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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체적 고통은 한순간이지만, 내가 발설하면 친구와 조직은 죽고 붕괴한다. 내가 죽는 것은 잠시이지만 친구와 조직을 배신하는 것은 내 삶의 영원한 치욕이다. 한 번의 배신은 천추만대에 더러운 이름을 남기는 일이다. 죽음이 가까이 와도 마음은 무쇠와 같이 변하지 않으리라."
정공단 친구들 취조를 받다
▲ 1926년 부산 서구 동대신동 부산형무소 당시 부산에는 일본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일본인 범법자를 가둔 부산형무소가 가장 시설이 좋았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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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찰서에 잡혀 온 사람들 수십 명을 한 방에 몰아넣어 앉아서 잠을 잤다. 사람들에게 수소문해보니 직접 목격자는 없었다. 다만 고막이 파열될만한 폭탄 소리만 들었고 부근을 지나던 행인 전부가 노상에서 쓰러질 정도였다고 한다. 경찰서 안에 있었던 사람들은 혼비백산했을 것에 오택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당시 부산경찰서는 1층은 유치장이고, 2층은 사무실이었다. 밤새도록 2층 사무실에 많은 사람을 오가는 소리가 들렸다. 숙직자에게 물어보니 관공서 대표의 위문객이고 법원장 이하 판검사의 현장조사와 수뇌부 회의라고 한다.
오택은 전날 박재혁의 불길한 꿈 때문에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재혁에게 분명 나쁜 일이 생긴 것이 틀림없는 듯했다. 다음날 새벽 4, 5시경 숙직 순사들이 교대하며 저들끼리 대화를 듣고 정공단 친구들은 안심하였다.
"자네 어제 부산일보 호외를 보았는가?"
"응, 범인은 부산상업학교 출신인 가정부원 같다고 하네."
"범인은 폭탄 다루는 것이 서툴러 자기가 다쳤다네. 현재 부립병원에 입원했지. 죽지는 않았는가 보더라."
"서장도 조금밖에 안 다쳤다며. 하늘이 복을 준 사람이야."
"그렇게 말이야. 경상자는 많은데 이는 폭탄 소리에 놀라 졸도한 사람들이라 위독한 사람은 없어."
"그나저나 오늘부터 비상 근무라네. 참, 귀찮게 되었어!"
▲ 1915년 부산부립병원 지석영이 종두법을 배웠던 재생병원은 1920년 박재혁의사가 치료한 병원인 부산부립병원이었다. - 출처 : 부경근대사료연구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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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혀 온 정공단 친구들은 서로는 모르는 척했지만, 남몰래 서로 다짐을 하였다. 요지는 분명했다. "우리는 모른다", "우리 그냥 친구로서 같이 오랜만에 왔기에 어울린 것뿐이다", "만약에 조사 결과를 가지고 묻는다면 그냥 인정할 것만 하자", "절대 회유에 넘어가지 말자"라는 것이었다.
잡혀 온 사람들이 이튿날이 되어 모두 석방되고 오택, 최천택, 김영주 세 명만 남았다. 각자 격리되었다. 정공단 친구들은 체포된 지 4~5일부터 본격 심문을 받았다. 하루 2~3시간씩 취조를 받았다. 조선인 취조주임인 유진후는 교묘하게 회유하듯 간청하였다.
"여러분은 내란죄라 사형범이다. 담배와 인단 고급 점심 등을 제공하니 잘 먹고 기왕이면 남자답게 진상을 자백하여 고문을 안 받게 하라."
친구들은 박재혁이 위독한 것을 알기 때문에 자백할 리 없었다. 매일 심문에 친구인 것은 사실이나 범행은 사전에 몰랐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거사 전에 최천택과 김영주는 박재혁과 온천장 등에 같이 있었다. 오택은 박재혁에게 1천 원을 제공하고 박재혁의 폭탄을 집에 두었다는 사실은 경찰도 알고 있었다. 이것을 부인하기는 어려웠다. 아무튼 재혁이 말하고 형사들이 조사한 것만 인정하기로 하였다.
