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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순종하는 사람들
(행 9:10-19)
1. 바울에게 안수하는 아나니아
① 선교보고
도미니카 선교
도미니카에 거주하는 헤이티인을 위한 선교
기도해 주셔서 도미니카 선교를 잘 다녀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단기 선교를 오랜만에 가게 되어 설레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작년부터 가려고 계획했었는데 사정이 있어 올해에야 합류하게 되었습니다.
토론토의 열린교회, 몬트리올의 람원교회가 작년에 연합해서 선교를 진행했고 올해는 제가 함께 하면서 벨빌교회가 함께 할 수 있는 것이 있는지 살펴보았습니다.
먼저 이임성 선교사님을 통해서 헤이티의 상황을 알게 되었고 선교사님을 후원하면서 헤이티를 위해 계속 기도했었습니다.
하지만 헤이티의 상황이 불안정해지면서 이임성 선교사님은 철수하게 되었는데 도미니카에서 헤이티를 위한 선교를 할 수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한 교회가 다 담당하기 어려운 일도 여러 교회가 함께 하면 쉽게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열린교회가 주축이 되고 람원교회와 벨빌교회가 참여하는 선교로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이번 선교는 세 교회가 연합하여 선교하는데 방향을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기도하면서 준비했는데 귀한 만남을 허락해 주셨고 학교와 교회를 연결해 주셨습니다.
먼저 도미니칸 크리스챤 스쿨에 연결되어 VBS와 찬양, 율동, 게임, 영화 상영, 그리고 어르신들을 위한 돋보기 안경 사역, 뜨게질, 그리고 지역교회의 페인트칠까지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번 선교가 선교팀의 기도응답이기도 했지만 크리스챤 스쿨의 기도응답이기도 했습니다.
도미니칸 크리스챤 스쿨도 정부의 지원을 받기 때문에 정부가 요구하는 학사정책에 따라서 종교교육을 할 수 없었는데 저희 선교팀이 가서 성경공부와 찬양, 율동을 가르치고 기독교 영화를 보여주면서 학교가 원하는 기독교 교육을 할 수 있었습니다.
또 정부에서 요구하는 도서관의 규모를 맞추지 못해 경고를 받았었는데 이번에 선교팀을 통해 5단 철제 책장을 6개 조립해서 학교에 기증하면서 정부의 요구대로 도서관 시설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헤이티인들이 출석하는 교회에 가서 예배드릴 수 있었는데 그들의 예배는 뜨거운 찬양을 부르며 드리는 열정적인 예배였습니다.
다른 곳에 있는 헤이티인들의 교회를 방문했고 그 교회에서 운영하고 있는 학교도 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교회와 학교는 도미니칸 크리스챤 스쿨에 비하면 거의 학교라고 할 수 없을 정도의 열악한 시설이었습니다.
헤이티인들을 긍휼히 여기는 도미니칸 교회의 목사님이 자신들의 교회 건물 1층을 학교로 사용할 수 있게 무료로 대여해 주고 있었고 학교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교회 건물도 무료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년 선교는 헤이티인들의 교회와 학교를 도울 수 있는 방법을 찾아 실질적인 도움을 주기 위한 선교를 하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이번 도미니카 선교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배울 수 있었고 우리의 생각이나 계획과 다른 하나님의 생각과 계획을 배울 수 있었습니다.
이번 선교팀은 스스로 계획한 선교 계획 대로 된 것이 많지 않았는데 그래서 하나님께서 더 효과적인 선교로 인도하셨고 그것을 통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습니다.
② 환상 중에 주의 음성을 들은 아나니아
다소 사람 사울에게 안수하라
(행 9:11-12) [11] 주께서 이르시되 일어나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서 다소 사람 사울이라 하는 사람을 찾으라 그가 기도하는 중이니라 [12] 그가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느니라 하시거늘
오늘 본문도 자신의 생각과 계획을 뛰어 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순종하는 아나니아를 보여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스데반의 일로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일어났을 때 사울이라는 청년을 택하시고 그가 교회를 핍박하고 그리스도인들을 잡아가고 죽이는데 앞장설 때 내버려 두셨다가 다메섹에서 그를 만나주시고 그가 앞을 못 보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다메섹에 있는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를 불러 사울이라는 사람을 찾아 가라 하시며 그가 기도 중인데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들어와서 자기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는 것을 보았다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이미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환상을 통해 아나니아를 보내셔서 그의 눈을 뜨게 해 주시는 것을 보여주셨다는 말입니다.
