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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생활을 마감하면서
가.강릉 에서 살고싶다.
1968년1월에 상경하여 오늘이 2012년 1월 중순 이니까 꼭 44년이 된다.군복무기간 3년을 제 한다고 하더라도 41년동안 서울에서 살았다.
금년1월말로 근무하던 프로젝트의 계약기한이 만료되고 금년초에 귀향하기로 한 계획에 의거 금년 임진년 2월말에 강릉으로 귀향하려고 한다.
강릉으로의 귀향은 영동지방의 중심이고 산이있고 바다가있고 경포호수가있고 의료시설등 각종 편의시설이 잘 갖추어져있고 부모님 산소가 가깝고 서울에서 접근이 용이하여 자식들이 찾아오기 좋고 찾아가기좋고 친구들이 있기 때문이다.
강릉은 지나 다니기만 했지 속내는 잘 모른다.해서 우선 아파트로 이사를 하고 주변환경과 상황파악을 한 연후에 텃밭이 딸린 조그만한 단독주택을 마련하여
나와 가족이 먹고살 농사를 짓으며 봄이되면 고사리 취나물등 봄나물을 케고 바다낚시와 바우길 등산등 유유자적 즐기면서 노후를 보내고 싶다.
짧게는 20년,길게는 30년이 남아있다고 생각할때 어떻게 사는것이 보람있는 삶인가에 대하여 생각하면서 살고싶다.
나.지난 40년은 어떻게 살았는가?
상경은 68년1월 고향에서 근덕중학교를 졸업한후 열흘이 되는날이다.집안 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못꾸었던 처지였다.
중학교 입학금 3천원이 없어 아버님이 영월 탄광에서 광부로 계시던 삼촌에게서 빌려 오셨고 교복과 교모는 고모님택 지금은 고인이 되신 고종사촌 형님이 입던 옷을 얻어 입었고 책가방 대신 3년동안 책보를 들고 다녔다.
그뿐인가 점심 도시락은 가지고 간 날보다 안가지고 간 날이 더 많았다. 중학교 3년동안 수업료를 내지못해서 극빈자로 면제받고,
학교 소유부지내에서 채소를 가꾸었는데 당번으로 채용되어 면제 받으면서 졸업을 한 처지라서 부모님에게 고등학교 진학 예기를 입밖에 낼수가 없었다.
가정형편이 이렇타 보니 형님과 여동생은 중학교 문앞에 가 보지도 못했다. 그나마 나는 행운아 였던 것이다.
집안형편이 이렇게 기우러진것은 큰 형님께서 군대 제대후 집에서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서 처가 동네인 개산에서 국유림에 산불을 놓아 개간하여 밭을 만들어서 농사를 짓기 위하여 개산으로 입산 하신지 1년만에 급사 하셨기 때문이다.
포항에 계신 형님과 함께 가셨는데 포항형님이 개산형님 처가와 산전까지는 10여리가 넘었는데 도 하루밤에 2번씩이나 처가에서 지어준 약을가지고 왕복 하셨다고 했는데도 결국 돌아가셨다고 한다.
병명은 병원에서 진단을 받은것이 아니라 확실하지는 않지만 군대 계실때 맹장수술을 받으셨는데 그것이 터져 복막염이 되어 돌아 가셨다고 했다.
그당시 형님께서 개산으로 가시지 않고 근덕집에 께셨다면 돌아 가시지는 않았을 것이라고들 예기가 있었는데, 이말은 사람이 주거지를 정할때 병원등 의료시설의 접근성등을 감안해야 된다는 말이 아니껬는가?
집안의 장남이 결혼후 조카하나 젓먹이를 남겨두고 돌아 가셨으니까 부모님께서는 얼마나 상심이 컸셨던지 어머님께서는 돌아 가시기전까지 우울한 나날을 보내셨서 결국 위암으로 돌아가셨고,
아버님께서도 술로 나날을 보내다싶이 하면서 결국 간암으로 돌아가시는 게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따라서 자식들의 죽음이나 의사결정의 잘 잘못으로 인하여 결국 한 가정의 흥망성쇄가 결정 될수있느것인 많큼 자기몸을 사랑하고 신중한 의사결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 하겠다.
하여 나는 고향이 싫었다.서울에 갈수있는 방법을 찾던중 아버님 외가집 그러니까 할머님 오빠 되시는 할아버님께서 서울에서 큰 인쇄소를 경영 하셨는다 예기와 친구분이 가게를 운영한다는 예기를 듣은바있어 중학교 졸업과동시에 아버님을 졸라서 서울로 상경한 것이다.
고향 친구들 대부분은 삼척공전에 진학했고 형편이되는 친구는 대학진학을 위하여 삼척고등학교로 집안형편이 안좋은 친구들은 근덕농고에 진학했다.
서울생활 40여년을 내 인생에 있어 득과 실을 따진다면, 실은 부모님 살아 계실때 모시지 못한것이고,득은 전주이씨 효령대군파인 이남숙씨를 배우자를 만난것이다.
덕분에 규태와 소연이를 얻었고, 명문대학과 대학원 석사출신 재원이며 명문가의 며느리와 사위를 본 것이다.
또한 집사람이 알뜰하게 살림을 살아준 덕분에 적당한 재물을 확보하여 남은여생 건강관리만 잘 하면 노후생활에는 지장이 없을듯 하니 이 또한 큰 득이 아니겠는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 속담이있는데 이말은 젊었을때의 고생은 후일 잘 살기위한 밑거름이 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부모가 자식들에게 젊어서 풍족한 생활을 하도록 하는것은 후일 고생을 물려주는 결과가 되는것이라 하겠다.
또, 3대 부자없고 3대 가난 없다는 말이 있는데, 이말은 머리가 깨어 있으면 가난이 3대까지는 가지않는다는 의미이며, 3대부자를 지키지 못하고 몰락하는 집안이 많다는 것이아니껬는가?
만약 나의 부모님들의 생활형편이 좋았다면 내가 서울에 올라 왔겠는가? 생각해볼때 아마 서울에 올라가지 않았을 것이다. 부모님 곁에서 농사을 지었거나 삼척지역에서 벗어나지 않은 삶을 살았을 것이다.
