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씨름 이야기
나는 기억력이 좀 있는 편이다.
안 믿겠지만,
만 나이 세 살이 안 되던 시절의 일도
가끔 기억나기도 한다.
어쩌면
1.4 후퇴라는 이름의
피란 갔던 시절이니까
아마 끔찍한
트라우마의 잔상일 수도 있을 것이다.
.
625동란으로 피란을 갔다.
서울을 떠나
아버지 등에 업히기도
또 걸리기도
몇 날 며칠을 아니면
한두 달 이상 갔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산도 넘고 물도 건너고
고향(경북 상주) 앞으로 계속 걸었던
기억이 난다.
.
피난처(고향)에 다 왔었는가 보다.
아주 넓은 강이 하나 나왔다.
특히
그때 아버지는
나를 업고 도강을 하셨다.
어린 마음에
몹시
죄송한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강물은 깊지 않았는지
등에 업힌
나의 발등을 적신 것을 보면
아버지의 허리춤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그 정도면
설령 나이가 더 들었어도
나는 꼴깍 잠기는 깊이였을 것이다.
아무튼 그땐
그 강이 그렇게 깊고 넓었었다.
.
나중에 철이 들고 나서
그 강의 이름이 낙동강 지류인‘뒷 내
(또 다른 정식 명칭이 있을 것이나
그것은 모르겠다)’라는 걸 알게 된다.
그곳에서
유년기를 보내며
그곳의
상주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졸업을 했다.
졸업하기 전까지 등. 하교 때
반드시
그 강을 건너다녀야 했다.
대충 시오리 길이었다.
즉
왕복 30리 길을
등. 하교를 했던 것이다.
.
여름철 장마 때면
10리 길을 더 가야
엉성한 나무다리가 있고
그곳을 통하여 학교를 다녔다`.
그래도
그런 장마철에
가끔 신나는 일이 있다.
등교를 했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면
선생님은‘뒷 내 건너서
등. 하교하는 아들(애)은 손 들어~!!
하신다’
그리곤
물 불어나기 전
빨리 집에 가라며 보내 주신다.
그런 날은
땡이 무엇인지도 모르며
“와~! 함성과 함께
땡 땄다”라고 신나 했다.
부러워하는 눈초리를 뒤로하고
100m 달리기 선수처럼
교실을 뛰쳐 나왔다.
.
그 뒷내에는
정말 넓고 고운 백사장이 있었다.
어쩌면
가보지 못한 명사십리만큼
길고 고운 백사장으로 기억된다.
요즘 같은 여름날이면
하교길에 발가벗고
목물이나 개헤엄을 치기도
또 어떤 경우는
힘자랑 겸 씨름도 하곤 했다.
.
나와 같은 반에
‘수식’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아마도 상급 학년
즉
4학년 때부터
한 반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당시로는
부자로 알려진 과수원집 아들이다.
나는 늘
배가 고프고 허기진 아이였기에
키가 작았다.
그러나 수식이네는
과수원집인 만큼 잘 먹고 잘 자라
나보단
머리 하나 더 있을 만큼
키도 컸고
우선 떡대가 좋았다.
수식이는
학년 전체에서
가장 씨름을 잘하는 아이 중의 하나였다.
기술도 기술이지만
우선
덩치로 제압할 만큼
힘과 실력(?)이 있었다.
.
학교에서 선생님은
가끔 체육 시간에
씨름 경기를 시키시곤 하셨다.
그러면
늘 수식이를 포함한
몇몇 아이들이
씨름판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그리고 어쩌다
수식이와
내가 시합이 붙으면 판판이 깨지고
단 한 번을 이긴 적이 없었다.
당시는
체급이고 뭐고 없으니
재수 없으면
그런 덩치 큰 놈들이랑
미스매치가 될 때가 많았다.
.
언젠가 아마
그 사건이 벌어진 날이었을 것이다.
역시 체육 시간에
나와 놈(수식)의 미스매치가 벌어져
나는
모래바닥에 내동댕이 쳐졌다.