오택은 매일밤 한 두 시간 밖에 자지 않고 알리바이를 구상하였다. 1천 원 용도에 대해 심문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자신의 개인적 활동에 관해 묻는다면 인삼장사라서 서울(경성)) 등지를 다닌다고 말할 작정이었다. 오택은 무죄 방면으로 풀려나는 유치장 사람들을 통해 부모님에게 한석명, 유진후, 와다 등 각각 요인을 통하여 매수 정책을 하도록 하였다. 매수 운동이 성공한 탓인지 오택에 대한 취조는 완화하여지고 시일은 여유가 있게 되었다.
오택을 유진후는 대강 심문하고 한석명에게 넘겼다. 한석명은 유진후보다는 좀 더 유화적으로 대했다. 유진후보다 직급이 높은 것도 있지만 인품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 한석명은 매일 4~5시간씩 2층 숙소에다 불러놓고 담배, 인단, 점심 등을 충분히 넣어주었다. 오택은 현금 1천 원 제공 이유에 대해 박재혁 노모에게 생활비로 500원, 박재혁이 병이 있어 치료비로 1천 원을 빌려주었다는 거짓 자백의 논리를 만들었다. 또 폭탄에 대해서는 신문 뭉치 한 개를 맡기기에 물으니 박재혁이 '떡이다'하여 중국 아편을 떡이라 함으로 박재혁이 아편 장사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숨겨주었다. "귀국할 때 비밀리에 가지고 온 것으로 생각하고 후일 속히 가져가라고 부탁하고 받아서 열어 보지도 않고 암실에 숨겨두었다가 6~7일 후 와서 떡을 내어달라고 하기에 오택은 무심히 내어주며 주의하라고 부탁하였다고 하며 그것이 과연 폭탄인 줄은 사후에 추측하였다고 말하고 한석명에게 정식 조사서 작성을 청하였다.
오택은 자신의 모범 답안에 안심하였다. 직접 조사서를 작성하고 도장을 찍었다. 이 정도의 진술이라면 악독한 판사라도 체형까지는 내리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유치장에 들어간 지 오택은 보름 만에 처음 대변을 보았다. 위급한 상황에 '똥줄이 탄다'라는 말을 실감하였다. 한 시간 반이나 용을 썼는데 겨우 수십 개의 양분(洋糞)만 누고 말았다. 일주일 이상 매일 한 끼씩 밥을 먹었으니 극도로 노심초사한 것이다.
오택과 달리 최천택과 김영주는 박재혁의 귀국 이후 1주일 동안 계속 같이 생활했기에 집중적 취조 대상이 되었다. 최천택은 부산경찰서 유치장에 구금된 후 4일 만에 사법실(취조실)에 불려갔다. 오택의 취조 담당이 조선인이었는데, 최천택 증언에는 그의 취조는 일본 형사가 담당했다. 경찰은 13일 용두산에 간 일을 물었다. 박재혁과 유흥하고 돌아다녔다고 진술했기에 취조할 내용이 없을 수도 있었다. 포악한 일본인 형사는 최천택의 손톱과 발톱을 뽑는 등 엄청난 고문을 가했다. 고문이 심하면 심할수록 최천택의 가슴 속에선 일제에 대한 적개심이 활화산처럼 분출되었다. 최천택은 끝까지 모든 것을 부인했다. 박재혁도 자백할 리가 없고 만약 자백한다면 단독범행을 주장하리라 믿었기 때문이었다.
어느 날 최천택에게 부산경찰서 조선인 사환이 붓 대롱을 떨어뜨려 놓고 갔다. 박재혁이 입원한 부립병원 간호사가 박재혁의 부탁을 받고 동생의 친구인 경찰서 사환을 통해 편지를 보낸 것이다.