물론 부자였다면 서울로 유학을 올수도 있었겠지만 그시절은 대부분이 먹고살기에 급급 했던터가 아닌가
따라서 부모님의 가난이 오늘의 나를 있게 하였으니 부모님이 가난하게 사셨던것이 다행이고 고맙게 생각해야 되지 않을까?
그렇다면 규태와 소연이는 나,부모을 잘 만난 것인가? 잘못 만난 것인가? 재물이 많은것도 아니고 작은것도 아니니까? 잘 만난것도 같고 잘못 만난것도 같은데 이것은 본인들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다.
재물이라느것이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인생사에 있어 큰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할 때 자식과 재물과의 관계에 대하여 심도있는 검토기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친구들로는 고향 근덕초.중학교 동창모임인 근우회, 한양공고동창 건우회, 산업대동창모임등 학교모임 친구들과 교통부등 직장 동료모임등 많은 모임들이 있으나 근우회가 그래도 마음이 통하는 친구들이 있고 마음이 편해서 좋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자식들에게 꼭 하고싶은 예기는 유언형식으로 남기고싶어 별첨 유언-1, 로 유언하니 자식교육에 참고하기 바란다.앞으로 살아가면서 2~3계속 할것이다.그리고 지나간 40년 세월을 되돌아가 보자.
1.서울에서 첫 번쩨 식품점 가게점원 생활
청량리와 종로 왕십리와 을지로에는 전차가 다녔고 서울역을 지나 영등포역까지 다녔다. 종로에는 화신백화점과 신신백화점이 있었고 시청앞에는 반도호텔, 중앙청등 큰 건물은 대충 이랬다.
아버님 외갓집 할아버지는 전에 종로에서 큰 인쇄소를 운영 하셨으나 망하여 마포구 대흥동 판자촌에 살고 계셨고 큰아들이 세브란스를 나와 정형외과 의사였고,오형제나 되어 도움을 받을수 없었다.
서울에서 첫 번쩨 시작은 종로구 서린동 청계천방향 현 SK본사옆 요즈음 한창 TV에 얼굴이 비치는 윤형주,송창식,조용남등 이분들이 드나들던 쌔시봉과 스타다스트 입구에 위치한 서린식품점에서 점원생활로 시작했다.
그시절의 쌔시봉은 음악감상실으로 기억되나 나는 근처에도 못가봤다. 음악감상 할 주재도 못 되었지만 먹고 사는게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가게 뒷골목은 술집과 음식점이 즐비하고 매일 저녁이면 술 손님들로 몹시 붐볐다. 청개천은 그당시 복개천 이였고 가게옆에 큰 한밭 설렁탕집이 있었다.
가게집 주인은 아버님 고향 친구분(임병구씨)으로 청진동,적선동에 집이있고 가게가 중구 다동에도있는 서울에 오셔서 자수성가하신 분으로
고향에 본부인과 자식이있고 서울에서 재혼하여 아들둘과 딸하나를 두셨는데 본부인의 큰아들이 서울에서 대학교를 다녔다.
점원생활은 가게에서 잠을 자고 식사는 청진동집에서 먹었는데 집위치는 수송국민학교앞 양영학원 뒷골이였다.
가게에서 주로하는일은 가게 점원일 외에 주변 요정집에 정종인 백화수복 댓병을 배달하고 공병을 회수하는 일이였다.어느정도 하는일이 익숙해지고 주변상환경도 파악되는데 약6개월이 지났다.
내가 상경한 목적은 서울에서 고등학교진학을 위해서 였다 .그래서 중학교 교모를 쓰고 상경 했었는데,고등학교진학이 안된다는것은 스스로 깨닫게 되었어고 대신 기술이라도 배워야되겠다는 생각에서 사장님과 면담을 했다.
저녁에 공평동 구 서울예식장앞에 위치한 조그만한 기술학원에 보내줄것을 말씀드렸더니, 거절 하시면서 가게일을 열심히하면 장가도 보내줄 것이며, 나중에 장사를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하셨다.
장사는 생각해 보지도 안았지만 장사를 하려면 돈이있어야 되는데 가게일 봐주면서 밥만얻어 먹는 처지에 가당치도 않겠다고 생각하여 기술을 배울수있는 곳을 찾던중
할머니쪽 먼 친척되시면서 큰형님 고향 친구분이 충무로에서 인쇄소에 다니신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부탁하여 점원생활을 접고 69년초 충무로에 위치한 태양당인쇄소에 가미돌이로 취직이 되어 출근하게 되었다.
2.인쇄소 가미돌이 생활
태양당 인쇄소는 동종 업계에서는 규모가 제법 큰 인쇄소였다. 하는일은 옵셋트 인쇄기에서 동아제약의 박카스디 케이스을 인쇄하는 작업으로 일당은 100원이였으나,
주로 야간작업이 많았는데 밤9시까지 야간작업시 200원,밤을새면 500원이고, 휴일근무는 300원이여서 한달봉급은 평균 6천원정도 되었다.
그당시 전차편도 2.5원 왕복5원이고,쌀 한말이 500원이였으니까 적은돈이 아니였다. 인쇄소가 충무로4가에 위치하여 상왕십리에서 을지로4가까지 전차로 출.퇴근하였다.
숙소는 형님이 나보다 좀 늦게 상경하여 상왕십리에 위치한 방한공업사에 입사하셔서 공장기숙사에 계셨는데 형님이 사장님께 양해를 구하여 기숙사에서 함께 있게되었다.
식사중 밥은 공장에서 군대에서 사용하는 항구를 사용했고 다른 반찬없이 해장국집에서 선지국물을 사다가 밥이랑 먹었는데 공장식구들이 6~7멍은 되었다. 현재 안산에서 큰 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안종숙회장도 함께 있었다.
안종숙회장은 방한공업사로 서울생활을 시작하여 자수성가하신분으로 여러개의 사업체를 운영하고있는 중견기업가로서 현역에서 활약중에있고,
형님은 울산에있는 현대조선소로 재취업 하셔서 근무하시다가 어머님이 돌아가시고나서 삼척에 올라가서 아버님을 모시다가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다시 포항으로 내려오셔서 흥화공업주식회사와 포항제철에서 근무하시다가 포항에살고 계신다.
