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편 배달부'라는 영화를 아시나요? 외딴 섬의 파도 소리, 바람 소리, 뱃속의 아기 소리를 소중히 담아 기약없는 벗에게 우편 배달하였습니다. 그는 시인보다 시인이었습니다. 은하별처럼 반짝였습니다.
언제부턴가 꼴찌에서 일등까지, 나는 간 데 없고 꼴찌에서 일등까지로만 남았습니다. 석차로 남고 평(坪)수로 남고 'cc'로 남고 '짜리'로 남았습니다. 온갖 잡스런 힘에 억눌리고 숫자에 짓눌려 나를 감추었습니다. 네온 사인 십자가로 몸을 감았습니다. 연속극 화면에 얼을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보기만 합니다. 그러나 나를 보지 않습니다. 들여다볼 나는 없고 조갑지처럼 지킬 나만 남습니다.
높은 곳 요란한 스테이지에서 온갖 잡된 숫자와 힘이 너울너울 춤을 춥니다. 권위가 춤추고 있습니다. 나들은 찬란한 스타들, 숫자들, 권위들을 넋놓고 올려다봅니다.
꼴찌에서 일등까지 나를 찾습니다. 나를 찾는 나를 찾습니다.
어떤 3층 구조물
이 구조물은 3층으로 되어 있다. 생긴 모양이 여느 3층 건물과 달라서 피라미드처럼 아래층일수록 넓고 위층일수록 좁다. 1층부터 차례대로 그 모습을 살펴보기로 하자.
1층의 모습
몇 해 전에 구조물 1층의 한쪽 구석에서는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파리에 있는 어느 한국 여행사 지국은 수소문 끝에 소르본느 대학 수료증을 한 부 구해 서울에 있는 본점으로 보냈다. 볼품없는 프랑스제 대학수료증은 금딱지 붙은 아주 훌륭한 수표증으로 둔갑했다. 아주 놀라운 솜씨였다.
며칠 뒤 한국의 로터리클럽과 라이온스클럽 회원 한 무리가 반나절 동안 소르본느에서 견학 겸 강의를 들었다. 한국의 이 도시 저 마을의 유지들에게 그 반나절은 실로 지루하고 하품나는 시간이었다. 그렇지만 그 지루함을 견뎌내고 열심히 하품을 했던 덕으로 그들은 금딱지 붙은 소르본느 수료증을 하나씩 받았다. 그날 악수를 나누며 수료증을 수여한 프랑스 사람이 여행사에서 일당을 몇 푼 받았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수료생들은 사각모를 쓰고 사진을 찍고 싶었지만, 프랑스에 그런 의식이 없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실망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유치원부터 대학원까지 입학식도, 졸업식도, 학위 수여식도 없으니 사각모나 가운 같은 게 있을 리 없다. 그런 것들은 미국이나 영국에 가야 구경할 수 있다. 어쨌든 그들은 소르본느가 특별히 개설했다는 특별강좌 과정을 무사히 마치고 한국에 돌아갔다. 금딱지 붙은 수료증들이 한국의 이 도시 저 마을의 로터리클럽과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의 집 거실 벽의 정면이나 응접실 벽 정면에 아주 잘 모셔져 있음은 안 봐도 알 수 있었는데 다음 이야기로 확인이 되었다.
다른 로터리클럽 회원들과 라이온스클럽 회원들이 동료의 거실이나 응접실에 모셔져 있는 프랑스제, 아니 한국제 금딱지를 보았다. 그들은 속으로 말했다. 프랑스 파리 소르본느라고!
