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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인의 방 [蒜艾齋 산애재] 원문보기 글쓴이: 松葉
♥ 어버이날에 다시 읽어보는 시(22편)♥
아버지
김남조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버지가 지어준 아들의 이름
그 좋은 이름으로
아버지가 불러주면
아들은 얼마나 감미로운지
아버지는 얼마나 눈물겨운지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아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세상의 으뜸같이 귀중하여라
달무리 둘러둘러 아름다워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른다
아들을 부르는
아버지의 음성은
세상 끝에서 끝까지 잘 들리고
하늘에서 땅까지도 잘 들린다
아버지가 불러주는
아들의 이름은
생모시 찢어내며 가슴 아파라
어머니 1
김초혜
한몸이었다
서로 갈려
다른 몸 되었는데
주고 아프게
받고 모자라게
나뉘일 줄
어이 알았으리
쓴 것만 알아
쓴 줄 모르는 어머니
단 것만 익혀
단 줄 모르는 자식
처음대로
한몸으로 돌아가
서로 바꾸어
태어나면 어떠하리
아버지
고은
강 건너 내포 일대
대천장 예산장 서산장
아무리 고달픈 길 걸어도
아버지는 사뭇 꿈꾸는 사람이었습니다
비 오면 두 손으로 비 받으며
아이고 아이고 반가워하는사람이었습니다
어머니의 향기
박목월
어머니에게서는
어린 날 코에 스민 아른한 비누냄새가 난다.
보리대궁이로 비눗방울을 불어 울리던 저녁 노을 냄새가 난다.
여름 아침 나절에
햇빛 끓는 향기가 풍긴다.
겨울밤 풍성하게 내리는
눈발 냄새가 난다.
그런 밤에
처마 끝에 조는 종이초롱의
그 서러운 석유냄새
구수하고도 찌릿한
백지 냄새
그리고
그 향긋한 어린 날의 젖내가 풍긴다.
아버지의 그늘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 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으로 쓰러진 나이를 넘었지만,
나는 내가 잘못했다고 생각한 일이 없다,
일생을 아들의 반면교사로 산 아버지를
가엽다고 생각한 일도 없다, 그래서
나는 늘 당당하고 떳떳했는데 문득
겨울을 쳐다보다가 놀란다, 나는 간 곳이 없고
나약하고 소심해진 아버지만이 있어서,
취한 색시를 안고 대낮에 거리를 활보하고,
호기있게 광산에서 돈을 뿌리던 아버지 대신,
그 거울속에는 인사동에서도 종로에서도
제대로 기 한번 못 펴고 큰 소리 한번 못 치는
늙고 초라한 아버지만이 있다.
손거울
박용래
어머니 젊었을 때
눈썹 그리며 아끼던
달
때까치 사뿐이 배추 이랑에
내릴 때 --
감 떨어지면
친정(親庭)집 달 보러 갈거나
손거울
아버지의 빛바랜 편지
문정희
하늘처럼 훤하고
산처럼 늠름한 아이 낳아
잘 키우거라
온몸 들쑤실 때는
허기진 채 눕지 말고
얼굴색 돋아나게
밥 한 끼쯤 질탕하게 사 먹거라
예금통장 잔고 비벼
주소 없는 봉함엽서에
만원 다섯 장
둥글게 꽂혀 놓으신 당신
이 온기
긴 세월 손마디 마디에 번져
당신을 기억하는 순간
서늘한 가을바람처럼
살랑 살랑 가슴이 뜁니다
교감
박제천
금강초롱 꽃잎 속 황금 꽃술로 발돋음하는 너를 본다.