③ 사울의 소식을 들은 아나니아
주의 성도에게 해를 끼치는 자
(행 9:13) 아나니아가 대답하되 주여 이 사람에 대하여 내가 여러 사람에게 듣사온즉 그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더니
하지만 아나니아는 사울에 대한 소문 때문에 환상 가운데 주님의 부르심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 소문은 예루살렘에서 주의 성도에게 적지 않은 해를 끼쳤다 하는 말이었습니다.
그 사람에게 가서 안수하라 말씀하시는 것이 잘못 된 것 아닌가 하는 반문입니다.
④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받은 자
안수할 필요가 있을까요?
(행 9:14) 여기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들에게서 받았나이다 하거늘
거기에 덧붙여서 여기 다메섹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사람을 결박할 권한을 대제사장에게 받아 가지고 왔다고 설명합니다.
주님께서 사울이 왜 다메섹에 왔는지 모르셨을까요?
주님께서 그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아나니아에게 가서 사울에게 안수하여 다시 보게 하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계획이 있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뜻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의 원함은 사울이 앞을 못 보는 채로 하나님의 징계 가운데 있는 것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아나니아를 통해 사울의 눈을 뜨게 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⑤ 이 사람은 이방인에게 내 이름을 전하기 위해 택한 그릇
그가 고난을 많이 받을 것
(행 9:15,16) [15] 주께서 이르시되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16] 그가 내 이름을 위하여 얼마나 고난을 받아야 할 것을 내가 그에게 보이리라 하시니
주의 뜻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하는 아나니아에게 주님은 보충 설명을 해 주십니다.
사울은 하나님의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택한 그릇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이름을 위해 고난을 얼마나 받을 것인지 보여주겠다 하십니다.
하나님의 일은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우리를 통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기 원한다면 우리가 원하는 뜻을 꺾는 것이 먼저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족하는 나를 위한 계획을 꺾고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에 굴복하면 하나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⑥ 사울에게 안수하는 아나니아
형제 사울아 예수께서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행 9:17) 아나니아가 떠나 그 집에 들어가서 그에게 안수하여 이르되 형제 사울아 주 곧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어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아나니아는 사울에게 안수하기 싫은 자신의 뜻을 꺾고 직가라 하는 거리로 가서 유다의 집에 들어갑니다.
집에 들어가서 사울에게 안수하는 아나니아는 사울을 형제로 부르고 있습니다.
그가 마음으로 굴복되지 않았다면 형식적인 기도만 했을 것인데 그는 자신의 뜻을 완전히 꺾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여 사울을 형제로 부르며 사울을 부르신 주님이 자신을 보내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네가 오는 길에서 나타나셨던 예수께서 나를 보내셔서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말해줍니다.
아나니아의 순종은 주인이신 예수님께 완전히 굴복한 순종이었습니다.
⑦ 눈을 뜨게 된 사울
세례를 받고 강건하게 됨
(행 9:18,19) [18]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된지라 일어나 세례를 받고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아나니아의 기도가 끝나자 즉시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져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고 음식을 먹고 강건해졌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인으로 믿는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때로 돌아보면 말로만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다고 하지는 않은지 의심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정말 예수님께서 주인이신 것이 실제라면 예수님의 말씀에 아나니아와 같이 무조건 아멘 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감동해 주시는 말씀에 순종해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것이지만 성령께서 아니라 하실 때 멈출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의 삶은 어떻습니까?
여러분이 정말 원하지만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아니라 하실 때 멈출 수 있습니까?