그로부터 얼마 후, 또 한 무리가 영국 옥스퍼드의 한 귀퉁이에서 지루하고 하품 나는 강의를 들었다. 소르본느보다는 역시 옥스퍼드가 한 급 위였는지 반나절 동안이 아니라 하루 온종일이었다. 나이 지긋한 교수는 영국 최고의 석학이어서 영국역사도 가르쳤고 영국정치도 가르쳤고 영국경제도 가르쳤고 영국사회도 가르쳤다. 온종일 교수가 바뀌지 않으니 하품이 더 자주 나왔다. 이윽고 지루한 시간이 지났다. 그들은 미리 장만해 놓은 멋진 꼬리가 붙은 까만색 사각모자와 멋진 휘장이 감긴 까만색 가운으로 부리나케 갈아입고 미리 대기시킨 사진사 앞에 섰다. 고풍스런 배경이 보이는 그런 자리였다. 그때 별안간 호각소리가 들려왔다. 관리인이 달려오더니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것이 아닌가. 보통 낭패가 아니었다. 그들은 영국 최고의 석학이 수여한 금딱지 붙은 수료증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바쁜 일정에 따라 그들은 프랑스에 왔다. 퐁텐블로 성(城) 앞에 도착한 그들은 서로 약속이나 한 듯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까만색 사각모와 까만색 가운이었다. 그들은 16세기 초에 완성한 퐁텐블로 성을 배경으로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지금도 한국 땅 이 마을 저 도시 곳곳의 응접실이나 거실의 벽 정면에, 배경은 프랑스이고 모자와 복장은 여국식인 인물사진들이 큼직하게 붙어 있을 것이다. 손에는 영국제, 아니 한국제 금딱지 수료증을 소중히 들고 있는.
독자 중에 내가 한 가지를 빼놓고 지나간 것을 알아차린 분이 있을 것이다. 영국 최고의 석학이 옥스퍼드의 서무과에서 일하다가 은퇴한 사람이었다는 얘기를. 그가 일당을 얼마 받았는지도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나 앞의 프랑스인보다는 많이 받았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글을 읽고 또는 이 얘기를 듣고 사람들은 실소(失笑)를 금치 못할 것이다. 그런데 죄송스럽지만 나는 실소를 보내는 대부분의 사람들과 이 얘기에 나오는 사람들 사이에 큰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 역시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놀라움이 더 컸다. 부끄러움 없는 '집단적 가식(假飾)' 때문이었다. 여행사의 잘못이 큰 것처럼 보이지만, '집단적 가식'을 무릅쓴 수요가 없었다면 아무리 재주가 용한 여행사라도 그런 일을 벌일 수 없었을 것이다. 다른 구조물에서는 한 두 사람이 슬그머니 그런 행위를 할 수는 있다. 그러나 한집단이 한꺼번에 그런 행위를 할 수는 도저히 없는 일이다. 어떻게 그렇게까지 되었을까? 누가? 그리고 무엇이? 그들을 '집단적 가식'에 합의하도록까지 몰아붙였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구하려면 우선 구조물의 2층으로 올라가 봐야 한다.
2층의 풍경
2층은 상의 파티장이다. 온갖 상을 주고받는다. 사람들이 상 주기를 좋아하고 상 받기를 좋아하니 연일 늘어나는 게 상이다. 이 현상을 경제학 용어를 빌려 말하면, 스요가 무한대이고 공급처가 무한대이므로 생산 또한 무한대라고 하겠다. 그래서 별의별 상이 다 많다. 옛날에 초등학교에서 개근상장과 우등상장을 주었듯이, 근속표창장을 주고 훈장을 주고 대통령표창장을 주고 국무총리표창장을 주고 장관표창장을 준다.
훈장의 종류와 등급은 워낙 복잡해서 보훈처 담당자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다. 그래서 언론창달에 공이 많다면서 방우영 씨 같은 사람에게 1등훈장을 주었다. 장준하 선생에겐 그 사람들과 동열에 넣을 수 없다고 생각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2등훈장을 주겠다는 망발을 저지른 것도 어쩌면 훈장의 종류와 등급이 워낙 복잡한 까닭이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리하여 날이면 날마다 주고받는 게 상이다. 어린이날에 착한 어린이에게 상을 주듯, 중소기업의 날에는 중소기업인에게 상을 주고 영화의 날에는 영화인에게 상을 주고 연극의 날에는 연극인에게 상을 주고 체육의 날에는 체육인에게 상을 주고 과학의 날에는 과학자에게 상을 주고 수출의 날에는 수출한 기업에 상을 주는데 1억달러 수출상을 주고 10억 달러 수출상을 주고 100억 달러 수출상을 주고 신문의 날에는 신문인에게 상을 주고 방송의 날에는 방송인에게, 탤런트에게, 그리고 가수에게 상을 주고 광고의 날에는 광고인에게 상을 주고 소방의 날에는 소방대원에게 상을 주고 국군의 날에는 군인에게 상을 주고 상공의 날에는 상공인에게 상을 주고 보건의 날에는 보건요원에게 상을 주고 향토예비군의 날에는 향토예비군에게 상을 주고 재향군인의 날에는 재향군인에게 상을 주고 노인의 날에는 노인에게 상을 주고 스승의 날에는 스승에게 상을 주고 문화의 날에는 문화인에게 상을 주고 관광의 날에는 관광인에게 상을 주고 철도의 날에는 철도원에게 상을 주고 저축의 날에는 저축인에게 상을 주고 농어업인의 날에는 농어민에게 상을 준다......(이 목록에 없는 상을 타신 분 중에 불만 있는 분은 연락해주시면 바로잡을 것을 정중히 약속드림). 그리하여 '무슨 무슨 말'이라고 정한 속 알맹이는 일찍부터 간 데 없고 상을 주고받는 행사가 되었다.