인쇄소생활은 일이많아 힘은 들었지만 그래도 월급을 받고 동료들이 있으니까 재미있게 다녔고 월급은 꼭박 저축하여 고등학교 진학시 입학금으로 충당했다.
인쇄소 근처 콩 비지탕집이있었는데 이북에서 월남하신 할머니가 운영하셨는데 맛이조아 많이 애용했다.
인쇄소생활이 어느정도 안정을 찾게되고 돈이 모아지니까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되겠다는 생각에서 입시학원을 찾아 상담한후 69년말로 인쇄소를 그만두고
성동입시학원에서 1개월간 주간.야간 동시수강한 결과 한양공고 야간반 건축과에 수험번호 777번으로 합격했다.
3.한양공고입학및 합동통신사 입사
합격 순간 그 기분은 이루말할수 없었지만 잠시뿐이였다. 학교에 다니려면 주간에 다닐 직장을 구해야 되는데 서울에는 아는사람이 없고 부탁할 사람조차 없어 급사(사무보조또는 심부름등 잡일하는자) 구함 신문광를보고 찾아 다녔지만 학생은 안쓴다고 번번이 거절당했다.
안되겠다 싶어 신문배달을 하기로 하고 신설동에 위치한 한국일보 보급소에서 배달실습을 마치고 막 집을 나서는데 성동학원에 다닐때 주간에 직장을 다니면서 야간에 학원을 다니던 장기명친구가 공장으로 찾아왔다.
성동학원에 다닐때 한양공고 야간에 입학하면 취직을 부탁한바 있었기 때문에 취직이 되었다고 찾아온 것이다.
직장은 을지로 입구 현 롯데백화점 건너편 하나은행 본점자리인 합동통신사였다.합동통신사에서 하는일은 관공소에 통신을 배달하는 일이였는데
오후 2시면 끝이나서 학교 야간수업이 오후 3시30분이였기 때문에 학교 다니기에는 딱이였다.
통신사는 AFP, UPI등 해외통신사부터 기사를 받아 관공서및 언론기관에 기사를 팔아먹는 회사로 일반 언론기관의 아버지인 셈이다. 지금은 통양통신사와 합병한 연합통신사의 전신이다.
1학년때에는 상왕십리 형님공장에서 전차로 을지로입구까지 출근하였는데 요금이 편도2.5원 왕복5원이였다.
2학년때에는 형님이 기숙사가없는 청계천에 위치한 공장으로 옮겨서 공장사무실에서 밥을 해먹으며 잠을잤고 아침에는 통신사로 출근하고 저녁에는 학교에 다녔다.
3학년때는 답십리 100번지 청계천 뚝방인 판자촌으로 이사를 해서 통신사와 학교를 다녔는데 그때 안종숙회장과 함께 자취를 했다.
뚝방에서 조금만한 나무다리로 청계천을 건너 한양대학교 밑인 사근동을 지나 한대앞에서 뚝섬에서 나오는 65번 시내버스를 따고 합동통신사로 출근을 했다.
전세5만원으로 기억되고 수도시설이없어 물지게로 물을 사다가 밥을 해먹었는데 청계천뚝방에는 많은사람들이 살았는데
주로시골에서 올라온사람이거나 재개발등으로 철거된 주민들이 많았다.지금은 모두 철거되었는데 그 철거민이 상계동이나 성남쪽으로 집단 이주 시겼다고한다.
야간학교수업은 1~2학년까지는 오후3시30분에 시작하고 3학년부터는 주간수업이 였는데 합동통신사업무도 야간 업무가있어 3학년에는 통신사 야간반에서 근무하여 학교는 무난히졸업할수 있었다.
합동통신사에서 1~2학년까지 내가맡은 배달구역은 중앙청에 소재하는 정부부처의 장.차관실과 공보관실및 청와대 였는데 청와대는 수위실에 보관함이 마련되어 있었다.
청와대 배달시 버스표를 회사에서 주었는데 걸어서다니고 학교 다니는데 사용했다.
정부각부처를 배달 다니면서 학교를 졸업하면 공무원으로 근무했으면 좋겠다는생각을 했는데 결국 학교졸업후 국가 공무원시험을 보게되었고 임용되어 교통부에서 근무하는 계기가 되었다.
학교재학 중에도 국가및 서울시등 지방직 공무원시험을 수차례 보러다녔고 73년1월초 한양공고를 졸업하고 남산시립도서관을 학교다니드시 주간에는 도서관에 갔다가
야간에는 통신사에서 근무한결과 74학년도 대학입학 학력고사에서 원했던 서울,강원두곳 모두합격 하였으나 증작 대학입학원서 조차 사러다니지 않았다.
이유는 교통부에서 시행한 5급국가 건축직 공무원시험에 합격해놓은 상태였고 대학입학금도 없었기 때문이다.
발령은 항망청근무를 원하였으나 74년 군입대영장이 나오기까지 발령이 나지 않아서 교통부 인사계에 문의한 결과 티오가 없어 군대제대하고 나오면 발령을 내 주겠로라 고한다.
그리고 입대하면 입영확인서를 보내 달라고했다. 이렇게 68년에 상경하여 73년말까지 5년동안 노력한결과 원했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으로 합격까지 해놓고 홀가분하게 군대에 입대 할수있었다.
4.육군입대및 군대복무생활
군대복무기간은 74.6~77.4월으로 34개월동안 5군단 예하 제1야포단 501대대 제1포대 포대서무계 조수로 발탁되어 서무계로 끝냈는데 마지막 한5개월은 취사반장을 했다.
근무중에 FDC신축공사가있어 본부,브라보및 찰리에서 건설공사 경험자를 차출받아 멋지게 끝내고 포상휴가도 다녀왔다.
근무지는 철원군 문혜리 훈련은 원주38사단에서 받고 101보에서 배속되었다.군대생활은 누구보다 수월하게 근무했는데 보초안서고 점호안받고 집합안하고 군대생활을 했다고하면 대한민국 군대생활이 아니다 하는데 나는 그렇게 했다.
포대가 훈련나가면 잔류병으로 부대에 남아 식사는 인근주민에게 의뢰하여 먹고 부대내에서 쉬면서 보냈다.