어찌나 쎄게 내동댕이 쳐 졌는지
모래판 밖으로 던져져
어딘가 찰과상을 입고
아프고 억울한
눈물까지 흘렸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
아!
그러고 보니 소개할 걸 깜빡했다.
수식이네 과수원은
뒷내를 건너 5분 정도에 위치 해 있었고
우리 집은
그곳에서 10리는 더 가야 하는
골짜기에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뒷내를 건너야 하는 수고로움은
놈이나 나나 같았다.
.
눈물까지 찔끔거린 그날
놈과 함께 하교를 하며 뒷내에 도착을 했다.
아마
그날 대여섯 명이
함께 하학을 하던 길이었다.
뒷내를 건너고
백사장이 나오자
불현듯
낮에 학교에서 놈에게
내동댕이쳐진 몰골이 생각났다.
.
나는 놈에게 제안을 했다
“야~! 수식아~!
내 오늘 낮에 학교에서
너한테 씨름 진 기 너무 억울항기라~!
우리 여게서
다시 한 판 붙어 보자”는
나의 제안에
놈은 피식 코웃음을 치며
“오야~! 조타
까이꺼 100판인들 몬하겐나?”라며
호기롭게 반응을 했다.
.
갑자기
씨름판이 벌어지며
나머지 급우들은 졸지에
‘식이 이겨라~! 뱅규 이기라~!’
응원을 벌였다.
그러나 한 판, 두 판, 세 판.....
열 판, 스무 판, .....
40판, 50판....
아무리 용을 써도
다윗과 골리앗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무 판 쯤 갔을 때
응원단은
“야~! 고마 집에 가자~!”라며
채근을 했지만,
나는
수식이를 놓아 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한 판이라도 이겨야 했다.
그러나
50판을 넘어서자
결국 수식이는
“내는 고마 할란다~! 낼 또 하자~!”
그러나
나는 “딱 한 판만 더...”를 요구하며
10여 판 더 했을 것이다.
날이 어둑어둑 해 질 때까지
놓아주지를 않았다.
문제는
수식이 놈은
그날 저거 엄마가
상주 서문시장에서 새로 사 주신
난닝구가 걸레가 돼서야
우리의 씨름은 끝이 났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어두워진 산길을
겁을 잔뜩 먹고 뛰어서 집엘 갔지만,
이번엔
딴 애들은 벌써 집에 왔는데
무슨 짓을 하다 이제 왔느냐며
아버지한테 디지게 맞은
추억의 씨름 얘기다.
(하여튼 나는 지금 생각해도
보통 꼴통은 넘었던 것 같다.ㅋㅋㅋㅋ)
.
ㅡ에필로그:
10년 전 쯤이든가?
초등학교
총동창회에서 수식이를 만났습니다.
놈은 나를 보자마자
“야이~! 독한 노무시키~!
넘의 새 난닝구를
다 찢어 논 노무시키~!”라며
농을 걸어오더군요.
그래서 그랬습니다.
“일마야~~! 독한 놈은 니늠이다.
그 한 판 져주만 좀 안 되나?
나쁜노무 시키~! ㅎㅎㅎ...깔깔깔....
.
위의
씨름 얘기를 까맣게 잊고 있었습니다.
엊그제 이곳 페북에
어떤 분께서
제게 댓글을 달아 주셨는데
잠시
그 분의 이력을 보니
저와는 너무 잘 아는
초등학교
여자 동창생과 친구로 되어 있더군요.
그래서 혹시나 하고
‘우리 동창생입니까?’라고
문의를 드렸던바
갑자기 그분이 댓글
”오형!
수식이하고 씨름 50번 붙었다는
얘기도 들었습니다.
대단한 사나이입니다“라고
하시는 겁니다.
옛 동창 하나 더 찾아냈습니다.^^
감사하고 반가운 일이지요.^^
by/오병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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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어린 초등학교 시절 씨름 이야기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한판 저 주지 않은 그 수식인가 너무 했군요 ㅎㅎㅎㅎ 한 판 쯤 저 줄 만도 한데 ㅎㅎㅎ 잘 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