氣치료를 받고 와서, 태어나 처음으로 들여다보는 배꼽
금강초롱 꽃잎 속 배꼽에서 배꼽으로 퍼져나가는
우주의 파동을 느낀다
꽃잎 가득,배꼽 가득,
눈부신 햇살도 눈시린 눈발도 모두 받아들여
황금꽃술로 발돋음하는 너를 본다
단전에 가득 불을 피워 덥히는 내 삶도
어머니의, 그 어머니의 해소기침도
예서 물려받았단다
꽃잎 속에 손을 넣으면
문득 외계의 하늘이 서른 세 하늘로 층층이 쌓이고
그 어느 하늘에 금강초롱으로 피어나는
어머니의 배꼽 있으니
나 있는 여기서도 개벽의 꽃잎으로 들어가는 길 보이느니,
그곳에서 내 배꼽을 꼭꼭 누르는 손길을 느끼나니
결빙의 아버지
이수익
어머님.
저 예닐곱 살 적 겨울은
목조 적산 가옥 이층 다다미방의
벌거숭이 유리창 깨질듯 울어대던 외풍 탓으로
한없이 추웠지요. 밤마다 나는 벌벌 떨면서
아버지 가랭이 사이로 시린 발을 밀어 넣고
그 가슴팍에 벌레처럼 파고들어 얼굴을 묻은 채
겨우 잠이 들곤 했었지요.
요즈음도 추운 밤이면
곁에서 잠든 아이들 이불깃을 덮어주며
늘 그런 추억으로 마음이 아프고
나를 품어주던 그 가슴이 이제는 한줌 뼛가루로 삭아
붉은 흙에 자취없이 뒤섞여 있음을 생각하면
옛날처럼 나는 다시 아버지 곁에 눕고 싶습니다.
그런데 어머님
오늘은 零下의 한강교를 지나면서 문득
나를 품에 안고 추위를 막아주던
예닐곱 살 적 그 겨울밤의 아버지가
이승의 물로 化身해 있음을 보았습니다.
품안에 부드럽고 여린 물살은 무사히 흘러
바다로 가라고
꽝꽝 얼어붙은 잔등으로 혹한을 막으며
하얗게 얼음으로 엎드려 있던 아버지
아버지, 아버지......
어머니
오세영
나의 일곱 살 적 어머니는
하얀 목련 꽃이셨다
눈부신 봄 한 낮 적막하게
빈 집을 지키는,
나의 열네 살 적 어머니는
연분홍 봉선화 꽃이셨다
저무는 여름 하오 울 밑에서
눈물 적시는,
나의 스물 한 살 적 어머니는
노오란 국화 꽃이셨다
어두운 가을 저녁 홀로
등불 켜드는,
그녀의 육신을 묻고 돌아 선
나의 스물 아홉 살어머니는
이제 별이고 바람이셨다
내 이마에 잔잔히 흐르는
흰구름이셨다.
아버지의 고기잡이
김명인
열목어의 눈병이 도졌는지, 아버지는
무슨 생각으로 나와 내 어로(漁撈)가 궁금해지신다
그러면 나, 아버지의 계류에서 다시 흘러가
검푸른 파도로 솟아 뱃전을 뒤흔드는 심해에
낚시를 드리우고 바닥에 닿는
옛날의 멀미에 시달리기도 하리라
줄을 당기면 손 안에 갇히는 미세한
퍼덕거림조차 해저의 감촉을 실어나르리라
알 수 없는 요동으로 떨려올 때
물밑 고기들이 뱉어놓은 수많은 기포 사이를
시간은 무슨 해류를 타고 용케 빠져나갔을까
건져올린 은빛 비늘의 저 선연한 색 티!
갓 낚은 물고기들 한 겹 제 물 무늬로 미끈거리듯
아버지의 고기잡이는 그게
새삼 벗어버리고 싶어지신 걸까
마음의 갈매기도 몇 마리 거느리고
바다 생살을 찢으며 아침놀 속으로
이 배는 돌아갈 테지만
살아 있음이란 결코 지울 수 없는 파동, 그 숱한 멀미
가득 실었다 해도
모든 만선(滿船)은 쓸쓸하다, 마침내 비워내고선
무얼 싣기도 버거운 저기 조각달처럼!