상 파티는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문학계도 예술계도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더욱이 장사에도 도움이 되는데 왜 '상 퍼레이드'에서 빠질 것인가. 이런 문학생이 생기고 저런 예술상이 생긴다. 그래서 이제는 일반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문인들조차도 문학상을 다 헤아릴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게 되었다.
프랑스의 권위 있는 문학상은 가장 유명한 공쿠르상을 비롯하여 세 개로 알고 있는데 그것들도 로비 활동을 벌이는 서너 출판사가 나누어 먹는 중이라는 험담들이 나오고 있다. 상을 타기만 하면 베스트셀러를 떼어 논 당상인데 제아무리 프랑스 문학인들 자본주의사회 바깥에 있는 게 아닌 다음에야 머리통 터지는 싸움이 일어나지 않는게 오히려 이상한 일인지 모른다. 네 번째로 궈누이있는 문학상도 출현할 만한데 나오지 않는 것을 보면 상보다 베스트셀러를 더 좋아하기 때문인가. 상의 권위가 없어지면 베스트셀러도 끝장날 테니까. 어쨌든 권위있는 문학상이 세 개이든 네 개가 되든 나로서는 '즈망푸(내가 알 게 뭐야)!" 이니 상관할 바 아니다.
상이 밤하늘의 별만큼 많으면 두 가지 일이 당연히 일어나야 마땅하다. 하나는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일' 이고 또 하나는 상의 권위가 주저앉는 일이다. 그런데 이 구조물의 2층 상 파티장에서는 첫 번째는 해당되는 데 두 번째는 별로 해당되지 않는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여 진짜 상다운 상은 다른 상과 섞이기 싫어 아예 기피하여 없고 또 진자 상다운 상은 상금 출연이 어려워서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상의 권위가 주저앉지도 않는다.
상이 그렇게 많은데 상의 권위가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딱 두 가지다. 우선 절대적인 이유는 사람들이 상을 무지 좋아한다는 것이다. 사족을 못쓰게 좋아한다. 그래서 경쟁자가 워낙 많으므로 상의 가치가 떨어지지 않는다. 둘째는 상대적인 이유다. 상이 너무 많으니 이 놈도 받았고 저 놈도 받았는데 내가 못 받아? 나를 어떻게 대접하는 거야, 이거! 뭐, 이런 것이다. 그리하여 노벨상을 거부했던 사르트르는 다른 구조물 사람이니 논외로 치더라도, 박정희 정권 초기에 5.16 문학상인가의 수상 소식을 듣고 "상 줄 사람에게 물어 보고 수상자를 발표하라!"고 일갈하고는 상 받기를 거부했던 시인 유치환의 정신은 잊혀진 옛이야기가 되었다.
여기서 우리 구조물과 다른 곳의 상 파티장을 잠깐 엿보자.
1998년 세계축구(월드컵) 경기에서 프랑스가 우승하자, 프랑스 정부는 감독과 선수 총 23명에게 '레지용 도뇌르'란 프랑스의 훈장인데 몇 가지 급이 잇는 모양이나 우리 구조물처럼 그렇게 복잡하지는 않다. 그리고 프랑스에는 무슨 날에 무슨 상을 주는 관습은 없다. 어쨌든 훈장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선수 중의 하나인 지네딘 지단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이 실제로 레지용 도뇌르를 받을 자격이 있는지 말하기 어렵다. 이 훈장은 전쟁터의 행위에 보상하기 위하여 생겨난 것인데, 프랑스에 공헌한 사람들을 구별해서 대우한다는 것이다...... 나는 조금 거북스러움을 느낀다. 몹시 자랑스럽기도 하지만 말이다."