2.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은 사람들
① 돌에 맞아 죽는 순간에도 용서의 기도를 드린 사람
스데반의 기도
(행 7:56-60) [56]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대 [57]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제히 그에게 달려들어 [58] 성 밖으로 내치고 돌로 칠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59]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아나니아 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을 살펴보면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굴복하기 위해 대가를 지불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는 7장에 스데반 집사를 통해 그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스데반 집사는 성령으로 충만하여 하늘이 열리고 인자,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신다는 말이고 그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는 말입니다.
죄인인 인간이 하나님을 본다는 것도 신성모독에 해당하는데 그들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예수님께서 하나님 우편에 계신다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죽였다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들이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돌로 치기 시작한 것입니다.
돌에 맞아 죽고 싶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할 수만 있거든 이 잔이 내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셨는데 하물며 스데반도 죽지 않는 것이 자신의 뜻이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스데반은 자신의 생명을 내어 놓을 수 밖에 없는 상황을 만나고 맙니다.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인정하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신 것으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던 사람들이 자신도 죽일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차마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모든 사람의 주인이 되신 예수님을 부정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을 인정한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저들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기도하셨던 것처럼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말아달라고 기도합니다.
십자가를 지기 싫었던 자신의 뜻을 꺾고 십자가의 길을 가신 예수님, 생명을 내어 놓아야 하는 상황에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예수님을 인정하고 돌에 맞아 죽은 스데반 집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내려 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인 모델을 보게 됩니다.
② 고넬료의 집에 간 베드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은 위법
(행 10: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줄은너희도알거니와하나님께서내게지시하사아무도속되다하거나깨끗하지않다하지말라하시기로
(행 10:44-46)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두번째는 이방인과 교제할 수 없는 유대인인 베드로가 이방인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말씀을 전하고 성령께서 임하시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세례를 베푼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베드로가 이방인의 집에 가지 않을 사람인 것을 아셨기 때문에 미리 보자기에 싸여 있는 동물들을 세 번이나 보여 주시고 그것을 잡아먹으라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속되고 깨끗하지 않은 것을 결코 먹지 않았다고 말하며 거부하지만 하늘에서 나는 소리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 하지 말라 하십니다.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인 유대인인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 때문에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을 따라 고넬료의 집에 갑니다.
이방인과 교제하는 것이 위법이기 때문에 이방인의 집에 가지 않았을 베드로는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환상 때문에 자신의 뜻을 꺾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 가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도 하나님께서 받으신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말씀을 전할 때 성령께서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 오셔서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이는 것을 듣게 됩니다.
베드로가 만약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면 이방인 고넬료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복음은 이방인에게 전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알고도 자신의 뜻을 꺾지 않으면 복음이 전해지는 길을 막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③ 이방인에게도 전도한 사람들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 주 예수를 전하팜
(행 11:19-21) [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20] 그 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21]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고넬료의 집에 성령께서 임하셨다는 것을 사람들이 분명히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흩어진 초대교회 사람들은 그 때까지만 해도 복음은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했는데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서 헬라인에게도 예수를 전파했습니다.
유대인이신 예수님이 유대인인 제자들에게 복음을 가르치셨고 유대인인 사도들이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방인에게 말씀을 전할 때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셔서 수 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 왔다고 합니다.
주의 손이 함께 했다는 것은 성령께서 함께 하셨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뜻을 꺾고 이방인에게도 말씀을 전할 때 성령의 역사로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지게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 된 것입니다.
④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운 사람들
성령께서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행 13:2-4) [2]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이르시되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3]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 [4] 두 사람이 성령의 보내심을 받아 실루기아에 내려가 거기서 배 타고 구브로에 가서
예루살렘 교회의 파송을 받아 안디옥 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바나바와 바나바의 초대로 함께 동역하던 사울은 교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감당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담임목사와 수석 부목사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께서 시키는 일을 위하여 두 사람을 따로 세우라 하십니다.
안디옥 교회가 자신들의 교회만 생각했다면 담임 목사님과 수석 부목사를 성령님께서 시키는 일을 위하여 따로 세우라 하실 때 순종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디옥교회 성도들은 자신들의 뜻을 꺾고 성령님의 뜻에 순종합니다.
