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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 도파민의 발산과 분열
사건은 잠잠한 복잡계를 뒤흔드는 새로운 생성의 벡터장의 출현으로부터 시작된다. 외부의 힘에 의한 것인지, 내부의 힘에 의한 것인지에 대한 불명료한 복잡계속에서 침잠하고 있던 욕망은 돌연변이를 일으키고, 노도와 같이, 태풍과 같이 회오리치며 지상을 뜨겁게 달군 열광, 환희, 도취, 황홀경의 신화가 된다. 분열의 창조적 생성은 IMF금융지배체제에 의해서 모두가 음울한 사회환경에 노출되었던 그 즈음에 시작되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국가의 역할을 축소시키고 세계적 지배체제를 만들고 있었던 그 시점에서, 애국주의의 열광은 축구경기장에서 시작되었다. 거리에는 수백만 명의 사람들이 운집해 있었고, 일사분란한 구호와 환호, 열정의 투사, 야유소리 등으로 거대한 복잡계의 생명체를 만들었다. 광장에서 거대한 군중들이 살아 움직이며 반응하기 시작한 것은 이때였다. 골이 들어가는 순간 사람들은 엄청난 에너지를 퍼 올리면서 광기를 발산하였고, 그 광기는 개인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집단적인 것이었다. 누가 해방의 기쁨과 그 짜릿함을 그렇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국가주의로 결집한 군중들의 해방감, 경탄, 도취의 힘은 다른 어떤 곳에서도 찾을 수 없는 식별 불가능한 영역을 보여주었다. 사람들은 분열되었고, 미쳐 있었다. 승리에 대한 열광, 국가에 대한 도취, 대/한/민/국이라는 자긍심, 이 모든 것은 축구가 주는 국가주의의 환각이기도 했다.
정신분석은 사회와 역사적 무의식에서 벗어난 가족무의식 속에서의 개인적 차원만을 다룬다. 그러나 분열에 대해서는 정신분석은 침묵할 수밖에 없다. 분열의 배후에는 늘 집단이 있으며, 그 집단은 새로운 영토를 만들고 영토를 생성시키며, 제도와 규범의 코드를 벗어나는 경향이 있다. 분열분석은 집단이 생성시키는 욕망의 성격에 대한 것이다. 붉은 악마의 욕망과 광기는 신자유주의 세계화 시대에 국가주의, 지역주의, 분파주의를 재가동시키는 낭만주의적 반동성을 갖고 있었다. 신자유주의 세계화라는 통합된 세계자본주의 사회에서, 국가라는 매듭은 매우 작은 영역에서만 유효하다는 한계를 지닌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직감하고 있었던 사람들을 국가주의를 통해서 재결집하고자 하는 낭만적 신화에 도취되고 만다. 물론 이 국가주의는 축구경기장 내에서만 가능한 신화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이미 신자유주의 현실에서 국가는 삶에서 매우 작은 영역에서만 작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축구에서 국가주의를 복원시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다시 애국주의로 결집할 수 있다는 그 자체에 만족하고 있었다. 그것은 매우 가상적인 국가에 대한 망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축구 자체를 넘어서 이러한 망상을 확장하는 것은 축구경기라는 게임의 영역에서 볼 수 없는 새로운 차원으로 다가왔다. 국가의 영원한 승리의 신화와 대한민국의 영원성을 입증할 수 있는 확실한 수단이 되었던 것이다.