브라질과 붙은 결승전에서 헤딩으로 두 골을 올려 프랑스팀을 승리로 이끈 지네딘 지단은 알제리에서도 산악족이며 소수민족인 카빌리 출신이여 마르세이유 교외 지역에서 가난하게 소년시절을 보낸, 그야말로 일반사람 중에서도 하층의 일반사람이다. 그런 그가, '훈장이란 전쟁터의 행위를 보상하는......'이라든가 '거북스러움'을 말하고 있다.
처음에 나는, '그 친구 제법 맹랑하네!' 하고 지나쳤다. 그런데 '훈장이란 전쟁터의 행위를 보상하는......'이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면서 갑자기 내 시야가 밝아졌다. 우리들의 2층 모습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것이었다. 그 숱한 상은, 그러니까 연병장에서 시작된 것이다. 나도 옛날 옛적에 상을 받았는데 운동장에서 받았다. 국민학교의 운동장에서 연병장으로 발전한 것이다. 아니 원래 운동장과 연병장은 한 가지였다. 그리하여 박정희 대통령은 연병장 문화를 굳건하게 확립시킨 일들 공로자였다.
전두환 대통령은 하사관부터 참모총장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병에게 '국난극복기장'을 수여하였다. 그 모든 장병의 공으로 광주항쟁을 진압할 수 있었다며 기장인지 훈장인지 나누어주었는데, 상의 힘을 빌어 모든 장병을 광주항쟁 진압 편으로 몰아간 것이다. 그는 솔직해서 상의 용도가 무엇인지 솔직하게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즉 상이란 받는 사람을 위한 게 아니라, 주는 사람을 위한 것임을.
연병장의 훈장 수여식 광경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아낼 수 있다. 하나는 단상이 있고 단하가 있는데 단상은 권위의 이름으로 단하에 상을 내리는 것이다. 또 하나는 사람보다 계급이 앞선다는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수출의 날 행사도, 신문의 날의 행사도, 예술의 날 행사도, 장소는 조금씩 다르고 모양새도 조금씩 다르지만 결국 훈장을 계급장처럼 붙여주는 연병장 행사와 큰 차이가 없는 것이다.
훈장을 단 사람에겐 훈장이 있을 뿐이다. 계급장을 단 사람이 계급장만 있는 것처럼. 속 빈 강정이 껍데기만 있는 것처럼. 사람이 발언하지 않고 상이 발언하다. 상에 경배하라. 권위를 숭배하라. 그리하여 소우주라 했던 인간은 간 데 없고 상에 경배하고 권위를 숭배하는 강정이 되었다. 밤하늘에 반짝거리는 별 같다던 마음들은 지상의 '스타'들을 바라보는 해바라기들이 되었다. 그러니까 1층 사람들이란 2층의 상 파티에서 소외된, 그러나 2층 사람들과 별 차이 없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 상을 받기로 한 것뿐이다. 어쩌면 순진하고 불쌍한 사람들이다. 이제 3층으로 슬그머니 올라가 보자.
3층, 상 제작실
3층은 아주 중요한 곳이다. 상의 제작실이며 '권위'들의 보금자리이다. 3층은 상을 제작하여 주는 사람들, 즉 권위들에게만 개방되어 있다.
어떤 프랑스인은 프랑스 문학상을 일컬어, "심사위원들에게는 우등 콤플렉스를 주고 수상자에게는 열등 콤플렉스를 준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얘기는 우리의 구조물과는 아주 동떨러진 딴 세상의 얘기다. 우리 구조물에서 상의 권위는 절대적이다. 아니, 절대적이어야 한다. 강정은 강정 그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권위가 절대적으로 남아 있을 수 있다. 원래 중요한 것은 권위의 확대, 보전이었지 상이 아니었다. 상은 다만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 강정들에게 열심히 상을 줌으로써 서로 다투어 강정으로 남아 있게끔 하는 것이다.
