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서받지 못한 자>와 <숨>으로 2년 연속 칸영화제의 초청을 받고, TV 드라마 <히트>의 히트로 영화 그 이상의 인기대열에 합류한 하정우. 현재 한국 남자배우 세대교체의 가장 선두에 선 이름이다.
<두 번째 사랑>에서 하정우가 연기하는 김지하는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남자다. 불법체류자인 그에게는 불임센터에서 자신의 건강한 정자를 파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다. 세탁소와 정육점에서 힘들게 아르바이트를 해서 돈을 벌고, 침대 밑에 숨겨둔 철제 박스에 차곡차곡 돈을 모으지만 한국에 있는 애인을 언제쯤 미국에 데려올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 자신도 언제 붙잡혀 미국 땅을 떠나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에게 위험한 거래를 제의하는 여자가 있다. 한 번 관계를 맺는 데 300달러, 임신이 되면 3만 달러를 주겠다는 제안. 섹스는 사랑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라지만, 그 여자가 자신과 인종이 다르다거나 자신의 스타일이 아니라거나 신뢰할 만한 사람인지 의심스럽다거나 하는 사실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는 당장 박스에 현금을 가득 채울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중요하다. 그렇게 지하는 위험한 거래를 받아들인다. 어쩌면 ‘용서받지 못한 자’라는 제목은 <두 번째 사랑>의 지하에게 더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뉴욕에서 김지하로 태어나다
최근 하정우는 정말 바쁜 시간을 보냈다. TV 드라마 <히트>, 칸국제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한 김기덕 감독의 <숨>, 그리고 곧 개봉예정인 <두 번째 사랑>에 이르기까지 그는 정말 서로 다른 모습으로 우리 앞에 나타났다. 그 변화는 의도한 것이든 아니든 현기증을 일으킬 정도다. <히트>에서 연기한 검사 ‘재윤’은 부유한 집안의 막내아들이다. 시험이라는 시험은 떨어져본 적 없는 수재라, 공인회계사시험에 합격하고서도 취직하기가 싫어 또 괜히 사법시험에 손댔다가 또 30세에 사법연수원을 졸업하게 됐다. 너무 가진 게 많고 누린 게 많아서인지 삶에 대한 특별한 욕심이 없는 철부지 같기도 하다. ‘처음으로 도전하는 사람은 훌륭하다. 그러나 내가 그 사람이 되진 말자’, ‘가족 너무 강조하는 사람치고 부인 안 패는 남편 없듯 팀워크 너무 강조하는 사람치고 팀원 안 괴롭히는 사람 없다’는 신조로 ‘대충’ 검사직을 수행한다. 뭐 어느 대목의 한 문장만 읽어도 <두 번째 사랑>의 지하와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다. <숨>과 비교해도 지하는 다르다. <숨>에서 하정우는 자신의 아내가 사형수를 찾아가 사랑을 갈구하는 것을 목격한다. <두 번째 사랑> 역시 그렇다. 앤드류(데이비드 맥기니스)는 자신의 아내 소피(베라 파미가)가 지하와 사랑에 빠져 있음을 알게 된다. 말하자면 <숨>의 하정우 역할을 <두 번째 사랑>에서 소피의 남편 앤드류가 가져가고, 하정우 그는 <두 번째 사랑>에서 <숨>의 장첸 같은 역할을 연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하정우는 세 작품에서 묘하게 순환하고 서로 거울을 비추는 듯한 캐릭터들을 연기했다. 어쩌면 그것은 더 성장하고 싶은 배우에게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연기수업이다. 그러니까 하정우는 올해 가장 멋진 연기 레슨을 받은 한국배우들 중 하나다.