5.교통부 공무원생활
77.4월 군대제대후 합동통산사에 복직이 되었다.통신사 휴직은 입대전 교통부발령이 나지않아 제대후에 다니려고 휴직하고 군대를 다녀 왔는데
휴직하길 너무 잘한것이 교통부 발령전 2개월근무하고 군복무기간을 합산해서 퇴직금을 받았기 때문이며, 35만원이라는 거금을 받았다.
그당시 공무원봉급이 2만원 정도였으니 제법 큰 돈이였는데 그돈으로 김포공항에 위치한 항공건설사무소로 발령받고 방화동에 단칸방의 전세자금으로 활용했다.
발령은 77.7월으로 교통부에서 EXIM차관자금 658억원으로 김포공항확장공사를 진행중에 있었는데 복수활주로,여객및 화물터미널을 건설하였는데 화물터미널과 여객터미널 공사감독업무를 명받고 근무를 시작했다.
공사감독인 공무원생활은 행정직에비해 비교적 수월했고 재미있게 보냈다.시공자는 현대건설주식회사였고 설계는 미국회사인 TAMS에서 해서 시방서나 설계도면등이 영문이여서 처음에는 어려움이 있었으나,곧 괜찮아졌고 미국회사의 설계도면은 간략하면서서도 명쾌했다.
우리나라 설계도면수준은 40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그만 못한것같다.
그당시 공무원 봉급이 국영기업체나 대기업에 비하여 절반수준이였던 시절으로 80년 김포공항확장사업이 끝나고 정부에서 운영하던 김포공항을 관리공단을 만들어 운영키로 함에따라 공단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당시 건설사무소 박남근소장께서 젊은사람들이 가면 안된다고 막아서 교통부 본부로 올라가게 되었다.
77년도에 어머님이 위암으로 돌아가시고 78년도 12월에 전주이씨인 이남숙씨와 연애끝에 결혼하고 79년10월에 첫아들인 규태가 태어났다.
방 한칸이 더필요하고 집장만등 공무원봉급으로는 어렵다고 판단하여 성동구 화양리에서 세탁소를 운영하던 처남가게를 인수하여 기술자를두고 세탁소를 운영해보았으나
오히려 내 봉급으로 기술자월급을 주는 꼴이여서 접고 부천 약대동에 소재한 15평형 희망연립주택을 구입하여 부천으로 이사를 했다.
그당시는 사무실은 김포공항에서 서부역에 위치한 교통부 항공국 시설과로 전보되었는데 주로하는업무는 공항건설를 위한 중장기계획,기본설계중 건축부문 관련업무와 및 공항건설예산업무을 담당하였는데
EPB(경제기획원)에 예산요구및 협의업무와 국회상임위및 예결위등 예산설명보조업무등이였다.
공무원생활을 하면서 대학에 대한 특별한 애로는 없었으나,자기개발 측면과 하는 업무도 어느정도 익숙해지고 공무원생활도 자신감이 들어 82학년도 경기공업개방대학 건축공학과에 원서를 내서 입학시험을 본결과 합격하여 입학했다.
집은 부천시 회사는 서울 중구서부역 학교는 노원구공능동 거리로 따지자면 왕복 150 KM가 넘고 시간으로도 5시간이상 전철과 버스를 타고 다녔는데 지금생각해도 어떻게 다닐수있었는지 상상이 가지않는다.
학교생활을 충실하게 한결과 8학기중 5학기는 성적우수 장학금을 받았고,과대표및 졸업준비위원등 요직을 맡아 재미있고 보람있게 보냈다.
82년 부천 연립주택에서 둘째인 소연이가 태었났다. 도저히 안되겠다 생각되어 집을 노원구 묵동으로 이사를 했다. 처음에는 단독주택 2층에서 전세를 살았으나 불편하여 반지하로 다시옮겨 살았다.
88년 상계동에 연금관리공단에서 대규모 아파트단지를 건설분양 하였는데 특별분양을 받는 행운을 안았다.
그러나 평당분양가 105만원, 25평형 주택은행융자를 공제하고 22백만원이 있어야 입주가 가능한데 그당시 반지하 전세금이 9백만원으로는 도저히 입주가 어려워 잔액은 융자도 생각해 보았으나
그당시 이율이 10%대로 봉급받아 이자 갔으면 먹고사는것이 문제여서 퇴직금13백만원 받아 처음으로 아파트를 마련했고 직장을 아시아나항공으로 옮겼다.
그러니까 77.7월부터 88년5월까지 공무원생활을 마감하고 제2민항인 아시아나항공 시설과장으로 갔다.
만약 교통부에서 계속 공무원생활을 하였다면 어땟을까? 동기중 가장 잘나간 친구는 부이사관으로 승진하여 인천국제공항공사 부사장까지 했고
못한친구는 사무관으로 제대한 친구들도 있으니까 본부에 일찍 올라갔고 열정적으로 공무원생활을 했다면 아마 서기관은 했을듯 싶다.
6.아시아나항공사 생활
88년 12월 취항을 목표로 아침 출근해서 밤10까지 휴일없이 취항 준비를했다.국내공항이 대한항공 독점 체제하에 운영해오던 카운터를 제2민항에게 나누어 주어야 하나 대한항공의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공단의 협조를 받고 교통부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카운터를 배정받았고,김포공항에는 사무실이 부족하였으나 그린벨트지역으로 사무실신축에 어려움이있어 콘테이너박스를 이용하여 사무실을 확보하여 취항에 대비했다.
중장기 계획으로는 격납고와 화물 터미널및 승무원 교육훈련시설등 설계및 신축하여 유지보수까지 했으며 특히 제2민항의 시설확보에 총력을 기울렸다.
공무원생활은 재량행위가 거없어 상사가 시키는대로 하면 되었지만 이곳은 내가 계획하고 집행하여 책임까지 져야하기 때문에 보람도 있었지만 힘도 들었다.
화물터미널 앞에 화물창고를 짓기로 건설교통부에 승인을 득하였으나 서울시 조례에의거 공개공지를 확보 하도록 규정되어있어
운수시설이나 창고시설임을 주장하여 총리실내 행정쇄신 위원회에 건의하여 서울시조례를 개정하는 쾌거를 거두었다.