상과 권위와 강정 사이의 삼가관계가 좀 복잡하므로 다시 풀어서 말하면 다음과 같다. 상은, 그러니까 강정들에게 주는 강정제(强精劑)인데(앞의 강정과 뒤의 가엊ㅇ은 서로 다른 말이다) 강정으로 남아있도록 하는 강정제이다. 강정으로 남아 있는 한, 권위는 계속 확대보전된다. 그래서 권위는 끊임없이 상을 제작하여 배급하는 것이다. 이 삼각관계를 이해하면, 이 구조물 속에 왜 그렇게 상이 많은지, 그리고 상이 많은데도 권위가 떨어지지 않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우리가 3층 상 제작실에 침입해 들어간 것과 때를 같이하여 새로운 상 하나가 제작 중에 있다. 이름하여 '김활란상'이다. 마침 아주 잘되었다. 이 김활란상을 잘 살펴보면 우리는 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구조물의 역사까지 알 수 있다. 그리고 내가 말한 강정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단서를 제공해줄 것이다. 구조물의 역사는 상의 역사인데, 또한 강정의 역사이기도 한 까닭이다. 정신대 할머니들을 단 1초 동안만 떠올렸어도 감히 생각조차 할 수 없는 김활란상의 제작 의도에도 강정의 역사가 그대로 들어 있다.
이화여대는 김활란상을 제정하는 사유를 밝히면서 첫마디를 이렇게 시작하고 있다.
"한국 현대사에 불멸의 자취를 남긴 김활란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여......"
이 말에는 단 하나의 단어도 틀린 데가 없다. 그렇다. 김활란 박사는 한국 현대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자취를 남겼다. 이화여대의 상 제작팀이 계승하고자 하는 게 김활란 박사의 '정신'이다. 그것도 아주 정확하게 맞다. 나로선 돌이키고 싶지 않은 '정신'이지만 계승하겠다고 나선 사람들이 있으니 되살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그렇다고 하눅ㄱ 현대사에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김활란 박사의 발자취를 낱낱이 열거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서너 가지만 뽑아 보면 이런 것이다(-<인물과 사상> 99년 1월호. '김활란상'이라니...고은광순-에서 재인용).
-이제야 기다리고 기다리던 징병제라는 '감격'이 왔다...... 우리도 국민으로서 최대 책임을 다함으로써 진정한 황국 신민으로서의 영광을 누리게 된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황송하고 '감격'스러운지......(<신세대> 1942년 12월)
-우리 학교가 앞으로 여자 특별양성소 지도원 양성기관으로 새로운 출발을 한 것은 당연한 일이며 황국 여성으로서 다시 없는 특전이라고 '감격'......(<매일신보> 1943년 12월 25일)
-우리는 '뱃속으로부터' '대화혼'의 소유자가 되어야...... 존업하옵신 황실을 '받들어 모시고'......(<매일신보> 1943년 8월 7일)
-물질 제일주의 서양 문명을 박차 버리고 동아의 천지로부터 '미영(米英)을 격퇴하여 버리자!" (1941년 12월 27일 부민관 대강당 조선임전보국단 결전부인대회 결성식 강연)
여기서 다시 잠깐 동안 다른 구조물의 옛이야기를 한 가지 해 보자.
프랑스는 4년여 동안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다. 4년여밖에 안되어서인지 합병도 안 되었고 프랑스 말을 없애겠다는 강제도 당하지 않았다. 괴뢰정권이지만 비쉬 정권이란 것도 있었다. 당시의 프랑스를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레지스탕스를 앞세우지만, 그들만 있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부역자들이 없었을 리가 없다. 아주 많았다. 특히 극우청년들로 구성된 민병대는 레지스탕스의 정반대편에 있었던 무장 그룹이었다. 그들은 레지스탕스 소탕작전에 앞장서기도 했는데 그들 중에는 독일의 게슈타포보다도 더 악독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런 자들을 포함하여 모든 부역자들을 프랑스에서는 '콜라보'라고 일컫는데, 콜라보라는 말은 지금도 프랑스 말에서 가장 추악한 말 중의 하나다.
나치가 패망하자마자, 바로 '콜라보' 청소작업이 벌어졌다. 처형된 사람만 7만 명에 이르러, 점령되었던 기간에 비하면 엄청난 숫자였다. 그 중에는 처형까지 당하기에는 억울한 사람도 없지 않았다. 그런 정도로 콜라보를 처리하는 데는 똘레랑스를 눈곱만큼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특히 말과 글로 콜라보 행위를 했던 이른바 지식인들에겐 그야말로 한치의 틈이 없었다. 그들은 콜라보 경찰이나 민병대들보다 더 엄중하게 처리되었다. 이유는 아주 간단했다. '에스프리(정신)'를 죽이는 행위가 가장 큰 죄라는 것이다. 심부름꾼들의 배반행위는 그것으로 끝나지만, 에스프리가 죽으면 세대가 죽고, 역사가 뒤틀린다고 했다. 남의 구조물에서는 그렇게 중요한 것이 에스프리였다. 정신이었다.