아마도 <두 번째 사랑>을 보고 있으면 하정우의 자연스런 영어 연기에 호기심 어린 표정을 짓게 될 것이다. 특별히 한 영화를 위해 훈련을 받았다고 하기는 힘들 만큼 그는 뉴욕의 불법 체류자를 완벽하게 소화해냈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뉴욕이라는 도시가 그리 낯설지 않았다. 그래서 ‘새로운 환경에서의 연기가 장애물이 되지는 않았나?’ 라는 질문은 그리 적절치 않다. 뉴욕에서 어학연수를 한 적도 있는 그는 이번 촬영까지 합하면 6번 정도 뉴욕에서 살거나 여행을 했다. “뉴욕은 정말 익숙한 곳이에요. 전에 뉴욕을 떠날 때 이런 곳에서 영어 연기를 할 수 있는 날이 올까, 하는 생각도 했으니까 어쩌면 그 꿈이 이뤄진 거죠. 미국과의 합작이다 보니 워낙 칼처럼 정해진 촬영을 하는 시스템이어서 쉬는 날에는 예전에 좋아했던 곳들도 다니면서 행복하게 보냈어요. 힘든 촬영이었냐고요? 한국에서의 촬영과 전혀 다르지 않았어요.” 말하자면 <두 번째 사랑>은 그에게 해외촬영이라는 낯선 도전이 아니라 그저 흥미로운 신작이었다.
그럼에도 <두 번째 사랑>은 100% 해외 로케이션 촬영이라는 환경의 변화를 포함, 여러 면에서 ‘처음’이었다. 그로서는 첫 번째 ‘정통’ 멜로영화였고, 여성 감독과의 첫 번째 작업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대답, 먼저 그는 대학 시절 연극을 할 때 줄기차게 멜로 연기만 했었다. 그래서 <두 번째 사랑>은 오히려 그에게 과거의 향수와 에너지를 불러일으키게 만드는 행복한 작업이었다. 그 다음, 김진아 감독은 여성 감독이라는 성별의 차이보다 동질감을 느끼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김진아 감독 스스로가 미국사회 속의 한국인이자, 영화가 말하는 소외와 고독에 대해 그 누구보다 친절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 더불어 지하의 실제 집이 있는 곳이 바로 게이 커뮤니티로 유명한 뉴욕의 첼시지역이었다. “첼시는 게이들이 너무 많다보니 오히려 이성애자들이 소외감을 느끼는 지역이에요. 내가 사는 집 주변에 첼시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게이 클럽이 있었고, 그런 환경 속에서 지하는 불법체류자에다 이성애자에요. 그 어디를 둘러봐도 소외된 사람이죠.”
2007년 하정우라는 배우를 얻다
영화가 보여주는 지하의 극단적 소외는 그에게 의외의 행동을 하게 만든다. 소피를 사랑하게 됐을 때쯤 아무 이유 없이 그녀의 집을 찾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한 중산층 가정의 행복하고 부유한 일상이다. 불법체류자인 그가 ‘언젠가 나도’ 하고 꿈꿔볼 수 있는 상황이지만, 절대 끼어들 수는 없는 풍경이다. 그렇게 그는 뉴욕에서 찾아온 두 번째 사랑에 적극적으로 변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시간이 돈인 그가 계속 소피의 집을 맴돌고 얼쩡거리는 것이다. 이쯤에서 묘한 의문이 든다. 지하가 미국으로 데려오려 하는 한국의 여자친구에게도 과연 그랬을까? 그는 첫 번째 사랑에게도 그처럼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을까? “아마 ‘두 번째 사랑’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었던 것도 ‘첫 번째 사랑’과는 다른 무엇이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결국 영화는 새로운 사랑을 위해 이전의 것들을 모두 포기할 수 있는지 묻고 있는 것 같아요. 인물이 처한 상황 같은 건 중요하지 않죠.” 그러니까 영화는 당신에게 두 번째 사랑이 찾아온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라고 묻는다. 지하와 소피 모두 포기해선 안 될 것들이 너무 많은 사람들이다. 