금호그룹이 타그룹에 비하여 좋은것은 지금은 돌아 가셨지만 박성용그룹회장의 방침으로 직원들에게 서울대,연.고대및 서강대학대학원에 금호 MBA과정을 개설하여 직원들을 교육시켰다.
조건없이 6개월과정으로 덕분에 서강대학 경영대학원에서 MBA과정을 수료했다.
88.5월부터 98.12월까지 10년간 아시아나항공에 근무하면서 제2민항이 기반을 구축하는데 일조를 했다고 자부한다.
덕분에 원하던 상계동 주공아파트 16단지 입주하여 약5년간 살다가 본사에서 김포공항으로 사무실을 이전하면서 등촌동에 아파트를 구입해놓고
잔금이 모자라 전세주고 우장산밑에 위치한 화곡동5동 단독주택에 전세로 이사하고 5년정도 살았다.
근무기간중 해외출장은 3번있었는데 일본및 영국출장인데 일본은 ANA항공사의 격납고시설 견학과 영국은 BA승무원 훈련시설견학 위한것이였고
또하나는 오스트리아 빈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인천국제공항 건설사업의일환으로 쓰레기처리시설 입찰에 금호건설과 삼성이경쟁을 하는과정에서 법정다툼이 있어
실적입증을 위한 출장으로 공항공사 직원과의 친분이 있었던 덕분에 다녀왔다.
98년 IMF때 내가 맡고있던 시설.환경업무가 총무팀에 포함시키는 조직개편이있어 나는 그룹사인 금호건설로 전보발령을 받아 금호건설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7.금호건설 생활
금호건설은 금호그룹 계열사로서 동 종업계 약10위권에 위치하는 건설회사로서 아시아나항공시절 격납고및 화물터미널등 시공을 금호건설에서 맡아서 임원및 직원들도 몇몇은 앞면이있어 낫설지는 않았다.
주로했던일은 건설공사 특히 포항및 무안공항 공항건설및 확장공사 수주영업업무였는데 건설회사의 영업업무라는것은
설계심사를 대학교 건축과교수중에서 심사위원을 선임하도록 되어있어 대구경북및 부산지역 대학교 건축담당 교수님들을 상대하여야 했었다.
설계설명과 저녁 술자리와 교수.대학생들을 인천국제공항 건설현장 견학업무를 담당했었는데 전국 약16개대학교 건축과교수와 학생들을 지방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하여
용인에있는 아시아나 골프장에위치한 훈련원에서 하루밤 재우면서 술 한잔하고 이튼날은 인천공항건설현장 견학후 내려 보냈다.
근무기간중 연세대학교에서 건축과 백준홍교수가 CM교육을 개설하여 6개월간 야간에 받았는데 금호건설에서 2명과 대우등 건설회사직원이 약20명정도 되었다.
그러나 영업업무 때문에 학교못나가는날이 더 많아 수료도 제대로 못하였으나,미국LA에서 세미나가 있었는데 담당교수와 학생전원 일주일간 재미있게다녀 왔는데 여행은 LA에서 센프란시스코와 중간에있는 요세밑 국립공원등을 관광했다.
또한 호주 포틀랜드에 다녀올 기회가 있었는데 인천국제공항내 아시아나항공 격납고신축과 대 견간구조인 스트라취구조 견학차 다녀왔다.
이후 스트라치사와 파이프 구조체로서 항공기격납고및 실내체육관등 대견간구조를 국내적용을 위한 협약을 체결하여 국내영업업무를 담당했다.적용은 인천국제공항에 아시아나항공격납고와 군산곡물저장창고등 적용한바있으나
국내수요가 제한되어있어 영업이 신통하지 못하던차에 울진공항건설공사에 건축책임감리용역 자리가있어 금호건설을 그만두었다.
8.울진공항건설공사 책임감리업무생활
2002년 1월부터 2004년12월말까지 도화종합기술공사에 입사하여 울진공항건설공사 여객터미널및 부대시설 건축공사 책임감리업무를 4년동안 수행하였는데
위치가 울진군 기성면에 위치하여 집은 후포에 위치한 공영아파트를 전세로 얻어 생활 했고 시공은 대우건설에서 담당했다.
감리업무는 그동안 쌓은 건설공사 노하우와 건설교통부 감리업무 수행지침서에의거 규정대로 원칙대로 업무를 수행 함에따라 신경쓸일이 없어 편했고 재미가 있었다.
휴일이면 가까운 백암온천에 다니며 심신을 단련하고 아침저녁으로는 운동을 꾸준이 했다.
후포항과 구산항이 가까이 있어 생선회와 대게는 기성검사및 발주처 감독방문시등 많이먹을 기회가 있었다. 특히 봄.여름이면 고사리및 취등 봄나물를 채취하고 가까운 백암산에 등산을 다녔다.
준공을 1년 앞두고 건설공사 예산배정이 끈겼다.이유는 항공수요가 없을것으로 예상하여 정부에서 준공기한을 무기연기했기 때문이다.지난 2010년도에 항공기 훈련용공항으로 개항했다.
따라서 2004년말로 공사를 중단해 버렸다.여객터미널은 공정율 90%이상이 끝난 상태이며,활주로는 포장도 완료된 상태였으며..보일러및 냉동기등 기계설비가 반입되어 설치가 완료된 상태였다.
울진공항건설 감리용역기간 4년동안은 내 인생에서 가장 재미있고 한가로운 기간이였으며 마음이 편했다.해서 현직에서 물러나면 동해안에 와서 살고싶다 했는데 이번에 강릉으로 내려가살아야 겠다는 결심은 그때 했던것 같다.
9.인천국제공항 자유무역지역 공공및 지원시설신축공사 감리용역
2005.1월 근정건축으로 회사를 옮겨서 인천공항 자유무역지역 공공및 지원시설 책임감리 감리단장으로 부임했으나 공사완공기한이 이미 정해져있는 현장으로 공사기간이 1년에 불과했다.
그런데 감리업무는 2배로 힘들었다.인천 공항공사의 감리업무 요령과 건설교통부 감리업무수행지침서 2가지를 수행 하여야되고,공사감리업무 요령이 절차가 얼마나 까다롭게 되어있는지 감리업무보다 행정업무가 많아 현장을 챙길시간이 부족하여 많은 애로가있었다.