앞에 말했듯이, 이화여대 상 제작팀이 김활란상의 제정 사유로 내건 것도 '정신'이다. 김활란 박사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것이다. 김활란 박사의 정신은, 그녀의 말 자취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감격의 정신'이며 '받들어 모시는 정신'이다. 그녀의 감격의 정신은 감격스러운 해방을 맞아 감격스러운 변신을 한다. '뱃속으로부터 대화혼의 소유자가 되어, 존엄하옵신 황실을 받들어 모시'던 정신이, '동아 천지로부터 몰아내자'고 외쳤던 바로 그 귀축(鬼畜) 미영(米英)을 뱃속으로부터 받들어 모시는 정신이 된 것이다. 실로 감격스러운 변신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감격의 무리들과 함께, 특히 점령군인 미국을 받들어 모신다. 그래서인지 미국은 '쌀 나라(米國)에서 '아름다운 나라(美國)'가 되었다.
김활란 박사에겐 이미 '아름다운 나라'에서 받은 상이 있었다. '박사'라는 상이다. 과거에 귀축이라고 불렸던 미국은 영어 잘하는 김활란 박사를 포함하여 감격의 무리들을 모두 환영하였다. 미국은 주민들에게 강정제(强精劑) 주사를 놓을 정신과 의사들이 필요했던 것이다. 강정처럼 속을 비운 뒤 강정제를 투여하는 것이다.
'비우고 채우라!'
이것이 새로이 등장한 미국의 정책이었다. 미국뿐 아니라, 프랑스나 영국도 새로운 개척지에 도착하였을 때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이 정책을 폈다. 이 정책은 원주민을 분열시켜 서로 싸우게 하는 것만큼 중요한 것이었다. 속을 비우고 김활란 박사 같은 사람의 정신을 집어넣으면 금상첨화였다. 속 빈 강정들은 지배하거나 영향력을 행사하긴 쉬우나, 스스로 따라오진 않는다. 빈 속에 김활란 박사의 받들어 모시는 정신을 집어넣으면 서로 다투어 받들어 모실 터이다. 그러므로 김활란 박사 같은 사람에게 권위를 심어주어야 한다. 김활란 박사는 더욱 출세를 하여 장관도 되고 반공연맹이사도 되고 대사도 된다. 권위는 그에 따라서 더욱더 쌓였고 더욱더 올라갔다.
김활란 박사의 중요한 역할 중에는 대학총장의 권위로 졸업장이란 상을 나누어준 것도 있다. 그 상의 대부분은 김활란 박사총장 밑에서 4년 동안 속을 잘 비웠고 김활란 총장박사의 받들어 모시는 정신을 잘 채워 넣었다는 확인서 같은 것이었다. 그 상은 특히 권위에게 시집가는 밑천으로 최고의 가치가 있었다.
한편 지속적으로 속을 비우게 하고 김활란 정신을 투여하자면 많은 정신과 의사들이 필요했다. 김활란 박사의 후배들이 대량으로 필요했다. 미국제 상이 뿌려지기 시작했다. 어떤 분이 아주 잘 지적했던 것처럼, 50년대까지는 주로 교육학상에, 60년대부터는 주로 정치학상에, 70년대부터는 주로 경제학상에, 그리고 신학상은 처음부터 계속하여 신경쓴 부분이다. 그래서인지 가짜가 제일 많은 게, '믿는' 사람들이 받는 신학상이다. 시기별로 중점을 둔 분야가 바뀐 것을 눈여겨보자. 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강정제'가 어떻게 변천할지 미리 알고 있었음이 보인다. 실로 신기(神技)에 가까운 천리안이다.