집단적 분열증과 분열된 사회환경
광기와 욕망이 집단적으로 표출될 때에는 반드시 분열된 사회환경과 분열을 발생시키는 사회적 배치와 떨어져서 사고할 수 없다. 실업, 양극화, 빈곤, 비정규직 등의 사회적 배치의 급격한 변화가 있었던 시점에서 사람들은 국경을 넘나드는 초국적 자본을 제어할 수 있는 국가주의의 복원을 강렬히 열망하였다. 그리고 이 사회분열의 양상은 사회적 배치 속에서 집단적 분열증을 일으킬 수 있는 내재적인 기반이 되었다. 물론 축구경기 속에서는 히틀러와 같은 인물은 없었지만, 나 자신 속에 내재해 있는 수많은 파시스트들의 호출은 있었다. 분열된 사회 환경이 집단적 분열증의 직접적인 원인이 됨에도 불구하고, 대중들은 분열을 일으키는 사회와 투쟁하기를 원하기 보다는 과거의 국가주의의 망령을 복원하고, 그 국가주의가 새로운 지평을 열어줄 것이라고 욕망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붉은 악마는 축구경기장 내에서 이 모든 것을 달성하려고 했다. 물론 그것은 가상적인 신화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대한민국의 성공 신화만 있는 것은 아니며, 패배와 후퇴, 만성적자와 실업, 음울한 대한민국도 같이 있었다. 그러나 대중들의 무의식은 패배보다 승리와 성공의 신화에 욕망을 투사시키고, 매우 짧은 순간이라도 현실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그것은 달콤한 마약이며, 순간의 쾌락이다.
정신분열증은 집단적이며, 어떤 집단이 광기에 사로잡히는가의 여부에 따라 그것에 접속한 개인도 공명한다. 맹목성을 갖고 있는 승리주의의 신화 앞에서 집단의 분열은 모든 욕망을 투사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다. 국가의 승리 신화 앞에 너도나도 모두 주역이 된다는 점은 매우 환상적인 설정이며, 그 욕망의 강렬도 앞에 누구라도 광기에 사로잡혀 구호, 노래, 율동을 할 수 있다는 점은 매우 매력적이다. 만약 평상시에 한 사람이 붉은 악마의 복장을 하고 이런 행동을 한다면 사람들은 개인적인 광기의 영역으로 여길 것이지만, 집단의 광기는 이런 점에 대한 우려를 없애버리고 매우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 버린다. 붉은 악마현상은 집단적 정신분열증적 시각에서 그 집단의 행동의 형태, 장, 에너지에 대해서 평가해야 한다. 그것은 욕망의 지도와도 상관되어 있다. 어떤 욕망의 장 속에서 이러한 집단이 출현했는가? 그리고 그 욕망은 무엇을 만들어내려고 하는가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욕망은 분열을 통해서 생성되며, 그 생성은 사회적 배치를 뒤바꾸어낸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인가 기존의 것으로 해석하려고 하면 문제는 해명되지 않으며, 아직까지 기억에 없던 분열생성의 입장에서 그것을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분열에 사로잡혔던 많은 사람들은 붉은 악마에 접속하여, 자신 속에서 발산되는 집단도파민현상을 일체화시키고, 자신의 광기의 정체가 붉은 악마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그 광기는 붉은 악마여서라기보다는 분열된 사회적 배치에 투사되는 집단의 욕망의 저항이라고 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신화의 주체일 수 없으며, 약소국이라는 열등감, 점점 격화되는 경쟁이라는 분열된 환경의 사회적 배치, 양극화의 과정에서 끝없이 나락으로 추락함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안전을 보장해 주는 국가가 없다는 것 등이 내재적인 무의식속에서 작동하였다.
붉은 악마는 파시스트인가?
