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한양으로 보내고 말은 제주로 보내라’는 옛말이 있다. 큰 인물이 되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시장이 크고 저변도 넓은 곳에 가야 크게 성장할 수 있다는 말일 게다.
프로야구에서 서울은 LG와 두산 두 팀이 홈으로 삼으면서도 8개구단 중 팬이 가장 많을 만큼 시장 규모가 크다. 그런 엄청난 팬들의 규모 덕분에 선수들의 선호대상이 되기도 한다.
기아 심재학은 어찌보면 남들이 선호하는 경로를 반대로 밟고 있는 불운(?)의 선수다. 적어도 그의 이력만을 놓고 보면 그렇다. 그러나 심재학은 올해 그 불운한 이력을 실력으로 이겨내고 있다.
아마추어 시절 화려한 국가대표 경력을 통해 왼손 슬러거로 기대를 모으며 95년 LG에 입단한 심재학은 99년 투수 전향을 시도하다 실패한 뒤 현대로 트레이드됐다. 그해 현대에서 우승컵을 거머쥔 뒤 이듬해에는 다시 두산으로 트레이드됐다. 그리고 또다시 지난 겨울 남행열차를 타고 기아 유니폼을 입었다. 2000·2002년 팀을 달리해 맹타를 휘두르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지만 잠시 부진한 사이 그에게 돌아온 결과는 트레이드였다.
유니폼을 갈아입는 선수의 마음은 편치 않다. 그렇지만 심재학은 프로다. 팀에 대한 미련은 LG에서 현대로 트레이드될 때 이미 버렸다. 하필 트레이드 통고를 받은 날은 그의 생일이었고, 집에 불까지 나는 변고를 치렀다. 트레이드의 시작이 이렇다보니 어느 선수보다 더 독기를 품을 수밖에 없다.
심재학은 올 시즌을 마치면 FA(자유계약선수)가 된다. 이제 자신의 의지에 따라 팀을 바꿀 수 있는 위치로 신분이 바뀐다. FA 계약에 따르는 대박은 기본이다. 물론 실력이 따라줘야 한다.
13일 현재 0.290의 타율에 13홈런 51타점의 성적을 올려 올 시즌 FA 대상 중 가장 눈에 띄는 성적을 올리고 있다. 특히 시즌 초반 부진하다 최근 들어 급상승세를 타고 있어 영양가면에서는 최고다. 6월 한달간 76타수 29안타 타율 0.382, 3홈런 22타점을 기록하며 위기의 팀을 다시 상위권으로 이끌었다. 13일 광주 한화전에서는 장염 후유증과 상대가 왼손 투수라는 문제 때문에 선발 라인업에서 제외됐지만 9회 1사 1·2루에서 대타로 출장해 짜릿한 끝내기 안타로 자신의 진가를 확인시켜줬다.
“박승호·박철우 두 왼손타자 출신 코치를 만나 프로야구 10년 동안 모르던 야구의 묘미를 깨달았다”는 그의 말처럼 반짝 성적이 아니라 한단계 향상된 실력을 뽐내고 있다. 힘에만 의존하던 타격에서 벗어나 진정한 클러치히터로 거듭났다.
FA 대박의 꿈이 무르익어가는 심재학은 짧게 깎은 머리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매처럼 굳이 FA가 아니더라도 스스로 만족할 만한 제2의 야구인생을 활짝 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