몸을 무리하게 다루어서인지 2005년6월 세브란스에서 간암판정을 받았으나, 다행이 초기단계로 색전술시술과 11월에 고주파시술을 받았다.
집사람의 간호와 가족들의 염여덕분에 5년간은 3개월마다 CT와 혈액검사로 재발여부와 관리상태를 확인하였으나,특별한 변화가 없어 요즈음은 5개월에 한번씩 확인한다.
인천공항공사에서 계획된 공기내에 무사히 준공처리해준 공로를 인정받아 건설교통부장관표창을 받았다. 개관식에 대통령이 참석했다.
10.김포국제공항 롯데몰 신축공사 감리용역
한국공항공사와 백화점,호텔등 롯데그룹계열사와 협약을 체결하여 한국공항공사는 년간 250억원의 토지사용료를 받고
롯데는 건설공사후 20년간 재산권인정및 영업을 보장한후 20년후부터는 공항공사에 기부하는 국유재산법상 기부채납방식을 준용한 민자유치사업이다.
동사업은 2006년7월부터 추진 되었는데 나는 공사착공전인 설계및 인.허가단계에서는 비상주감리원으로 참여하여 인.허가에 협조하였고 2007.11월 착공시에는 건축분야수석감리사로서 감리단장으로 사업을 총괄하였다.
사업규모가 부지 6만5천평에 연면적 약 9만5천평으로 사업비 약 5천억원이 투입된 대규모 공사로 지하5층 지상9층규모인데 지상은 백화점동,호텔동및 시네마동으로 분리되어있다.
설계는 건물은 서한건축사 사무소에서 했고 감리는 건축,토목,기계설비,전기통신.소방으로분리발주되어으나 총괄은 건축감리단장인 내가했다.
나는 77년.7월에 공직생활을 처음시작한 곳이 김포공항인데 그동안 항공사에 있을때도 김포공항에서 근무를했고,건설회사에가서도 공항건설공사 수주업무를 담당했고,감리도 공항만했다.
그리고 서울생활 마지막까지 김포공항에서 하게되어 나는 공항으로 시작하여 공항에서 마무리하는 진정한 공항맨이 였다고 자부한다.
(참고)
수석감리사의 자격은 건설기술관련법에서 국가기술자격자와 학력.경력자로 구분하여 규정하고있는데
1.국가기술자격자:기술사또는 건축사자격을 취득한자로서 10년이상 건설공사업무수행한자또는 기사자격취듣후 19년이상 건설공사를 수행자이며
2.학력.경력자:박사학위를 취득한자로서 14년동안 건설공사업무수행자또는 석사19년,학사22년동안 건설공사 업무수행자로 규정하고있음.
# 첨부:유언 - 1 끝.
2012.1월 중순
김포공항 롯데몰 감리사무실에서 쓰다.
======================================================================================================================= #별첨
유언-1
1.제목:자녀교육은 이렇게 시켜라
가.목적
나의 자식과 손자들 에게서도 글로벌 시대에 걸 맞는 인재를 생산,육성할수 있겠다는 확고한 믿음으로
세계가 인정하는 강영우,현용수 교육학박사 두분의 교육철학과 이론및 실제 자식들의 실험을 통하여 영재육성을 입증한 교육방법을 소개하니 자식교육에 참고하여라.
나.강영우 박사의 교육철학과 방법및 두아들의 사례
1)첫째아들 강진석(현 재미 안과의사)
3살반때 진석이가 기도하는데 “나도 눈뜬 아버지를 주세요” 아버지는 장님으로 자전거도 못가르쳐 주어요,운전도 못해요,야구도 못해요.못해요,못해요....
이 기도소리를 들은 교육학을 아는 아버지 강영우박사는 비젼과 꿈을 심어주는 기회로 삼아 아들아 너의 아버지의 눈은 현대의학으로는 고칠수가 없다.
그렇지만 네가 컸을때 미래에는 미래의학으로는 고칠수 있을지 모른다.그러니 너가 안과의사가 되어서 아버지의 눈을 고쳐주면 너와같이 야구도하고 자전거도 타고 운전도하고 그렇게 되지 않겠는냐 ?
그랬더니 그것참 멋있겠다 아빠 기다려 내가 의사가되어 눈 고쳐줄게
그후 부터는 눈뜬 아버지 달라는 기도 안해좋고, 안과의사가 된다는 꿈을 가져서 그걸 가지고 미래를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니까
학창시절에는 안과의사가 된다는 확실한 비젼과 꿈이 있으니까 일을해도 안과병원에가서 안과의사를 돕고 연구하고 거기에 집중해서 결과로는 30대에 미국에서 최고의 안과의사로 존경과 사랑을 받을뿐 아니라 협회장 까지 하고있다.
2)둘째아들 강진영(현 오바마정부 백악관 정책보좌관)
초등학교5학년때 담임 선생님의 한학기 숙제가“65세까지 살아서 은퇴하는 것을 과거를 회고하는 자서전을 써와라
자서전은 6장으로 나누어서 써라 취학전시절,초등학교시절,중학교시절,고등학교요시절,대학시절및 대학원시절과 성인시절 6장으로 작성해라.
자서전을 쓰기위해서는 65세에 무엇이 되어서 어떻게 은퇴하느냐? 정상의 목표에 도달하기 위한 과정의 목적과 목표를 정하고 실천목표를 정하라 였다.
진영이는 65세에 은퇴하는 연방 대법관으로 은퇴하기 몇일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난다.그래서 자기는 현직에서 죽고 싶다고 했고,비문에는 여기에 동양계 최초 아시아계 최초 연방대법관 크리스토퍼 진영강이 누어있노라
이렇게 정상의 목표를 정하고 그러면 정상으로 가기위해서 초,중,고,대학,법학전문대학원,판사,대통령의 임명을 받아야하니까?
과정의 목표를 정하고 나니까 그동안 못 보았던것이 보인다.5학년 짜리가 중,고,대학원까지는 내힘껏 열심히 공부하면 목표달성이 되는데 그후부터는 내 힘만 가지고는 안되는구나
대통령이 뽑아 주어야지 그러니까 얘가 5학년때 2가지를 결정하는거여요. 대통령의 임명을 받는데는 네트워킹을 넓히는 2가지 방법이있다.(자기스스로 생각)
형과 다른 학교를 간다.필요시 형의 네트워킹을 사용하기 위하여 다음은 아버지,어머니,형이 공화당 이니까 나는 민주당으로 간다.