그리하여 1,599명의 교사를 교단에서 몰아내는 데 앞장섬으로써, '교육의 이름으로 교육을 죽인' 동서고금을 통해 최초의 인물이 된 정원식이란 사람은 틀림없이 50년대에 미국제 교육학상을 받기 위해 떠났던 사람이다. 유신시대에 뒷북을 쳤거나 모른 척함으로써 방조했던 사람들은 60년대 정치학 수상자들이고, 오늘날 아이엠에프를 직접 불러왔거나 혹은 역시 모른 척하거나 아예 모름으로써 방조한 사람들은 70년대에 경제학상을 받은 사람들일 터이다.그리고 오늘날 방방곡곡에서 십자가가 네온 사인의 빛을 발하게 된 것은 미국제의 여러 가지 신학상을 받은 사람들의 덕이다. 물론 다 그렇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세가 그렇다는 것이다.
모든 길이 로마로 통하듯 모든 상은 권위로 통하고 권위에서 만난다. 분야가 어떻든 그 상들은 상의 권위로 주민들에게 비우고 채우는 강정제를 끊임없이 주사했다. 분야가 다르건, 선후배 사이건, 서로 북돋아주며 힘을 합쳐. 권위의 확대 보전을 위해.
언제부턴가 비우는 일은 필요 없어졌다. 이미 비어 있기 때문이다. 김활란 박사총장 같은 1세대의 공이 컸다. 이젠 강정제만 주사하면 된다. 일이 쉬워졌다. 그래서 후배들이 김활란 총장박사를 기리고자 함일까. 미리 말하지만 그런 것은 아니다. 후배들이 김활란 박사총장을 기리고자 하는 이유는 전혀 다른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는 권위의 확대, 보전실이며 상의 제작실인 3층과 상의 파티장인 2층과 '집단적 가식'으로 몰리고 있는 1층 사이의 함수관계를 대충이나마 짚어볼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누구도 프랑스의 소르본느나 영국의 옥스퍼드를 찾았던 사람들에게 실소를 보낼 수도, 돌을 던질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자. 그리하여 절망에서 벗어나 희망을 품어 보도록 하자.
마지막 질문이란, 김활란상이 왜 지금 나오는가?라는 것이다. 김활란 박사가 사망한 지 30년이 다 돼간다. 김활란상은 좋은 세월 다보내고 뒤늦게, 왜 지금에사 불거져나온 것일까? 김활란 씨가 태어난 100주년 기념이라고 하지만 그 이유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상의 제작실, 권위의 확대 보전실에서 위기를 느낀 것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물결이 일기 시작했다. 강정들이 강정들로 남아있으려 하지 않고 권위에 의문을 던지고 있다.
특히 김활란상 제작팀이 느낀 위기는 전교조의 합법화를 중심으로 교육계에 신선한 바람이 불고 있는 데서 비롯되었다. 전교조의 합법화는 지금까지 태형성대를 누려왔던 사학재단에게 보통 심각한 얘기가 아니다. 교육을 마음대로 주물러왔고 돈도 잘 벌어왔는데 참교육 소리가 크게 들리게 되었으니 이보다 더 큰 위기가 있을 수 없다. 공들여 쌓아올린 권위가 밑에서부터 흔들리게 되었다.
김활란상을 제작하는 의도란, 그러니까 김활란의 그림자로 그 위기를 막아 보려는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 죽은 이승만 되살리기나 죽은 박정희 되살리기와 마찬가지로, 죽은 김활란을 되살려 그 영광스러웠던 권위를 돌이켜 자기들의 권위를 지켜 보려는 안간힘인 것이다.
옛날에 여럿이 함께 부르던 노래가 있었다. 그 노래는 끝없이 부를 수 있어 좋았다. "q층 위에 2층, 2층 위에 3층, 3층 위에 4층......" 이렇게 올라간 뒤에 다시 내려간다. "4층 밑에 3층, 3층 밑에 2층, 2층 밑에 1층, 1층 밑에 지하실, 지하실의 멜로디......"
이 노래처럼 우리들의 구조물도 1층 위에 2층 있고 2층 위에 3층 있다. 그러나 1층 없으면 2층 없고 2층 없으면 3층 없다. 사람들에게 3층집을 그리라고 하면 거의 모두 3층집 지붕부터 그린 뒤에 아래층으로 내려간다. 그러나 땀을 흘리며 손수 집을 집는 노동자는 1층부터 그린다. 1층을 짓지 않고 2층도, 3층도 지을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1층의 구조가 허물어지면 2층, 3층의 구조도 자연 허물어진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