어머니의 물
유안진
생수를 마실 때마다 어머니의 물이 생각난다
어머니의 물은 H20가 아니었지, 우물 속 용신에게 예의를 지키느라, 안마당 우물에서도 한밤중 두레박질은 금하였고, 땅을 판다고 우물일 수 없으니, 마실 만한 사람이 사는 곳에서만 우물이 생기는 법이니, 먼저 물마실 자격을 갖추라셨고
때로는 우물가를 정돈하고 발길을 삼가, 고요의 한나절을 바치기도 했으니, 행여 용신이 떠나가서, 물이 마르거나 물맛이 변할까 염려하였고, 신새벽 첫 두레박 물은 하늘의 몫이라고 장독대에 올리셨지
‘물쓰듯 한다’는 말도 있지만, “생전에 쓴 물은 저승 가서 다 마시게 된다”시며 물인심이란 필요한 때 필요한 만큼이라고 노래하듯 이르시며 우물가엔 구기자나 향나무를 심어야, 그윽한 물맛으로 우물과 사람이 함께 편안하다면서, 쓰고 난 물로 토란을 키우셨지
“부모 잃고는 살아도, 물 잃으면 못 산다”면서, 못물 도랑물 냇물조차 섬기며, 물보다 낮춰 사신 어머니의 그 물도 이젠 다만 H20가 되고 말았네
노을
이근배
어디 계세요
인공 때 집 떠나신 후
열한 살 어린 저에게
편지 한 장 주시고는
소식 끊긴 아버지
오랜 가뭄 끝에
붉은 강철 빠져나가는
서녘 하늘은
콩깍지 속에 숨겨놓은
아버지의 깃발이어요.
보내 시라던 옷과 구두
챙겨드리지 못하고
왈칵 뒤 바뀐 세상에서
오늘 토록 저녁 해만 바라보고 서 있어요.
너무 늦은 이 답장
하늘 끝에다 쓰며
아버지 받아보시나요
놋수저
정진규
어머니 쓰시던 놋수저 한 벌을 간직하고 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오늘도 놋수저를 꽂는다 제삿날 메올리는 揷匙가 아니다 어머니의 고봉밥을 어머니의 놋수저로 내가 먹는다 혼령의 밥을 내가 먹는다 어머니는 오늘도 내 밥이시다 죽이 아니라 밥이시다 어머니 가신 뒤 늘 배가 고팠다 그럴 때마다 어머니의 고봉밥에 놋수저를 꽂았다
소주를 맛보다
김종해
저녁 식탁에 앉아 소줏잔을 기울인다
식도를 타고 전류보다 빠르게
위胃까지 흐르는 화기火氣
문득 증류소주를 만들던 아버지를 생각한다
부산하고도 천마산 아래
그래, 열 살이었던 나는
아버지를 과학자처럼 지켜보았다
불 지핀 거대한 무쇠솥과 천장에 매단
가느다란 몇 겹의 구리관을 통해
한 방울, 또 한 방울
흐르는 증류소주를 맛보던 아버지
식도를 타고 빠르게 위까지 도달하기 전에
아버지는 50도의 화기火氣를
혀 끝에 올려놓고 승부를 건다
옆집 ‘복상 아저씨’도 맛을 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아득한 세월의 저쪽
벼랑 끝의 그 승부사들을 떠올리며
나는 소줏병의 마지막 술잔을
혀 끝으로 맛본다
어머니
정호승
호롱불 켜놓고 밤새워
콩나물 다듬으시던 어머니
날 새기가 무섭게 콩나물다라이 이고 나가
온양시장 모퉁이에서 밤이 늦도록
콩나물 파시다가 할머니 된 어머니
그 어머니 관도 없이 흙속에 묻히셨다
콩나물처럼 쓰러져 세상을 버리셨다
손끝마다 눈을 떠서 아프던 까치눈도
고요히 눈을 감고 잠이 드셨다
일평생 밭 한 뙈기 논 한 마지기 없이
남의 집 배추밭도 잘도 잘 매시더니
배추 가시에 손 찔리며 뜨거운 뙤약볕에
포기마다 짚으로 잘도 싸매시더니
그 배추밭 너머 마을산 공동묘지
눈물도 없이 어머니 산 속에 묻히셨다
콩나물처럼 누워서 흙속에 묻히셨다
막걸리에 취한 아버지와 산을 내려와
앞마당에 들어서니 어머니 말씀
얘야, 돌과 쥐똥 아니면
곡식이라면 뭐든지 버리지 말아라
소나무와 아버지
황금찬
소나무는 사람의 성품을
사람만큼 가지고 있다.
