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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중간고사 대체 과제 제출하러왔습니다.
다음은 본문 내용입니다.
나는 이럴 때 내가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 철학과 / 2014101277 / 서동진
나는 ‘세상이 콱 망해버렸으면’ 하고 바랄 때, 내가 인간임을 실감한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겠지만, 나에게만 한정된 이야기는 아닐 거라고 굳게 믿고 있다. 고도로 발달되고 거대화된 문명사회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모두들 한번쯤은 그런 생각해보지 않았을까. ‘지금 당장, 이놈의 세상이 콱 망해버렸으면.’ 뭐 옛날 옛적이라고 그렇지 않았겠느냐만, 세상은 꼭 커다란 컨베이어 벨트 같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춘천이든, 경주든 김해든 제주든 간에 크고 작은 도심지가 있고, 화려하거나 추레한 불빛이 있고, 밤낮 없이 오가다 멈춰서는 사람들이 있다. 의원이든 교원이든 사원이든, 장교든 목사든 깡패든 간에 줄기차게 벌어먹고 사는 직장이 있고, 하루하루 벌어먹은 밥 한 끼가 있고, 그 와중엔 손등에 걸치는 생채기처럼 나날의 은혜와 죄가 묻어난다. 누구에게나 반복되는 일상이 있다. 순간순간의 불안과 강박을 반복하는, 그다지 안정적이지 않으면서도 무료한 일상이 있다.
인생은 순탄치 않지만 뻔하다. 어디로 튈지 모를 청춘도 막상 튀고 나서는 모를 것이 없다지 않은가. 분명 인간은 아는 것이 많은 존재다. 문제는 그 아는 것이란 게 자신의 힘이나 권능에 비해서 지나치게 많다는 것이다. 인간이 이룩해놓은 사회란 그 흐름은 보이면서도 그 속은 보이지 않기에, 시기, 폭언, 구타, 갈취, 감금, 무시, 사기, 루머, 감봉, 해고 등 갖가지 구조적 폭력에 우리는 ‘알면서도’ 당한다. 그리고 당하고 나서는 인간 특유의 인지적 능력을 통해 사회와 구조의 거대함과 스스로의 나약함을 제대로 실감하는 것이다. 바로 그때, 인간은 자신의 불편한 요람에게 복수심을 느낀다. 혹은, 마음대로 멈출 수도 없고, 멋대로 속도를 줄일 수도 없는 마라톤의 레일에서 자신을 해방시켜줄 기적을 원하게 된다. 한마디 덧붙여서, ‘이놈의 세상이 콱 망해버렸으면’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거대자본과 사회의 통제가 먹이고 기른 인간으로서, 절망 말고는 잃을 것이 없었던 옛 사람들처럼 정의와 생계를 걸고 혁명이니 봉기니 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므로 인간은 웅크리고 꿈을 꾼다. 공멸을 위한 핵전쟁, 세계적 규모의 신종 바이러스 창궐, 외계의 침공 등의 익히 알려진 아포칼립틱 트레이드마크에서 성비 불균형이나 빙하기 도래, 자원 고갈이나 전산 경제 붕괴 등의 다소 희소하고 치밀한 스토리라인에 이르기까지. 별의별 공상과 예측을 동원하여 자신을 압박해왔던 세상을 마음껏 쳐부숴버린다. 그리고 그 뒤엔 방독면, 산탄총 한 정, 후드가 부착된 가벼운 재킷에, 끈이 짧은 배낭을 두른 자신을 처참한 폐허 위에 올려놓는 것이다.
20세기 후반부터 제 1, 2차 세계 대전 종식 및 냉전과 함께 시작된 세계 공멸에 대한 공포 혹은 ‘낭만’은 문학이나 영화와 같은 창작 분야에서 꽤 인기 있는 주제로 활용되어왔다. 심지어 반세기가 지난 오늘 날까지도 대중의 이목과 흥미를 끌고 있으며, 장르의 지속된 성장과 발전은 무수한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계의 면면을 더욱 깊이 비추어 보였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여전한 인기는 현대인이 사회에 대해 느끼는 구속감과 다양한 인류 사회의 동향 혹은 운명이 집적되고 있음을 드러낸다. 이는 이러한 장르의 대중을 공감과 만족으로 인도하는 특수한 메커니즘을 통해서도 파악할 수 있는데, 대체로 국가권력, 이데올로기, 도덕성의 말소를 통해 느끼는 사디즘적 쾌감과 은밀한 해방감이 다른 한편 법과 윤리에 구속받지 않는 순수한 인간애가 전하는 감동으로 이어지며, 결론적으로는 사회의 시스템과 통제에서 벗어나 인간 본연의 의지와 사랑으로 이루어진 삶을 갈망하는 현대인의 소망에 부응하는 바가 그것이다. 날마다 다양한 규모의 통섭과 분열을 경험하는 인간의 눈앞에 세계는 점점 더 좁아져 가며 혼란은 점점 더 거대해진다.
