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인으로 손꼽히던 소설가 손소희, 수필가 전숙희, 성악가 유부용이 동업으로 차린 마돈나다방은 개업하자마자 수많은 문화예술인들의 아지트가 되었다. 특히 활동공간이 거의 없던 여성문인들은 다투어 마돈나를 찾았다. 이에 맞춰 손소희는 여성문인들을 위한 문학행사도 개최하고 문학잡지 발행도 주선하는 등 여류문인들을 적극적으로 도왔다. 이러한 공로로 마돈나다방은 훗날 ‘근대 여성문학의 성지’라는 평가를 받았다. 한국여성문예원은 2017년 손소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명동백작과 마돈나>라는 문학행사를 개최하기도 했다.
마돈나의 첫 단골손님은 언론인 김광주, 소설가 김동리, 극작가 김송, 시인 이용악, 평론가 조연현 등이었다. 김동리는 오래지 않아 손소희와 불꽃같은 사랑에 빠졌다. 문단에서는 김동리의 첫째부인이 문학세계에 문외한인 까막눈이어서 자연스럽게 두 유부남‧유부녀가 사랑에 빠졌다고 호의적으로 이해했다. 이후에도 김동리의 바람기는 잦아들지 않아 손소희와 살면서도 30년 연하의 소설가 서영은과 불꽃같은 밀애를 나누기도 했다. 첫째부인은 손소희의 머리끄댕이를 쥐어뜯은 뒤 이혼했고, 손소희는 서영은을 찾아가 따뜻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김동리는 손소희가 암으로 세상을 떠나자 서영은과 정식으로 혼례를 올린 뒤 죽는 날까지 해로했다. 생전의 김동리는 첫째부인에게서는 자식을, 둘째부인에게서는 재산을, 셋째부인에게서는 사랑을 얻었노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바람둥이였든 아니든, 김동리 선생은 1970년 제1회 전국독서경진대회 심사위원장을 맡아 내게 대통령상을 안겨준 고마운 분이었다.
천재시인 이용악은 함경북도 출신으로, 곱슬머리를 올백으로 넘기고 검은테 안경을 쓴 멋쟁이였다. 차림새로 보나 행동으로 보나 오갈 데 없는 집시였다. 왜국 상지대학교를 나온 이용악은 한때 평론가 최재서가 경영하던 잡지사 <인문사>에서 착실하게 근무한 적도 있었지만, 오래지 않아 후배 여직원을 데리고 고향으로 도망을 쳤다. 해방 후 상경한 이용악은 늘 술에 절어 살면서도 <분수령><낡은 집><오랑캐꽃> 등 주옥같은 명시를 남겼다. 조선문학가동맹에 가입하여 ‘미제와 이승만을 반대하는 문화인 모임’을 이끌다가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6‧25전쟁 때 인민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그들을 따라 월북했다.
마돈나에 이어 남강‧미네르바‧오아시스‧고향‧코롬방 등 다방들이 우후죽순처럼 개업했다. 바야흐로 다방 전성시대였다. 방송작가 김광조 부부는 에덴다방 바로 옆에 라아뿌룸다방을 차렸다. 라아뿌룸에는 시인 박인환을 필두로 방송인 강문수‧윤길구‧이계원‧이진섭 등이 단골로 드나들었다. 비련의 여배우 남궁연은 돈이 생기면 호기 있게 돈다발을 흔들며 안면이 있는 문화예술인들을 몽땅 데리고 동순루로 가서 청요리와 빼갈을 사곤 했다. 놀기도 좋아하지만 푸슈킨의 시를 줄줄 외는 문학적 기질도 다분했다. 남궁연은 박인환과 늘 어울려 다니면서 염문을 뿌리기도 했는데, 사실은 한 유부남과 열애에 빠져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한 번도 사랑에 빠져본 적은 없었지만 박인환은 친구 남궁연의 처지를 이해하고 감싸주는 편이었다. 남궁연이 사랑하고 있는 남자의 부인이 나타나 속을 뒤집어놓은 날은, 둘이서 동순루로 찾아가 독주에 흠뻑 취하며 심사를 달랬다. 술값은 언제나 남궁연 차지였다. 두 사람은 기분이 좋을 때나 나쁠 때나, 비가 올 때나 개일 때나 동순루를 찾아가 만취할 때까지 독주를 마셨다. 박인환은 납북시인 김기림의 시를 가장 좋아했는데, 정작 김기림의 시를 더 많이 외는 쪽은 여배우 남궁연이었다. 남궁연은 6‧25전쟁 뒤 명동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짐작만 분분할 뿐 행방을 아는 사람은커녕 죽었는지 살았는지조차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해방 직후, 매우 독특한 명동식구가 한 사람 나타났다. 권투선수이자 시인인 배인철이었다. 그가 명동에 처음 나타났을 때는 미군부대에서 통역으로 근무하며 쏠쏠하게 월급을 받고 있었는데, 특별히 단골로 정해둔 다방이나 대폿집도 없이 아무데나 불쑥불쑥 끼어들어 넉살 좋게 합석하곤 했다. 그는 상대방의 턱밑까지 어퍼컷을 죽죽 뻗으며 주먹을 휘두르는 게 인사법이었다. 한참 연상인 이봉구에게도 ‘헤이, 부라보’ 하며 친구 대하듯 인사를 했다.
배인철은 한참 어린 구두닦이나 장사치들과도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친구처럼 지냈다. 술을 잘 마시지는 못하지만 잘 사기는 했다. 이따금 자신이 통역으로 근무하는 미군부대의 흑인 병사가 선사한 고급 브랜디로 명동식구들의 입맛을 돋우기도 했다. 한 2년쯤 명동에 활기를 뿌리고 다니며 마당발 역할을 하던 배인철은, 자신에게 브랜디를 주곤 하던 흑인 병사의 애인과 밀애를 즐기다가 그가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시인 김광균‧이시우‧이해관 등 많은 문인들이 인천까지 내려가 ‘시인’ 배인철의 상여를 묘지까지 운구함으로써 술빚을 갚았다.
첫댓글 좋은 내음이 풍기는 곳에 향기도 많지만,
가끔은 악취도 있는게 인생사인가뷔여...
처음 서울오니 많은게 다방이고 명동을 벗어나서 옛시경앞에 여왕봉이라는 다방에 자주 간 기억이 나네
회수권을 쓰던 때라 버스정류소가 시경옆에 있었는데 많이 이용하다 제대하니 없어졌다네
내가 처음 연정을 느낀 여인도 다방 레지
그것도 연상
울산에서 군생할 할 때였는데,
하도 내가 그 다방으로 찾아가니까,
어느날 사라지고 말았더라고..
이 쪽지 하나 남겨놓고...
'지금은 잘 모르지만, 나중에는 나를 만는 것으로 후회할 겁니다. 그래서 떠납니다. 찾으려 하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