"천택아, 고생이 심하겠구나. 너희들은 이 사건을 모른다고 해라. 모든 것은 내가 책임지겠다."
편지를 읽은 최천택은 뼈가 부서지고 살이 으깨어지는 고문을 묵묵히 이겨냈다. 때론 역사에는 소설 같고 영화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사실 여부는 알 수 없다.
유치장에서 취조 중인 김영주, 오재영 등은 가택 수색 결과, 주범자 폭탄투하 사건에 대해 직접 관련이 있는 서류는 없어도 왕복한 불온 문서가 다수 발견되었다. 하지만 박재혁 의거와는 관련이 없는 것들이었다. 김영주의 집에서는 불온문서가 많이 나왔지만, 이번 사건과 직접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다만 김원봉(김성일)이 김병태를 통해 김영주에게 박재혁의 여비 100엔이 송금된 사실이 드러난다. 이 일로 김영주는 혹독한 심문을 당했다. 최천택은 직접적으로 상해와 연결된 증거가 없었지만, 김영주는 돈이 오고 간 증거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세 친구 중에서 가장 심한 취조와 고문을 당한 사람은 김영주라고 할 수 있다. 김영주에게 집중된 질문은 당연히 김성일과 김병태의 정체였다. 그리고 송금된 돈이 있는 것만이 아니라 다른 때에도 있었는가였다. 김영주의 잡화상이 중국과 연결된 부산의 고리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김영주의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일로 김영주의 몸은 극도로 쇠약해졌다.
검사국에 송치되다
▲ 오택과 최천택 두 사람은 부산상업학교 출신으로 박재혁과 정공단 친구들이다. 하지만 최천택의 청년 시절 증언은 오택의 삶과 겹치는 부분이 많다. |
3주일 후 기소가 되었다. 이날이 10월 5일이다. 박재혁 의거에 대한 보도 통제가 해제되어 신문보도가 된 날이다. 박재혁과 공범자에 대한 조사가 끝났기 때문이다. 박재혁은 "폭발물 취제벌칙 위반과 살인미수죄"로 부산 감옥에 갇혔다. 정공단 친구들도 검사국으로 송치하는 데 부산 초유의 사건이라 특별대우를 하여 당시 부산 제일 고급자동차에 생화를 꽂고 일본인 와다 사범주임이 죄수 호송자가 되어 부산 검사국으로 갔다. 당시 표독하기로 악명이 높았던 호리다(窪田) 검사는 주소, 성명과 듣고 사건 내용은 언급도 하지 않고 수감 명령을 내렸다.
정공단 세 친구는 감옥행 검은 자동차를 타고 생전 처음 옥문을 들어섰다. 간수들도 대사건의 주인공이라면 특별대우하는 듯했다. 그만큼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사건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에게도 특별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이 얼마나 주목받았는지 사건 발생부터 박재혁 순국까지 당시 신문에 30여 차례 보도가 되었다. 옷을 갈아입고 지문을 날인하고 절차를 마치고 미결감으로 부산 감옥에 들어갔다. 당시 부산 감옥은 일본인 죄수가 삼 분의 일이나 있으므로 설비, 위생, 대우, 식사 등이 전 조선에서 제일 좋았다. 정공단 친구 일행은 옥문 밖에 가족이 직접 밥과 반찬을 만들어 세끼 때마다 쌀밥과 고기를 차입시켜 주었다. 또 대사건 주인공이라 하여 교도소장 이하 간수장이 매일 문안을 오고 후대(厚待)함으로 별 고통은 없었다. 당시 일제는 부산경찰서 투탄이 의열단 최초로 성공한 사건이고 일본인 경찰 서장이 부상 당한 사건이므로 민족적 차별이 없는 동화정책의 하나로 보고 수감자들을 특별 대우한 듯하다.