지하에게는 한국의 여자친구가 있고, 또한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에는 돈도 별로 없는 남자다. 소피도 마찬가지, 그녀는 무엇보다 가정이라고 하는 거대한 울타리 안에서만 숨 쉬어 왔던 여자다. 한 마디로, 살면서 전혀 만날 일 없을 것 같은 두 남녀의 질긴 사랑의 이야기가 바로 <두 번째 사랑>이다. 김진아 감독의 이전 작들인 <김진아의 비디오 다이어리>(2001)나 <그 집 앞>(2003)과 비교하면 좀 더 장르성에 충실한 정통 연애담이라 할 수 있다. 감독 스스로 ‘지극히 통속적인 연애담’이라 말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
이처럼 <두 번째 사랑>은 하정우에게 가장 전형적인 모습을 요구한 영화이기도 하다. 바꿔 말해 그의 팬들이 ‘꼭 봤으면’ 했던 역할을 소화한 작품이다. 그리 큰 인상을 남기지 못했던 몇 편의 영화를 지나 <용서받지 못한 자>(2005)로 독립영화라는 경계 안에서 본격적인 기지개를 켰고, <구미호 가족>(2006)으로는 ‘구미호’라는 생소한 도전에 나섰고, <시간>(2006)과 <숨>은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김기덕 감독의 개인적 연금술이 짙게 반영된 역할이었다. 그만큼 그에게 기대를 걸고 사랑했던 많은 사람들은 그의 지극히 전형적인 연기를 보고 싶어 했다. 그가 주목받는 이유가 어쩌면 ‘희소성 있는 작품’에 출연해서가 아닌가, 의심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두 번째 사랑>은 그에 대한 자신의 첫 번째 대답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는 그런 의심을 말끔히 떨쳐낼 만한 모습을 보였다. ‘김용건의 아들’이라는 왕년의 단골 수식어는 사라진 지 오래다. 2007년은 바로 한국영화계가 하정우라는 변치 않는 재능을 얻은 해이기도 할 것이다.
최근 하정우만큼 바쁜 배우도 없었을 것이다. <구미호 가족>을 촬영하다 <두 번째 사랑> 제의를 받고는 미국으로 갔고, 귀국해서 휴식에 젖을 수 있을까 하다 <숨>에 들어갔고, 최근에는 <히트>로 정말 정신없이 지나가는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미국식 제작 시스템에 적응해 있다 곧장 김기덕 감독이라는, 한국영화계 안에서도 가장 독특한 제작방식으로 이름나 있는 시스템으로 흡수됐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랍다. 그만큼 하정우라는 배우가 보여주는 유연성이 크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그의 차기작은 바로 윤종빈 감독의 <비스티 보이즈>다. 장혁과 함께 캐스팅된 이 영화는 호스트바에서 일하는 일명 ‘선수’ 두 명이 돈을 벌어 답답한 일상에서 탈출하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서 뒤틀어지는 이야기다. 하정우 그로서는 같은 감독과 두 번째로 작업하는 첫 번째 영화고, 윤종빈이라는 맘 맞는 친구 감독과 보다 더 큰 ‘물’에서 조우하게 된 영화다. 윤종빈과의 ‘두 번째 만남’이 어떠할지, 그 역시 지금 조심스런 기대감으로 들떠 있다. 같은 감독과 두 번째 만난다는 사실은 자신에게 어느 정도 경력이 쌓였다는 얘기일 테니 아무래도 더 큰 무게감을 가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 하정우는 <두 번째 사랑>을 계기로 할리우드 진출의 문도 열어뒀다. 이에 대해 그는 “올해 안에 꼭 어떤 얘기를 들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더불어 ‘영화배우’라는 이름이 익숙해지려면 좀 더 뭘 해야 한다고 머리를 긁적인다. 하정우는 최근 가장 빠른 성장을 보여준 남자배우다. 그 속도가 줄어들 일, 당분간 전혀 없어 보인다.
사진 김동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