그래서 하버드에서 월35만불을 준다는 돈의 유혹을 뿌리치고 1,500불 받으며 에드웨드 케네디후보 비서진으로 참여하여 경험을샇고 능력을 인정받아 오바마가 대통령이 되면서 현재 백악관에 입성하여 정책보좌관 45명중 최연소로 활약하고 있다.
3)강영우박사의 교육철학
영재로 교육시키기 위하여 IQ는 100정도면 되고 노력과 원동력이 필요하다.
노력하게 만드는 동기가 되는힘(동력:Driving Force Motivationl Force)이 중요하다
동력중에 학문적으로 검증된 동력이 원동력인데 이 원동력은 0~13세사이에 자신감,자존감을 심어주어야한다.
위인의 생일이나 특별한 날을 대입시켜 자신감을 회복시켜준다.
진석에게는 생일이 4,23일이여서 4.23일에 태어난 위인을 조사했더니 섹스피어가있어 너가 태어난것은 우연이 아니다.섹스피어처럼 위인이될수있다.
또,4,23일과 관련된 다른자료를 도서관에서 찾아 보았더니 2000,4,23일이 부활절이였다. 그래서 2000.4.23일은 너 인생에서 부활에 버금가는 위대한사건이 일어날것이다.기대하고 기도하면서 기다려라 했더니
2000,4,23일 의학박사가 되었다.사실은 1999,4월에 의학박사가 될수 있었는데 필립스 아카데미 입학사전관으로 일하면서 스스로 1년을 늦추었다.
또 하나의 원동력은 컴패션(성김의 리더십:남의아품에 동참해서 고통을함께나누는 마음)인데 어려서부터 길러주어야 한다.
한차원 높은 원동력으로는 창의력,집중력,소통의능력,결코 포기하지 않는 끈기 인데 이건 중상정도의 머리를 요구한다.
원동력을 심을때 1~2개만 심어 주어야 한다.
케네디:성공의척도 돈이아니다.가문이다.하나님이 주신 기본능력을 최대한 개발 성공하여 나를 위해 쓰는것이 아니라 사회발전,꿈 실현을위해 써라.
링컨:어머님 은혜다.어머니로부터 더 좋은 세상을 만들어가는 꿈을 꾸는것과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을 배웠다.(어머니가 9살 때 죽었다.9살전에 듣은 예기다)
즉,영재로 키워지는 자녀는 13세 이전에 1~2개의 원동력을 심어주어야 한다.
다.현용수박사의 교육철학
1)유대인 교육방법과 우리나라교육의 문제점
유대인은 4000년동안 흩어져 살다가 1968년 이스라엘 건국으로 만났음에도 세대차이가 없었으나,우리나라는 해방이후 60년도 안되었는데 부모자식간 세대차이가 크다.
그 이유는 우리나라는 해방이후 미국식 교육을 실험없이 그대로 적용함므로서 지혜교육인 전통,역사,종교,철학,사상,고전,효도등 수직교육을 시키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국식 교육방법은 수평교육으로 물질,권력,명예,유행,현대,학문,과학등으로 IQ교육이며,자녀가 원하는대로 교육시켜야 한다는
죤-듀이의 교육철학에서 비롯된 것으로 아이를 낳으면 전문가에게 맡켜라인 현대 학교교육이다.
노벨상 수상자의 32%가 유대인 민족인데 유대인의 교육방법은 과연 어떻한 것인가? 연구한 결과 자녀가 원하는대로가 아니라 부모가 원하는대로 교육시킨다.이다.
즉 13세 이전까지 아버지와어머니가 가정에서 지혜교육인 전통,역사,종교,철학,사상,고전,및 효도교육등을 시키고 학교 갈때가 되면 학교교육을 병행한다는 것이 차이점이다.
우리나라도 이전에는 인간의 도리와 철학등을 가르치는 한학교육이 있었는데 이것이 유대인이가르치는 지혜교육과 같았으나.해방이후 완전이 없애고 학교교육만 시켰다.
“자녀는 낳은 사람을 닮는것이 아니라 가르친 사람을 닮는다”
우리나라의 세대차이는 부모가 학교,학원등에 데려다주기만 하고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코드가 맞지않아 부모말을 듣지않고 세대차이가 생긴것이다.
2)현용수박사의 교육방법
컴퓨터에 비유할 때 지혜교육을 시키면 하드훼어 용량의 크기를 크고 넓이는 역활을 하며 정신세계가 견고하고 깊이가 있는 사람으로 자라서
고생이 되더라도 자살 하지않고,육체적 쾌락과 유혹이 온다고 하더라도 거기에 빠지지 않는다.
정신세계가 됫바침 되어야 그사람이 클수있다.성철스님,김수환추기경,한경직목사등 이분들이 사회적으로 존경을 받는것은 입문 이전에 한학교육을 받았기 때문이며,
정주영,안창호 이분들은 학교교육은 받지 안았지만 인성교육은 제대로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부모님의 교육열은 세계에서 최고다.그래서 미국유수 하버드,예일,스텐포드등 일류대학을 나와서 미국 주류사회에서 진출하게되는데
통계에 의하면 70%가량이 탈락하고있다고 한다. 그이유는 지혜교육인 인성교육을 무시하고 학교교육만 시킨 결과이다.따라서 이제는 인성교육이 경쟁력이다.
우리 부모님이 다른 부모보다 휼륭하니까 다른 부모보다 존경 해야하는냐?->NO,우리부모님을 내가존경하지 않으면 누가 존경하겠는가?
우리민족이 다른 민족보다 우수하니까 우리민족을 더 사랑해야되는냐?->NO,우리민족을 내가 사랑하고 아끼지않으면 누가하겠는가?
우리민족의 한복,국악,음식이 다른 민족꺼보다 우수하니까 우리것을 더 챙겨야되는냐?->NO,우리것을 우리가 챙기지 않으면 누가 챙기 겠는가?