아버지는 소나무를
친구중의 친구로
사귀고 계셨다
혼자 외로우실 때
소나무숲을 찾아가신다
작은 초막을 세우고
그곳에서 열흘이고 보름
소나무와 같이
생활하다 오신다.
가족에겐 못할 말이 있어도
소나무 친구에겐
못할 말이 없다
옛 사람들이 살던 집은
소나무와 흙으로만 지었는데
그 두 가지가
사는 이의 성품을 닮았기 때문이다.
친구 사이에도
금이가는 일이 있지만
소나무와의 우정에는
진실이 있을 뿐이다.
어머니의 부엌
허영자
봄이 와도
네 마음 아직도 얼어있거든
이 부엌으로 오너라
아궁이의 불길은
기쁜 듯이 타오르고
더운 김을 내뿜는
쇠솥의 숨소리
정다운 도마소리
그릇 부딪는 소리
행주치마 누이들의
분주한 손길
봄이 와도
네 마음 아직도 춥거든
어머니가 계시는
이 부엌으로 오너라
풀 뽑기
문인수
아버지 따라가 묵정밭을 맨 적 있습니다. 쇠비름풀 여뀌 바랭이서껀 이런 저런 잡초들 수없이 뽑아 던졌습니다. 검붉은 맨살의 흙이 드러나면서 밭뙈기 한 두락이 새로 나는 것 볼 수 있었습니다. 아버지, 일평생 마침내 논 서른 마지기 이루고, 그러나 송충이 같은 자식들, 그 푸르게 일렁이던 논들 다 갉아먹어 버리고 빈 들 노을 아래 서 있던……
아버지, 일흔 중반 넘어서면서 망령드셨습니다. 처음에는 세상사 관심거리가 하나 둘 줄어들더니, 마을이나 집안 대소사는 물론 식솔들의 잦은 불상사에 대해서도 영 남의 일이 되어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아버지, 사람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나중에는 당신의 자식들, 심지어는 늘 곁에서 수발 드는 어머니 보고도 당신 누구요. 우리 집사람 못 봤소, 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다음 아버지, 이미 다 팔아 치우고 없는 농토, 그 논에 물꼬 보러 간다며 나섰습니다. 없는 소, 없는 일꾼들을 부렸습니다. 품안의 새끼들을 어르고 입안의 혀 같은 당신의 아내와 자주 두런거렸습니다. 그러기를 십여 년, 어느 날 아버지, 검불같이 남아 있던 당신의 육신까지도 뽑아 던졌습니다. 그렇게 돌아가신……
아버지, 비로소 아버지의 풀 뽑기가 마저 끝났습니다. 번듯하게 눕는 아버지의 땅, 그곳으로 드는 아버지, 보였습니다.
사월, 진해
정일근
1
사람들은 꽃이 피는 즐거운 때만 알 뿐이다. 꽃이 지는 슬픔의 시간은 기억하지 못한 채 몰려왔다 몰려가며 바다가 있는 도시에 또 다른 바다를 만드는 사월. 하늘에 폭죽이 터지고 땅의 나무에는 축등이 켜지는 만개滿開의 팽팽한 해안선을 배경으로 아버지가 남긴 흑백사진 한 장, 단기 4203년 사월, 진해라고 적힌 기념사진. 아버지는 자신의 꽃이 지는 시간을 예감하셨을까. 그 해 사월에 진해를 떠나며 근엄했던 아버지가 사진에 남긴 마지막 환한 웃음.
