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세레나데' - 「황성옛터」
이 노래는 1932년 이애리수가 취입한 작품으로 식민지 대중의 폐부를 찌른 가사와 곡조로 한국 대중가요 역사에서 첫 손에 꼽히는 대중가요이다.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가사 첫 대목을 따서 '황성옛터'로도 불리는 이 노래의 원명은 ‘황성(荒城)의 적(跡)’, 폐망한 왕궁의 흔적이란 뜻이다.
이 노래의 작곡자는 전수린. 연대는 이 나라의 무대예술이 유랑극단의 어설픈 무대에 명맥을 유지하던 1928년이었다. 이해, 어느 날 바이올린 주자로 순회악극단에 몸을 담고 있던 전수린은 공연의 여가를 빌어 옛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 만월대를 들르게 되었다. 비록 잡초만 우거져 인적은 없으나 옛 왕조의 영화는 무너진 성터에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때마침 보름달이 밝게 뜬 가을 밤, 잡초에 가려 폐허가 된 옛 궁궐의 터는 떠돌이 악극단원들의 마음을 울렸고 곧바로 오선지에 슬픈 멜로디와 가사를 써내려갔다.
그로부터 며칠 뒤, 순회극단은 황해도 배천군에 묵고 있었다. 마침 후줄근하게 비가 내리는 날이어서 단원들은 어쩔 수 없이 여인숙 침침한 골방에서 소일하고 있었다. 이런 때면 으레 피게 마련인 잡담의 꽃도 이젠 그 씨가 끊어졌던지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었으며, 그러다 보니 답답하기까지 한 침울한 공기가 방안을 메우고 있었다. 허기야, 허구한 날 거듭되는 유랑에 이젠 정말 지친 것인지도 모르겠다.
모두가 까닭 모를 한숨들을 몰아쉴 때 '전수린(본명 전수남)'은 바이올린을 더듬어 꺼냈다. 바이올린에서는 침울한, 그러나 감미로운 애수를 동반한 조용한 선율이 흘러나왔다. 이때 굳게 감긴 그의 눈에는 며칠 전 옛 고려왕조 수도였던 개성 만월대(송악산 기슭에 있는 고려의 궁궐)에서 느낀 감회가 어리고 있었다. 푸르고 차기까지 한 달빛, 그 달빛 아래 잡초를 스치는 바람 소리의 적막감, 흩어진 옛 기와, 기둥없는 궁터의 초석들, 그렇게 작곡가 전수린은 개성 만월루 방초 우거진 고궁 옛 성터에서 뼈저리게 느껴지는 민족의 슬픈 감회를 오선지로 나타내었다.
이렇게 해서 '황성 옛터(荒城의 跡)'의 선율은 태어났다. 이 선율에 그 악극단의 대표였던 왕평이 작시해서 가사를 붙였다. 노래는 이애리수가 맡아 연습했다. 그리고 1928년 늦은 가을 이 노래는 단성사에서 이애리수가 불렀고 사람들의 입을 통해 널리 전해지게 된다. 이후 '황성옛터'는 1932년 ‘황성(荒城)의 적(跡)’이라는 제목으로 빅터레코드에서 정식 음반으로 발매된다.
당시 서울극단 취성좌 공연 때였다. 청순한 여가수 이애리수의 등장은 만장 관중의 환호성 섞인 박수를 받았다. 박수가 지나고 다시 정숙해 졌을 때...,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장내는 갑자기 숙연해졌다. 저마다 그녀의 노래에서 다시 한번 망국의 뼈저린 한을, 그리고 잃어버린 조국에의 그리움을 되새겼는지도 모르겠다. 어떻든 앙코르의 요청이 터져 나오고 그래서 관객들이 따라 부르고, 따라 부르는 사람들의 두 뺨에는 자기도 의식하지 못하는 눈물들이 흐르고 있었다. 특히 나라를 잃은 아픔을 폐허에 빗댄 가사와 슬픈 왈츠의 곡조는 많은 사람들을 눈물짓게 했고, 조선총독부의 탄압에도 불구하고 전국으로 급속히 퍼져나갔다.
당시 이 노래가 배달의 민족혼을 일깨운 데 비상한 관심을 끌자, 작곡자와 작사자를 함께 구인해서 혹독하게 조사하는 한편 노래는 금지곡으로 못 박고 말았다. 그러나 일본 경찰의 심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숨어서 전해졌다. 그뿐만 아니라 이 노래를 금지했던 일본인들조차 "조선의 세레나데"라고 하여 즐겨 애창하였으니 그만큼 이 노래가 담았던 예술성과 호소력은 컸던 것이라 할수있다.
정작 해당 곡을 부른 이애리수는 음독자살 소동까지 일어난 후로 배동필의 부모한테서 연예계에서 완전히 은퇴하고 주변인들에게 연예인인 것을 발설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간신히 결혼하고 나서는 가정주부로 지냈으며, 1960년 이후로는 평범한 가정주부로 지낸다는 소식만 전해진 채로 잊혀졌다. 사실 딱히 연예계에 복귀하지 않더라도 최소한 TV와 라디오에 출연하거나 언론사 인터뷰에 응하는 식으로 근황을 전할수도 있었고, 아니면 학자들과 만나서 당대의 연예계 생활이나 음악관련 풍문들을 증언하는 식으로 근황을 전할수도 있었지만 어떠한 인터뷰에도 응하지 않은탓에 학자들조차도 이애리수가 죽은줄만 알았다가, 2008년에서야 근황이 알려졌으며, 2009년 향년 99세의 나이로 작고했다. 자식들도 나중에 어머니가 말하기전까지는 가수생활을 한줄 몰랐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애리수
한영애
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서린 회포를
말하여 주노라
아아 외로운 저 나그네
홀로이 잠 못 이뤄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져요
성은 허물어져 빈터인데
방초만 푸르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아 가엾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려
끝이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나는 가리로다 끝이 없이
이 발길 닿는 곳
산을 넘고 물을 건너서
정처가 없이도
아아 한없는 이 설움을
가슴 속 깊이 안고
이 몸은 흘러서 가노니
옛터야 잘 있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