그래서 바나바와 바울을 통해 복음은 아시아 전역에 퍼지게 되었습니다.
⑤ 돌에 맞아도 복음을 전한 사람들
돌에 맞아 죽은 줄 알았던 바울이 일어나 더베로 가서 복음을 전함
(행 14:19) 유대인들이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와서 무리를 충동하니 그들이 돌로 바울을 쳐서 죽은 줄로 알고 시외로 끌어 내치니라
안디옥교회를 떠나 선교하는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었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하여 시작한 선교는 어렵고 힘든 환난의 길이었습니다.
루스드라에서 나면서부터 걷지 못하는 사람을 일으킨 것으로 사람들이 바나바와 바울을 신격화 하려는 소동이 났지만 그들을 진정시켰는데 안디옥과 이고니온에서 온 유대인들이 무리를 충동하여 바울을 돌로 치게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죽었다고 생각할 정도로 돌에 맞은 바울은 다시 일어나 더베로 가서 또 복음을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았습니다.
자신의 뜻을 꺾고 성령의 인도하심에 순종했음에도 불구하고 평탄한 길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면 하나님께 복을 받고 모든 것이 잘 되고 만사형통할 것이라 생각하지만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결과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었으며 바울도 돌에 맞에 죽을 뻔했습니다.
⑥ 전도 계획을 바꾼 사람들
마게도냐 사람의 환상을 보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인정
(행 16:6-10) [6] 성령이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시거늘 그들이 브루기아와 갈라디아 땅으로 다녀가 [7] 무시아 앞에 이르러 비두니아로 가고자 애쓰되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아니하시는지라 [9]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10]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뿐만 아니라 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려고 하는데 성령께서 말씀을 전하지 못하게 하십니다.
바울은 소아시아의 갈라디아, 무시아, 비두니아로 다니며 말씀을 전하려 하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 것을 경험합니다.
바울의 일행의 뜻은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는 것이었지만 예수의 영이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기도 중에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는 환상을 보고 아시아에서 말씀을 전하고자 하는 자신들의 뜻을 꺾고 마게도냐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르신 줄로 인정하고 마게도냐로 떠납니다.
소아시아를 넘어 유럽 선교가 시작된 것도 자신들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한 사람들을 통해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렇게 마게도냐로 건너갔지만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환대가 아니라 또 다른 환난이었습니다.
점하는 귀신 들린 여종에게서 귀신을 쫓아낸 것으로 바울 일행은 매를 맞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초대교회 선교는 환난의 연속이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적인 생각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들을 통해 복음은 전해졌고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얼마나 자신의 인간적인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마음에 주인으로 모셨습니까?
그렇다면 주인이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준비가 되셨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가 원하는 것을 주장하며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뜻을 꺾지 않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복음이 전해지는 통로로 사용하기 원하십니다.
기쁘게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복음의 통로가 되기 원하십니까?
그 길은 평탄한 길이 아니라 오히려 고난과 실패가 기다리고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때 말씀이 흥왕하여 힘을 얻게 되고 주의 손이 함께 하여 믿는 사람이 많아지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그 사람을 통해 복음이 전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게 하십니다.
자신의 뜻을 꺾는 사람만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 앞에서 목도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벨빌교회 성도 모두가 자신의 뜻을 꺾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는 것을 목격하는 감격을 누리는 자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3. 함께 드리는 기도
① 벨빌교회를 위한 기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셨기 때문에 자신의 뜻을 꺾고 주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 되어 누군가에게 전해져야 하는 복음의 통로가 되게 하소서.
작은 예물을 드립니다. 열에 하나 십일조를 드리고 여러 가지 제목으로 감사헌금을 드리며 선교헌금을 드립니다. 예물 드린 손길에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이 임한 자로 일어나 빛을 발하게 하소서.
이 물질이 쓰일 때도 함께 해 주셔서 하나님의 영광의 빛을 드러내는 곳에 쓰이게 하소서.
찬송 : 316장 주여 나의 생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