2
그 해 사월 꽃피우는 큰 나무를 잃은 마당에 나는 작은 뿌리 하나로 남았다. 사월이면 꽃잎들을 눈처럼 날리던 저녁 바람에게서 서툴게 서툴게 휘파람을 배웠고, 잔치가 끝나고 사람들이 떠나간 파장의 쓸쓸한 밤길이 나를 키웠다. 비에 젖어 돌아와 웅크리고 잠들었던 밤들이 있었으니, 그 젖은 잠을 저벅저벅 밟고 나를 찾아오시던 사월의 아버지. 어서 꽃피우고 싶었다. 빈 마당에 성숙의 깊은 뿌리 내려 아버지 가지 끝까지 꽃을 밀어올리며 남쪽 바다 저편 아득히 먼 섬으로 날려 보내고 싶었다.
3
해마다 사월이 오면
싸락눈 같은 꽃잎을 앞세워
내 마당으로 돌아오시는 아버지
사월에, 진해라고 중얼거려보면
나는 아직도 입 속에 씹히는 아버지의 잎
어머니
황지우
저를 이, 시간 속으로 들여넣어주시고
당신을 생각하면 늘, 시간이 없던 분
틀니를 하시느라
치과에 다녀오신 직후의,
이를 몽땅 뺀
시간의 끔찍한 모습
당신은 그 모습이 미안하시었던지
자꾸 나를 피하시었으나
아니, 우리 어머니가 저리 되시다니!
목구멍에까지 차오른 술처럼
넘치려는 시간이 컥, 눈물 되네
안방에서 당신은 거울을 피하시고
나는 눈물을 안 보이려고 등을 돌리고
흑백 텔레비전 시절 어느 연속극에서
최불암씨가 늙으신 어머니를 등에 업고
“어머니, 왜 이리 가벼워지셨어요?” 하고
역정내듯 말할 때도 바보같이
막 울어버린 적 있지
저에게 이, 시간을 주시었으되
저와 함께 어느덧
시간이 있는 분
아직은 저와 당신, 은밀한 것이 있어
아내 몰래 더 드리는 용돈에 대하여
당신 스스로 제 앞에서 애써 기뻐하시지만
그러니까, 아직은 시간이 좀 있을까
연립주택 붉은 벽돌벽에 그늘을 옮기는 흰 목련,
그 테두리를 저는 오래오래 보고 있어요
산양
이건청
아버지의 등뒤에 벼랑이 보인다. 아니, 아버지는 안 보이고 벼랑만 보인다. 요즘엔 선연히 보인다. 옛날, 나는 아버지가 산인 줄 알았다. 차령산맥이거나 낭림산맥인 줄 알았다. 장대한 능선들 모두가 아버지인 줄 알았다. 그때 나는 생각했었다. 푸른 이끼를 스쳐간 그 산의 물이 흐르고 흘러, 바다에 닿는 것이라고, 수평선에 해가 뜨고 하늘도 열리는 것이라고. 그때 나는 뒷짐 지고 아버지 뒤를 따라갔었다. 아버지가 아들인 내가 밟아야 할 비탈들을 앞장서 가시면서 당신 몸으로 끌어안아 들이고 있는 걸 몰랐다. 아들의 비탈들을 모두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으로 쫓기고 계신 걸 나는 몰랐었다.
나 이제 늙은 짐승 되어 힘겨운 벼랑에 서서 뒤돌아보니 뒷짐 지고 내 뒤를 따르는 낯익은 얼굴 하나 보인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쫓기고 쫓겨 까마득한 벼랑으로 접어드는 내 뒤에 또 한 마리 산양이 보인다. 겨우겨우 벼랑 하나 발 딛고 선 내 뒤를 따르는 초식 동물 한 마리가 보인다.
* 사진 출처 : http://cafe.daum.net/gjl6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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