붉은 악마는 파시스트인가라는 논쟁은 그 시점에서 제기되었다. 사회적 소수자들의 현실, 사회적 패배자들의 열악하고 절박한 현실, 착취 받고 억압받는 사람들의 현실은 대한민국의 승리의 신화에서 배제되어 있었으며, 국가에 대한 승리에 대한 열망은 당연히 미시파시즘과 공명한다는 혐의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승리주의, 성공주의의 다수자들의 열망은 이미 패배한 사람들에게 배려와 보살핌의 손길을 주지 못한다. 오직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승리만이 신화의 주인공이 될 자격이 있으며, 이미 그 반열에서 배제된 사람들은 논외가 된다. 이들이 생각하는 승리에 대한 열망에는 패배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배려나 관용이 없으며, 승리와 성공한 사람 이외의 보이지 않는 영역 - 이주민, 장애인, 아이, 노인, 여성, 광인 - 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다. 이러한 사고 속에서 친근함과 재미와 열광을 주는 축구라는 매체는 선의의 경쟁이라는 자본주의의 이데올로기를 확산시키고, 성공한 사람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쾌감과 환호를 미리 느끼게끔 만들어준다. 스포츠파시즘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훌리건과 같은 무장한 인간집단의 조직화라는 세계적 현상을 굳이 얘기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을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역할과 경쟁을 정당화하고, 소수자 배제를 정당화하고, 승리한 사람들의 무의식을 미리 느낀다는 점에서 스포츠파시즘은 이미 존재하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하고 속도감 있으며 일사분란하며 승리에 대해서 욕망을 갖고 있는 선수들은 환호와 경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상대팀과 자신의 팀의 엄격한 구분은, 이겨야 한다는 미시파시즘을 작동시킨다. 무엇에 이겨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상대팀을 적이라고 규정하는 심리는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이제 스포츠는 경쟁 정도를 넘어서 전쟁 수준의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경쟁은 전쟁이라는 차원에서 이해되어야 할 수준의 것이다. 그 속에서 국가주의를 통해서 억압을 정당화하고, 억압을 욕망하는 기괴한 미시파시즘은 또아리를 튼다. 붉은 악마는 사실 축구를 통해서 가상전쟁을 하고 있었던 것이라고도 평가할 수 있다. 억압되어 있던 욕망을 분출시켰던 것은 축구를 통해서 이길 수 있다는 망상이 작동하였던 것도 한 몫을 한다. 애국주의는 미시파시즘과 공명하며, 아주 미세한 영역에서의 소수자에 대한 배제와 차별에 공모한다. 승리한 다수자와 패배한 소수자라는 사회적 배치 속에서 다수자의 안녕과 영원한 승리의 신화를 보증해 주는 것이 바로 국가주의의 정체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악마에 대해서 환호했던 많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민족주의, 국가주의, 지역주의, 분파주의를 스스로의 내면에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다수자 중심의 역사/사회적 무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므로 붉은 악마현상 이외에도 사회에는 미시파시즘이 뿌리내리고 있으며, 우리 모두에게 혐의가 있다. 문제는 그 어떤 수준에서의 미시파시스트인가의 문제이다. 폭력과 증오의 수준으로 나아간 미시파시스트인가 아니면 다수자의 차별과 배제에 공모하고 있는 잠재적 미시파시스트인가의 문제가 남아 있다. 붉은 악마에 대한 변호론자들은 그들은 증오와 폭력의 파시스트와 다르다고 항변한다. 그러나 미시파시즘의 영역은 무의식의 층위까지 뿌리내리고 있으며, 모든 매체, 기관, 단체, 기구, 집단 속에서 작동하고 있다. 그런 포괄적인 의미에서 붉은 악마는 분명 미시파시스트들의 집단이다.
분열분석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은 긴밀한 연관을 갖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 탐구하다보면 자본주의 사회가 잘못된 발신음에 의해서 이중적으로 구속된 사회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상대의 패배가 곧 나의 승리라는 발신음과 나의 승리가 상대방에 대한 압도적 우위라는 발신음과 같은 것이다. 분열은 이러한 이중구속의 경쟁상황에서 시작된다. 그것은 복잡계로 진입한 사회환경을 매우 단순한 분열의 양상으로 만들어버린다. 물론 분열은 단순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분열은 미세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신경망과 같은 사회에 집단적으로 전염되면서 생성된다. 분열은 광야무의식과 같은 지평으로 순간적으로 집단을 던져버리며, 이제까지 경험해보지 못했던 위대성의 영역에 대한 인식을 하게 만든다. 붉은 악마는 광야에 투여되는 집단무의식속에서 증식하는 하나의 복잡계 네트워크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승리에 의해서 도취된 감정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먼저 고립되어 있던 가족이라는 환경을 벗어나 거리거리로 광장으로 뛰쳐나왔다. 그들은 사실 어떻게 보면 분열되어 있고, 미쳐 있었다고도 평가할 수 있다. 대중들은 자본주의 세포적 형태인 가족단위로 고립되어 있다가 순식간에 일체화된 집단무의식, 사회/역사적 무의식, 광야 무의식으로 투사된다. 물론 이러한 광인과 같은 행동은 끊임없이 생성되는 욕망과 욕망을 억제하려는 반생산의 국가사이에서 갈림길에 선다. 그러나 사람들의 분열은 기묘하게도 국가주의를 욕망하고, 예속을 욕망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행동으로 전이된 집단의 행동 속에서 나타난 전체주의의 망상적 편집증의 반동적 흐름으로의 전변이다. 최초에는 혁명적이었던 분열증은 편집증에 사로잡혀 제어된다.
