술 준비실은 아주 넓었다. 그런데 들어가자 마자 으시시한 분위기였으며, 어떤 기운에 내 기가 꺾여 다운되는 것을 느꼈다. 나는 이래서는 안된다고 마음을 다시 다잡아먹고 아랫배에 힘을 주었다. 간호사는 “송건수 환자 맞으시죠? 수술 담당 선생님은 누구신가요?” 하고 물었다. 나는 ‘다 알면서 왜 묻지?’라고 생각하면서 ‘노성훈 선생님’이라고 대답하였다. 그 간호사는 내 등에서 척추에 이르는 긴 주사를 놓고 하얀 십자형 장치를 하더니 “이것은 수술한 후에 통증을 없애주는 장치입니다.” 하였다. 또 엉덩이에도 혈관에도 몇 대의 주사를 놓았는데 한 20여분 있으니까 변이 급하게마려웠다. 어제 저녁부터 굶은 터라 무슨 변이 나올까 하고 화장실에 갔는데 정말 많은 양의 설사를 하였다. 설사를 하고 나니 힘이 주욱 빠졌다. 나는 다시 이동식 침대로 돌아와서 아예 눈을 감고 있었다. 배가 좀 가라앉아 안정을 찾으니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고 머리 속을 지나기 시작하였다. ‘이제 곧 수술실로 들어가겠지. 그럴 리야 없겠지만 만에 하나 혹시 의료 사고라도 나면 나는 죽어서 나올지도 몰라. 하느님 정말로 저 좀 잘 봐주세요.’ 라고 생각하자 밖에서 지금 기도를 하고 있을 아내, 자식, 대부님 얼굴이 떠올랐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저으며 ‘나를 끔찍이도 사랑하시는 하느님이 계신데’라고 생각하였다. 계속되는 생각 속에 내가 세상을 살면서 사랑스럽고 아름답고 좋았던 일이 번개같이 지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생각하기도 싫었던 일들이 또 지나갔다. 얼마가 지났을까? 출입문이 열리더니 수술 복장을 한 간호사가 안내를 하였다. “송건수 환자분 어디 계세요? 10분 후에 제4수술실로 들어오십시오.” 내 옆에 있던 간호사가 알았다는 신호를 하자 그녀는 바로 문을 닫고 바쁜 듯이 문을 닫고 나갔다. 그 때 나는 두 가지 생각을 하였다. 하나는 ‘10분 만 있으면 내 암이 치료된다.’ 라는 생각과 ‘어쩌면, 내 생명은 10분 뿐일 수도 있어.’ 라는 생각이었다. 그러고 난 후 내 머리 속은 빠르게 움직이기 사작하였다. 먼저, 이 세상을 살면서 따뜻하고 고맙고 아름다운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맨 먼저 어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고, 어릴 적 내가 어머니와 떨어져 할아버지 집 시골에 있을 때 나를 업어키우다 싶이 한 작은 고모님도 떠올랐다. 중학교 때의 은사님 한 분과 고등학교 때의 담임선생님이 계셨고, 공군 시절의 홍중령님, 충북 영동여고에서 교사의 길을 몸소 가르쳐 주신 정○○선생님도 생각났다. 정○○선생님은 고등학교 교사로서 걸어갈 사도의 길을 몸소 행동으로 보여주시며 가르쳐 주셨는데, 한 번 여고에 발령 받으면 계속 여고로 가기 쉽다고 하시면서 특히 여자고등학교에서 교사를 하려면 이런 저런 점을 명심해야 한다고 여교교사 좌우명을 가르쳐 주셨다. 그러던 어느 월급날 내가 선생님의 두툼한 월급봉투를 보고 “선생님, 제 월급봉투하고 서로 바꿉시다.” 라고 농담을 하였더니 구수한 충청도 사투리로 “그려어, 그 봉투 위에 나이도 같이 얹어, 그러면 언제나 바꿔 줄꺼구먼.” 하셨다. 그리고 조선일보 광고란을 보고 시험을 쳐서 올라온 미림여고에서 33살의 젊은 내가 아무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껏 연구하고 가르칠 수 있도록 뒤를 받혀주신 초창기 교장선생님, 삭막한 서울에 와서 성당을 통해 알게 된 수 많은 고마우신 분들, 직장 동료들, 정말로 소중한 우리 송설 형제들의 얼굴들이 환하게 웃는 낯으로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이 세상을 살면서 나를 괴롭히고 못살게 한 위인들의 얼굴이 떠오르기 시작하였다. 보통 사람이 사람을 좋아할 때에는 “너 그 사람 뭐가 그렇게 좋으냐?” 하고 물어보면 구체적인 대답이 나오는 경우도 있지만 ‘그 사람 분위기가 좋다든지, 어쩐지 좋다든지’ 하는 대답을 들을 수가 있는데 반하여,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경우에는 ‘그사람이 언제 나한데 어떻게 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나쁘다, 밉다.’라고 반드시 구체적인 행동이나 상황을 대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영동 시절에 옆집에 살면서 아내가 젖먹이 작은 애를 데리고 초등학생들을 집에서 가르쳐번 전 재산 100만 원을 삼킨 L○○씨 부부, 옆 집에 살면서 우리 애기들도 곧잘 봐주던 아주머니는 어느 일요일에 자기 남편의 도장을 가지고 와서 차용증을 쓰고 돈을 빌려갔다. 