1주일 후 두 번째로 검사국에 출정하여 호리다 검사를 만났다. 검사는 온정적이고 질문도 유리한 점만 기록하게 하였다. 오택은 부모의 매수 운동이 검사에게까지 영향이 미쳤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정공단의 친구들에게 별다른 혐의가 없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표면적으로 최천택과 김영주는 1주일 동안 박재혁과 같이 유흥을 즐기고 정양했을 뿐이고, 오택은 단지 1천 원의 치료비와 보관된 물건을 준 것뿐이기 때문이다.
10월 16일 갑자기 출정 명령이 떨어졌다. 그날은 박재혁의 부산경찰서 투탄 의거 1심 재판이 시작하는 날이었다. 거사가 일어난 지 한 달여 만에 연루자로 지목된 최천택, 김영주 외 4명은 동시에 증거불충분으로 모두 불기소 방면되었다. 당연한 결과였다. 호리다 검사는 정공단 친구들에게 준엄한 설유(說諭-말로 타이름)를 하고 나가라고 하였다.
"여러분은 물심양면으로 박재혁의 투탄 방조가 확실하여 극형에 처할까 하였다. 하지만 아직 나이가 어려 특별히 호의로 해석하여 특히 용서하여 기소유예를 한다. 앞으로 다시 이러한 행동이 재연할 때는 이번 죄를 부활 가형(加刑)할 터이니 회개(悔改) 천선(遷善)하라."
정공단 친구 일행은 형식적으로 감사를 표하고 여러 친지의 마중을 받아 귀가하였다. 그러나 구금 이후 일수는 불과 한 달 남짓이었으니 모두 극도의 노심초사를 겪어서인지 피골이 상접하고 수년 동안 앓은 중병자같았다. 그날 밤 오택은 부친이 다수 요인을 매수 노력하느라고 수만 원의 금품과 노력이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출옥된 후에 오택이 신문보도 등을 확인해보니 오택이 병 치료비로 1천 원을 주었다는 내용만 보도되었고, 오택 집에 폭탄을 보관하였다는 내용은 빠져있었다. 어쩌면 혐의가 하나도 없었다. 박재혁은 일관되게 폭탄은 자기 집에 보관하였다고 진술한 것이다. 만약 오택의 집에 보관한 사실이 경찰이 보고했다면 오택은 절대 석방되지 않았을 것이다. 폭탄에 대한 혐의가 없다면, 박재혁의 귀국에서 거사까지 오택은 귀국 첫날과 거사 당일만 만났기에 경찰로서도 특별하게 조사할 것이 없었다. 또 오택 부모의 매수 운동이 성공했기 때문인지 체포된 이후의 신문보도에 오택에 관한 내용은 한 줄도 신문에 보도되지 않았다. 최천택과 김영주의 조사 사실도 아주 단순해서 법적 처벌을 받을 내용이 없었다. 그것은 실재 박재혁과 같이 거사를 도모하였지만, 구체적 물증이나 행동이 없었기에 기소하여 처벌하기 어려운 점이 있었다.
혐의가 있다면 오택의 경우는 폭탄 은닉, 자금 제공 등의 혐의가 있었다. 김영주는 불온 문서 은닉과 불법 자금 거래 혐의가 있었다. 최천택은 불령선인 김기득과 박창수를 만난 혐의가 있었다. 이 모든 혐의가 실상 범죄로 처벌받을 구체성은 없었다.
9월 6일 귀국 후 1주일 만에 일어난 거사이고 사건 조사 결과 치밀성이나 연루자들의 연관성 등을 고려해볼 때 단독범행 이외의 어떤 협력자도 찾을 수 없었다. 이는 박재혁 자신이 친구들과의 사건 자체를 처음부터 직접적으로 연관 짓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공단 친구들도 몇 가지 혐의가 있었지만, 구체적이고 행동적이지 않았다. 그리고 오택 부모의 요인 매수 노력을 위한 수만 원의 금품과 노력의 산물로 무마된 것 같다. 사건의 파장에 피해가 가벼웠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