국가주의적 편집증이 오히려 집단의 분열에 대해서 통제의 시각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를 욕망하는 역설은 괴기스러운 역설이다. 그러나 분열의 과정은 광장을 열고, 잡다한 대중의 삶의 공간으로 바꾸어버린다. 광장에서 알 수 없는 대화들이 오가며, 분자적 수준에 대한 접속은 시작된다. 제도적인 수준에서는 알 수 없는 탈영토화 되고 탈코드화 된 행위양식들이 광장에서의 대중들의 생태계에서 존재하게 되며, 자신을 분열시키는 자본주의의 사회환경에서 벗어난 분열을 통해서 생성시킨 새로운 환경을 집단생태계 속에서 갖게 된다. 사람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집단에서 식별 가능한 집단으로 비추게 되지만 사실상 기존 질서에서는 파악될 수 없는 새로운 수준의 행위양식을 보여준다. 이것은 광장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분열을 통해서 새로운 장을 여는 데 매우 혁신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사람들은 욕망이 만들어 놓은 벡터장 속에서 새로운 현실을 재구성하기 시작했다. 붉은 악마가 열광했던 대한민국이 효순, 미선의 죽음 앞에서도 사법권조차도 갖고 있지 못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의 대중들의 행동역학의 변화가 촛불시위를 만들었고, 대중들은 새로운 벡터장 속에서 광장민주주의라는 새로운 영토로 진입하게 되었다. 욕망의 흐름과 접속은 자본주의의 기계장치와는 다른 조립을 할 수 있는 새로운 기계를 만들어낸다. 그러한 기계는 무의식속에서 서식하며, 조립되고, 증식하는 욕망하는 기계라고 할 수 있다. 붉은 악마의 기계장치는 제도화되고 덩어리진 몰적 집단이 아닌 비제도적인 분자적 집단의 수준에서 시작되어, 새로운 수준의 기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대중의 역능을 보여주었다는 데 의미가 있다. 대중들은 역능을 갖고 있는 주체, 분열을 통해서 생성으로 나아갈 수 있는 주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집단적 광기의 혁신적인 역할에 대해서 알게 되며, 그 광기조차도 자본주의 사회의 파시즘에 오염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나 분열의 지도는 새로운 광장을 개방하는 효과를 갖고 되었으며, 욕망의 벡터장을 통해서 광장민주주의로 나아갈 수 있는 새로운 출구를 보여주었다.
축구와 세계화
축구가 위로부터의 세계화라고 할 수 있는 금융세계자본주의의 지배명령질서가 주도하는 문화적 코드로서 작동하게 되었던 것은 축구를 즐거운 게임이나 감자칩을 먹으면서 감상할 정도의 프로그램을 넘어서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자유주의의 새로운 문화적 코드로서의 축구는 강렬한 욕망의 힘을 동원하면서도, 지역주의, 분파주의, 국가주의가 실존하고 있다는 망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결국 국가단위는 통합된 세계자본주의에서 하나의 축구팀의 경기정도로 한정되어 있는 것으로 조작된다. 국가도 이제는 즐기며, 환호하고, 기뻐할 대상이라는 것에 대해서 자연스럽게 포섭된다면, 국가주의의 망령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다. 거대한 체스판은 차려졌고, 국가의 다채로운 유니폼을 입은 새로운 주체들이 가상적인 영역에서 경쟁하고 가상전쟁을 벌인다. 유럽의 축구팀들이 다문화의 상징이라는 것은 역설적이면서도 축구가 갖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측면이기도 하다. 물론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라는 측면은 다국적인 축구선수들이 등장한다고 해서 완결될 수 없는 부분이 있다. 아래로부터의 세계화의 물결은 다채로운 욕망의 합성과 관련되어 있다. 횡단적 노마디즘이 사회에서 내재해 있다면, 욕망은 애국주의를 굳이 슬로건으로 걸지 않고도 작동할 수 있을 것이다.