그후 그 집 경제가 꼬여 우리가 돈을 갚으라고 하자 그런 일이 없다고 잡아떼었다. 우리는 억울하여 상당한 수수료를 각오하고 재판을 걸었는데 영동이 고향인 그 사람은 차용 증서를 쓴 그날에 대구에 있었고 영동에 없었다는 사실을 증명함으로서 나는 재판에 졌다. 우리는 그 이후로 또 다른 한국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그 일부를 받았지만 지금 생각해도 참 나쁜 사람이었다. 그리고 서울 미림여고에서 나를 괴롭힌 2명, 어느 출판사에서 같이 참고서 원고를 쓰던 모 고등학교 C○○ 교사가 내 원고를 가지고 다른 출판사로 가서 장난을 친 일 등 모두 4명이었다. 이들은 밥을 먹고 살기 위해 서로 부딪힌 그런 관계가 아니고, 처음부터 나를 괴롭히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은 하나 같이 미술 시간에 우리가 보고 데생을 하던 석고처럼 굳은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당황하여 얼른 기도를 하기 시작하였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 … 내가 주문처럼 같은 기도를 15번 쯤 끊임없이 외우자, 정말로 내가 그 사람들을 미워하는 이유가 내 탓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였다. 아니 사실은 그들은 내가 지금 그들을 이렇게 미워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있을 수도 있고, 내 가슴 속에 맺혀 있는 매듭의 원인이 내탓일 가능성이 더 많을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생각이 여기까지 이르자 석고 같은 그들의 굳은 표정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하였고 드디어 얼굴에 발갛게 핏기가 돌기 시작하였다. 그들을 미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새벽기도까지 다니며 빌어도 또 빌어도 질기고 질긴 끈은 끊어지지 않았었는데, 다시 살아서 못 나올지도 모르는 수술실로 들어가기 직전에 그 모진 끈과 매듭이 봄 눈 녹듯 끊어져 흩어지고 있는 것은 어인 일인가? 그러고 나니 마음이 평화로워지기 시작하였다. ‘아, 주님 이것이 용서인가요?’ 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나를 태운 침대는 누군가에 밀려 수술실로 들어서고 있었다. 수술실 안은 조명이 눈이 부시게 밝아 누워 있는 나에게는 무척 불편하였다. 내가 얼굴을 찡그리고 “저 조명 좀 어떻게 해보세요.” 라고 하자 불빛이 좀 조용해졌고,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눈에 들어왔는데, 어떤 사람은 무슨 장치를 만지고 또 다른 사람은 나를 수술실 침대로 옮겼다. 얼른 보기에는 의사선생님이 셋, 간호사가 둘 정도 되었다. 나는 그분들을 올려다보며 말하였다. “저는 이렇게 좋은 병원에서 정말 좋은 선생님에게 수술을 받게 된 것을 너무도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와 저를 수술하시는 여러분의 손길에 주님의 은총이 가득하시길 빕니다. 아 멘.” 하였더니, 모든 의사와 간호사가 같이 따라서 ‘아 멘’ 하였다. 나를 따라서 합창을 하다시피 한 그 ‘아 멘’ 소리가 참 좋게 느껴졌다. 그리고 몇 초 후에 마스크를 쓰고 나는 잠이 들었다. <계속> |
첫댓글 병고의 과정을 적은 송형의 글이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매우 리얼하고, 기억이 섬세하여 기슴에 와 닿습니다. 송형 안에 숨어 있는 '선한 자아'를 이 글 도처에서 발견합니다. 동범형 정성으로 찾아서 꾸며 주신 사진들로 상황의 박진감을 느낍니다. 열심히 읽고 갑니다.
천주교인은 남의 잘못도 자기 잘못으로 다시 한번 되돌아 보는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라고 가슴을 치는 기도는 정말 자성의 기도입니다. 항상 축복 받으시고, 힘내시기를 빕니다.
내미할 믿신자고필사존, 내 잘못입니다. 미안합니다. 할 수 있습니다. 나와 당신을 믿습니다. 신뢰합니다. 당신이 자랑스럽습니다. 고맙습니다. 당신이 필요합니다. 사랑합니다. 당신을 존경합니다. ...초긍정의 마인드...정신건강에 꼭 필요해서 저도 늘 전철속에서 자기암시하고 기도합니다. 송건수동기가 정말 대단하시고 자랑스럽습니다. 감사
얼마나 외롭고 큰 두려움이었으랴...
우리 예수님의 처절한 겟세마네 동산 기도를 님의 아픔에 바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