<참고문헌>
1.원동력(저자:강영우교육학박사).....이책에 강영우박사의 교육철학과 두아들을 글로벌 리더로 키운 노하우가있다(구매하여 보아라)
2.인성교육의 노하우(저자:현용수 교육학박사)...이책에 현용수박사의 교육철학과 유대인의 교육방법과 우리나라의 교육방법의 문제점등이 기술되어있다.(구매하여 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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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우리들의 현대사입니다...........^^* 종화친구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한 강릉생활이되길 기원합니다..............
감사드리며,아들 며느리 딸 사위에게 보낸메일을 우리카페에 올린것입니다.부끄러운 면도없지 않지만 자랑스럽고 떳떳한 삶을 살았다고 자부합니다.강영우 현용수박사의 교육철학이 우리손주들의 교육에 참고가 되었으면 합니다.
친구야 우리들의친구라는게자랑스로울정도로 대견하구나 어려운환경속에서홀로서기에 무척이나힘든나날이였던과거가있엇것만 넌 지금도 서울의깍쟁이같은모습은전혀찿아볼수없는게 순수하고 어진성품이 오늘의 널 만들엇구나 가까이온다하니 환영한다 농부의아들이라 시골생활 잘 적응하리라 생각하며 행여 보따리싸는 일이 없도록.......
환영해주어 감사드리고, 친구나 우리 친구님들 모두 나와같은 환경이 였다면 다들 잘 혜처 나갔을거야 ~ 이쁘게 봐주어서 고맙소! 잘 적응할수 있도록 친구와 친구님들의 관심과 지도.편달을 부탁합니다.
그래 열심히 잘 살아냈어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바탕으로 이제 부터 시작이야 옛날은가고 없어도 지금부터 시작이야 좋은 환경과 물질적인 부분도 잘 갖추어진 지금
이남숙 여사님과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를.............웃어가며
지금부터 시작이라는 말에 공감합니다.과연 어떻게 남은 여생을 사는것이냐? 인데 우선 즐겁고 행복해야 된다는 전제를 했을때, 행복은 재미가 있어야 행복하다고 하니까 재미있는 삶은? 자연의 순리를 거슬리지 않고 순리를 따르느는 삶?과연 어떻게 사는것인가? 나는 농사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먹고살기위해서 농사를 짓으면 힘들어서 못하고 나누기위한 농사! 비료,농약 안주고 자연농법(기무라 아키노리 방식)으로 자연의 순리대로 옛날 우리 부모들이 짓던 방식과 같이.....
대도행심의발원으로인생의항로을사랑하며지키어온친구종화님과가정의축이되여행복과사랑이충만하도록이끌어온이남숙여사님;친구님의가정의복되심진심으로축복의박수을보내내'.가슴저리도록지나온길 ,길마다눈물과아품,주마등처럼 인생에서의행복이라는꽃,소중한것을아는사람만이거둘수있음을사랑하고사랑하는친구님에가정에가득가득하기를바라며강원도비탈에입성하면내면의당신을안고져하네,지나온길 눈물겹도록감사한마음으로접하였네,,,,,,,들넠에도황금빛이있음에또항해해하지,,,
이쁘게 봐 주어서 감사하이, 우리세대의 숙명같으것 아니겠는가? 옥화씨가 염여 했드시 보따리 싸는일 없도록 친구님은 귀향 선배로서 많은 조언을 부탁함세! 가자미 낚시도 함께하면서 세월을 낚으며 막걸리한잔에 기분을 추스리고 우리가락에 흥겨운 날을 기약하면서... 살아감세! 글구 세해에는 뜻한바대로 이루어지길 바라며.....
어려운 역경을 딛고 우뚝선 당신 자랑스럽고 존경스럽다.나역시 마읍에서 태어나 근덕중으로의 유학, 삼척, 서울에서 대학교를 졸업할때까지 고생도 했지만 친구에 비하면 훨씬 좋은 조건이었던 같다. 친구에 대해 모르던 것도 많이 알았고 탐독하면서 많은 것을 깨닫게 한 감동 그 자체다. 산좋고 물좋은 강릉에서의 새로운 생활 멋지고 후회없는 삶보내렴. 친구야 화이팅!
고맙네,동해 여러곳을 둘러 보았지만 마읍같은 곳이 흔하질 않아요.귀향 후보지로 생각했던 곳인데 자네가 마읍에서 태어났구먼! 많은 친구들이 염여해주고 격려해주는 덕분에 새로운 강릉에서 삶이 설래이네- 친구는 상계동에서 20년 넘게 사는것 같은데... 환경을 바꾸어서 새로운 곳에서 둥지를 틀고 살아보시길 권하네 처음에는 낯설고 하지만 좀 지나면 괜찮아 지고.. 긴장도되고 삶에 활력이 생기는것 같아요.서울생활은 자식들을 위한생활이였다면 강릉에서의 생활은 부부중심이 될것이니까 노후를 후회없이 즐기면서 살려고 합니다.강릉에 오시면 꼭 들려주시고 박사장님도 뜻한바대로 만사형통하시길 바랍니다.
친구 종화/벌써인가 생각 했더니 세월이 많이 흘렀네 그려/강릉 온다는 소식 들었네.나도 서울에서 동아제약에 근무하다가 강릉지점 발령받아 강릉온지/ 어언 37년/강릉이 제2의 고향이 되었네.참 파란만장한 여러 일들 많았제/환영하네,,,진심으로...나 또한 할말 많지요. 자넨 노후설계 멋있게 설계했구나..난 이제 시작이라네 열심히 일하고 있네.나의 인생좌우명은 멋있게 살자는것일세/할일 넘넘 많아서 좋다네/그동안 수고 많았고,이젠 남은 삶을 어떻게 살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해봄이 또다른 행복이 기다리고 있을것이야...기다릴께 친구/연락주게 강릉에서 진수
감사드리고, 친구는 서울에서 근무하다가 신학대학나와 목사안수 받고 강릉으로 내려갔나 했었는데.... 강릉에서 오랫동안 근무를 했었구먼! 난 강릉은 지나만 다녔지 잘 몰라요. 앞으로 강릉에서의 삶에 대하여 선배로서 많은 조언과 지도.편달을 부탁함세.그럼 내려가서 보세 고맙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