축구를 통한 애국주의는 매우 천박한 수준의 국가주의를 작동시키는 수단이다. 이미 존재하지 않는 국가, 사회적 안전을 책임지지 않지만, 전체를 자임하는 부분으로서의 국가의 통합 능력을 다시 복권시킨다는 것은 탈근대자본주의하에서 불가능한 일에 가까운 것이다. 비록 신자유주의 세계화라고 하지만 국가라는 망령을 추방하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새로운 전지구적 책임주체로서의 집단적 주체성은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금융독과점과 결탁한 제국의 영향력이 자신들의 문화와 삶의 양식을 만들어가려는 이미지, 상징, 코드에서 조작을 통해서 관철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 속에서 축구는 하나의 문화적 행위양식으로서 존재하고 있으며, 철저히 이러한 자본주의에 복무하는 문화로서 존재하고 있다. 붉은 악마에 환호했던 대중들의 욕망의 실존은 이러한 지점에서 세계화라는 지점에 역행하고, 그렇다고 아래로부터의 세계화라는 지점에 대해서도 역행하는 지점에 있었다. 그 욕망은 현실에서는 달성될 수 없었던 정말로 슬로건이 아닌 대한민국의 위대성에 대한 염원이었다. 시대는 적절한 파시스트를 만들어내고, 보통사람으로 이들을 위장해 낸다. 붉은 악마는 세계화시대가 만들어 놓은 낭만적인 국가주의의 레파토리이며, 그 낭만성과 환상적인 감수성 덕분에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니 모든 사람들이 위로부터의 세례화의 문화양식임에도 불구하고, 국가주의를 외치는 체스판을 쥐고 있는 사람들이 비밀을 모른 체 바락바락 소리를 질러댔던 해프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축구는 단순히 TV를 시청하는 한 개인의 무의식의 수준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지구적 무의식의 수준에서 위치하며, 대량생산되어 지구적 차원의 미세한 무의식을 조작하는 전지구적인 사람들의 욕망을 사로잡는 문화양식인 것이다.
승리에 열광한 사람들
한일월드컵 시기 붉은 악마는 한편의 드라마였고, 신화였고, 역사였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붉은 악마는 각 구단 서포터즈의 토양이 되었고, 축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들어냈다. 사실 한일월드컵을 보던 사람의 절반은 업사이드조차 모르던 사람이었다고 한다. 붉은 악마가 보여준 새로운 욕망의 벡터장은 광장민주주의의 토양이 되었고 비제도적인 영역에서 촛불시위로, 제도적인 영역에서 노사모로 이어지는 욕망의 집단적 흐름이 되었다. 그러나 붉은 악마는 승리주의, 성공주의라는 미시파시즘적인 흐름을 강렬히 만들고, 사회적 안전과 배치에서 국가가 해야 할 책임을 방기한 국가에 대해서 열광하는 기괴한 역설을 보여주었다. 특히 소수자들의 삶을 배제하고, 경쟁을 독려하며, 승리의 신화만을 욕망하는 이러한 스포츠의 마인드는 매우 불안정한 욕망의 지도에서 분열적 양상을 보여주었다. 붉은 악마의 상업성 시비 이후에 조용한 변화가 찾아 왔다. 붉은 악마가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해서 기금을 조성하고, 그들을 지원하는 조용한 실천에 나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조용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붉은 악마가 보여주었던 강렬한 욕망의 흐름은 여전히 승리에만 몰입되어 있다. 우리 사회는 패배한 사람들에게 박수를 쳐주고, 환호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질서의 실험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쟁에서 지치고, 패배하고, 추락한 사람들에게 야유를 퍼붓는 승자독식의 문화는 극복되어야 할 대상이며, 욕망에 있어서도 자주 관리하고, 미시정치를 작동시킬 수 있는 책임성 있는 문화가 필요한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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