인간의 보편적인 삶 속에 내재된 어느 고루한 지향점이 오늘날의 세계를 만들었겠지만, 어쩌면 정작 오늘날의 인간은 이 타고난 균형감에 따라 회귀를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휴머니즘의 부활도, 생태주의자들의 등장도 같은 맥락이 아닐까. 인류와 사회는 한계에 다가가고 있다. 부패해가는 시장경제체제와 최후의 선을 넘어가고자 하는 신자유주의 및 물질만능주의에 지쳐버린 걸 수도 있고, 매일 같이 반복되는 사회적, 개인적 문제와 현재로부터 멀어져가는 개선점 사이에서 은근한 조바심이 자라나는 것일 수도 있다. 많은 이들이 변화와 진보를 원한다. 위에서 설명한 근래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적 공상의 원천은 이러한 시대적 경계심이다. 물질의 수량적 가치 앞에 훼손된 인간성, 수십억의 일시적인 욕망으로 망가진 행성 곳곳의 생태 등 현 시점에 대한 경각심을 환기시키는 하나의 경고로서, 비대해진 현대 사회의 급진적인 파괴가 내세워진 것이다.
단순히 사회적이고 거시적인 관점이 아닌, 개인적이고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는 시각도 있다. 사회와 집단의 요구에 의해 덧씌워지고 위장된 자신의 페르소나를 벗어던지고 본래의 인격과 마주하고픈 현대인의 내면적 욕구가 반영된 것이라든지, 자본주의 사회의 소유 개념이나 수량화된 자원이 아니라 인간 고유의 도구적 가치인 ‘유용과 무용’의 관계, 생존이라는 기본적 욕구의 감각을 되찾고자 하는 시도로서 말이다.
실제로 ‘아포칼립스’는 현 세계의 멸망 및 적그리스도의 파멸과 천년왕국의 도래를 예고한 ‘요한계시록’, 즉 ‘묵시록’의 영제다. 당시 크게 벌어진 빈부격차와 노예 및 빈민들의 급속한 증가로 골머리를 앓던 로마 제국의 시대상, 지배층의 착취 및 압제로 고초를 겪던 피지배층들이 그리스도교로 합류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애초에 수세대의 인간들이 꿈꾸었던 멸망은 종말로서의 ‘오메가’보다 부활로서의 ‘오메가’의 의미가 크지 않았을까. 18세기 조선에서 유행했던 미륵불 사상, 서기 1000년경의 서유럽인 그리스도교도들의 집단적 자살도 마찬가지이리라. 실낱같은 희망을 만연한 절망을 통해 극대화하려는 인간의 행태는 무척이나 어리석어 보이지만, 한편으로 일말의 애석함마저 느껴질 만큼 동정적인 시선을 이끌어낸다. 또한 이제서는 종말이라는 주제가 더 이상 말도 안 되는 망상에서, 깊이 고민해보고 과학적으로도 예측 가능한 미래가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다시 한 번 되돌아봄직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 인류의 세상은 그리 쉽게 멸망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는 잘 알고 있다. 이미 무수한 재난과 돌발적 위기에 대한 대응책이 마련되고 있으며, 지난 수세기간 인간들은 세대를 이어 대지진, 화산 재해, 장기간 지속된 기근, 치명적인 역병의 창궐, 세계적 규모의 국제전 등 다양한 종류와 크기의 재앙 등을 경험했고, 결국은 이겨냈었다. 설령 소설에서처럼 대량의 방사능 유출 피해나 신종 바이러스의 확산 등 새롭고 강력한 유형의 종말적 사건을 맞이한다 해도 인간은 우수한 적응력과 발전을 통해 당시에 적합한 대안과 포지션을 찾아낼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은 이후의 ‘방향’이다.
인류 문명이 수천 년의 역사 속에서 마주했었던 몇 번의 격변은 바로 위와 같은 종말적 재앙이었다. 농업의 발전은 수많은 기근을 거쳤고, 민주주의의 탄생은 왕정국가와 독재의 몰락을 거쳤으며 국제기구의 성장은 두 번의 세계대전과 냉전을 거쳤다. 인간은 한계와 위기에 다다라 방향을 틀었으며 사상의 양극을 오가며 변화된 미래로 나아갔다. 모든 ‘알파’는 ‘오메가’를 향하나, 모든 ‘오메가’는 또 다른 라인의 ‘알파’로 이어진다. 과거의 끝에서 미래의 시작으로 걸음을 옮기는 모든 이들은 걸음이 향하는 곳에 대해 고민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고민을 위한 기초적인 자세가 바로 사회와 집단과 관습과 윤리 속에서 탈피한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소리 없이 북적대는 도서관, 문명의 모든 시간이 편편이 들어찬 공간에서 하릴없는 상상을 곁들인 종말을 접할 때, 또 한참이 지나 책을 덮고 모든 것이 건재한 오늘의 세상을 다시 만날 때, 나는 스스로가 인간임을 실감한다. 시작과 끝에서 변화와 진보를 고민하는 나약하고 조급한 난쟁이임을, 허영과 가식에 지쳐 본 모습을 망각한 보잘 것 없는 가면임을, 실은 소크라테스의 독을 ‘살짝’ 맛본 배가 부른 돼지임을 실감한다.
그리고서야 가볍게 한숨을 짓는 것이다.
‘세상이 콱 망해버렸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